성城의 나라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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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hongguohenda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9월 23일 (일) 19:57 판 (천리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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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성의 특징

고구려의 성은 돌무지무덤과 함께 환인·집안 지역에서 고구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성을 나타내는 구루(溝婁)는 구려(句麗)와도 일치하는 말이다. 즉, 고구려라는 국가 명칭은 높고 큰(高) 성(句麗)을 뜻하며, 고구려에 있어 성이 갖는 문화적 의미의 비중이 크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고구려의 성은 위치에 따라 산성과 평지성으로 구분하며, 지금까지 알려진 160개의 고구려 중 약 85%가 산성으로 산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만주 일대 다른 종족 집단은 산성을 축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산성의 분포를 통해 고구려 영역의 대강의 범위가 추정 가능하기도 하다.



고구려인들이 산성을 많이 쌓은 이유는?

고구려는 본래 산이 많은 지역에 자리 잡았다. 첫 수도였던 졸본이나 두 번째 수도였던 국내성 지역 모두 공통적으로 산이 많은 지역에 있다. 산에 성을 쌓으면 적은 병력으로도 수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우세한 적으로부터 쉽게 방어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즉, 고구려의 산성은 산지 활동에 능한 고구려인 자신들의 장점을 적극 활용하여 반대로 평지전을 위주로 하는 적의 약점을 이용한 것이다. 산성 중심의 고구려 전술은 전투에서 큰 성과를 나타냈는데, 645년 당태종이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패해 돌아와 재침공에 관한 회의를 했을 때도 신하들은 고구려 산성의 위력을 우려하여 반대했다고 한다.



고구려 성의 구조

고구려 성은 지세에 맞는 성벽과 성문, 장대, 치와 성가퀴, 수원시설, 수구문과 배수구, 기타 건물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고구려 성의 구조는 견고한 성벽을 쌓는 축성법과 더불어 고구려 성의 강력한 방어 체계의 기반이 되었다. 성문은 외부와의 통로로 적의 공격이 집중되기 쉬운 곳이다. 그래서 고구려는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성문 주위의 성벽을 특히 높고 견고하게 구축했으며, 성문 주위의 성벽을 어긋나게 쌓거나 U자형으로 들여쌓기도 했다. 또한 성문 주위에는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한 돌출시설인 ‘치’를 두기도 했고, 성벽 위에는 아군이 몸을 숨기고 적을 향해 활을 쏘거나 공격하던 시설인 성가퀴를 두었다. 장수의 전투 지휘소인 장대는 성 안에서 가장 높은 곳이나 정문 근처에 설치했으며, 성 밖을 감시하는 초소인 망대는 성벽 곳곳 전망이 좋은 곳에 설치했다. 장대와 망대 근처에서는 군사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이는 건물터가 발견되곤 한다. 산 위에 위치하는 산성의 특성상 물의 안정적인 공급이 중요했기에, 고구려 산성의 경우 수량이 풍부한 계곡을 끼고 있거나 저수지와 우물, 혹은 빗물 저장시설이 빠짐없이 발견되는 것도 특징이다. 또한 성벽이나 성문 아래 성 안의 물을 내보내기 위한 배수구도 설치되었다. 대형 산성의 경우 관청이나 일부 주민들의 일상적인 거주 공간도 마련되었다. 산성이기 때문에 완만한 산비탈의 경사면을 깎아 계단 형태의 대지를 조성해 건물을 축조한 흔적이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구려 산성의 유형

고구려의 성은 성이 들어선 지형에 따라 평지성과 산성, 그 둘이 혼합된 평양의 장안성 같은 평산성으로 분류된다. 고구려 성에서 평지성은 드문 편인데, 주민들이 집중된 도성 지역에 주로 평지성이 존재하며 대부분은 산성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지방통치 단위인 성은 구체적으로 산성을 의미한다. 산성의 유형은 성곽이 위치한 지세에 따라 포곡식(包谷式) 산성과 산정식(山頂式) 산성, 그 둘을 혼합한 복합식 산성으로 분류할 수 있다. 포곡식 산성은 계곡을 끼고 주위의 산능선에 성곽을 축조한 형태로 대체로 대형 산성이 이러한 지세를 이용한 경우가 많다. 포곡식 산성은 성 안에 넓은 평탄지를 확보하고 있어 병력뿐 아니라 일반 주민들의 거주 공간이 마련될 수도 있었다. 산정식 산성은 산 정상부의 평탄면을 이용하여 주위에 성곽을 두른 형태로 집안과 환인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초기 산성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다. 홀승골성을 비롯해서 흑구산성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산성을 쌓던 초기에는 돌을 주로 이용해 벽을 쌓았지만 점차 지세나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에 따라 토성을 쌓거나 토석혼축성을 쌓았다. 토석혼축성은 고구려 성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순수 토석혼축법과 하단부와 석벽을 쌓고 상단부에 토벽을 결합하는 방식이 있다.



고구려 산성의 위치 조건

1. 반드시 강이나 하천 옆에 축조했는데, 강이나 하천이 성을 향해 공격해 오는 적을 막는 천연 장애물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예시: 환인의 오녀산성 옆의 혼하, 집안의 환도산성 바로 옆 통구하와 근처의 압록강, 대성산성 남쪽 대동강, 동쪽 장수천, 서쪽 합장강, 태백산성 예성강, 장수산성 옆 재령강 지류)
2. 경제적 조건이 좋은 곳, 즉 큰 평야가 있고 인적 자원이 풍부한 곳에 위치했다. 이는 유사시에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을 충분히 확보하고 성의 전투력을 높이기 위함이었다.(예시: 오녀산성 주위 환인평야, 환도산성 옆 통구벌, 대성산성 옆 평양 준평원)
3. 군대의 기동성, 이웃 성들과 긴밀한 협동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교통 조건이 좋은 곳에 위치했다.



수도방어성

고구려가 요동 평원을 모두 장악하기 전, 국내성을 도읍으로 삼고 있던 시기에는 국경으로부터 왕도 국내성에 이르는 구간에 산성과 관애를 겹겹이 축조하였다. 국경선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외곽산성을 두고, 외곽산성과 왕도 사이에는 작은 산성과 관애를 배치했다. 외곽산성으로 고검지산성, 흑구산성 등이 있고 그 배후에 작은 산성인 마안산성, 건설산성 등이 위치해 있다. 기타 관애는 중간 방어선인 홀승골성, 패왕조산성에서 국내성에 이르는 4개의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이렇듯 국내성의 방어선은 최전선에서 2중, 3중으로 구축되어 있던 것이다. 한편 국내성에서 요동 지역으로 나가는 출입구라 할 수 있는 신성이 마련된 뒤에는 환인 일대에서 요동으로 이어지는 2개의 교통로에 철배산성, 오룡산성, 구노성, 나통산성, 태자성 등을 축조하여 방어망을 구축했다.



천리장성

현재 만주 지역에 남아 있는 고구려의 성을 주축으로 생각하면, 고구려는 요동에서 수도까지 이어지는 교통로에 따라 요동 반도 남단에서 북쪽 길림까지 이어지는 국경 지대의 방어성, 요동에서 도성에 이르는 중간 지점에 구축된 중간 방어성, 그리고 도성을 둘러싼 최종 방어성으로 다중의 방어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른바 ‘천리장성’은 그 다중 방어 체계 중에서도 요동 반도 남단에서 북쪽까지 이어진 국경지대의 요충지에 구축된 성들을 말한다.

비사성 : 요동 반도의 끝자락, 멀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기암절벽 이에 올라선 성이다. 해발 663미터의 대흑산 정상부에서 서쪽과 남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을 따라 골짜기를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성의 둘레 5km이고 능선을 따라 돌로 쌓아 만들었다. 장대 위에 서면 서쪽으로는 발해만이, 오른쪽으로는 황해가 모두 굽어 보인다. 비사성은 요동 반도 연안로를 이용한 해상교통을 장악하는 데 최적의 위치에 있다. 그리하여 이곳이 무너지면 적에게 서해안을 경유하여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성까지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된다. 그래서 비사성에서는 대륙을 건너온 적이 전쟁의 승기를 잡기 위해 맹공을 펼쳐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곤 했다. 645년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성 안에 있던 8,000여 명의 고구려인이 전몰하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위패산성 : 요령성 보란점시 북쪽에 자리 잡은 산에 위치해 있다. 벽류하의 지류 연안에 해당하는 곳이다. ‘오고성’으로 부르기도 한다. 성의 규모와 성벽을 쌓아 올린 공력으로 미루어 벽류하의 동쪽에 축조된 성산산성과 함께 건안성으로 연결도는 교통로에 자리잡았던 고구려의 주요 성곽으로 추정된다. 성벽은 산등성이를 따라 잘 다듬은 청색의 화강암으로 쌓아 만들었고, 둘레가 5km에 달하는 대형 산성이다.



성산산성 : 비사성에서 동쪽으로 올라와 위패산성을 지나 동쪽 장하시에 위치한다. 황해로 흘러들어가는 벽류하의 동쪽 연안에 세워졌는데, 요동의 방어선이 미처 차단하지 못한 적군이 동남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을 막거나, 요동 반도 남단에 상륙한 적의 진출을 가로막던 요새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성산산성은 고구려가 쌓은 성벽의 모습이 잘 남아 있는 성 가운데 하나이며, 성 안에 여러 시설들이 많이 남아 있다. 성의 둘레는 2,989m이며 후성산산성과 마주보고 있다.



득리사산성 : 비사성에서 반도의 서쪽을 따라 건안성까지 이어진 방어선의 중간 지점인 요령성 와방점시 북쪽 득리사향 용담산 위에 위치한다. 요동 반도 서쪽 해안에 근접해 있어 바다를 이용해 침입하는 적을 막아낼 수 있는 요새이고, 요동 반도의 주요 거점성인 비사성과 건안성 사이를 연결하는 주요한 고구려 성이다. 총 둘레 2,240m이다.



건안성 : 안시성, 요동성과 연계해 고구려의 국경선을 지키는 철벽방어선이었던 건안성은 개주시 청석령향 고려성자촌의 석성산에 위치한다. ‘고려성자산성’, ‘청석관산성’이라고도 부른다. 전체 둘레 약 5km이고, 서쪽 골짜기 입구를 제외하면 사방이 산등성이로 둘러싸여 있다. 골짜기 입구의 남쪽과 북쪽에서 노청산, 노경산이라 부르는 두 산에서 길게 뻗은 산줄기가 타원형을 이루면서 산성을 감싼 형세를 이룬다. 산성의 내부에는 평탄한 대지가 넓게 펼쳐져 있는데, 요하 지역의 고구려 산성 가운데 가장 넓은 편이다. 645년 고구려를 침략했던 당태종이 “건안성을 얻으면 안시성은 내 손아귀에 든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할 만큼 안시성과 요동성으로 이어지는 요동 방어선에서 주축이었다. 2009년 현재 출입불가하다.



낭랑산성 : 고구려는 안시성의 배후가 되며 오골성의 전면에 해당하는 곳에 성들을 배치해 철벽 방어망을 구축했는데, 이 20여 개 방어성들 가운데 중심이 된 산성이다. 요령성 수암현 낭랑성산에 위치한다. 요동 방면에서 천산산맥을 거쳐 압록강 일대로 들어올 수 있는 주요 길목의 하나를 장악했던 산성이다. 둘레 3.5km이며, 안쪽 성을 2km 남짓한 바깥 성이 반원형으로 둘러싼 특이한 구조를 보인다. 2009년 현재 출입불가하다.



안시성 : 당태종은 645년 고구려를 침략해 개모성, 요동성, 백암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기세등등했으나, 안시성에서 쓰라린 패배를 당하고 돌아섰다. 여러 성이 함락되면서 전세가 절대적으로 불리했음에도 고구려인의 참다운 기상을 보여주며 끝까지 항전했던 산성이다. 건안성의 동북쪽 해성시 영성자촌에 있어 ‘영성자산성’이라고 불리는 산성이 안시성으로 사료된다. 안시성은 토성이다. 둘레는 2.7-4km정도이다. 남쪽과 북쪽에서 내려온 산등성이가 성문을 감싸는 형세인 U자형 옹성 구조다. 2009년 현재 안시성은 외부인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다.



요동성 : 612년 100만 대군을 앞세운 수나라의 침입을 막아냈으나, 645년 당나라의 침략에 함락되며 영욕의 세월을 보낸 산성이다. 도성이 아닌 곳으로는 드물게 평지성인데, 지금은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현재의 요양 시가에 자리 잡았던 요동성은 예로부터 요동 지방의 중심지였고, 고구려가 중국 세력을 몰아낸 뒤에는 요동 일대에서 가장 주요한 고구려의 거점성이었다.



석대자산성 : 요동성터에서 북쪽, 심양의 동북쪽 외곽에 위치한다. 고구려가 혼하 연안로의 요충지를 방어하고 지방 통치의 거점으로 삼기 위해 쌓은 산성이다. 신성과 요하를 잇는 교통로 상에 있어 신성과 연결성이 높았던 성으로 사료된다. 전체 둘레 1,384m, 대개의 고구려 산성들처럼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되었고, 성돌은 길쭉한 쐐기꼴 형으로 다듬어져 가지런히 쌓아올렸다.



신성 : 요동성터가 있는 요양시에서 심양을 거쳐 동쪽 무순시 고이산에 위치한다. ‘고이산성’이라고도 부른다. 한의 현도군을 몰아낸 고구려는 현도성이었던 현재의 노동공원에 있던 토성을 평지성으로 활용하는 한편, 주변에 산세가 적합한 곳을 골라 산성을 쌓고 신성이라 이름 붙였다. 이후 신성은 요동 진출의 거점이면서 고구려 서북방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지였다. 신성은 645년 당의 1차 침략 때 두 번에 걸친 대대적인 공격에도 성을 지켜낸 바 있으며, 이로써 안시성 싸움에서 지친 당군에게 위협적인 배후가 되기도 했다. 둘레 4km, 성벽은 흙으로 쌓은 토벽과 돌로 먼저 쌓은 후 그 위에 흙을 덧쌓은 혼합식이 어우러진 형태다.



청룡산성 : 신성 동북쪽 요하 중류 일대에 위치한다. 철령시를 흐르는 범하 남쪽 청룡산에 자리 잡았다. 최진보산성과 함께 범하의 좌우에서 요하 중류 지역의 평원인 송요 대평원에서 범하 연안으로 들어오는 통로를 장악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6개의 작은 언덕을 둘러싼 형태의 산성으로, 둘레 4km이다. 성벽은 토벽을 주로하되, 지형에 따라 토석혼축의 축조방식도 쓰였다.



최진보산성 : 철령시 남쪽, 범하 북쪽 골짜기에 위치하며, 고구려가 요하 중류 지역에 진출한 초기에 구축된 성이다. 둘레 7km의 대형산성으로 산등성이에 솟은 높은 절벽은 천연장벽으로 삼고, 중간 중간 낮은 구간에는 성벽을 축조하였다. 성돌을 다듬어 벽체의 안팎을 정연하게 쌓아올린 고구려 고유의 성벽 축조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를 찾아서)』, 동북아역사재단, 2009.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 문명 기행(고구려의 도읍, 환인과 집안을 찾아서)』, 동북아역사재단,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