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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소식蘇軾,1037년~1101년)은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이자 문장가, 학자, 정치가이다. 자(字)는 자첨(子瞻)이고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였다. 흔히 [[소동파]](蘇東坡)라고 부른다. 현 쓰촨 성 미산(眉山)현에서 태어났다. 시(詩),사(詞),부(賦),산문(散文) 등 모두에 능해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소동파(소식蘇軾,1037년~1101년)은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이자 문장가, 학자, 정치가이다. 자(字)는 자첨(子瞻)이고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였다. 흔히 [[소동파]](蘇東坡)라고 부른다. 현 쓰촨 성 미산(眉山)현에서 태어났다. 시(詩),사(詞),부(賦),산문(散文) 등 모두에 능해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소동파는 [[송시]]의 성격을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대시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문장가였고 중국문학사상 처음으로 호방사(豪放詞)를 개척한 호방파의 대표 사인(詞人)이었다. 그는 또 북송사대가로 손꼽히는 유명 서예가이기도 했고 문호주죽파(文湖州竹派)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중국 문인화풍을 확립한 뛰어난 화가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천재 예술가요 못 하는 것이 없었던 팔방미인으로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천 년이 다 돼 가는 지금까지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중국문예사상 가장 걸출한 인물이었다.
 
소동파는 [[송시]]의 성격을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대시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문장가였고 중국문학사상 처음으로 호방사(豪放詞)를 개척한 호방파의 대표 사인(詞人)이었다. 그는 또 북송사대가로 손꼽히는 유명 서예가이기도 했고 문호주죽파(文湖州竹派)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중국 문인화풍을 확립한 뛰어난 화가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천재 예술가요 못 하는 것이 없었던 팔방미인으로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천 년이 다 돼 가는 지금까지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중국문예사상 가장 걸출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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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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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0월 3일 (수) 16:54 판

<晚笑堂画传>의 소식 인물화

소동파(소식蘇軾,1037년~1101년)은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이자 문장가, 학자, 정치가이다. 자(字)는 자첨(子瞻)이고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였다. 흔히 소동파(蘇東坡)라고 부른다. 현 쓰촨 성 미산(眉山)현에서 태어났다. 시(詩),사(詞),부(賦),산문(散文) 등 모두에 능해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소동파는 송시의 성격을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대시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문장가였고 중국문학사상 처음으로 호방사(豪放詞)를 개척한 호방파의 대표 사인(詞人)이었다. 그는 또 북송사대가로 손꼽히는 유명 서예가이기도 했고 문호주죽파(文湖州竹派)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중국 문인화풍을 확립한 뛰어난 화가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 천재 예술가요 못 하는 것이 없었던 팔방미인으로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천 년이 다 돼 가는 지금까지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중국문예사상 가장 걸출한 인물이었다.

인생

1037~1061(1~25세) 성장, 과거급제, 모친상 3년
1061~1071(25~35세) 관직생활, 왕안석과 대립 후 항주로 전출
1071~1079(35~43세) 항주, 밀주, 서주, 호주 지방관
1079~1085(43~49세) 황주로 유배 (신법당을 비판했던 것이 화근)
1085~1094(49~58세) 사면 복권 (신종 사망, 선인태후 섭정, 구법당 복권)
1094~1101(58~65세) 담주로 유배 및 사망 (선인태후 사망, 철종 친정, 신법당 복권)


작품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