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당대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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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대운하는 수 양제의 대규모 토목공사 계획에 의해 개통된 운하로, 통제거(通濟渠)와 영제거(永濟渠)를 중심으로 한다.

수당대운하

수당대운하의 건설목적

운하의 굴착은 물론 수왕조의 지배를 강화하게 황제의 향락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나 남북간 경제 교류 문제라는 관점에서는 수나라로서 꼭 필요했던 역사적 과업이라 할 수 있다.
진한(秦漢)시대에는 전국 경제의 중심지가 중원지방이었으나 후한 이래 남북 분열의 국면이 나타나면서 중원에 거주하던 사람의 남방 이주가 시작되어 장강 이남의 지역도 점차 개발이 촉진되었다. 수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경제의 중심이 남방으로 옮겨져 있었다. 수나라를 이은 당나라 때에는 “조세수입의 9할을 강남이 차지했다.”고 할 정도로 강남 지방이 경제적 중심지로 부상했다.
따라서 수나라가 중국통일을 이룩함으로써 남북간의 경제교류는 이미 대세가 지향하는 필연적 사실로 대두되었고 지금까지 해오던 수레나 마소를 이용한 물자교류 방법으로는 수요 공급의 원할을 가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수나라로선 남북을 연결하는 수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되었으며 결국 운하의 공사는 이같은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현실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수당대운하의 건설과정

운하의 굴착이라 하지만 전혀 없던 새로운 수로를 굴착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있었던 자연하천을 연결하는 공사였다.
북쪽의 북경, 천진에서 남쪽 항주(杭州)에 이르는 중국 동부 지역에는 해하(海河), 황하, 회화, 장강, 전당강의 5대강이 흐르고 있으며 각 강의 지류는 그다지 멀지 않은 작은 물줄기들로 이루어져 있어 이들 물줄기를 연결시키고 강 밑을 파내면 운하가 되는 것이었다.
통제거의 경우는 장안 서원(西苑)에서 곡수와 낙수를 끌어들여 황하에 흐르게 하고 황하의 물을 끌어들여 변수에 흐르게 하고 변수를 끌어들여 쇄수(洒水)에 흐르게 하여 회수에 연결시키는 공사였다.
이 공사를 위하여 수많은 백성들이 징발되어 간구(刊溝)를 깊게 파 운하를 만들고 이 간구를 장강에 연결하였다. 그리고 이 운하 곁에는 가로를 만들어 버드나무로 가로수를 심고 장안에서 강도에 이르는 사이사이에 40여 개의 이궁(離宮)을 만들었다.
양제는 또 기술자와 인부를 강남에 파견하여 황제가 탈 용선(龍船)과 유람선 등 수 만 척의 배를 만들게 하였다. 장안 서원은 그 둘레가 2백 리나 되는 넓이였는데 그 가운데 큰 호수를 만들었다. 그리고 호수 가운데에는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州)라는 명칭을 붙인 산을 만들었다. 이들 산의 높이는 각각 1백여 자이고 망루, 궁전이 산 위에 벌여서 장관을 이루었다. 또 호수 북쪽에는 도랑을 파 구불구불 돌아서 호수에 흘러들어가도록 하고 그 도랑을 따라 16개의 어전(御殿)을 만들고 각 어전마다 4품 부인을 두어 주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문을 모두 도랑 쪽으로 세워 수면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하여 화려의 극치를 이루었다.
운하의 공사는 4기로 나누어 실시되었는데 대업 원년(605년)에서 대업 6년(611년)까지의 공사기간에는 낙양을 중심으로 북쪽은 탁군, 남쪽인 여항(余杭)에 이르는 전장 2천km의 남북을 연결하는 운하가 완성되었다.
운하의 건설 뿐 아니라 동도 건설, 만리장성 축조, 인공호수와 인공산의 조영, 몇 만 척에 이르는 용선과 유람선의 건조 등으로 수십, 수백만에 이르는 인부가 동원되어 노역은 일종의 재난처럼 여겨졌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낙양 동쪽과 북쪽 수백km의 도로변에서는 매월 인부들의 교체가 이루어졌는데 축성 공사에서 희생된 시체가 도로 여기저기에 널려 있고, 운하의 양 언덕에도 도처에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고 한다.


수당대운하의 역사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

대운하의 전신(前身) 즉 최초의 대운하는 춘추(春秋)시기 초(楚)나라 손숙오(孙叔敖)로 비롯해 기원전 613년에 개척된 장강(長江), 한수(汉水) 수계(水系)을 연결한 경한운하(荆汉运河)및 기원전 578년에 개척한 장강(長江), 회수(淮水) 양대수계(兩大水系)를 통하게 된 비수운하(巢肥运河)이다. 한편 전국(战国)시에 위(魏)나라가 개척한 홍구(鸿沟)로 비롯한 중원지역 운하의 총칭인 홍구 수계(기원전360-339년)를 비교적 체계적으로 형성시켰다.

진한시대(秦汉时期)

진의 시황제(始皇帝)는 고강남(古江南) 운하 및 백척독을 준설하여 강남운하의 기본구조 형성기반을 마련시켰다. 서한(西汉)시기에 기원전 129년에 장안(长安)으로 동관(潼关)까지 조거(漕渠)를 건설하였다. 그 후 삼국시대(三国时代)에 하북(河北)에서 여러 수운 통로를 건설하였으며, 특히 204년에 공사를 시작한 배구(白溝)는 오랫동안 하북지역의 주요 운송 통로로 되었다. 이처럼 운하건설을 통해 조운이 강화되면서 조거(漕渠), 황하(黄河), 변거(汴渠) 및 한구(邗沟)로 형성된 동서 수운통로의 수로교통망을 구축되었을 뿐더러 운하체계 형성에 따라 도성(都城)으로 확대시켜 주변도시까지 발전되어 지역발전을 촉진 시켰다.

수(隋)나라

수나라는 낙양(洛阳)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장안(长安)까지, 북쪽으로는 탁군(涿郡)까지, 남쪽으로는 여항(余杭)까지 연결되는 총연장 약 2700km의 대운하를 건설하여 황하(黄河), 해하(海河), 회하(淮河), 장강(长江), 첸탕강(钱塘江), 오대수계(五大水系)를 개통하게 되었다.

당(唐)나라

당나라는 수(隋)나라 운하 운영체계의 운영 장점을 계승하고 나라의 기본 건설 공사로 삼았다. 당나라의 운하체계는 수나라 대운하를 기초로 일정한 수리공사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 당나라의 조운(漕运)은 주로 강남운하, 통제거와 양주조구를 이용하여, 양주(扬州), 회안(淮安), 변주(금 개봉) 지역의 좁쌀을 도성 장안으로 운송하였으며, 이로 인해 운하가 회남(淮南)지역 경제의 발전을 촉진시켜 회남은 당나라 전국 교통허브이자 경제중심지로 육성되었다.

송(宋)나라

북송왕조는 운하를 “건국지본(建国之本)”이라고 하였다. 송나라는 운하인접지역인 변양(汴梁, 현 개봉-开封)을 수도로 정하여 운하를 건설하였다. 이처럼 북송(北宋)시기의 국가 경제중심은 남쪽으로 이동하여 강회(江淮)-장강(长江) 중하류와 회하(淮河) 유역과 연결시킨 변하(汴河)는 조운, 경제의 활성화, 문화교류에서 모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 큰 운송 수익을 얻었다.


참고문헌

傅崇蘭, 「운하시화(運河史話)」,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00.
맹해양 외, 중국 대운하의 경제적 파급효과에 대한 분석, 한국물류학회, 한국물류학회지 25권 2호: pp.39-52,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