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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7일 (화) 10:57 기준 최신판

수의 문황제 양견(隋 文皇帝 楊堅, 581~604년)은 수 왕조의 초대 황제이다. 근 400년 동안 이어오던 대분열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었으며 선정을 통해 개황의 치를 이룩한 명군이다.


생애

수 문제의 치적

양견은 이전까지의 악정에 대해 단호한 개혁조치를 취하는 등 정치에 정진함으로써 유능한 군주로서의 재질을 발휘했다. 먼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함과 아울러 지방행정의 간소화를 단행했다. 또한 군사제도의 개혁을 단행하여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원칙을 마련하였다. 관리의 임용에 있어서도 지방의 호족이 관리 후보자를 중앙에 추천하던 이전의 과거의 제도를 지양하고 학과시험을 치러 선발하는 방법으로 전환했다. 이 방법은 후에 단계적으로 정비되어 과거제도의 효시가 되었다. 이에 따라 중소 지주 계층도 정치에 참여하는 기회가 주어져 지배층의 저변이 확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경제면에서는 부역의 경감, 세금의 감소와 농상(農桑) 장려 정책을 취함으로써 생산력의 향상과 국력의 신장을 기했다. 또한 생산의 발전을 중시함과 아울러 절약을 강조하였다. 먼저 문제 자신이 솔선하여 검소한 생활을 하고 궁중에서 사용하는 물건도 아껴 썼으며 황후의 복장도 사치를 금했다. 관리와 귀족들도 검약을 자랑으로 삼고 금과 옥으로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풍토를 조성하는 데 힘썼다. 문제는 관리의 비행사실에 대하여는 항시 엄벌주의를 택하여 때로는 너무 지나치다고 비판받을 정도로 단호한 조처를 취했으나 민생 문제에 대해서는 특별한 배려를 했다. 이와 같은 문제의 선정이 20여 년간 계속되자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번영하여 서민의 생활도 풍족해져 태평성대의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창고가 꽉 차 더 이상 곡식과 피륙을 쌓을 곳이 없게 되자 문제는 각 군현에 조서를 내려 부를 백성에게 돌리도록 하고 조세를 면제하도록 하기도 했다.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번영함에 따라 인구도 급격히 증가했다. 수나라 초기 북조에는 약 360만 호, 남조에는 약 50여만 호로 모두 4백여만 호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로부터 20년 후에는 전국의 호수가 890여만 호, 인구가 4천 6백여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황태자 책봉문제

당시 수나라에서는 장자상속제가 아닌 유능한 황자가 왕위를 잇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황태자 책봉을 두고 경쟁을 하게 마련이었다. 황태자를 정하는 일은 황제의 막중한 권한이었으나 문제의 경우에는 부인 독고황후의 영향력이 더 강하게 작용했다. 문제에게는 다섯 황자인 용, 광, 준, 수, 양이 있었는데 장남이었던 황태자 양용은 여색에 빠져 독고황후의 신임을 잃게 되었다. 둘째 양광이 독고황후에게 아첨하여 자신이 태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배후에서 조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양광은 또한 사생활을 삼가고 여성을 멀리함으로써 어머니의 신임을 얻으려하였다. 황태자의 폐립은 개황 20년(600)에 있었다. 이 해 6월 문제의 3남 양준이 병사하고, 10월 양용이 폐태자가 되고 11월에 양광이 황태자가 되었다. 새로운 황태자 양광은 32세였다. 그로부터 2년 후 독고황후는 세상을 떠났고 인수 4년(604)에는 문제가 세상을 떠났다.

문제의 최후

문제의 죽음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그 중 황태자인 양제 양광이 암살했을 거라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 604년 4월부터 문제는 병상에 눕게 되었다. 그러던 중 자신의 후궁이었던 선화공주를 양광이 범하려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크게 노해 폐태자가 된 양용을 다시 불러들여 다시 황태자로 앉히려 했다. 이를 전해들은 양광은 심복 장형과 모의해 쿠데타를 일으켰고 자객을 보내 양용까지 살해함으로써 무난히 제위에 오를 수가 있었다.


수 문제의 계보

부왕: 양충(楊忠)
모후: 여씨(呂氏)

국왕: 문제(고조, 견) 文帝(高祖, 堅)
왕비: 문헌독고황후(文獻獨孤皇后)
장녀: 양황후(여화) 楊皇后(麗華)
장남: 폐태자(용) 廢太子(勇)
차남: 양제(광) 煬帝(廣)
3남: 진왕(준) 秦王(俊)
4남: 촉왕(수) 蜀王(秀)
5남: 한왕(양) 漢王(諒)
차녀: 광평광주 廣平廣主


연호

개황(開皇, 581~600년) 인수(仁壽, 601~604년)


참고문헌

김희영,『이야기중국사 2』(청아출판사, 2006)
박덕규, 『중국역사이야기 8』(일송북,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