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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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명황제 양광(隋 明皇帝 楊廣, 569년 ~ 618년 3월 11일)은 중국 수나라의 제 2대 황제이다. 수 문제와 독고황후 사이의 차남이고,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 양견과 형 양용을 살해한 후 황제가 되었다. 수 양제의 폭정에 의해 반란이 끊이질 않았고 618년 결국 강도에서 친위군에 의해 시해되고 만다.

생애

수 양제의 폭정

대규모 토목공사

고구려 원정

양제의 최후

주요 행적

수 양제 양광의 주요 행적표(604~618년)
연도 사건
604년 아버지 양견을 죽이고 황제 자리에 오름
낙양 교외에 긴 참호를 파고 초소를 설치함
605년 ①낙양을 확장하고 동도(東都)로 이름을 바꿈
②낙양 서쪽에 서원(西苑)이란 정원을 만듦
③배 수만 척을 만듦
④제거(濟渠, 하남성 형양에서 강소성 회안에 이르는 운하)와 한구(邗溝,회안에서 강소성 양주에 이르는 운하)를 개통
⑤낙양 남쪽 교외에 현인궁(顯仁宮)을 지음
⑥낙양에서 용선(龍船)을 타고 강도(江都)로 유람함(1차 강도 유람)
606년 강도에서 낙양으로 돌아옴
607년 ①태행산을 뚫어 낭자관을 설치하고, 산서성 태원에서 화북에 이르는 어도를 개통함
②어양군에서 유림에 이르는 어도를 개통함
③낙양에서 탁군(북경)으로 놀러갔다가 다시 유림을 지나 동돌궐의 계민극한의 왕정에 이르렀다가 태원을 거쳐 낙양으로 돌아옴
④400만 명을 징발하여 유림에서 자하에 이르는 장성을 쌓음
⑤태원에 진양궁을 세움
608년 ①영제거(하남성 수무에서 북경에 이르는 운하)를 개통함
②관잠산(산서성 영무) 북쪽 경계에 분양궁을 세움
③낙양을 나와 오원에 놀러가 장성을 순시함
609년 낙양을 나와 장안으로 갔다가 호미천(청해성 문원), 장액(감숙성 장액)을 유람함
610년 ①낙양에서 용주를 타고 강도를 유람함(2차 강도 유람)
②강남하(강소성 진강에서 절강성 항주에 이르는 운하)를 개통함
611년 ①용주를 타고 강도에서 운하를 따라 북상하여 탁군에 놀러갔다가 다시 낙양으로 돌아옴
②고구려 왕국의 죄를 묻는다고 선포하고는 전국의 군사를 탁군에 집합시키고 전국의 양식을 요서군(요녕성 의현)에 집중시키게 함
민란이 발생하기 시작함
612년 몸소 113만 3,800명을 거느리고 탁군을 출발하여 고구려 왕국을 공격함
요동성(요녕성 요양)을 포위했으나 대패하여 돌아옴(1차 동정)
613년 다시 전국의 병사들을 탁군에 집결하여 몸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왕국 정벌에 나섬
요동성을 포위했으나 역시 이기지 못함
대창 양현감이 여양(하남성 준현)을 거점으로 쿠데타를 일으키자 포위를 풀고 회군하여 양현감의 반란을 진압함(2차 동정)
614년 다시 용선을 타고 탁군으로 가서 고구려 왕국 공격에 나섬
전국에서 일어난 민란때문에 군사의 수가 적어짐
고구려 역시 기력을 많이 소모하여 화친을 청함(3차 동정)
615년 태원으로 가 분양궁에서 피서한 후 다시 장성을 나가 북쪽을 순시함
돌궐의 시필극한이 군사를 동원하여 안문(산서성 대현)에서 양광을 포위함
의성공주의 힘으로 도망쳐 돌아옴
616년 낙양에서 용선을 타고 강도를 유람함(3차 강도 유람)
617년 강도에서 밤낮으로 연회를 열어 마시고 놀았음
618년 쿠데타가 일어나 목 졸려 죽음

주요 민란

수 왕조 말기~당 왕조 초기 주요 민란표(611~621년)
연도 이름 근거지 행적
611년 왕박(王薄) 장백산(산동성 장구)
611년 손조안(孫祖安) 고계박(하북성 고성 서쪽)
611년 두건덕(竇建德) 낙수(하북성 헌현) 손조안이 전사하자 군중은 두건덕 밑으로 들어가 하북성 대부분을 점령하여 하(夏) 왕국을 세움으로써 민란 지도자 중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 되었다.
611년 장금칭(張金稱) 하곡(하북성 청하)
613년 백유사(白瑜娑) 영무군(영하 영무) 도망친 노복들을 결집하여 목장의 말을 약탈하고 북쪽으로 돌궐과 연합했다. 수 정부에서는 노적이라 불렀다.
613년 맹해공(孟海公) 주교(산동성 정도) 군중 수만 명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사대부를 가장 혐오하여 대화를 할 때 유가의 서적을 인용하는 자를 보면 바로 목을 베었다.
613년 양현감(楊玄感) 여양(하남성 준현) 궁정 쿠데타
613년 주섭(朱燮) 오군(강소성 소주) 주섭은 곤산현에서 박사를 지낸 고급 지식분자로 학생 수십 명과 함께 기병하니, 징병과 군량 징발에 시달리던 인민이 대거 합세했다.
613년 두복위(杜伏威) 역양군(안휘성 화현) 단양군(강소성 남경)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장강 하류를 모두 장악했다.
614년 이홍지(李弘芝) 부풍군(섬서성 봉상) 부장 당필(唐弼)이 이홍지를 황제로 세우고 자신은 당왕이라 불렀다.
615년 이자통(李子通) 여항군(절강성 항주) 오(吳) 제국을 세워 황제로 칭했다.
615년 주찬(朱粲) 관군(하남성 등주) 초(楚) 제국을 세워 황제로 자청했다. 행동이 잔인하고 난폭하여 민란 수령들 중 가장 질이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616년 이밀(李密) 낙구창(하남성 공의)
616년 임사홍(林士弘) 예장군(강서성 남창) 강서 및 광동 동부를 통일하고 초 제국을 세워 황제로 칭했다.
616년 고개도(高開道) 어양군(천진 계현) 연(燕) 왕국을 세워 연왕이라 칭했다.
616년 서원랑(徐圓朗) 임성(산동성 제녕) 노(魯) 왕국을 세워 노왕이라 칭했다.
616년 양사도(梁師都) 삭방군(섬서성 정변) 양사도는 수 정부의 응양낭장(鷹揚郎將)으로 관리를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켜 북쪽으로 돌궐과 연합하고 양(梁) 제국을 세워 황제로 칭했다. 군웅들 중 맨 뒤에 멸망했다.
616년 유무주(劉武周) 마읍군(산서성 삭주) 유무주는 수 정부의 응양교위(鷹揚校尉)로 관리를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북쪽으로 돌궐과 연계하니 돌궐은 그를 정양극한(定揚可汗)에 봉했다.
617년 곽자화(郭子和) 유림군(내몽고 탁극탁) 지방에 큰 기근이 들자 곽자화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지방 관원을 죽이고 왕으로 칭했다. 이에 돌궐이 곽자화를 평양천자에 봉했으나, 곽자화가 고사하여 옥리설(屋利設)로 고쳐 불렀다.
617년 설거(薛擧) 농서군(감숙성 천수) 진(秦) 제국을 세워 황제로 칭했으나 오래지 않아 병으로 죽고 아들 설인고(薛仁杲)가 뒤를 이었다.
617년 이연(李淵) 태원군(산서성 태원) 쿠데타
617년 이궤(李軌) 무위군(감숙성 무위) 이궤는 수 정부 무위군 응양부의 사마(司馬)였는데 관리를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킨 다음 양(凉) 제국을 세우고 황제로 칭했다.
617년 소선(蕭銑) 강릉(호북성 강릉) 소선은 남량 제국 7대 황제 소찰의 증손으로 당시 나현(호남성 멱라)의 현장으로 있다가 기병하여 남량 제국을 회복하고 황제로 칭했다.
618년 우문화급(宇文化及) 강도군(강소성 양주) 궁정 쿠데타
619년 왕세충(王世充) 낙양 궁정 쿠데타. 황제로 칭했다.
619년 유계진(劉季眞) 이석군(산서성 이석) 돌리극한(突利可汗)이라 칭했다.
619년 송금강(宋金剛) 역주(하북성 역현) 정양극한 유무주를 항복시키고 송왕에 봉했다.
620년 양정도(楊政道) 정양군(내몽고 화림격이) 양정도는 양광의 손자로 돌궐이 수왕으로 세우니 돌궐에 있던 한인 만여 명이 그에게로 귀순했다.
621년 유흑달(劉黑闥) 장남현(하북성 고성 동쪽) 당 정부 관리가 가렴주구를 일삼자 두건덕의 옛 부장이었던 유흑달이 기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