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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의 기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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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上海鲁迅纪念馆 编, 《许广平纪念集》, 百家出版社, 2000.
 
# 上海鲁迅纪念馆 编, 《许广平纪念集》, 百家出版社, 2000.

2016년 6월 23일 (목) 21:12 판

쉬광핑(许广平, xǔ guǎng píng)

출생 1898년 2월 12일
청나라 광둥 성 광저우 부 판위 현
(現 중화인민공화국 광둥 성 광저우 시 판위 구)
사망 1968년 3월 3일 (70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학력 중화민국 허베이 성 톈진 즈리 제1여자사범학교 전문학사 졸업
중화민국 허베이 성 베이징 여자사범대학교 교육학과 학사 졸업
직업 문필가, 사회운동가, 정치가
활동 기간 1932년 ~ 1968년
가족 배우자 루쉰, 아들 저우하이잉

개요

쉬광핑(중국어간체: 许广平, 정체: 許廣平, 병음: xǔ guǎng píng, 1898~1968)은 '쉬징송(许景宋)'이란 필명으로 활동한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필가이자 사회운동가, 정치가이다. 광둥 성의 판위 구에서 태어났고, 루쉰의 두 번째 아내로 알려져 있다. 1917년 톈진 즈리 제1여자 사범학교에서 공부하였고, 톈진 애국 동지회(天津爱国同志会)의 간행물인 《醒世周刊》의 편집을 맡았다. 또한 저우언라이(周恩来)의 지도 하에 5.4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23년 베이징 여자고등사범학교 국문과에 입학하여, 루쉰의 학생이 되었다. 1927년 1월에 루쉰이 중산대학의 교수직을 맡게 되었고, 이때 쉬광핑은 루쉰과 白云路에서 동거를 시작하였으며, 조교가 되어 광둥어 통역을 도와주기도 했다. 10월에는 루쉰과 함께 상해로 가서 정식으로 동거를 시작했다. 1929년, 아들인 저우하이잉(周海婴)을 낳았다. 1932년 12월에는 루쉰과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모아 《两地书》를 편집, 출간하기도 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성립된 이후에는 중국공산당 인민정치협상회의 상임위원, 중국공산당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 중국공산당 민주촉진회 부주석, 부녀연합 부주석 등 고위직을 지냈다. 1968년 3월, "四人帮"의 협박을 받기도 했으며, 베이징에서 심장병으로 7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

가족관계

쉬광핑은 자신의 집안에 대해 ‘봉건적인 사회에서 반쯤 개화된 가정’이라고 표현한다. [2]

  • 아버지: 쉬광핑의 어머니가 그녀의 발을 묶자(전족) 이를 내팽개칠 정도로는 개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술김에 딸의 혼처를 미리 정해놓았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인습을 따라가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어머니: 딸의 귀를 뚫어 귀걸이를 걸게 하고, 전족을 행하는 등 전통적인 인습을 어느 정도 따르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쉬광핑이 여덟 살이 되던 해에 사망했다.
  • 할아버지(쉬잉쭝): 쉬광핑이 태어나던 당시 저장 성의 순무(巡撫), 즉 지금의 도지사 정도 되는 관리직을 맡고 있었다.

신여성으로서의 삶

중국에서는 ‘신여성’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정의하고 있다. '전통 가족제도를 부정하고 단발 등 외모상의 새로움을 추구했던 신식 교육 수혜자로 새로운 직업에 진출하거나 조직적인 행동으로 여성해방을 추구하는 여성들'을 일컬었다. 또한 반봉건 의식, 애정과 결혼에 대한 진취성, 자유, 평등, 박애를 숭배하는 인도주의자라는 의미의 ‘모던 걸(modern girl)’을 번역한 말이라는 설명도 있다. 쉬광핑은 신식 교육을 받고, 반봉건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여성해방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신여성에 부합하는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여성으로서 강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구국을 위해 여권을 혁명에 종속시켰다는 남다른 신여성의 표본이 되기도 한다. [3]

유년시절

무술년은 중국 신여성의 맹아가 등장한 시기라고 볼 수 있는데, 쉬광핑은 바로 그해 광저우 부근의 판위 현(番禺县)에서 태어났다. 덕분에 태어난 직후부터 쉬광핑은 중국이 전통에서 벗어나 신여성을 추구하는 과정 안에서 살아온 것이다. 그녀의 어린 시절 시대적으로 진행된 대표적인 신여성 운동 중 '전족 반대운동'과 '여성 교육 운동'이 있었다. 이에 따라 쉬광핑은 전족을 하지 않았고, 오빠들과 함께 가숙(家塾), 즉 집안 서당에 나가 수업을 듣기도 했다. 쉬광핑은 남자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며 관화(官話)를 배우고, 다양한 종류의 고전들을 읽는 등 당시 다른 여자 아이들보다 폭넓게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쉬광핑의 유년시절은 그녀의 비교적 개화된 가정의 영향으로 당시의 다른 여자 아이들에 비해 조금 앞서 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쉬광핑의 유년시절은 남녀불평등의 현실을 자각하고 그에 대한 자의식이 성장한 시기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쉬광핑의 이름이 지어진 유래가 있다. 쉬광핑의 아버지가 본래 그녀에게 지어주려 했던 이름은 ‘쉬총첸(徐崇媊)’이다. 그러나 쉬광핑은 ‘계집 여 변’이 있는 이름이 싫다며 불평했고, 그녀의 아버지는 결국 그녀의 이름을 ‘쉬광핑’으로 바꾸어 주었다. 또한 어느 날 오빠들이 장기 두는 것을 보고 따라 배우려다 여자 주제에 장기를 배우려 하느냐는 조롱 어린 말을 들은 뒤로 장기 두는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평생 장기를 배우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더해 쉬광핑이 어렸을 때 그녀의 아버지가 술김에 정해놓은 쉬광핑의 혼사가 있었다. 하지만 쉬광핑은 이를 적극적으로 거부했고,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그녀의 오빠의 도움을 받아 파혼하게 된다. 이러한 점들을 통해 어렸을 때부터 여성이라서 은연중에 받게 되는 차별에 대한 반발이 있었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톈진 즈리 여자 사범 학교 진학

쉬광핑은 톈진의 즈리여자사범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당시 일어난 신해혁명을 통해 쉬광핑은 구망, 즉 '보통 사람들[匹夫匹婦]이 천하의 위망(危亡)에 책임이 있다'는 소명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의식은 신문화 운동5.4 운동을 통해 '현실에 보탬이 될 지식을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하는데 밑거름이 된다. 1919년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서 애국운동이 일어났고 이 운동은 톈진에도 파급되었다. 때마침 쉬광핑이 다니던 여사범은 톈진 여학새계의 중추가 되어 여성의 애국 운동 동참을 이끌고 있었다. 쉬광핑은 덕분에 이 애국 운동 과정에서 학교 밖으로 나가 구국을 위한 행동을 취하는 큰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녀가 당시 문집에 발표한 몇 편의 글에 따르면, 그녀는 본인이 경험한 애국 운동을 통해 '중국을 개량하는데 필요한 인재가 되겠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녀는 더 실용적인 학문을 배우기 위해 베이징의 상급 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베이징 여자 사범 대학 진학

1922년 톈진의 여자 사범 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에 여성 최고학부인 베이징 여자 사범 대학에 진학했다. 당시 5.4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남녀 교제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쉬광핑은 베이징대에서 그녀와 동향 사람이었던 리샤오후이(李小辉)가 병사하기 전까지 그와 교제하기도 했다. 1924년 베이징 여자 사범 대학의 양인위(楊蔭楡) 교장의 보수적이고 불공평한 태도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이 점점 커져 1925년 '교장 배척 운동'의 형태로 폭발하게 되었다. 이 운동에서 쉬광핑은 중심적인 역할을 맡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에 봉착한 그녀는, 1925년 3월 11일 결국 강직한 인물이라 생각하여 존경하던 루쉰 선생님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청하게 된다. 학생들과 교장의 대치가 계속되었고, 교장이 쉬광핑을 포함한 학생 자치회 간부 여섯 명을 제적한다는 공고를 냈다. 이는 더 극심한 대립을 불러일으켰고, 이 시점에서 루쉰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는 공개적으로 교장을 비난하고 여사대의 학생들을 옹호하는 글을 실었다. 이로 인해 여사대 내부에서 발생한 '교장 배척 운동'은 바깥으로 불거지게 되었고, 그 갈등의 골에 학교 바깥의 사람들이 개입하면서 더 깊어졌다. 하지만 이는 상하이 5.30 사건으로 잠시 주춤했는데, 이를 틈타 장스자오 교육총장과 양 교장은 여사대의 해산을 도모했다. 무장경찰이 학교로 쳐들어와 학생들과 대치하고 체포하는 과정에서 쉬광핑은 루쉰의 처소로 피신하기도 했다. 같은 해 11월, 베이징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수도 혁명'으로 장총장은 사직되었고 여사대도 해산에서 회복하였다.

루쉰과 함께 한 이후

'교장 배척 운동'으로 시작된 루쉰과 쉬광핑의 편지들과 더불어 여사대 회복을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생겨난 쉬광핑과 루쉰 사이의 동지애는 남녀 간의 애정으로 발전하게 된다.

인물 평가

작품 목록

시간 작품명 비고
1923년 9월 18일 《공원과 소년》 《신보》에 실린 백화문 시론 형식의 글, 내용상 5.4이후 베이징 시기 초기의 쉬광핑의 관심사를 보여줌.
1925년 10월 12일 《동행자(同行者)》 발간 당시 필명“平林”을 사용, 루쉰이 편집한 《국민신보(国民新报)》의 부록으로 실림.
1937년 4월 《야기(夜记)》 루쉰의 1934년부터 1936년까지의 잡문 13편을 정리하여 발간한 것.
1937년 《노신서간(鲁迅书简)》영인본
《조개정잡문말편(且介亭杂文末编)》
삼한서옥(三闲书屋) 명의로 자비 출간.
1938년 4월 《집외집습유(集外集拾遗)》
1938년 8월 《노신전집(鲁迅全集)》(총 20권) 胡愈之을 시작으로, 쉬광핑, 郑振铎 등 20명의 사람이 “复社”를 조직하여 공통 편집.
1941년 《조난전후(遭难前后)》 1941년 쉬광핑이 일본 헌병에게 잡혀가 고문을 당한 일을 바탕으로 쓴 책.
1959년 10월 《노신회의록(鲁迅回忆录)》
1961년 8월 22일 《허광평대노신박물관적의견(许广平对鲁迅博物馆的意见)》 “전시방침”, “조직의 리더”, “진열 내용”, “인사 안배 문제” 네 가지 방면에서, 구체적이고 적절한 의견과 건의를 날카롭게 제시함.

후대의 기념자료

  1. 上海鲁迅纪念馆 编, 《许广平纪念集》, 百家出版社, 2000.

참고자료

각주

  1. 百度百科’许广平’
  2. 윤혜영, 『(루쉰의 사랑 중국의 자랑) 쉬광핑』, 서해문집, 2008, p21.
  3. 위의 책, p1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