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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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農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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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남방을 다스리던 신. 소의 머리를 한 반인반수로 염제(炎帝)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며,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인간에게 농사를 본격적으로 알린 것이 있다. 그래서 이름(神農)이 농사(農)의 신(神)인 듯하다. 원래는 염제와 신농은 별개의 신이었지만, 세본(世本)에서부터 동일시하여 이 해석이 널리 퍼졌다. 태호와 복희를 처음으로 합친 것도 세본이다. 하지만 현재에는 다른 서적에 인용된 내용만 남아있을 뿐 세본 자체는 전하지 않는다.
당시엔 사냥이 주요 생계 수단이라 인구 부양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식물을 대량으로 농사짓는 방법을 모색하였고, 먹을 수 있는 식물과 없는 식물을 구분하고자 신농은 스스로 실험체를 자처했다. 당연히 독초를 먹은 적도 많았으나, 다행히 차를 알게 된 후부터는 웬만한 독초에는 몸이 상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날 단장초(斷腸草)라는, 이름대로 창자가 끊어진다는 독초를 먹고 미처 해독도 하기 전에 죽었다는 전설도 있다. 또, 몸 속이 훤히 비쳐서 온갖 풀을 씹으며 어떤 풀이 몸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게 되어 의술에도 능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신농씨는 의술과 농업에 관련이 깊은 신이며, 그래서인지 백성들 사이에서 지지를 많이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도 농사와 한의학이 신농씨가 남긴 업적이라 하여 신농유업(神農遺業)이라고 칭하였다. 농촌에서는 신농유업이라는 구절을 쓴 깃발을 만들고, 한의원에서는 신농 유업이라고 글씨를 써서 걸어두기도 했다.
또한 신농은 경제에 관련된 신이기도 하다. 신농씨가 시장이라는 것을 두어 서로가 필요한 물건을 교환할 수 있도록 했는데, 태양이 머리 위에 떴을 때 시장이 서도록 하고 얼마쯤 지나면 끝나도록 하는 시장경제 시스템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황제 다음으로 중국인의 시조로 많이 언급되는 것이 바로 염제이다. 중국인들은 스스로를 황제의 자손이라고 하지만, 그 외에도 염제와 황제 모두의 자손이라는 뜻에서 염황 자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神農의 생애

신농씨의 어머니 여등(女登)은 제후 유교씨(有嬌氏)의 딸이자 제후 소전씨(小典氏)의 비(妃)로, 어느 날, 그녀가 화양(華陽)으로 나들이 갔다가 신비스럽게 생긴 용(龍)을 보고 이상한 기운을 느꼈는데, 그 후 임신을 하여 열 달이 지나자 머리는 소, 몸은 사람의 형상을 한 반인반신을 낳았으니, 이 아이가 바로 신농이었다.
『진주강씨대동보(晋州姜氏大同譜)』에는 기원전 3218년 4월 16일에 천수(天水: 현 감숙성 위천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날은 중국에서 ‘신농선제만세일(神農先帝萬歲日)’이라 하여 신농씨에게 제사지내는 날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기원전 28세기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갓 태어나자마자 주위에는 저절로 아홉 개의 우물이 생겨 불이 솟아 올랐다고 한다. 그 우물의 물을 길으면 나머지 여덟개의 우물이 출렁거렸다. 그리고 그가 인류에게 오곡의 파종법을 가르치려고 할 무렵 하늘에서 수많은 씨앗이 떨어졌다. 그는 이것을 모아 밭에다 심었는데, 이것이 인류가 먹는 오곡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나라를 세웠는데 『춘추좌씨전』에서는 그가 열산(烈山, 현 허베이 성 수주)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열산씨(烈山氏) 혹은 여산씨(厲山氏)라고도 하였다. 처음에는 진(陳: 현 허난 성 부근)에 도읍을 정했다가 후에 곡부(曲阜: 현 산둥 성)으로 옮겨 140여년 간 통치했다. 신농이 백성들을 공평하게 다스리니 백성들은 소박하고 성실해서 다투지 않았고, 위세는 강했지만 드러내지 않았고, 형벌을 제정했지만 사용하지 않았으며, 법은 번잡하지 않았다고 한다.

神農의 후손

5000년전 중국 섬서성 강수에서 자라 지명을 따서 강씨(姜氏)를 득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신농으로부터 이어지는 성씨가 바로 중국의 천수 강씨이며, 천수 강씨에서 갈라져 나온 한국의 진주 강씨도 신농의 자손이 된다. 강태공도 염제 신농씨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농의 가계(家係)에 관해서는 당(唐)의 사마정(司馬貞)이 『사기(史記)』를 보충하여 쓴 「삼황본기(三皇本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신농씨는 분수씨(奔水氏)의 딸인 청발(聽詙)을 들여 비(妃)로 삼았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제괴(帝魁)를 낳았다. 그 뒤를 이어 제승(帝承), 제명(帝明), 제직(帝直) 등이 차례로 자리를 이어받아, 8대(代) 530년 동안 계속되다가 황제 헌원씨가 일어났다고 한다. 이후 주(州)·보(甫)·감(甘)·허(許)·희(戲) 등이 강성의 후예로서 제후가 되고 사악(四嶽)을 나누어 맡았다. 주대(周代)에 이르러 포후(甫侯)·신백(申伯)은 왕실의 지혜로운 재상이 되었고, 제(齊)·허(許)는 제후의 서열에 끼어 중국에서 패(覇)라 일컬어졌다.


神農과 제사

동대문구 제기동에 위치한 선농단

중국에서는 기원전 3218년 4월 16일에 태어났다는 설을 받아들여 이 날 여기저기에 세워진 사당에서 제사를 올리고 있으며, 중국과 우리 나라에서는 매년 경칩 후 해일(亥日)에 임금이 직접 선농단에 나아가 선농제(先農祭)를 지내며 농업신인 신농과 후직(后稷)에게 풍년을 기원하였다.
농촌에서는 한 해의 농사가 시작될 무렵이면 그 마을의 상징이며 농신(農神)인 신농씨와 관계된 농기(農旗)에 대한 고사를 지냈다. 이때 그 기폭에는 ‘농자천하지대본야(農者天下之大本也)’나 ‘신농유업(神農遺業)’, ‘신농사명(神農司命)’ 등의 글자를 넣어 한 해의 풍농을 기원하였다.

한국에서의 神農

염제 신농은 우수신(牛首神)의 모습을 하고 고구려 벽화에도 나타난다. 고구려 벽화에 그려진 소머리를 한 신상의 모습이 이미 요서지역의 홍산문화에 나타나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 겨레의 이동과 관련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神農의 몸은 사람이었지만 두상은 소머리였는데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기 때문에 신농이라고 한다. 그를 염제라고 하는 것은 불을 다루는 방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도읍한 곳은 徙魯였는데 그곳 산동에는 석굴이 있었다. 신농은 厲鄕에서 출생했는데 춘추 시대에 신농의 출생지가 厲國이 되었다.
홍산 문화는 대체로 B.C. 3,000년 전후에 형성되었다.요서 지역에는 B.C. 6,000-5,000년경에 신석기문화를 꽃피웠던 査海-興隆窪(차하이-싱륭와) 문화인들이 있었다. 이들이 용과 옥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계승한 홍산문화에서 옥기는 찬란한 모습으로 빛났다.
홍산문화는 대체로 B.C. 3,000년 전후에 형성되었다. 우리는 홍산 문화인들이 남긴 옥기를 통해 그들의 의식을 읽을 수 있다. 옥기 중에 우리의 관심을 끄는 소머리를 한 牛首神器이다. 우수 신상은 홍산 문화시기에 사람들의 토템이었다.牛首神器는 홍산 문화인들의 소 토템으로 보는 학자가 있는 반면에 태양신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홍산 문화의 옥기를 전문으로 연구한 陳逸民에 따르면, 소머리의 모습이 점차 사람의 얼굴 모습으로 변했으며 중국에는 해의 신의 모습으로 변했다고 한다. 이 소의 신상은 소를 소중히 여긴 집단의 토템이었을 것이다. 이 소머리 신상과 관련된 습속이 한반도와 일본에 많이 나타난다. 천신에게 제를 올리는 것을 부여에서는 迎鼓, 예와 맥에서는 舞天, 진한, 변한에서는 禊飮, 고구려에서는 東盟, 백제에서는 效天, 고려에서는 八關祭라고 각각 불렀다. 무천, 동맹, 영고와같은 동이족의 제사에 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소의 발굽으로 길흉을 점치는 풍습이 있었다.

참고문헌

  • 중국 고대사 대륙의 문명을 급진전시킨 춘추전국시대와 영웅호걸들의 이야기, 북랩, 2017
  • 이야기 동양 신화 1 중국편, 황금부엉이, 2004
  • 신화와 전설에 얽힌 한겨레의 사적들, 정연규 , 국학연구론총, 2009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