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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의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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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25일 (금) 02:19 판

개요

신안선은 14세기 중국 원나라 영파(寧波)에서[1] 출발하여 일본 하카타(福岡県)와 교토(京都)로 항해하던 중 고려의 신안 앞바다에 침몰한 중국의 무역선이다. 명나라 초기의 하서양과 함께 중세시기 중국의 대외무역 규모를 엿볼 수 있는 사료이다. 국가 사적 274호로 지정되어있다.

발견

1975년 신안 앞바다에서 조업을 하던 한 어부의 그물에 6점의 청자가 건져 올려졌다. 어부가 신안군청에 이 사실을 신고하여 이듬해부터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고[2], 신안군 증도면 방축리 앞 해역 해저 20m 지점에서 길이 28m 규모의 선박 뼈대와 흩어져있는 유물들을 발견하였다. 발굴은 9년에 걸쳐 11차례 실시되었으며 중국의 도자기, 각종 금속공예품, 고려의 고려 청자와 청동 거울, 일본의 칠기그릇을 비롯하여 동남아시아의 향신료와 동전 등 총 2만 7천여 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600여 년 간 해저에 잠겨있었으나 서해의 갯벌이 물살과 해충 등으로부터 보호 작용을 해준 덕에 갯벌에 잠겨있던 우측 선체와 유물들의 상태는 비교적 양호했다.

선박

잔존선체 예상복원선체

파일:--

신안선복원예상모형.jpg

길이: 28.4m, 너비: 6.6m, 깊이: 3.6m

전장: 34.0m, 전폭:11.0m, 깊이:4.5m 만재배수량: 200ton (추정량)

건조정보: 14C 중국에서 만들어진 첨저형 선박
신안선은 단면이 뾰족한 V자 형태의 전형적 첨저형(尖底型) 선박으로 깊은 바다의 파도를 가르며 운항하는 데 적합하도록 설계된 배이다. 첨저형 선박은 복건성 일대에서 주로 건조되던 방식으로, 당시 우리나라의 평저형(平底型) 선박과는 확실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이는 중국에서 제조된 배라는 확실한 단서이다. 신안선의 삼판 축조방식은 삼판 아랫면에 반턱을 따고 아래 삼판의 윗면에 겹쳐서 부착하는 클링커 방식으로, 삼판은 한 겹으로 되어 있다. 7개의 격벽과 8개의 화물창고가 설치된 구조로 추정된다.

유물

신안선에서는 무려 2만 7천여 점의 유물이 실려있었다. 유물은 동아시아의 고가의 공예품부터 동남아시아의 향신료와 향나무 등 가치 높은 상품이 대부분이었는데, 당시 중국의 물품과 동남아시아의 향료는 세계적으로도 인기가 높았기에 수요가 많았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특히 신안선의 최종 목적지인 일본은 중국의 불교와 도교를 수용하였으며 상류층에서 중국문화 열풍이 뜨거웠다. 따라서 중국의 고급 공예품들의 광범위하고 거대한 규모의 수입이 이루어졌다.
한편, 목적지가 일본이었음을 확정하는데 큰 기여를 한 물품이 있는데 바로 목간저울추 이다. 목간은 일종의 무역품 화물표로 날짜와 수신자가 적혀있다. 목간의 날짜가 당시 원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던 점을 통해 중국에서 출발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했으며, 다수의 목간에 일본 하카타의 신사와 교토의 사찰명이 적혀있어 도착지가 일본임이 확인되었다. 또한 무역에 많이 사용되던 저울추와 저울대 관련 물품이 다수 발견되었고, 저울추에 칭위엔(寧波), 경신년(庚申年)이라는 글자가 세겨져 있어 정확한 출항지를 추정할 수 있었다.


신안선의 특이점은 원나라의 선박임에도 고려와 일본의 상품이 다수 확인되었으며 고려와 일본의 생활물품이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중국인 뿐만 아니라 고려와 일본의 선원, 상인, 사신, 승려 등이 함께 탑승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중국의 유물

2만 5천여 점의 도자기와 8백만 점의 동전(약 28톤)이[3] 대표적이다. 특히 2만 5천여 점의 도자기는 그 종류가 방대하여 학계의 조명을 받았고 우리나라 도자기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제공되었다. 도자기는 대부분 14세기 전반 원나라 제품이지만 남송(南宋) 시기의 도자기도 일부 존재한다. 청자(약 60%), 백자와 청백자(약 26%), 흑갈유자기(약 2.4%), 균유자기, 백지흑화자기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중국 도자기 명산지인 절강성(浙江省)의 용천요(龍泉窯)청자와 강서성(江西省)의 경덕진요(景德鎭窯)백자이다.


다음으로는 향도구 및 향신료이다. 중세 동아시아에서는 왕실부터 서민까지 전 계층이 폭넓게 향 문화를 즐긴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또한 불교, 도교 등의 의례 시 필수품이었으므로 좋은 품질의 향도구는 고가의 무역품에 속했다. 이렇게 수요가 많았기에 동아시아 간의 무역품으로 거래된 것으로 보여진다.


향문화와 함께 중세 동아시아에 크게 유행한 것이 바로 차 문화이다. 차 문화 역시 양반 계층이 향유하는 하나의 문화로써, 멋스러운 차도구는 동아시아 각국에서 수요가 높았다. 이미 크게 발전해있던 중국의 차 관련 자기들이 일본 상류층 귀족의 수요에 맞추어 수출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파악되고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용도의 상형 도자기 역시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불상, 도교 인물상, 연적 등의 문방구류, 등잔 등이 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구경했던 연적들은 너무 아름다워 집에 가져오고 싶었다.

한국과 일본의 유물

신안선에서는 고려의 고려청자 7점, 숟가락, 거울, 그리고 일본의 나막신, 무기류, 칠기그릇, 놀이도구[4] 등이 발견되었다. 아시아 3국의 바닷길은 물품의 무역 뿐만 아니라 사절단, 승려들의 활동을 위한 왕래에도 활발히 이용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양국의 생활물품이 유물로 발견되는 것을 통해 학자들은 고려와 일본의 외교사절단, 상인, 승려들이 신안선에 탑승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함의

참고문헌

각주

  1. 신안선이 활동하던 원나라 때는 경원(慶元)이라 불렀다.
  2. 정확히는 어부 최형근씨의 동생 최평호씨가 군청에 신고를 하여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3. 28톤의 동전과 고급 목재인 자단목이 적재 물품 중 상당한 무게를 담당하고 있는데,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는 이가 배의 무게중심을 위해 적재함 가장 아래에 가득 실렸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4. 발견된 유물 중 일본의 장기판은 현존하는 일본식 장기판 중 가장 오래된 장기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