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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간에서 1644년은 명의 멸망시기를 의미하고, 1911년은 청조의 멸망과 중화민국 정부의 수립 시기를 의미한다.<br>
 
이 기간에서 1644년은 명의 멸망시기를 의미하고, 1911년은 청조의 멸망과 중화민국 정부의 수립 시기를 의미한다.<br>

2016년 5월 24일 (화) 19:35 판

개요

신청사(新淸史)란, 1990년대 말, 미국 학계에서 새롭게 등장한 청대사 연구 경향이다.
신청사의 대표적인 학자들로는 이블린 러스키(Evelyn S. Rawski), 파멜라 크로슬리(Pamel K. Crossley), 마크 엘리엇(Mark C. Elliott), 조안나 웨일리-코헨(Joanna Waley-Cohen)등이 있다.
'신청사'라는 용어가 어떠한 학자에 의해 정의된 적은 없었지만, 2004년 미국에서 발표된 청대사 관련 논문집이 '신청사'라는 이름으로 출판 되었던 것과 청대사의 연구경향을 논의하는 비평 논문 등에서 '신청사(The New Qing History)' 라는 용어가 적극적으로 사용 되었던 것이 '신청사'의 등장 배경이 되었다.

기존의 청사와 신청사

기존의 청사는 청의 존속기간을 1644년부터 1911년까지로 보고 있다.
이 기간에서 1644년은 명의 멸망시기를 의미하고, 1911년은 청조의 멸망과 중화민국 정부의 수립 시기를 의미한다.
기존의 청사를 연구하던 학자들이 청의 존속기간을 이렇게 설정한 이유는 청을 단순히 명의 다음에 위치한, 그리고 중화민국의 전에 위치한 중국 제국의 역사중의 한 부분으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기존 청사연구의 주체는 존.K.페어뱅크(John King Fairbank (1907.5.24 ~ 1991.9.14))와 중국의 민족주의 역사가들이다.
위와 같은 학자들에게 어째서 청을 만주족이 정복한 정복왕조가 아닌 중국왕조의 역사 중 하나로 보냐고 묻는다면 이들은 청 제국이 설립된 이후의 만주족들이 모두 한족에게 동화, 즉 한화(漢化)되어 만주족의 독자적인 문화나 정체성이 점차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만주족의 제국이었던 청조에서, 만주족들이 한족과 완전히 동화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한족이 세운 중화민국이 청의 영토를 그대로 물려받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청사 학파의 학자들은 기존 청사를 연구하던 학자들의 시각을 다소 민족주의적이고, 국수적인 경향을 보인다며 비판하고 새로운 의견을 밝혔다.

신청사 학자들은 청조를 만주족의 정체성을 뚜렷이 띈 국가로써 보는 입장에서, 청조의 존속년도를 1636년부터 1912년까지로 설정하고 있다.
1636년은 후금의 태종이었던 홍타이지가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바꾼 년도이며, 1912년은 청조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溥儀)가 퇴위한 년도이다.
사실 신청사는 아직까지도 활발히 연구중인 학문으로써 학자들마다 청조가 시작되는 시기에 대한 논의(청조의 팔기가 만들어지게 된 1601년, 청의 전신인 후금이 설립되었던 1616년 등)가 있지만,
어느 시기가 되었던 간에 신청사 학자들은 청의 시작을 청제국 자체의 역사를 중점으로 둔다는 것이 중요하다.

내용과 특징

신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주장하는 내용과 그로부터 도출되는 특징을 보자면

  • 만주족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관심을 가짐

-기존의 청사를 연구하던 학자들이 만주족과 중화제국, 중국문화와의 관계 그리고 비한족 집단과의 관계에 주목해서 중국인과 중국 문화가 균질적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비판한다.

  • 한족 중심적인 민족주의 입장에서 ‘청사’를 파악하는 것을 지양

-이것은 청조를 단순히 중국사의 일부분으로 편입시키려는 시각을 거부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청조를 많은 동이(東夷)들의 제국, 내륙아시아의 제국이라고 주장한다.

  • 청조가 기존의 중화제국들이 시행하던 정책들과는 다른 독자적인 정책들을 사용한 것에 주목

-대표적으로 청조의 팔기제도가 만주족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제도라고 주장하며 타 왕조와는 다르게 여러 가지 독자적인 정책들(다중 수도제, 변발, 만주어 사용 등)을 사용한 것은
전통적으로 중화제국 역사상에 내려져 오던 조공 제도나 중화중심론과 같은 사상과는 무관했다고 주장한다.

  • 만문자료를 새로운 자료로써 채택하고, 적극적으로 활용

-과거 기존의 청사 연구 학자들은 만주어로 쓰여진 만문자료를 단순히 한문자료의 번역본 정도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가져 만문자료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지만,
신청사 학자들은 이와같은 태도를 비판하며, 만문자료를 연구하는 것이 청 제국의 역사 혹은 중국사 전반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음을 강조했다.


신청사 분기

마크 C.엘리엇과 파멜라 크로슬리

신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여러 사회적, 문화적 분야에서 존재했지만,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두 학자를 뽑자면 마크 엘리엇(Mark C. Elliot)과 파멜라 크로슬리(Pamel K.Crossley)를 들 수 있다.
이 두 명의 학자는 다른 신청사 학자들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만주족이 중국 대륙을 정복하여 청조를 세우고 한족을 지배할 때 만주족들의 생활방식이나 의식체계가 한화(漢和)되어 민족적 정체성이 상실 된 것이 아니었음을 주장한다.
이들은 만주족의 민족적 정체성이 어떤 체계나 방식으로써 존재했고 유지 되었음을 주장하는데, 방식의 차이에서 이 두 학자의 의견이 대립된다.
청조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서 중점인 '만주족의 정체성'에 관하여 마크 엘리엇은 만주족이 청조라는 국가를 세우고, 그들만의 제도인 팔기제도를 확립함과 함께 만주족의 정체성이 생겨나 그 정체성이 존속되어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파멜라 크로슬리는 만주족의 민족적 정체성은 팔기제도의 형식과 위상이 시기에 따라 변함과 함께 변화해 온 것이라는 주장을 피력한다.

팔기제도

팔기(八旗)제란, 청조를 지배한 만주족만의 특수한 군사·행정 조직이다.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할 당시 함께 만든 제도로써, 장정 300명을 1니루로 묶고, 5니루를 1자란으로 묶고, 다시 5자란을 1쿠사 혹은 1기(旗)로써 묶는 형식이다. 7,500여명의 장정이 속한 1개의 기가 8개가 모여서 하나의 팔기를 형성하는데, 후금 시기부터 시작하여 시기가 지남에 따라 팔기의 규모와 형태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후에 본래 하나의 팔기에서 만주족과 한인, 몽고인을 구분해내기 위해 한군팔기(漢軍八旗)와 몽고팔기(蒙古八旗)를 나누고, 만주팔기(満州八旗)를 따로 구별하여 호칭을 주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변방을 맡아 관리했던 주방팔기(駐防八旗)나 북경의 경비를 담당했던 북경팔기(北京八旗)도 존재했다.
팔기군에 속한 집단 엘리트층을 기인(旗人)이라고 불렀으며, 이들은 토지지급이나 관직세습과 같은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일반 백성들과는 다른 생활을 했으며 실제로도 일반 백성들과 분리되어 생활했다고 알려진다.

마크.C.엘리엇의 주장

기존의 청사 신청사
'청'의 존속 기간
1644년 ~ 1911년

1644년 : 명의 멸망

1911년 : 청의 멸망 & 중화민국 수립
1626년 ~ 1912년

1626년 : 금의 ‘대청’ 제국선포 (홍타이지)

1912년 : 청의 푸이 퇴위
청조에 대한 시각
청조는 중국 왕조 역사의 한 부분
청조가 단순한 중국 왕조의 일부분은 아님
만주족을 보는 시각
청조의 만주족들은 모두 한화(漢化)되었음
청조의 역사 속에서 충분히 만주족의 문화와 정체성을 찾아 볼 수 있음
Mark C. Elliot
[[파일:Markelliot.jpg|200px|alt=]]
학력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1993년), 예일 대학교

팔기제의 제도적 의미

엘리엇은 만주족의 민족적, 문화적 정체성은 청조의 팔기제도로써 대변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팔기제도는 기존의 중국 왕조의 주류를 이루던 한족과는 다른 만주족만의 차별성을 보여주는 뚜렷한 지표이며, 제도라는 것은 하나의 고정된 실체이기 때문에 이 팔기제가 폐지되는 순간까지, 즉 청조가 패망하게 되는 순간까지 청 제국의 성격과 만주족의 정체성은 상실되지 않고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엘리엇은 만주족이 팔기에 주류로 존재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만주족과 기인을 동일한 개념으로써 설명하고, '기인'이라는 용어가 팔기 안에 속한 단순한 법적 지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민족적 특성과 범주처럼 사용되었고, 민족적인 의미를 가진 용어로 인식 되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엘리엇은 팔기에 의해 기인이라는 집단이 성립되었을때 부터 이미 만주족의민족적 정체성이 생성되었고, 팔기가 유지됨에 의해 정체성 또한 변함없이 유지되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주의 법도

청의 제 6대 황제였던 건륭제(乾隆帝)는 자신의 통치기간에 '만주의 법도'를 중요시했다.
이는 과거 12세기 여진족이 중국 대륙을 정복했지만 결국 완전한 지배를 성공하지 못하고 패망하는 과정을

한군팔기

파멜라 크로슬리의 주장

변화해온 만주족의 정체성

니칸과 한군팔기

민족성과 정체성의 차이

기타

참고자료

1)<신청사의 등장과 분기>, 김선민 저
2)<만주족의 청제국>,이훈 김선민 역, 마크.C.엘리엇 저
3)<신 청사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 파멜라 카일 크로슬리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