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Q 속의 우리, 우리 속의 아Q - 노예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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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문화학과

김유정 윤창호 이한솔

사람들은 각자 스스로 다른 사람을 노예로 부리고 다른 사람을 먹을 수 있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자기도 마찬가지로 노예로 부려지고 먹힐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망각한다.

 
루쉰, <무덤>

루쉰의 산문시집 <들풀>에 수록되어 있는 이야기인 <총명한 사람과 바보, 종>의 내용은 이러하다. 등장인물은 총명한 사람과 바보와 종, 이렇게 셋이다. 아, 종의 주인까지 해서 총 넷이다. 주인은 후반부에 아주 잠깐 등장한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종이 총명한 사람과 바보에게 자신이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 지 털어놓는 하소연이다. 그는 아주 자세하게 주인으로부터의 핍박과 그로 인한 고통을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창문도 없는 방에서 지낸다는 등의 이야기다. 총명한 사람은 이 이야기를 듣고 그저 “잘 될 거요.” 라고 위로의 말을 건넨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바보는 다르다. 왜 창문 하나 내달라는 말을 못하냐며, 직접 가서 종이 사는 방의 벽을 부수어 버린다. 그러나 종은 이에 고마워하기는커녕, 주인에게 이를 재빨리 일러바치고 주인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한다! 주인은 그에게 잘했다, 라고 칭찬을 해준다. 종은 이를 총명한 사람에게 자랑한다. 이러한 종의 작태는 읽는 이로 하여금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저 비굴한 모습은 ‘노예성’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노예를 노예로 묶어두는 것은 주인과의 대립관계만이 아니다. 노예의 문제점은 자신을 스스로 노예 상태에 머물게 하는 노예성이 몸에 배인 데 있다. 루쉰의 소설에서, 노예는 그 자리에서 벗어날 욕망이 없다는 점뿐만 아니라 노예라는 자리에 안주하기 위해, 주인을 공격하는 우자 및 주인에게 인정받지 못한 다른 노예를 배척하거나 살해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역시 문제가 된다.

‘노예’란 자기 자신에 대한 인격적인 긍지나 자기 정체성이 자신의 내부에서 구성되지 못하고 자신보다 강한 것에 굴복하는 자들이다. 니체 역시 노예와 비슷한 ‘약자’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타인의 시선에 의해 결박당하거나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 다른 것에 투사해서 운명 혹은 타인을 탓 하면서 자기를 기만하는 사람들이 약자라고 말하였다. [1]


노예는 스스로가 노예인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심지어 자기가 노예가 아니라는, 심지어 주인이라는 자기기만 상태에 빠진다. 루쉰은 그것을 정신승리법으로 칭한다. 루쉰의 소설 <아Q정전>의 주인공 아Q는 이러한 정신승리법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아Q는 성에서 조금 떨어진 시골마을인 웨이좡에서 살고 있다. 그는 홀로 근근히 다른 집의 허드렛일을 도맡아하며 끼니를 이어나간다. 그 당시 사회의 최하층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혁명(소설에서는 정확히 나오지는 않으나 ‘신해혁명’으로 보인다)이 일어나자, 혁명에 참여하면 세상이 뒤바뀌어 자신이 이제 노예로 부려지는 것이 아니라 노예를 부릴 수 있는 처지가 될 것이라 꿈을 꾼다. 그러나 우왕좌왕하다가 어이없이 사형 판결을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아Q정전>에서 루쉰은 정신승리법의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었다.

1. 날조와 가정- 짜오 어르신은 원래 한 집안인데 꼼꼼하게 항렬을 따져보면 자기가 그 수재의 증조부 뻘이 된다는 것이다. ‘내 아들이 있었다면 훨씬 뛰어났을 거야’

2. 자기중심주의– 우리도 말이야 예전엔 네깐 놈보다 훨씬 더 잘살았어! 네깐 놈이 뭐야!

3. 왜곡된 경쟁- 왕 털보에게는 이가 저렇게 많은데 자기에게는 외려 이렇게 적다니 이게 얼마나 체면이 깎이는 노릇인가!

4. 책임전가– 여자란 참으로 가증스러운 것이다. 만일 젊은 비구니의 볼이 매끈거리지 않았다면 아큐가 그렇게 까지 마음의 유혹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아무리 매끈거린다 할지라도 젊은 비구니가 얼굴을 천으로 가리고 있었다면 아큐가 또 그렇게 까지 마음의 유혹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5. 자아분열- 자기 뺨을 연방 두 어 대 쳤다. …(중략)… 때린 사람은 자기이고 맞은 사람은 또 다른 자기인 것처럼 느껴지더니 좀 지나니 자기가 다른 사람을 때린 것처럼 생각되었다.

6. 금기와 망각- 그는 문둥병을 가리키는 ‘라(癩)’자와 발음이 비슷한 모든 글자를 꺼리더니, 나중에는 더욱 확장하여 번들거린다는 ‘광(光)’자도 꺼리고, 훤하다는 ‘량(亮)’ 자도 꺼리게 되었으며, 마침내 등불의 ‘등(燈)’자와 촛불의 ‘촉(燭)’자까지 꺼리게 되었다. 다행히도 딱딱 소리가 나게 얻어맞고 나니 사건이 이로써 매듭이 지어진 것 같아 기분이 한결 거뜬해졌다. 게다가 또 ‘망각’이라는 조상 전래의 보배가 효력을 나타내었다. 어슬렁어슬렁 걸어서 술집 문 앞에 이르렀을 때는 벌써 그의 기분도 어지간히 유쾌해졌다

7. 생떼와 발뺌-“중놈은 집적거려도 되고, 나는 집적거리면 안 돼?" “허, 이 또한 계집의 가증스러운 점이야. 계집년들은 모두 하나같이 ‘정숙한 체’한단 말이야.”

8. 체념과 합리화-그는 감방에 다시 돌아와서도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사람이 인간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노라면 감방에 붙들려 들어올 때도 있고 끌려 나갈 때도 있으며 종이에 동그라미를 그리지 않으면 안 될 때도 있는가보다 하고 생각하였다.


아큐가 현실을 외면하고 정신승리법으로 우월감을 얻는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이 모습이 그저 웃기기만 한가? 뭔가 불쾌하고 맘 놓고 비웃기에는 뭔가 뜨끔하지 않은가? 우리는 왜 우스꽝스러움과 동시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일까? 예수는 죄가 없는 사람이 이 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했다. 결국 우리에게는 맘 편히 아큐를 비웃고, 그에게 돌을 던질 수만은 없는 사정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와 저 종의 노예성, 아큐의 욕심과 정신승리법이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우리는 편히 웃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저 안에서 자신도 모르게 우리 자신의 모습을 언뜻 발견하고 그것을 께름칙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루쉰은 사람이 사람으로 제대로 서는 길은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상이란 것은 '난 사상을 가지고 있다' 라는 선언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루쉰은 사상이란 자신의 피로 폭정의 불을 누그러뜨리고, 자신이 뼈로 폭정의 칼날을 무디게 하는 희생을 치를 때 주어지는 어떤 것이라고 하였다. 오랜 시간 고통스러운 현실을 직시하고, 그에 따른 공포를 피하지 않고 마주하며, 이를 견뎌내고 극복하는 삶, 그 자체가 바로 사상인 것이다. 그렇기에 아큐는 고통스럽고 지난한 사상 대신 달콤하고 쉬운 정신승리법을 택하였다.

사람들은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회적 제도, 가족, 사랑, 국가 등 우리 삶에 영향을 주는 여러 부분에서, 우리는 많은 것들이 불공정하고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제도 때문에 무언가를 제대로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 제도의 노예이고, 돈 때문에 무언가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돈의 노예임을 시인하는 것이다. 미국의 진보적인 법률가이자 가장 뛰어난 법관 중 하나였던 러니드 핸드(Learned Hand) 판사는 생전에 “자유로운 인간의 징표는 자신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영원히 고뇌하는 내적 불확실성에 있다”고 했다.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보아야 한다. 노예 혹은 아큐의 모습을 내 안에서 발견하는 것,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이 상태를 유지시키는 데 나 자신도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이를 직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신을 비롯한 아큐-중국인-사람들이 노예가 아닌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참된 인간으로 살길 원한 루쉰이 자신의 문학을 통해 이루고자 한 바가 아닌가 한다.

사실 이는 단지 그 당시 중국에 관한 루쉰의 희망 사항으로 국한 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를 읽는 우리들도 어딘가 모르게 마냥 웃으며 아큐를 조롱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남들에게 뒤처지면 안 된다.’ ‘남들이 하는 것은 해야 한다.’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높은 토익 성적, 어학연수, 학점 더 나아가 좋은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진 않은가? 결국 자신이 아니라 남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삶이라는 틀에 끼워 맞추기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진 않은가? 영어 공부를 하고, 어학연수를 하고, 복수전공을 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무엇을 위해 하고 있는지 그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은 것이다.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는 자신이 고민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이번 발표를 마치도록 하겠다.


  1. “고귀한 부류의 인간은 스스로를 가치 결정하는 자라고 느낀다. 그에게는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는 "나에게 해로운 것은 그 자체로 해로운 것이다"라고 판단한다. 그는 대체로 자신을 사물에 처음으로 영예를 부여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는 가치를 창조하는 자이다.”, “힘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이 아닌 어떤 권위나 조직이나 대리자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그는 약자다. 그런 점에서 장애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스스로의 욕망에 충실하게 움직이면 그는 강자이고, 어떤 권위나 대리자에 의존하여 움직이면 약자이다. 그런데 기성질서에 의존하는 약자에 비해, 스스로 판단 가치를 창조하는 강자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 강자는 언제나 소수자이다.”,<선악의 저편>, 프리드리히 니체, 책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