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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중심주의와 캘리포니아 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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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16-19세기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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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이래 유럽의 세계 팽창과 유럽 근대 문명의 지구적 확대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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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중심주의는 1840년 아편전쟁에 의한 개항을 계기로 유럽 근대문명이 중국에 도달하였고, 연이은 동아시아 각국의 개항에 의해 유럽문화에 의한 근대화가 완료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이러한 기존의 시각에서는 동아시아가 피동적으로 그려졌고, 19세기 중반 이후의 급격한 정치적 패퇴 과정만 부각되었다.또한 16세기 신대륙의 발견 이래로 형성되기 시작한 세계체제 속에서 중국과 아시아는 어디까지나 누락된 존재였고,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의 정치적 진출 이래로‘세계시장‘, '세계체제’로 편입된 것으로 생각되었다.<br>이에 반대되게 최근 중국의 경제적 발전상이 재조명되고, 아시아 지역 무역의 규모와 성격에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중에 '''경제사 측면'''에서 반론을 제기하며 세계사 속에서 동아시아의 위치를 복권시키려는 학자들이 생겨났고, 주요 학자들의 근무지를 따서 이들을 "캘리포니아 학파"라고 부른다. 주요 학자로는 웡(R.Bin Wong), [[포메란츠]](Kenneth Pomeranz), '''{{색|black|프랑크(Andre Gunder Frank)|배경=yellow}}''', 제임스 리(James Z. Lee), 왕펑(Wang Feng), 잭 골드스톤(Jack A. Goldstone), 리처드 폰 글란(Richard von Glahn), 홉슨(John Hobson), 구디(Jack Goody), 블로트(Jim Blaut) 등이 있다.
 
==대분기 이전의 중국==
 
==대분기 이전의 중국==
===웡과 [[포메란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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웡, 포메란츠, 프랑크는 공통적으로 산업혁명 이전에 유럽이 중심이 되는 세계경제를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이 당시 유럽에 뒤쳐지지 않았다면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에 대해 웡, 포메란츠와 프랑크는 다른 의견이 나뉜다.
===중국중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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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심(多中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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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웡'''은 18세기의 중국 경제는 유럽 정도의 발전 수준에 달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근대 산업혁명 이전에 [https://ko.wikipedia.org/wiki/%ED%94%84%EB%A1%9C%ED%86%A0%EC%82%B0%EC%97%85%ED%99%94 원공업화]는 유럽뿐만 아니라 중국에도 진행되었고, 따라서 매뉴팩쳐와 분업, 원공업화에 의해 반드시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가 도출되지 않음을 지적한다. 이는 근대 이전 중국 경제가 유럽과 매우 유사한 발전 형태 및 단계에 있었다는 점을 비교사적, 실증적으로 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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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br>'''포메란츠'''는 산업혁명 이전 양쯔강 하류지역, 일본과 인도의 선진지역을 영국과 비교분석하였다. 유럽이 중국과 달리 장기투자가 가능해진 것은 19세기에 가서 였고, 유럽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인구압이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수준이었다는 것 등을 근거로 들어, 인구, 임금, 기술, 법적 제도, 신용 등 모든 면에서 서구 근대를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유발시키기 충분하지 않았고 동등한 발전단계에 도달해 있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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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br>→근거는 다르지만 윙과 포메란츠는 둘 다 기존의 유럽중심주의 속에서 소외되었던 중국을 당시 유럽과 수평적인 존재였다는 입장을 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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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black|중국중심론|배경=yel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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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는 『리오리엔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br>하나의 세계경제가 19세기 이전 근세에도 존재했으며, 웡과 포메란츠보다 더 나아가 중국을 핵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이 세계경제권의 ‘중심’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즉, 15-19세기 세계체제의 중심은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 특히 중국 쪽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아시아 지역 전체 경제권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고, 특히 무역량과 경제적 비중이라는 면에서 수량적 비교를 시도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1750-1800년 아시아가 인구 생산측면뿐만 아니라 생산성, 경쟁력, 무역을 통한 자본 축적 측면에서도 세계경제체제에서 앞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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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br>'''프랑크가 그렇게 주장한 근거는 크게 2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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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첫째''', 1750년과 1800년 사이에 아시아는 생산력에서 유럽을 압도하고 있었다. 1750년의 경험적 자료로 세계인구의 3분의 2였던 아시아인이 세계 GNP의 5분의 4를 생산한 반면, 세계인구의 5분의 1이었던 유럽인은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과 함께 나머지 5분의 1을 생산하고 있었다. 또한 1800년 영국과 프랑스의 1인당 GNP는 150-200달러였지만, 중국의 1인당 GNP는 228달러였다는 점에서 1800년까지도 아시아의 우위는 유지되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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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br>'''둘째''', 프랑크는 당시 세계체제를 형성한 핵심을 ‘아시아적 상품’과 ‘은’에서 찾았다. 유럽이 중국의 비단, 도자기, 인도의 목면 등 아시아적 상품에 높은 수요를 보였고,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33497&cid=40942&categoryId=31827 은본위제]로 전환한 중국은 본격적으로 그 거래의 대가를 은으로 받으면서 이 두 가지가 결합하여 세계를 묶는 무역이 형태를 갖추었다고 보았다. 그 관계 속에서 빠지지 않고 흘러가던 것이 ‘은’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크는 수백년간의 막대한 은의 흡입구였고, 은과 교환할 높은 기술과 생산을 유지할 수 있었던 중국이 세계체제를 유지시키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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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분기의 이유==
 
==대분기의 이유==
===산업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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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는 세계 체제의 중심이었던 중국이 유럽과 격차가 벌어지면 대분기가 일어난 이유를 19세기 이전까지 경제에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아시아는 아메리카에서 유입되는 화폐를 자금으로 삼아 18세기 상당기간동안 지속되었던 장기 성장국면에 잘 대처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생산과정에 대한 투자와 기술개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후발주자인 유럽과 미국이 이를 따라잡기 위해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양상은 산업혁명과 은 유출로 나타난다.
===은 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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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는 경제 수량적 측면에서 유럽과 중국 사이에 확실한 격차를 낳은 시점은 산업혁명이 일어난 1760년이 아닌 1820년대라고 주장한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1760년에 바로 유럽이 중심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일어난 결과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파일:GNP_도표.JPG|프레임|alt=퍼즐 형태의 로고|이 도표는 프랑크의 설명을 바탕으로 임의로 만듦]]
====은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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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먼저, 1820년 이후 유럽의 산업혁명이 본격화되었고, 이런 성장이 세계 1인당 순수입을 이전 8세기 동안 이룩한 것보다 20배나 빨리 성장하기 시작했고 유럽의 10%대 고성장이 이루어졌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인 1820년대에 중국이 16세기부터 300여 년간 유지해 오던 거대한 은유입의 대외무역구조가 지속적인 아편 수입으로 인해 처음으로 은의 순수출로 역전되었다. 이러한 은유출은 가격지수가 1815-1850년 사이에 50%나 하락하는 등 중국의 경제위기를 초래하였고 결국 세계의 중심이었던 중국이 유럽의 산업혁명의 본격화와 은유출로 인한 경제위기로 그 자리를 유럽에게 내어주게 된 것이다.
=====기존의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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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 군더 프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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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에 대한 다양한 의견==
=====기시모토 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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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가 주장한 은에 대한 생각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부족한 점이 보이고, 이에 몇몇 학자들이 반론을 제시하였다.
=====구로다 아키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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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은의 유통과 그로 인해 팽창한 무역체제가 중국과 유럽 각 문명에 얼마나 영향이 있었는지 별도의 검증 필요
=====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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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은으로 맺어진 전지구적 규모의 경제관계가 과연 ‘세계체제'라고까지 부를 만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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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관점([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55294&cid=40942&categoryId=31827 화폐수량설], [[은경제|비축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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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유럽학자들은 화폐수량설에 기반하여 신대륙 은의 유입으로 16세기 유럽에만 가격혁명이 일어나 경제를 진작시켰으며 중국은 이 은이 비축되고 경제활동에 투입되지 못해 가격혁명도 경제성장도 자극하지 못했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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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화폐수량설, 비축설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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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프랑크는 ‘은'을 매개로 한 세계무역이 중국에 미친 영향을 적극적으로 평가하여 반박하였습니다. 중국에서 유럽만큼의 물가 상승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화폐유입의 영향력을 소화할 만큼 중국에서 생산이 증대되고 인구가 성장하였기 때문으로 거꾸로 해석하여, 신대륙의 은유입은 유럽보다 오히려 아시아의 경제성장을 자극했다고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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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모토 미오(화폐수량설, 비축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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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시대 물가연구가 기시모토 미오는 16세기 이래 팽창한 대외무역은 확실히 명말의 물가를 상승시켰고 인플레이션은 호황국면을 연출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비축설을 지지하여, 관료 및 대상인 등 일부 상층에 은이 집중되고 축적된 결과 호황의 과실이 불평등하게 분배되었고 사회불평등을 초래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결국 사회불평등의 심화는 명말의 분방하고 체제이탈적 사회분위기를 조성, 구 사회질서를 뒤흔드는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727068&cid=42140&categoryId=42140 모럴 헤저드]를 가져왔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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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이민족 왕조인 청이 이러한 혼돈을 제거하고 안정을 재구축한 측면, 그 혼돈 뒤에 숨어있던 새로운 사회질서로서의 전환 가능성의 부정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파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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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다 아키노부(은전이중화폐설->화폐수량설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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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사 연구자인 구로다 아키노부는 중국의 화폐시스템은 현지화폐인 동전과 지역간 결제화폐인 은의 이중적 구조로 되어있었다고 설명하였다. 따라서 일반 지역사회의 경제생활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식량, 직물의 가격은 모두 ‘동전본위'였기 때문에, 해외로부터 막대한 은이 유입된다고 해도 은전의 가격에 변동은 있어도 국내물가는 간접적인 영향밖에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여, 은이 아닌 동전으로 눈을 돌리게 했다. 또한, 중국의 시장은 유통화폐를 공유하는 하위의 지역경제로 분할되어 있어, 지역경제간의 결제는 은으로 매개되어도 각 지역경제의 내부통합력이 강했기 때문에 이 화폐공통체 안의 화폐 조절은 동전의 의미는 보다 중대해지고 은의 의미는 보다 약화된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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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웡(통화시스템의 독립적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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웡 또한 이런 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자 후속 논문에서 자신의 의견을 밝혔는데, 중국으로 흘러간 은은 유럽과 아시아의 비가를 좌우하는 통화라기 보다는 상품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양 지역 간의 은과 무역의 흐름이 비가에 영향을 그다지 미치지 못했던 만큼 근세 유럽과 아시아의 통화 시스템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여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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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근대국제무역(프랑스혁명1789-1914)에서의 은의 역할과 근세국제무역에서의 은의 역할이 다르다고 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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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주장의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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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전체를 강조하다 보니 각 지역의 특성은 무시되고, 역사발전 전체시기를 강조하다 보니 근대 시기의 특수성이 사라지고, 경제영역의 분석에만 치중하다 보니 총체적이고 균형적인 역사파악이 어렵게 되고, 그러다 보니 그의 기존 유럽중심주의 세계사에 대한 설득력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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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br>2.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아시아를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아시아 특수주의"를 야기할 우려가 크다.또한 아시아를 분석하는 가운데 중국을 중심으로 분석이 이루어지면서 주변의 다른 지역은 다뤄지지 않아 실제로 "중국 중심주의"가 나타나고 있다.<br><br>3. 프랑크는 유럽중심의 근대자본주의 세계체제를 비판하면서 일본이나 중국 등 동아시아로 세계체제의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모순의 극복 방안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프랑크의 주장이 이렇게 현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내적 구조 변혁과 결합되지 않을 경우 현재의 신자유주의 자본논리를 강화시킬 소지를 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 유럽의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제국주의적 팽창과정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 내부의 계급적, 구조적 모순을 해결할 방안을 동시에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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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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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두진, 이내영, 『유럽산업혁명과 동아시아 ‘대분기’ 논쟁』, 『아세아연구 제55권 2호』,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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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성호, 『유럽중심주의 세계사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을 넘어』, 『역사학연구 제39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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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아, 『16-19세기 중국경제와 세계체제-"19세기 분기론"과 "중국중심론"』,『梨花史學硏究 31호』, 2004
 +
* 윤종희, 『자본주의 이행논쟁의 새로운 지평: 세계체제의 연속과 단절의 쟁점』,『Transtoria 3호』, 2003

2020년 12월 25일 (금) 12:59 기준 최신판

인물정보

안드레 군더 프랑크(Andre Gunder Frank)

출생 1929년
독일 베를린
사망 2005년 4월 23일
학력 시카고 대학교 경제학 박사
직업 교수
주요 작품 리오리엔트
관련 활동 중국중심론

유럽중심주의와 캘리포니아 학파

기존의 16-19세기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음과 같다.

"16세기 이래 유럽의 세계 팽창과 유럽 근대 문명의 지구적 확대과정"

유럽중심주의는 1840년 아편전쟁에 의한 개항을 계기로 유럽 근대문명이 중국에 도달하였고, 연이은 동아시아 각국의 개항에 의해 유럽문화에 의한 근대화가 완료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이러한 기존의 시각에서는 동아시아가 피동적으로 그려졌고, 19세기 중반 이후의 급격한 정치적 패퇴 과정만 부각되었다.또한 16세기 신대륙의 발견 이래로 형성되기 시작한 세계체제 속에서 중국과 아시아는 어디까지나 누락된 존재였고, 19세기 중반 이후 유럽의 정치적 진출 이래로‘세계시장‘, '세계체제’로 편입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에 반대되게 최근 중국의 경제적 발전상이 재조명되고, 아시아 지역 무역의 규모와 성격에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중에 경제사 측면에서 반론을 제기하며 세계사 속에서 동아시아의 위치를 복권시키려는 학자들이 생겨났고, 주요 학자들의 근무지를 따서 이들을 "캘리포니아 학파"라고 부른다. 주요 학자로는 웡(R.Bin Wong), 포메란츠(Kenneth Pomeranz), 프랑크(Andre Gunder Frank), 제임스 리(James Z. Lee), 왕펑(Wang Feng), 잭 골드스톤(Jack A. Goldstone), 리처드 폰 글란(Richard von Glahn), 홉슨(John Hobson), 구디(Jack Goody), 블로트(Jim Blaut) 등이 있다.

대분기 이전의 중국

웡, 포메란츠, 프랑크는 공통적으로 산업혁명 이전에 유럽이 중심이 되는 세계경제를 부정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이 당시 유럽에 뒤쳐지지 않았다면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에 대해 웡, 포메란츠와 프랑크는 다른 의견이 나뉜다.

다중심(多中心)

은 18세기의 중국 경제는 유럽 정도의 발전 수준에 달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근대 산업혁명 이전에 원공업화는 유럽뿐만 아니라 중국에도 진행되었고, 따라서 매뉴팩쳐와 분업, 원공업화에 의해 반드시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가 도출되지 않음을 지적한다. 이는 근대 이전 중국 경제가 유럽과 매우 유사한 발전 형태 및 단계에 있었다는 점을 비교사적, 실증적으로 제기하였다.

포메란츠는 산업혁명 이전 양쯔강 하류지역, 일본과 인도의 선진지역을 영국과 비교분석하였다. 유럽이 중국과 달리 장기투자가 가능해진 것은 19세기에 가서 였고, 유럽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인구압이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수준이었다는 것 등을 근거로 들어, 인구, 임금, 기술, 법적 제도, 신용 등 모든 면에서 서구 근대를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유발시키기 충분하지 않았고 동등한 발전단계에 도달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근거는 다르지만 윙과 포메란츠는 둘 다 기존의 유럽중심주의 속에서 소외되었던 중국을 당시 유럽과 수평적인 존재였다는 입장을 펴고 있다.

중국중심론

프랑크는 『리오리엔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하나의 세계경제가 19세기 이전 근세에도 존재했으며, 웡과 포메란츠보다 더 나아가 중국을 핵으로 한 동아시아 지역이 세계경제권의 ‘중심’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즉, 15-19세기 세계체제의 중심은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 특히 중국 쪽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아시아 지역 전체 경제권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고, 특히 무역량과 경제적 비중이라는 면에서 수량적 비교를 시도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1750-1800년 아시아가 인구 생산측면뿐만 아니라 생산성, 경쟁력, 무역을 통한 자본 축적 측면에서도 세계경제체제에서 앞지르고 있다.

프랑크가 그렇게 주장한 근거는 크게 2가지이다.
첫째, 1750년과 1800년 사이에 아시아는 생산력에서 유럽을 압도하고 있었다. 1750년의 경험적 자료로 세계인구의 3분의 2였던 아시아인이 세계 GNP의 5분의 4를 생산한 반면, 세계인구의 5분의 1이었던 유럽인은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과 함께 나머지 5분의 1을 생산하고 있었다. 또한 1800년 영국과 프랑스의 1인당 GNP는 150-200달러였지만, 중국의 1인당 GNP는 228달러였다는 점에서 1800년까지도 아시아의 우위는 유지되었다고 주장한다.

둘째, 프랑크는 당시 세계체제를 형성한 핵심을 ‘아시아적 상품’과 ‘은’에서 찾았다. 유럽이 중국의 비단, 도자기, 인도의 목면 등 아시아적 상품에 높은 수요를 보였고, 은본위제로 전환한 중국은 본격적으로 그 거래의 대가를 은으로 받으면서 이 두 가지가 결합하여 세계를 묶는 무역이 형태를 갖추었다고 보았다. 그 관계 속에서 빠지지 않고 흘러가던 것이 ‘은’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크는 수백년간의 막대한 은의 흡입구였고, 은과 교환할 높은 기술과 생산을 유지할 수 있었던 중국이 세계체제를 유지시키 중심이라고 생각했다.

대분기의 이유

프랑크는 세계 체제의 중심이었던 중국이 유럽과 격차가 벌어지면 대분기가 일어난 이유를 19세기 이전까지 경제에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아시아는 아메리카에서 유입되는 화폐를 자금으로 삼아 18세기 상당기간동안 지속되었던 장기 성장국면에 잘 대처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생산과정에 대한 투자와 기술개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후발주자인 유럽과 미국이 이를 따라잡기 위해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양상은 산업혁명과 은 유출로 나타난다.

프랑크는 경제 수량적 측면에서 유럽과 중국 사이에 확실한 격차를 낳은 시점은 산업혁명이 일어난 1760년이 아닌 1820년대라고 주장한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1760년에 바로 유럽이 중심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일어난 결과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퍼즐 형태의 로고
이 도표는 프랑크의 설명을 바탕으로 임의로 만듦


먼저, 1820년 이후 유럽의 산업혁명이 본격화되었고, 이런 성장이 세계 1인당 순수입을 이전 8세기 동안 이룩한 것보다 20배나 빨리 성장하기 시작했고 유럽의 10%대 고성장이 이루어졌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인 1820년대에 중국이 16세기부터 300여 년간 유지해 오던 거대한 은유입의 대외무역구조가 지속적인 아편 수입으로 인해 처음으로 은의 순수출로 역전되었다. 이러한 은유출은 가격지수가 1815-1850년 사이에 50%나 하락하는 등 중국의 경제위기를 초래하였고 결국 세계의 중심이었던 중국이 유럽의 산업혁명의 본격화와 은유출로 인한 경제위기로 그 자리를 유럽에게 내어주게 된 것이다.

은에 대한 다양한 의견

프랑크가 주장한 은에 대한 생각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부족한 점이 보이고, 이에 몇몇 학자들이 반론을 제시하였다.

1. 은의 유통과 그로 인해 팽창한 무역체제가 중국과 유럽 각 문명에 얼마나 영향이 있었는지 별도의 검증 필요
2. 은으로 맺어진 전지구적 규모의 경제관계가 과연 ‘세계체제'라고까지 부를 만한 것인가

기존의 관점(화폐수량설, 비축설)

기존의 유럽학자들은 화폐수량설에 기반하여 신대륙 은의 유입으로 16세기 유럽에만 가격혁명이 일어나 경제를 진작시켰으며 중국은 이 은이 비축되고 경제활동에 투입되지 못해 가격혁명도 경제성장도 자극하지 못했다고 주장하였다.

프랑크(화폐수량설, 비축설X)

이에 프랑크는 ‘은'을 매개로 한 세계무역이 중국에 미친 영향을 적극적으로 평가하여 반박하였습니다. 중국에서 유럽만큼의 물가 상승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화폐유입의 영향력을 소화할 만큼 중국에서 생산이 증대되고 인구가 성장하였기 때문으로 거꾸로 해석하여, 신대륙의 은유입은 유럽보다 오히려 아시아의 경제성장을 자극했다고 주장

기시모토 미오(화폐수량설, 비축설)

명청시대 물가연구가 기시모토 미오는 16세기 이래 팽창한 대외무역은 확실히 명말의 물가를 상승시켰고 인플레이션은 호황국면을 연출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비축설을 지지하여, 관료 및 대상인 등 일부 상층에 은이 집중되고 축적된 결과 호황의 과실이 불평등하게 분배되었고 사회불평등을 초래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결국 사회불평등의 심화는 명말의 분방하고 체제이탈적 사회분위기를 조성, 구 사회질서를 뒤흔드는 모럴 헤저드를 가져왔다고 보았다.
→이민족 왕조인 청이 이러한 혼돈을 제거하고 안정을 재구축한 측면, 그 혼돈 뒤에 숨어있던 새로운 사회질서로서의 전환 가능성의 부정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파악한 것이다.

구로다 아키노부(은전이중화폐설->화폐수량설X)

화폐사 연구자인 구로다 아키노부는 중국의 화폐시스템은 현지화폐인 동전과 지역간 결제화폐인 은의 이중적 구조로 되어있었다고 설명하였다. 따라서 일반 지역사회의 경제생활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식량, 직물의 가격은 모두 ‘동전본위'였기 때문에, 해외로부터 막대한 은이 유입된다고 해도 은전의 가격에 변동은 있어도 국내물가는 간접적인 영향밖에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여, 은이 아닌 동전으로 눈을 돌리게 했다. 또한, 중국의 시장은 유통화폐를 공유하는 하위의 지역경제로 분할되어 있어, 지역경제간의 결제는 은으로 매개되어도 각 지역경제의 내부통합력이 강했기 때문에 이 화폐공통체 안의 화폐 조절은 동전의 의미는 보다 중대해지고 은의 의미는 보다 약화된다고 보았다.

웡(통화시스템의 독립적 존재)

웡 또한 이런 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자 후속 논문에서 자신의 의견을 밝혔는데, 중국으로 흘러간 은은 유럽과 아시아의 비가를 좌우하는 통화라기 보다는 상품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양 지역 간의 은과 무역의 흐름이 비가에 영향을 그다지 미치지 못했던 만큼 근세 유럽과 아시아의 통화 시스템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여긴 것이다.
→근대국제무역(프랑스혁명1789-1914)에서의 은의 역할과 근세국제무역에서의 은의 역할이 다르다고 파악

프랑크 주장의 문제점

1. 세계전체를 강조하다 보니 각 지역의 특성은 무시되고, 역사발전 전체시기를 강조하다 보니 근대 시기의 특수성이 사라지고, 경제영역의 분석에만 치중하다 보니 총체적이고 균형적인 역사파악이 어렵게 되고, 그러다 보니 그의 기존 유럽중심주의 세계사에 대한 설득력이 떨어진다.

2. 유럽중심주의 세계사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아시아를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아시아 특수주의"를 야기할 우려가 크다.또한 아시아를 분석하는 가운데 중국을 중심으로 분석이 이루어지면서 주변의 다른 지역은 다뤄지지 않아 실제로 "중국 중심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3. 프랑크는 유럽중심의 근대자본주의 세계체제를 비판하면서 일본이나 중국 등 동아시아로 세계체제의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모순의 극복 방안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프랑크의 주장이 이렇게 현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내적 구조 변혁과 결합되지 않을 경우 현재의 신자유주의 자본논리를 강화시킬 소지를 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 유럽의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제국주의적 팽창과정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 내부의 계급적, 구조적 모순을 해결할 방안을 동시에 모색해야 한다.

참고자료

  • 김두진, 이내영, 『유럽산업혁명과 동아시아 ‘대분기’ 논쟁』, 『아세아연구 제55권 2호』, 2012
  • 강성호, 『유럽중심주의 세계사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을 넘어』, 『역사학연구 제39권』, 2010
  • 강진아, 『16-19세기 중국경제와 세계체제-"19세기 분기론"과 "중국중심론"』,『梨花史學硏究 31호』, 2004
  • 윤종희, 『자본주의 이행논쟁의 새로운 지평: 세계체제의 연속과 단절의 쟁점』,『Transtoria 3호』,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