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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라가 걸출한 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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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을 역사책에서는 안자(晏子)라고 부른다. 자는 평중(平仲)이며 춘추시대 제나라 이유(지금의 산동성 밀현) 출신이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500년에 죽었다. 제나라의 명문가 출신으로 아버지 안약(晏弱)이 죽은 뒤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 경(卿)이 되어, 영공·장공·경공을 거치면서 관직이 상국(相國, 수상에 해당)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관중 이후 제나라가 배출한 걸출한 재상의 한 사람으로 무려 57년 동안 제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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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晏嬰)을 역사책에서는 안자(晏子)라고 부른다. 자는 평중(平仲)이며 [[춘추]]시대 [[제나라]] 이유(夷維 지금의 산동성 高密) 출신이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500년에 죽었다. 제나라의 명문가 출신으로 아버지 안약(晏弱)이 죽은 뒤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 경(卿)이 되어, 영공·장공·경공을 거치면서 관직이 상국(相國, 수상에 해당)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관중]] 이후 제나라가 배출한 걸출한 재상의 한 사람으로 무려 57년 동안 제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
 
 
 
 
 
==안자의 생애==
 
==안자의 생애==
===제나라가 걸출한 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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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라의 재상===
제나라의 명문가 출신으로 아버지 안약(晏弱)이 죽은 뒤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 경(卿)이 되어, 영공·장공·경공을 거치면서 관직이 상국(相國, 수상에 해당)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관중 이후 제나라가 배출한 걸출한 재상의 한 사람으로 무려 57년 동안 제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인의(仁義)로 나라를 다스리고 평화로 외교한다는 '인의치국(仁義治國), 화평외교(和平外交)'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백성들을 자기 몸처럼 아꼈고, 근검절약 하는 생활에 힘썼다. 박학다식했으며 논쟁에도 능숙했다. 아부를 모르는 강직한 성품으로 늘 국군의 면전에서 어진 정치를 펴고 형벌을 줄이며 세금을 가볍게 하라고 바른 소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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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정치적 입장은 인의(仁義)로 나라를 다스리고 평화로 외교한다는 '인의치국(仁義治國), 화평외교(和平外交)'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백성들을 자기 몸처럼 아꼈고, 근검절약 하는 생활에 힘썼다. 박학다식했으며 논쟁에도 능숙했다. 아부를 모르는 강직한 성품으로 늘 국군의 면전에서 어진 정치를 펴고 형벌을 줄이며 세금을 가볍게 하라고 바른 소리를 했다.
  
===뛰어난 정치가·외교가·문학가, 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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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외교가·문학가===
오자서는 오나라에 도착한 이후 공자광(公子光)을 보좌하였다. 광은 원래 왕이 되었어야 되는 사람이었는데, 이복 동생 요에게 왕위를 빼앗긴 상태였다. 오자서는 이 사실을 알고 광의 쿠데타에 협력하여 BC 515년 공자광은 오나라의 왕위를 탈취하여 오왕 합려가 되고 오자서를 재상에 임명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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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세기에 활약한 안영은 외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나아가서는 정치와의 연관성을 강조했다. 그는 외교가 정치의 연장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이해했던 선구적 모략가였다. 또 외교에서 가장 필요한 유연한 자세와 날카로운 언변의 활용으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여기서는 안영의 지혜를 잘 보여주는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BC 506년 오나라 왕 [[합려]](闔閭, 즉 공자광)는 [[손무]](孫武: ≪손자병법≫의 저자)를 대장, 오자서를 부장으로 삼고 6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오자서와 손무는 군대를 이끌고 회수(淮水) 유역에서 한수(漢水)로 들어가 5전 전승을 거두고 초나라의 수도 영(郢: 지금의 강릉<江陵>)을 함락시켰다. <br />
 
이때 초나라는 평왕은 이미 죽고 소왕(昭王)이 왕위에 있었다. 오자서는 직접 초나라 왕실을 점령하여 평왕의 묘를 파헤치고 평왕의 시체를 300번이나 채찍질하여 결국 원한을 갚았다. <br />
 
사기 오자서열전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예전의 친구였던, 신포서(申包胥)가 오자서의 행동을 지적하며, “일찍이 평왕의 신하로서 왕을 섬겼던 그대가 지금 그 시신을 욕되게 하였으니, 이보다 더 천리(天理)에 어긋난 일이 있겠는가?” 하며 너무 가혹하다고 비난했지만, 오자서는 “나의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머니,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吾日莫途遠,吾故倒行而逆施之。)”고 하였다고 한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 즉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은 없다'는 뜻의 사자성어 일모도원(日暮途遠)은 여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초나라를 격파한 공으로 그는 신(申: 지금의 황포강<黃浦江> 하류 일대)에 봉해졌으며, 이로 인해 그를 신서(申胥)라고도 한다.  
 
  
===안자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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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라 경공은 요란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했다. 그의 주변에는 이른바 '제나라 3걸'로 불리는 세 명의 용사가 늘 따랐다. 이들은 경공의 총애를 믿고 멋대로 횡포를 부리는 등 그 피해가 여간 큰 게 아니었다. 이에 안영은 이들을 징벌하기로 결심했다.<br>
BC 496년 강대해진 오나라는 패권 야욕으로, 월나라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지만, 월왕 구천의 참모 범려와 지혜 대결에서 패하고, 오군은 월나라에 대패하게 된다. 이 때의 상처로 합려는 사망하게 된다. 합려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아들 [[부차]](夫差)는 오자서를 상국(相國)에, 대부 [[백비]](伯噽)를 태재(太宰)에 임명하였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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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노나라에서 국군이 방문했다. 안영은 상국의 신분으로 연회에 참석했는데, 세 용사는 칼을 찬 채 회랑 아래서 키득거리며 안영을 본체만체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안영은 뒤뜰에 복숭아가 익었으니 몇 개 따서 안주로 삼자고 제의했다. 경공은 흔쾌히 허락했고, 안영은 시종을 시켜 한 접시 따오게 했다. 이 복숭아는 희귀종이라 열매는 많이 열리지 않았지만 크기가 쟁반만 하고 색과 향이 여간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맛을 본 두 나라 정상은 침이 마르도록 맛을 칭찬했다.<br>
2년 후 오나라 왕 부차는 절치부심 끝에 월나라 왕 구천을 부초(夫椒)에서 격파하고 회계산(會稽山)으로 몰아넣었다. 이때 오자서는 지금 구천을 죽이지 않으면 후회할 날이 올 것이라고 부차에게 강력하게 건의하였으나, 부차는 그의 말을 끝내 듣지 않고 구천을 용서해주었다. 당시 월나라에서는 구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백비에게는 많은 뇌물을 써서 부차를 설득토록 하고, 부차에게는 많은 미인들을 바쳐 그의 환심을 사두었었다. <br />
+
이래저래 중요 인사들이 하나씩 맛을 보고 나니 쟁반에는 두 개가 남게 되었다. 안영은 경공에게 세 용사에게 내려 노고를 치하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의했다. 그러면서 노나라 국군도 계시고 하니 제나라 용사의 위풍과 솜씨를 한번 자랑하게 하자고 했다. 경공은 신이 나서 세 용사들을 불러서는 각자가 세운 공을 자랑해서 가장 뛰어나다고 판단되는 자에게 이 귀한 복숭아를 상으로 내리겠다고 했다.<br>
여기에서 바로 월나라 미인 서시(西施)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오자서는 이러한 월나라의 계책을 간파하고 누차 부차에게 충고를 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오자서는 부차의 무능으로 오나라가 위기에 빠질 것임을 예감하고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의 아들을 제나라의 친척 포목(飽牧)과 유명(維明)의 집에 맡겨두고 왔다. BC 484년 부차는 제후의 패주(覇主)를 차지하기 위해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br />
+
세 용사는 우쭐거리며 각자의 공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판정을 맡은 안영은 앞 두 용사에게 상으로 복숭아를 내렸다. 그러자 복숭아를 받지 못한 나머지 한 용사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검으로 자살했다. 그러자 용사도 자신들은 죽어도 함께 죽자고 맹세한 형제 사이라면서 역시 자결했다.<br>
오자서는 다시 그것을 반대하고 월나라가 가장 위험한 적이라고 경고하였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부차의 반감만 사고 말았다. 이때를 틈타 백비 등이 오자서가 제나라와 결탁하였다고 모함하자, 부차는 그들의 참언을 믿고 오자서에게 속루(屬鏤)의 검을 주어 자결을 명했다. 오자서는 자결하기 전에 비분에 찬 어조로 다음과 같이 부차에게 말하였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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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안영은 복숭아 두 개로 골치 아픈 세 용사를 제거했다. 이것이 저 유명한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라는 성어의 고사다.
  
{{인용문|"그 옛날 선왕들께는 대대손손 보좌를 해온 훌륭한 신하들이 있었기 때문에 난제에 부딪혀도 그 득실을 잘 헤아려서 큰 위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왕께서는 어진 신하의 충직한 간언을 버리고, 우매한 간신배들을 가까이하여 국정을 전횡하시니, 신하와 백성들은 대왕의 뜻에 따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는 바로 대왕을 파멸의 길로 이끄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오자서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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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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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00년 안영은 처에게 가법(家法)을 바꾸지 말도록 유언하고 사망하였다. 안영이 중태에 빠졌을 때 경공은 치수 가에 나들이를 나가 있었다. 파발이 도착하여 안영의 위독을 알리자 경공은 마차에 올라서 급히 수도인 임치(臨淄)로 향했다. 경공은 마차의 속도가 느리다며 마부에게서 고삐를 뺐어 들고 스스로 말을 몰았다. 그러나 그것도 느리다고 느끼고 심지어는 마차에서 내려서 스스로 달려가다가 마차에 다시 타기를 세 번이나 반복하며 마침내 임치에 도착하였다. <br>
 +
경공은 바로 안영의 집에 들어가서는 안영의 시신을 껴안고 통곡했다. 근신이 "군께서 이렇듯 슬피 통곡하시는 것은 예가 아닙니다."라고 간하였으나, 경공은 "지금 예를 따질 겨를이 아니다. 내가 옛날 선생과 공부(公阜)에 놀러 갔을 때, 하루에 세 번이나 내 과실을 책망해 주었다. 이제 누가 내 과실을 바로 잡아 주겠는가. 선생이 돌아가신 것은 곧 내가 망하는 것이다. 지금 어찌 예를 따지겠는가?"라고 말하고 슬픔이 다 할때까지 곡하였다고 한다. 사후에 평(平)이라는 시호가 내려져 안평중이라고 불리게 되나 후세 사람들은 존경의 의미를 담아 안자라고 불렀다. 현재 안영의 묘지는 중국 산둥성 쯔보시에 있다.
  
그리고는 다시 그의 부하들에게 "내 눈을 도려내어 수도 고소성(姑蘇城: 지금의 강소성 소주) 동문에 걸어두라! 월나라 군대가 입성하는 꼴을 똑똑히 봐 주겠다."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부차는 크게 분노하며 오자서의 시신을 찢어 전당강(錢塘江)에 던져 버리라고 명했다. BC 473년 마침내 월나라의 공격에 크게 패한 부차는 자결하면서, "오자서를 만날 낯이 없구나!"라고 하면서 죽었다고 한다.≪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는 오자서의 병서인 ≪오자서(伍子胥)≫ 10편이 있다고 하였으나 지금 전하지는 않고 있다. 오자서의 고향 임리현(臨利縣)에는 "오상사(伍相祠)"와 "오자서묘(伍子胥廟)", "오자서수부(伍子胥帥府)" 등의 건물을 지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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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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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은 제 환공을 보좌한 [[관중]]과 더불어 춘추시대 전체를 거론해도 결코 빠지지 않는 명재상으로 여겨졌으며, [[사마천]]은 '[[사기]]' 열전에서 관중과 안영을 한 편으로 엮어서(管晏列傳) 열전 첫 편인 '백이열전' 바로 뒤에 배치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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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은 [[사기]] '관안열전'에서 "안자가 제 장공이 역신에게 시해 당했을 때 그 시체 앞에서 엎드려 곡하고 예를 마치고 그대로 돌아갔으니 이것이 이른바 '의를 보고 행하지 않음은 곧 무용(無勇)'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가 간언의 말을 올릴 때는 그 군주의 안색에 아랑곳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물러나서는 허물을 고칠 것을 생각한다(進思盡忠退思補過)'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안자가 오늘날 살아있어 말채찍을 잡고 그의 수레를 몰 수 있다면 그 일은 내가 기뻐하고 흠모하는 바가 될것이다."라고 하여, 그를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다.
  
 
==안자춘추==
 
==안자춘추==
===유격전을 상세히 밝힌 최고의 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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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한서》〈예문지〉 병가류에 “《오자서》 10편, 도록 1권”, 잡가류에 “《오자서》 8권”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오자서’라는 병서가 실존했고, 오자서의 병법은 당시 상당한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예문지>에서 언급된 병서《오자서》는 실전된 지 오래고, 다른 사적에 인용된 문구도 부족한지라 면목을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1983년 과거 초나라의 수도인 강릉의 장가산(張家山) 서한(西漢) 시대 무덤에서 뒷면에 ‘개려’라고 적힌 죽간들이 무더기로 발견이 되었고, 최근에는 거의 독해되었다. <개려>란 바로 오나라 왕 합려와 오자서가 치국과 군사전략에 대해 논하는 병법서로 그의 전술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되었다. 오자서병법(개려)는 병법서로써의 형식을 갖춘 손자병법과는 달리 오나라 왕 합려의 물음에 오자서가 답을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
[https://ctext.org/yanzi-chun-qiu/zh 안자춘추](晏子春秋)는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 안자의 언행을 모아 후세의 사람이 기록하여 편찬한 책으로써, 후세의 사람이 그의 일화를 모아 문답식으로 편찬한 것이다. 현행4부 총간본 등에는 내편 간 상하, 문 상하, 잡 상하의 6편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외편은 2편으로 되어있다. 모두 여덟편의 215장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이야기 형식의 글이다. <br>
작은 세력이 큰 세력을 이기는 방법, 즉 유격전이 바로 오자서의 전략이었다.
+
안자춘추는 딱딱한 언어로 이루어진 다른 유가의 경전들과 달리 이야기와 교훈이 내재되어 있으며, 주변 사건들에 대한 명쾌한 해결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그 때문에 안자의 사상을 분류할 때, 질서 유지와 경을 근간으로하는 [[유가]]의 반열에 넣기도하고, 검약과 박애를 근본으로 하는 [[묵가]]의 반열에 넣기도 한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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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자의 기발하고 번뜩이는 재치는 바탕이 선하고 긍정적인 데다가 인간적이고 나아가 주객 누구도 상처받지 않도록 양쪽 모두를 배려하고 인정한다. 기지와 해학이 가득 담겨 있으며 드라마처럼 전개될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경쾌한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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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이야기로 "景公所愛馬死欲誅圉人晏子諫(경공소애마사욕주어인안자간) 경공이 아끼던 말이 죽자 그 말 관리자를 죽이려 하자 안자가 간하다)는 보기로 하자.<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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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공이 어인을 시켜 자기의 사랑하는 말을 돌보도록 임무를 맡겼다. 그런데 그 말이 갑자기 병들어 죽고 말았다. 경공은 노하여 칼을 가져와 그 자를 해체 하라고 하였다. 이때 안자가 저지하며 말하길 옛날 요순시대에 사람의 사지를 해체할 때 몸의 어느 부분부터 하였습니까? 경공이 끔찍하다는 듯이 안자에게 말하길 과인이 그런 일을 처음 저지르는 사람이 되겠군요. 드디어 그 일은 철회되고 말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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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공은 옥에 가두라는 명령을 하고 안자가 다시 나서서 말하길 말지기는 자신이 지은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죽는 것이니 청컨대 제가 임금을 위해서 따져드리겠습니다.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스스로 그 죄를 알게 한 후에 옥에 가두십시오. 경공이 허락하였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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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자가 말하길 너의 죄는 세 가지이다.  임금이 너로 하여금 말을 기르도록 명하였는데 너는 이를 죽게하였다. 이것이 첫째 죽을 죄이다. 또 가장 아끼는 말을 죽게 하였으니 두 번째 죽을죄이다. 그리고 임금으로 하여금 그까짓 말 한 마리의 이유로 사람을 죽일 뻔하도록 하게 하였다. 백성들은 이를 듣고 반드시 우리 임금을 원망할 것이며, 제후들이 들으면, 틀림없이 우리 나라를 가벼이 보게 될 것이다. 너 하나가 임금의 말 한 마리를 죽임으로 인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백성에게는 원한이 쌓이고 이웃 나라에게는 나라의 위세가 약해지게 하였으니, 이것이 죽음에 해당하는 세 번째 죄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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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공은 위연히 탄식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선생께서는 풀어주시오! 선생께서는 풀어주시오! 제발 나의 인을 손상시키지 말아주시오!
  
{{인용문|"적이 들이치면 우리는 뒤로 물러나 유인하여, 적이 여러 번 출입하면서 작은 승리를 얻게 하고, 막상 맞부딪치면 일부러 달아나서 적의 주력이 도착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적이 우리를 급하게 추격하면 반드시 대오가 흐트러질 것입니다. 저들이 이겼다고 자신할 때 갑자기 군사를 돌려 반격하면 저들은 당황할 것이 분명하니 이때 따라붙어 치면 저들을 달아나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오자서병법 원문 7장 中|}}
+
===저자===
오자서는 오나라의 재상으로서 전략을 실행해 초나라의 수도를 점령하고 부형의 원수를 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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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자춘추』 8권 215장을 저술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사실은 후세 사람이 그의 이름을 빌린 것이고, 대체로 안영과 동시대 사람들이 그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것을 바탕으로 후대에 다시 정리하여 책으로 엮은 것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책은 안영의 기본 사상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안자춘추의 저자===
 
오자서병법 즉 '개려'는 누구에 의해 지필 된 것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손자병법≫의 저자를 손무로 확정할 수 없듯이 ≪오자서병법≫역시 오자서를 저자로 확정하지 못한다. 이것이 언제 책으로 만들어졌는지, 또 합려와 오자서의 대화를 그대로 옮긴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다만 이 책이 오나라의 사서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있다. 왜냐하면 오자서병법은 손자병법과 달리 누군가가 정리한 흔적이 보이지 않고 원 사료를 옮긴 느낌이 강하기도 하며, 그리고 오자서가 등장하는 사서인 ≪좌전≫에서의 유격전의 개념과 오자서병법에서의 유격전 개념이 시종일관 일치한다. 뿐만 아니라 오자서가 초나라를 쳐야 하는 이유로 든 논리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정도의 정황과 근거로는 이 책을 오자서 본인의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로 확실히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오자서병법의 저자는 오자서 본인은 아닐지라도 역사적으로 오자서가 만들고 실전에 응용한 전략을 대단히 정밀하게 이해한 사람, 즉 '오자서의 병법'계승자라는 사실이다.
 
 
==관련 고사성어==
 
==관련 고사성어==
===귤화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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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화위지(橘化爲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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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와 풍토가 다르면 강남에 심은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로 되듯이 사람도 주위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비유한 고사이다.
동병상련(同病相憐) : ‘같을 동, 병 병, 서로 상, 불쌍할 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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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듣기로는 귤이 회남(淮南)에서 나면 귤이 되지만, 회북(淮北)에서 나면 탱자가 된다고 들었습니다. 잎은 서로 비슷하지만 그 과실의 맛은 다릅니다. 그러한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물과 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병을 가진 사람끼리 서로를 가엾게 여긴다.'라는 뜻이다. 오자서의 아버지는 간신 비무기(費無忌)의 모함으로 인해 억울하게 죽었는데, 백비 역시 마찬가지로 그렇게 아버지를 잃었기에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백비에게 오자서는 동정감을 느낀다. 오자서는 초나라를 벗어나 오나라로 도망쳐 온 백비를 합려에게 소개해 대부 벼슬을 받게 한다.
 
{{인용문|“[하상가]라는 노래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같은 병을 앓으니 서로 불쌍히 여기고 같은 걱정이 있으니 서로 구해 주네. 놀라서 나는 새들은 서로 모여서 날아가고 여울 밑의 물도 함께 모여 흐르네.’ 우리는 똑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으니 서로 도와야 합니다.” |오자서曰|}}
 
 
 
===갈이천정===
 
굴묘편시(掘墓鞭屍) : ‘팔 굴, 무덤 묘, 채찍 편, 주검 시.’
 
 
 
'무덤을 파헤치고 주검에 채찍질을 하다.' 라는 뜻으로, 통쾌한 복수나 지나친 행동을 일컫는 말이다. 오자서의 아버지와 형은 초나라 평왕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하게 되었고, 후에 평왕이 죽은 뒤 오자서는 초나라를 찾아가 그의 무덤을 파헤치고 주검을 심하게 훼손시켰다. .≪史記(사기)≫ 伍子胥列傳(오자서열전)에도, “이에 楚平王(초평왕)의 무덤을 파고 그의 시체를 꺼내 삼백 대를 내리친 뒤에야 그만두었다”라고 나와 있다.
 
 
 
 
 
===이도삼살사===
 
오월동주(吳越同舟) : ‘오나라 오, 월나라 월, 같을 동, 배 주.’
 
 
 
오와 월이 한 배를 타고 있다는 뜻이다. 오와 월은 오랜 원수 사이였지만 한 배에 타고 있는 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서로 운명을 같이 하고 협력하게 된다.
 
{{인용문|“夫吳人與越人 相惡也 當其同舟而濟 遇風 其相救也 如左右手”
 
“무릇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은 서로 미워하나, 그들이 같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상황에서 풍랑을 만난다면 서로 구제함이 오른손 왼손의 관계와 같을 것이다.”
 
|孫子(손자) 中|}}
 
 
 
===심복지환===
 
심복지환 (心腹之患) : ‘마음 심, 배 복, 갈 지, 근심 환.’
 
 
 
‘가슴이나 배에 생긴 병’이란 뜻으로, 쉽게 물리치기 어려운 적 또는 쉽사리 고치기 어려운 고질을 뜻한다. 합려의 아들인 오나라 왕 부차는 월나라로 부터 뇌물을 받은 백비의 말에 따라 제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오자서는 월나라의 속셈에 넘어가지 말라며 부차에게 간언한다. 이때 월나라를 심복지환에 비유하며 빨리 공격해야 함을 주장한다. 하지만 부차는 이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오나라는 월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인용문 |“제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월나라는 우리에게 가슴이나 배에 생긴 병과 같은 존재입니다.(越在我, 心腹之疾也). 왕께서는 제나라를 공격할 것이 아니라 빨리 월나라를 멸하여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 | |}}
 
  
 +
===의기양양(意氣揚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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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기가 드날리다'라는 뜻으로, 바라던 대로 이루어져 매우 자랑스러워하며 뽐내는 모양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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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의 마차를 모는 한 마부가 있었다. 그 마부는 안영의 마차가 지날 때 머리 숙여 예를 표하는 것을 보고 마치 자기가 안영이 된 듯 한 착각에 빠져있었다. 마부의 처는 남편이 몹시 우쭐댄다는 소문을 듣고 불안해하였다. 하루는 안영의 마차가 자신의 집 앞을 지난다는 소리를 듣고 문틈으로 남편이 마치를 모는 모습을 보았다. 과연 남편은 마차를 아름답게 꾸미고 화려한 마차 덮개를 씌우고 마차를 모는데, 그 모습이 자못 의기양양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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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저녁, 남편이 집에 돌아오자 아내는 이혼하자고 했다.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고 마부는 깜짝 놀라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아내가 말했다. “안자께서는 여섯 척의 키로 나라의 중임을 지고 있으며 그 이름이 만천하에 퍼져 있습니다. 그는 마차에 앉아서 조용하고 신중한 태도로 한 점의 자만심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키가 팔 척이나 크면서 마부 노릇이나 하면서 의기양양하며 몹시 거만해 보였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멋대로 잘난 체 하니 제가 어찌 당신과 함께 결혼생활을 계속할 수 있겠습니까?”<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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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듣고 마부는 몹시 부끄러웠다. 이때부터 마부는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사람을 대할 때 몹시 겸손했다. 마부가 갑자기 변한 모습을 보고 안영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자세히 물어보고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부가 개과천선한 것에 대해 칭찬해 주고 후에 안영은 마부를 대부의 직에 추천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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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에서 마부의 의기양양한 모습에서 ‘뜻한 바를 이루어 우쭐거리며 뽐내는 모습’을 뜻하는 득의양양([[得意揚揚]])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그러나 得意揚揚의 속뜻은 ‘자만심에 사로잡히지 말고 매사에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안자의 마부’를 뜻하는 안자지어(晏子之御)라는 고사성어도 전해지는데, 이는 ‘변변치 못한 지위를 믿고 우쭐대는 사람’을 나타낸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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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이천정(渴而穿井)===  
1. 사마천 - 사기(史記) 66권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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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말라야만 그제서야 우물을 판다'는 뜻으로 자신에게 닥쳐오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무심하다가도 막상 급한 일이 발생하거나 필요한 일이 생기면 스스로 나서 해결하게 된다는 의미
  
2. 고우영 - 십팔사략(十八史略) 2권 '춘추시대'
+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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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두 개로 선비 셋을 죽임. 매우 놀랍고도 교활한 계략
  
3. 공원국 - 통쾌한 반격의 기술 '오자서병법'
+
===양두구육(羊頭狗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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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머리에 개고기라는 뜻으로, 겉과 속이 다른 속임수를 꼬집는 말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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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제나라 영공(靈公)이 총애하는 첩인 융자가 남장을 하고 다니자 그걸 좋아해서 남장하는 풍습이 널리 퍼졌다. 나라에서 몇 번이고 금하려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아 안영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궁중 여인에게는 남장을 허용하면서 민간에서는 남장을 금하니 이야말로 "문밖에는 소머리를 걸어두고 안에서는 말고기를 파는 것과 같습니다"(猶懸牛首于門而賣馬肉于內也)라며 궁중 여인의 남장부터 금하라고 진언했다. 그렇게 하니 과연 남장하는 풍습이 사라졌는데, 이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4. 조기형 - 한자성어 고전명언구 대사전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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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마천,『사기 열전』,김원중 역,민음사,2007<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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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자오촨둥,『쟁경』,노만수 역,민음사,2013<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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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임동석,『안자춘추』,동문선,1998<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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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증선지,『십팔사략』이준영 역,자유문고,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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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9일 (목) 17:51 기준 최신판

안자(晏子)

출생 ?
사망 기원전 500년

안영(晏嬰)을 역사책에서는 안자(晏子)라고 부른다. 자는 평중(平仲)이며 춘추시대 제나라 이유(夷維 지금의 산동성 高密) 출신이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500년에 죽었다. 제나라의 명문가 출신으로 아버지 안약(晏弱)이 죽은 뒤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 경(卿)이 되어, 영공·장공·경공을 거치면서 관직이 상국(相國, 수상에 해당)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관중 이후 제나라가 배출한 걸출한 재상의 한 사람으로 무려 57년 동안 제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

안자의 생애

제나라의 재상

그의 정치적 입장은 인의(仁義)로 나라를 다스리고 평화로 외교한다는 '인의치국(仁義治國), 화평외교(和平外交)'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백성들을 자기 몸처럼 아꼈고, 근검절약 하는 생활에 힘썼다. 박학다식했으며 논쟁에도 능숙했다. 아부를 모르는 강직한 성품으로 늘 국군의 면전에서 어진 정치를 펴고 형벌을 줄이며 세금을 가볍게 하라고 바른 소리를 했다.

정치가·외교가·문학가

기원전 6세기에 활약한 안영은 외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나아가서는 정치와의 연관성을 강조했다. 그는 외교가 정치의 연장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이해했던 선구적 모략가였다. 또 외교에서 가장 필요한 유연한 자세와 날카로운 언변의 활용으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여기서는 안영의 지혜를 잘 보여주는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제나라 경공은 요란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했다. 그의 주변에는 이른바 '제나라 3걸'로 불리는 세 명의 용사가 늘 따랐다. 이들은 경공의 총애를 믿고 멋대로 횡포를 부리는 등 그 피해가 여간 큰 게 아니었다. 이에 안영은 이들을 징벌하기로 결심했다.
이때 노나라에서 국군이 방문했다. 안영은 상국의 신분으로 연회에 참석했는데, 세 용사는 칼을 찬 채 회랑 아래서 키득거리며 안영을 본체만체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안영은 뒤뜰에 복숭아가 익었으니 몇 개 따서 안주로 삼자고 제의했다. 경공은 흔쾌히 허락했고, 안영은 시종을 시켜 한 접시 따오게 했다. 이 복숭아는 희귀종이라 열매는 많이 열리지 않았지만 크기가 쟁반만 하고 색과 향이 여간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맛을 본 두 나라 정상은 침이 마르도록 맛을 칭찬했다.
이래저래 중요 인사들이 하나씩 맛을 보고 나니 쟁반에는 두 개가 남게 되었다. 안영은 경공에게 세 용사에게 내려 노고를 치하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의했다. 그러면서 노나라 국군도 계시고 하니 제나라 용사의 위풍과 솜씨를 한번 자랑하게 하자고 했다. 경공은 신이 나서 세 용사들을 불러서는 각자가 세운 공을 자랑해서 가장 뛰어나다고 판단되는 자에게 이 귀한 복숭아를 상으로 내리겠다고 했다.
세 용사는 우쭐거리며 각자의 공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판정을 맡은 안영은 앞 두 용사에게 상으로 복숭아를 내렸다. 그러자 복숭아를 받지 못한 나머지 한 용사가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검으로 자살했다. 그러자 두 용사도 자신들은 죽어도 함께 죽자고 맹세한 형제 사이라면서 역시 자결했다.
이렇게 해서 안영은 복숭아 두 개로 골치 아픈 세 용사를 제거했다. 이것이 저 유명한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라는 성어의 고사다.

사망

기원전 500년 안영은 처에게 가법(家法)을 바꾸지 말도록 유언하고 사망하였다. 안영이 중태에 빠졌을 때 경공은 치수 가에 나들이를 나가 있었다. 파발이 도착하여 안영의 위독을 알리자 경공은 마차에 올라서 급히 수도인 임치(臨淄)로 향했다. 경공은 마차의 속도가 느리다며 마부에게서 고삐를 뺐어 들고 스스로 말을 몰았다. 그러나 그것도 느리다고 느끼고 심지어는 마차에서 내려서 스스로 달려가다가 마차에 다시 타기를 세 번이나 반복하며 마침내 임치에 도착하였다.
경공은 바로 안영의 집에 들어가서는 안영의 시신을 껴안고 통곡했다. 근신이 "군께서 이렇듯 슬피 통곡하시는 것은 예가 아닙니다."라고 간하였으나, 경공은 "지금 예를 따질 겨를이 아니다. 내가 옛날 선생과 공부(公阜)에 놀러 갔을 때, 하루에 세 번이나 내 과실을 책망해 주었다. 이제 누가 내 과실을 바로 잡아 주겠는가. 선생이 돌아가신 것은 곧 내가 망하는 것이다. 지금 어찌 예를 따지겠는가?"라고 말하고 슬픔이 다 할때까지 곡하였다고 한다. 사후에 평(平)이라는 시호가 내려져 안평중이라고 불리게 되나 후세 사람들은 존경의 의미를 담아 안자라고 불렀다. 현재 안영의 묘지는 중국 산둥성 쯔보시에 있다.

사마천의 평가

안영은 제 환공을 보좌한 관중과 더불어 춘추시대 전체를 거론해도 결코 빠지지 않는 명재상으로 여겨졌으며, 사마천은 '사기' 열전에서 관중과 안영을 한 편으로 엮어서(管晏列傳) 열전 첫 편인 '백이열전' 바로 뒤에 배치하였다.
사마천사기 '관안열전'에서 "안자가 제 장공이 역신에게 시해 당했을 때 그 시체 앞에서 엎드려 곡하고 예를 마치고 그대로 돌아갔으니 이것이 이른바 '의를 보고 행하지 않음은 곧 무용(無勇)'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가 간언의 말을 올릴 때는 그 군주의 안색에 아랑곳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생각하고 물러나서는 허물을 고칠 것을 생각한다(進思盡忠退思補過)'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안자가 오늘날 살아있어 말채찍을 잡고 그의 수레를 몰 수 있다면 그 일은 내가 기뻐하고 흠모하는 바가 될것이다."라고 하여, 그를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다.

안자춘추

특징

안자춘추(晏子春秋)는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 안자의 언행을 모아 후세의 사람이 기록하여 편찬한 책으로써, 후세의 사람이 그의 일화를 모아 문답식으로 편찬한 것이다. 현행4부 총간본 등에는 내편 간 상하, 문 상하, 잡 상하의 6편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외편은 2편으로 되어있다. 모두 여덟편의 215장으로 이루어져있으며 이야기 형식의 글이다.
안자춘추는 딱딱한 언어로 이루어진 다른 유가의 경전들과 달리 이야기와 교훈이 내재되어 있으며, 주변 사건들에 대한 명쾌한 해결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그 때문에 안자의 사상을 분류할 때, 질서 유지와 경을 근간으로하는 유가의 반열에 넣기도하고, 검약과 박애를 근본으로 하는 묵가의 반열에 넣기도 한다.
안자의 기발하고 번뜩이는 재치는 그 바탕이 선하고 긍정적인 데다가 인간적이고 나아가 주객 누구도 상처받지 않도록 양쪽 모두를 배려하고 인정한다. 기지와 해학이 가득 담겨 있으며 드라마처럼 전개될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경쾌한 고전이다. 대표적인 이야기로 "景公所愛馬死欲誅圉人晏子諫(경공소애마사욕주어인안자간) 경공이 아끼던 말이 죽자 그 말 관리자를 죽이려 하자 안자가 간하다)는 보기로 하자.
경공이 어인을 시켜 자기의 사랑하는 말을 돌보도록 임무를 맡겼다. 그런데 그 말이 갑자기 병들어 죽고 말았다. 경공은 노하여 칼을 가져와 그 자를 해체 하라고 하였다. 이때 안자가 저지하며 말하길 옛날 요순시대에 사람의 사지를 해체할 때 몸의 어느 부분부터 하였습니까? 경공이 끔찍하다는 듯이 안자에게 말하길 과인이 그런 일을 처음 저지르는 사람이 되겠군요. 드디어 그 일은 철회되고 말았다.
경공은 옥에 가두라는 명령을 하고 안자가 다시 나서서 말하길 말지기는 자신이 지은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죽는 것이니 청컨대 제가 임금을 위해서 따져드리겠습니다.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스스로 그 죄를 알게 한 후에 옥에 가두십시오. 경공이 허락하였다.
안자가 말하길 너의 죄는 세 가지이다. 임금이 너로 하여금 말을 기르도록 명하였는데 너는 이를 죽게하였다. 이것이 첫째 죽을 죄이다. 또 가장 아끼는 말을 죽게 하였으니 두 번째 죽을죄이다. 그리고 임금으로 하여금 그까짓 말 한 마리의 이유로 사람을 죽일 뻔하도록 하게 하였다. 백성들은 이를 듣고 반드시 우리 임금을 원망할 것이며, 제후들이 들으면, 틀림없이 우리 나라를 가벼이 보게 될 것이다. 너 하나가 임금의 말 한 마리를 죽임으로 인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백성에게는 원한이 쌓이고 이웃 나라에게는 나라의 위세가 약해지게 하였으니, 이것이 죽음에 해당하는 세 번째 죄이다.
경공은 위연히 탄식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선생께서는 풀어주시오! 선생께서는 풀어주시오! 제발 나의 인을 손상시키지 말아주시오!

저자

『안자춘추』 8권 215장을 저술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사실은 후세 사람이 그의 이름을 빌린 것이고, 대체로 안영과 동시대 사람들이 그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것을 바탕으로 후대에 다시 정리하여 책으로 엮은 것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이 책은 안영의 기본 사상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관련 고사성어

귤화위지(橘化爲枳)

'기후와 풍토가 다르면 강남에 심은 귤을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로 되듯이 사람도 주위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비유한 고사이다.

"제가 듣기로는 귤이 회남(淮南)에서 나면 귤이 되지만, 회북(淮北)에서 나면 탱자가 된다고 들었습니다. 잎은 서로 비슷하지만 그 과실의 맛은 다릅니다. 그러한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물과 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의기양양(意氣揚揚)

'의기가 드날리다'라는 뜻으로, 바라던 대로 이루어져 매우 자랑스러워하며 뽐내는 모양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안영의 마차를 모는 한 마부가 있었다. 그 마부는 안영의 마차가 지날 때 머리 숙여 예를 표하는 것을 보고 마치 자기가 안영이 된 듯 한 착각에 빠져있었다. 마부의 처는 남편이 몹시 우쭐댄다는 소문을 듣고 불안해하였다. 하루는 안영의 마차가 자신의 집 앞을 지난다는 소리를 듣고 문틈으로 남편이 마치를 모는 모습을 보았다. 과연 남편은 마차를 아름답게 꾸미고 화려한 마차 덮개를 씌우고 마차를 모는데, 그 모습이 자못 의기양양했다.
그 날 저녁, 남편이 집에 돌아오자 아내는 이혼하자고 했다.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고 마부는 깜짝 놀라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아내가 말했다. “안자께서는 여섯 척의 키로 나라의 중임을 지고 있으며 그 이름이 만천하에 퍼져 있습니다. 그는 마차에 앉아서 조용하고 신중한 태도로 한 점의 자만심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키가 팔 척이나 크면서 마부 노릇이나 하면서 의기양양하며 몹시 거만해 보였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멋대로 잘난 체 하니 제가 어찌 당신과 함께 결혼생활을 계속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마부는 몹시 부끄러웠다. 이때부터 마부는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사람을 대할 때 몹시 겸손했다. 마부가 갑자기 변한 모습을 보고 안영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자세히 물어보고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마부가 개과천선한 것에 대해 칭찬해 주고 후에 안영은 마부를 대부의 직에 추천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마부의 의기양양한 모습에서 ‘뜻한 바를 이루어 우쭐거리며 뽐내는 모습’을 뜻하는 득의양양(得意揚揚)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 그러나 得意揚揚의 속뜻은 ‘자만심에 사로잡히지 말고 매사에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안자의 마부’를 뜻하는 안자지어(晏子之御)라는 고사성어도 전해지는데, 이는 ‘변변치 못한 지위를 믿고 우쭐대는 사람’을 나타낸다.

갈이천정(渴而穿井)

목이 말라야만 그제서야 우물을 판다'는 뜻으로 자신에게 닥쳐오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무심하다가도 막상 급한 일이 발생하거나 필요한 일이 생기면 스스로 나서 해결하게 된다는 의미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

복숭아 두 개로 선비 셋을 죽임. 매우 놀랍고도 교활한 계략

양두구육(羊頭狗肉)

양 머리에 개고기라는 뜻으로, 겉과 속이 다른 속임수를 꼬집는 말이다.

“춘추시대 제나라 영공(靈公)이 총애하는 첩인 융자가 남장을 하고 다니자 그걸 좋아해서 남장하는 풍습이 널리 퍼졌다. 나라에서 몇 번이고 금하려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아 안영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궁중 여인에게는 남장을 허용하면서 민간에서는 남장을 금하니 이야말로 "문밖에는 소머리를 걸어두고 안에서는 말고기를 파는 것과 같습니다"(猶懸牛首于門而賣馬肉于內也)라며 궁중 여인의 남장부터 금하라고 진언했다. 그렇게 하니 과연 남장하는 풍습이 사라졌는데, 이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참고문헌

1. 사마천,『사기 열전』,김원중 역,민음사,2007
2. 자오촨둥,『쟁경』,노만수 역,민음사,2013
3. 임동석,『안자춘추』,동문선,1998
4. 증선지,『십팔사략』이준영 역,자유문고,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