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오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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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hoonchang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5월 25일 (토) 13:1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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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오밍은 나를 정말 정말 힘들게 한 유일한 선수였을 것이다. 야오밍은 포스트 업도 하지 않고 나를 빤히 보며 슛을 던졌다. 나와 야오밍은 서로를 막을 수 없었다. 난 야오밍을 하킴 올라주원과 같은 클래스로 본다. 올라주원이 날 못막는 것처럼, 나도 올라주원의 페이드 어웨이 슛을 막지 못하기 때문이다.

 
샤킬 오닐

포지션 = 센터 리그 = NBA


야오밍
(간체:姚明, 병음: Yáo Míng)

출생 1980년 9월 12일
중국 상하이
국적 중국
학력 상해체육대학 졸업
229cm
몸무게 141kg
배우자 예리

출생과 유년기 시절

야오밍은 상하이에서 프로 농구선수 출신의 부모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야오밍의 아버지 야오즈위엔은 208cm, 어머니 팡펑디는 188cm의 신장을 가졌으며, 특히 팡펑디는 중국여자농구대표팀 주장을 맡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이렇게 남다른 부모님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야오밍은 10세 때에 5피트 5인치(약 165cm)로 자랐다. 당시 스포츠 전문병원에서 전문의에게 성장판검사를 받은 야오밍은 의사로부터 그의 키가 221cm까지 자라날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야오밍은 9살이 되던 해에 (우유 한 병의 유혹에 넘어가) 초등학교 농구부에 지원하며 농구를 시작한다. 농구를 갓 시작한 야오밍은 기본기가 아예 없는 선수였다. 때문에 야오밍이 다니던 초등학교의 농구부 감독이었던 리장민 감독은 매일 정규훈련 후 야오밍과 나머지 훈련을 진행하여 볼 핸들링과 사이드스텝 등의 기본기를 반복 훈련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리 감독의 노력 덕분에 야오밍은 안정적인 볼 핸들링과 슈팅을 장착할 수 있었다. 2016년 야오밍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며 소감을 발표할 때에 리장민 감독을 가장 존경하는 은사로 꼽을 정도로, 리 감독은 야오밍의 농구인생에 큰 도움을 준 은사이다. 야오밍은 13세 때 CBA 상하이 샤크스의 주니어 팀에 입단하였는데, 입단과 동시에 일요일을 제외하고 일주일에 6번, 매일 10시간이 넘는 강훈련을 하였다. 입단한지 한 달 만에 몸무게가 20kg가까이 빠졌을 정도로, 훈련의 강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당시 야오밍의 훈련 파트너는 류웨이였는데, 둘은 매일 붙어다니며 고된 훈련과 농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후에 프로와 국제 무대에서 계속해서 호흡을 맞추는 좋은 파트너가 된다. 상하이 샤크스 주니어 팀에서 고된 훈련을 받으며 4년의 시간을 보낸 야오밍은 17세의 나이로 상하이 샤크스의 성인 선수로 입단하였다.처음 상하이 샤크스의 유소년 팀에 입단했을 때 193cm이던 신장도 어느새 2m를 훌쩍 넘어 220cm를 향해가고 있었다.

CBA 경력

CBA 데뷔시즌 야오밍은 상하이 샤크스에서 경기당 평균 10득점 8리바운드 2.3블록의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두번째 시즌이었던 1998-1999시즌 정규리그 개막을 목전에 두고 야오밍은 왼쪽 발이 골절되는 심각한 부상을 당하게 된다. 이로 인해 야오밍은 시즌을 통째로 결장하게 된다. 이 때의 부상 후유증으로 야오밍의 제자리 점프력은 10cm에서 15cm 사이로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이뤄낸 프로 데뷔의 기쁨도 잠시, 어린 나이에 몸을 혹사시킨 대가가 데뷔 2년차 피로골절이라는 혹독한 시련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길고 긴 재활을 끝내고 코트로 돌아온 야오밍은 1999-2000시즌 정규리그에서 경기 당 평균 20.9득점 12.9리바운드를 기록, 데뷔 후 처음으로 평균 20-10을 돌파하며 상하이 샤크스의 주축 멤버로 거듭난다. 야오밍의 활약으로 상하이 샤크스는 1999-2000시즌과 2000-2001시즌 두 시즌 연속으로 CBA 파이널에 진출하지만, 왕즈즈가 이끄는 빠이 로케츠에 가로막혀 두 시즌 모두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2001년 여름 왕즈즈가 NBA로 떠나면서 경쟁자가 사라진 야오밍은 2001-2002시즌 정규리그에서 평균 32.4득점 19리바운드 4.8블록을 기록하며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끈다. 게다가 플레이오프에서는 평균 38.9득점 20.2리바운드 4.3블록을 올리며 마침내 상하이 샤크스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 때 그는 필드골 성공률 76%를 기록하는 등 CBA 불멸의 기록을 남기었다. 2001년에 아시아선수권에서 MVP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2002년 여름, 야오밍은 NBA 진출을 공식 선언한다.

NBA 드래프트 입단 과정

1998년은 당시의 야오밍에게 악몽과도 같은 해였을 것이다. 왼쪽 발 골절로 한 시즌을 통째로 날렸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1998년은 야오밍이 NBA 진출의 꿈을 꾸기 시작한 해이기도 했다. 1998년 5월 야오밍은 나이키의 초청으로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린 농구캠프에 참가한다. 이 캠프는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농구 유망주들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 이 곳에서 야오밍은 타이슨 챈들러와 함꼐 가장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며 NBA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이후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 국가대표팀 상비군에 승선한 야오밍은 상비군에 함께 승선한 왕즈즈와 NBA 진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본인의 꿈을 확고히 다지게 된다. 이 때의 이야기가 야오밍의 NBA 진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야오밍은 본인의 자서전에 "NBA 진출에 대한 왕즈즈의 격려와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라는 멘트를 남겨 왕즈즈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 야오밍에 앞서 1999 신인드래프트에 참가했던 왕즈즈는 낙방할 것이라는 전망과 달리, 2라운드 전체 36순위로 댈러스 매버릭스에 지명되며 많은 이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비록 왕즈즈가 참가에만 의의를 두고 NBA 진출에 대해 소속팀과 전혀 협의하지 않아 그의 NBA 입성은 2001년으로 미뤄졌지만, 이는 야오밍이 본인의 NBA 진출 가능성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NBA 진출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모두 마치고 있었던 야오밍은 2000-2001시즌 팀의 CBA 우승을 이끌고 2001 아시아선수권에서 MVP를 차지하는 등 아시아에서 농구로 이룰 것을 모두 다 이루자 2002년 여름 NBA 진풀을 공식 선언한다. 2002 신인드래프트를 앞두고 야오밍은 美 현지 에이전트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고용하는 등 NBA 관련하여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이들을 대거 초빙하며 이른바 '야오밍 사단'을 구축하였고, NBA 진출을 심도 있게 준비하였다. 이미 당시의 야오밍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보여준 활약으로 '걸어 다니는 만리장성'이란 별명을 얻으며 많은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이에 많은 팀들이 야오밍의 1라운드 지명을 심각하게 고려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야오밍의 NBA 진출 걸림돌은 자국인 중국이었다. 상하이 샤크스는 이제 막 최전성기에 접어든 야오밍이 NBA로 떠나버리면 열기를 띠기 시작한 팀의 인기가 급격히 하락할 것을 걱정하여 야오밍의 NBA 진출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중국농구협회는 야오밍이 오프시즌 국가대표팀 차출에 제대로 응하지 않을 것을 우려하면서 야오밍의 미국 진출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왕즈즈 또한 이러한 이유로 NBA 진출이 늦어진 바 있었다. 이에 야오밍은 본인이 직접 상하이 샤크스 구단주와 면담을 진행하여, 구단으로부터 "합당한 조건에 NBA 팀과 계약이 가능하다면 NBA 진출을 허락한다"는 조건부 승낙을 얻어내는 한편, 중국농구협회에는 자신의 2002 부산 아시안게임에의 출전을 확약하면서 직접 중국농구협회의 허락을 받아냈다. 당시 美 현지에서 야오밍의 전체 1순위 지명이 유력하다는 전망이 나온 것도 승낙을 받아내는 데에 한 몫을 했는데, 야오밍은 모두의 바람대로 2002 NBA 신인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휴스턴 로케츠의 지명을 받게 된다.

NBA 경력

야오밍에 대한 美 현지의 초기 평가

야오밍이 2002 신인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휴스턴 로케츠의 지명을 받게 된 당일부터 美 현지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야오밍의 1순위 지명을 두고 갑론을박을 이어갔다. 美 현지 보도에 따르면 당시에만 무려 7명의 전문가가 야오밍의 성공가능성을 낮게 점쳤는데, 그 이유인즉슨 중국리그의 수준이 NBA에 비해 현저히 낮다는 것과 야오밍이 NBA는 물론 미국농구 자체를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하였다는 것이었다.美 현지 전문가집단 뿐만이 아니라, 휴스턴 로케츠의 주축 선수이던 스티브 프랜시스 또한 야오밍의 지명을 비난하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1]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며 리그 최고 센터가 되다 (2002-2005)

시즌 개막 초만 해도 야오밍에 대한 비관적 전망은 현실이 되는 듯 했다. 야오밍은 데뷔전인 인디애나 페이서스전에서 무득점-2리바운드에 그치는 등, 개막 후 첫 7경기에서 모두 합쳐 단 4득점만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그 결과 휴스턴 팬들의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으며, 개막전 이후 출전시간도 점차 줄어들면서 경기 당 평균 14분 출전에 그쳤다. 물론 2002 부산 아시안게임에 참가하면서 팀 트레이닝캠프에 늦게 합류했다는 것과 아직 NBA 리그의 경기 템포에 대한 적응이 덜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그에게는 경기력의 빠른 반등이 절실했다. 야오밍은 본인의 데뷔 후 8번째 경기인 LA 레이커스전에서 23분 동안 무려 20득점(FG 100%) 6리바운드를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2] 그간의 부진으로 인해 자칫 자신감이 떨어질 수 있는 상황에서 터진 시원한 득점 쇼로 야오밍은 더 이상의 비난과 우려를 불식했고, 자신감 또한 회복하게 되었다. LA 레이커스전을 기점으로 야오밍은 리그에 적응하기 시작하여, 데뷔 시즌 82경기에서 평균 13.5득점(FG49.8%) 8.2리바운드 1.8블록을 올리며 성공적으로 NBA 첫 시즌을 마무리했다.[3] 시즌 종료 후, 야오밍은 신인왕 최종투표에서 아마레 스타더마이어에 이어 전체 2위를 차지하였고 NBA 올 루키 퍼스트 팀의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였다. 게다가 2003 올스타 투표부터 영어, 스페인어와 함께 중국어 기능이 도입되면서, 야오밍은 중국 인민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으며 올스타전 선발 명단에도 이름을 올리게 된다. 야오밍은 무려 25만 표를 받으며 샤킬 오닐을 제치고 서부 올스타 센터 부문 1위를 차지했다. NBA 역사상 데뷔 시즌 신인이 올스타전 선발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은 1995년 그랜트 힐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4] 2002-2003시즌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야오밍은 2003-2004시즌부터 스탠 밴 건디 감독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팀의 중심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2003년 여름, 루디 톰자노비치 감독이 건강을 이유로 사임하자 그를 이어 휴스턴 로케츠의 지휘봉을 잡은 스탠 밴 건디 감독은 야오밍을 중심으로 팀의 전술을 개편하였다. 스탠 밴 건디 감독의 지휘 아래 휴스턴 로케츠는 2003-2004시즌 45승 37패, 서부 컨퍼런스 7번 시드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다. 야오밍은 감독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두 시즌 연속 82경기 출장을 하였고, 정규리그 평균 17.5득점(FG 52.2%) 9리바운드 1.9블록을 기록하며 준수한 성적으로 정규리그를 마무리했다. 다만 PO 1라운드에서 야오밍과 휴스턴 로케츠는 전당포 라인업의 레이커스에 4-1로 패하며 아쉬움 속에 시즌을 마쳐야 했다. 2004년 여름, 휴스턴 로케츠는 스티브 프랜시스-쿠티노 모블리-캘빈 케이토를 올랜도로 보내고 올랜도로부터 트레이시 맥그레이디-타이론 루-주안 하워드-리스 게인스를 영입하며 맥그레이디와 야오밍 투톱 체제로 팀을 재편했다. 맥그레이디는 당시 '서코비 동티맥'으로 불리며 리그를 대표하는 득점기계로 주가를 올리고 있었으며 야오밍도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휴스턴 로케츠는 2004-2005시즌 강력한 서부 컨퍼런스 상위 시드 후보로 지목되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휴스턴을 서부 컨퍼런스 1번 시드로 지목하기도 하였다. 맥그레이디-야오밍 원투 펀치는 물론이고, 이 둘을 뒷받침하는 다른 선수들(디켐베 무톰보, 밥 수라 등)의 경쟁력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즌 초반 맥그레이디가 잔부상으로 경기력이 하락하고 야오밍과도 불협화음을 내자 휴스턴 로케츠는 한때 부진에 빠졌지만, 야오밍과 맥그레이디의 호흡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나아졌고, 결국 휴스턴은 정규리그 51승 31패로 서부 컨퍼런스 5번 시드를 차지한다. 휴스턴 로케츠는 플레이오프에서 4번 시드를 차지한 댈러스를 상대로 첫 2경기를 승리로 가져가며 정규 시즌의 상승세를 이어갔지만, 이때 맥그레이디가 예기치 못한 무릎부상을 당하는 등 악재가 겹치며 휴스턴은 또 다시 1라운드에서 탈락하게 된다. 야오밍은 정규리그 80경기를 출장하며 평균 18.3득점(FG 55.2%) 8.4리바운드 2블록을 기록하였고, 플레이오프에서도 평균 21.4득점(FG 65.5%) 7.7리바운드 2.7블록을 가록하는 훌륭한 성적을 내었으나 팀의 탈락을 막지는 못하였다. 이렇게 야오밍은 NBA 커리어에서 세 번쨰 시즌까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며 NBA 리그를 대표하는 엘리트 센터로 성장하였다. 중국인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기는 했지만, 야오밍은 해마다 올스타전 투표에서 전체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하였다.

악몽같은 시간들, 떨어지지 않는 부상악령 (2005-2011)

야오밍의 NBA 커리어 네번째 시즌이었던 2005-2006시즌, 야오밍은 왼쪽 엄지발가락 부상을 시작으로 계속되는 잔부상에 시달리며 힘겨운 시간을 보낸다. 2005-2006시즌은 야오밍이 정규리그 평균 22.3득점(FG 51.9%) 10.2리바운드로 NBA 데뷔 후 처음으로 20-10을 기록한 시즌이었지만, 정규리그 57경기 출장에 그치며 큰 아쉬움을 남긴 시즌이기도 했다.[5] 2006-2007시즌, 시즌 초반 야오밍은 25경기에서 평균 26.8득점 9.7리바운드 2.3블록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강력한 정규리그 MVP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2006년 12월 그는 오른쪽 무릎 부상으로 올스타전을 결장, 정규리그 48경기 출장에 그친다. 이어진 2007-2008시즌에서도 왼쪽 다리에 부상을 입으며 정규리그 55경기 출장에 그친 그는(정규리그 55경기 평균 22득점(FG 50.7%) 10.8리바운드 2블록을 기록하기는 했지만) 인저리 프론(Injury prone)이라는 오명을 얻게 된다. 2008-2009시즌, 야오밍은 정규리그 77경기에 뛰며 평균 19.7득점(FG 54.8%) 9.9리바운드 1.9블록을 옮기며 재기에 성공하는 듯 했다. 그러나 2009년 여름 야오밍은 또다시 왼쪽 발 골절을 입으며 2009-2010시즌에는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하게 된다. 당시 야오밍의 담당의사는 야오밍과의 면담에서 "더 이상은 농구선수로 활동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야오밍은 재활에 더욱 매진하며 2010-2011시즌 재기를 노렸다. 휴스턴 로케츠 구단 차원에서도 2010-2011시즌을 앞두고 야오밍의 출전시간을 24분으로 제한할 것이라 언론에 공표하는 등 야오밍의 부상관리에 힘썼지만, 2010년 12월 야오밍은 왼쪽 다리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받으며 시즌을 접어야 했다.

은퇴와 명예의 전당 헌액

2011년 7월 21일, 야오밍은 고향인 상하이에서 공식 은퇴를 선언한다. 2016년 9월, 야오밍은 샤킬 오닐, 앨런 아이버슨과 함께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다. 2017년 2월, 휴스턴 로케츠는 야오밍의 백넘버 11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한다.

수상내역

  1. 스티브 프랜시스는 야오밍과의 첫 훈련에서 그의 농구열정과 친화력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이후 야오밍의 든든한 파트너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우정을 이어나가고 있다.
  2. 당시 LA 레이커스는 샤킬 오닐이 부상으로 빠지면서 사마키 워커가 야오밍을 수비했다.
  3. 휴스턴 로케츠는 2002-2003시즌 정규리그 43승 39패로 서부 컨퍼런스 9위를 기록하였다.
  4. 야오밍은 NBA 리그 데뷔 후 총 8번 NBA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5. 이 기간 맥그레이디까지 허리부상을 입어, 2005-2006시즌 야오밍과 맥그레이디 두 사람이 함께 뛴 경기는 31경기에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