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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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양명학명나라시대의 유학자 왕양명(王陽明)에 의해 성립된 유가의 한 학파로서 침체한 명대 사상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탄생배경

명대 초기에는 몽고족의 풍습을 배제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등 국수주의적인 성격이 강했다. 유학 중에도 체제유지를 위한 주자학이 관학화하여 학문과 사상이 위축되어 있었다. 왕양명이 활동한 명 중기는 명 초의 질서가 붕괴되면서 갖가지 사회모순이 분출했던 변혁의 시대이자 격동기였다. 변혁의 원동력은 상업이었다. 주원장이 설계한 이상향은 농업 위주의 자급자족적인 색체가 강한 사회였다. 그러나 전란이 멈추고 평화가 찾아오자 농업 생산물의 양과 질은 점차 자급자족의 수준을 넘게 되어 시장판매를 목적으로 생산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농산물과 수공업 제품을 교역해주는 상인의 역할이 두드러지고 사치가 유행하면서 겉으로 보기에 사람의 신분을 구분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사농공상을 엄격하게 구분했던 명 초의 사회 분위기가 일변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포착한 왕양명은 사농공상은 "종사하는 업종은 다르나 도는 같다(異業同道)"는 관점에서 사민평등을 주장했다. 이는 이기론(理氣論)에 입각하여 인간사회를 이분법으로 구분하고 그 속에 내재하는 불평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주자학적 세계관을 넘어서는 획기적인 견해였다.

사상

심즉리

인간의 마음이 곧 천하만물의 이법(理法)이므로 마음을 함양하는 것으로 족하고 굳이 학문을 통할 필요가 없다는 심즉리(心卽理)의 주장은, 송나라시대의 두 철학자 가운데 이학(理學)을 중시한 주자와 달리 심학(心學)을 중시한 육상산(陸象山)을 계승한 것이었다.

양지설

양지설의 핵심은 인간 본연의 지(知)인 양지(良知)가 모든 사람에게 갖춰져 있으므로 누구에게나 성인이 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는 욕심에 사로잡힌 소인도 여전히 존재했으므로 양지를 발현하기 위한 수양이 필요했다. 왕양명은 주자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재해석함으로써 양지 발현을 위한 새로운 수양법을 제시했다. 주자학에서는 격물치지에 대해 모든 사물을 연구해 그 이법(理法)을 깨닫는다고 해석해 객관적인 학문연구를 중시했던 데 반해, 왕양명은 마음의 부정(不正)을 바로잡아 타고난 본연의 지를 실현하는 주관적인 수양을 중시했다. 이러한 주관적인 수양의 중시로부터 지(知)는 행동(行)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지행합일성(知行合一說)이 나왔고 인간은 도덕적으로 평등한 존재라는 인식으로부터 사농공상의 사민(四民)평등이 주장이 나왔으며 나아가 만물일체론으로 발전했다.

후대의 사상

양명학은 시대가 뒤로 가면서 명교(名敎)적 측면을 강조하는 우파와 반명교적 요소를 가진 좌파로 나뉘었다. 좌파는 왕간(王艮)을 시조로 하는 서민 출신 사상가집단인 태주학파(泰州學派)로 발전했다. 태주학파는 서원에서의 강학활동 등을 통해 양명학이 서민층까지 확대되게 만들었다. 태주학파의 한 사람이었던 하심은(何心隱)에 이르러서는 반명교적 성격이 한층 강하게 부각되어 주자학과 달리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태주학파의 욕망긍정론을 극단으로까지 발전시킨 것은 이단으로 몰린 인물인 이지(李贄)의 동심설(童心說)이었다.

평가

세대의 변화 추세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그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들을 긍정하고 포용한 양명학은 상인과 수공업자 등 서민층에게 선풍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전통질서에 안주하며 이를 유지하려는 지식인들에게는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 원흉으로 비판받았다. 명이 멸망한 후 청조의 비판자들은 양명학이 너무 추상적이고, 수동적인 데다가 개인 중심적이었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비판은 명조의 학문이 실용기술보다는 올바른 도덕성만을 떠받들었다는 견해를 낳게 했다.

참고문헌

존 킹 페어뱅크・멀 골드만 지음, 김형종・신성곤 옮김, 《신중국사》, 까치(2005)
신성곤, 윤혜영 지음,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2004)
박한제, 김형종, 김병준, 이근명, 이준갑 지음, 《아틀라스 중국사》, 사계절출판사(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