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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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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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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시기 양판의 형성과정, 김진공
 
문화대혁명시기 양판의 형성과정, 김진공
 
 
양판희에 관한 몇가지 오해에 대한 변, 김형란
 
양판희에 관한 몇가지 오해에 대한 변, 김형란
 
 
바이두 <样板戏>,<8大样板戏>
 
바이두 <样板戏>,<8大样板戏>

2016년 6월 3일 (금) 21:29 판

양판희의 개념

양판희의 형성과정

8대 양판희

1967년 5월 23일 모택동 <연안문예강화(延安文艺讲话)>발표 25주년 기념 공연에서 선보인 8대 양판희로서 경극 <홍등기>,<사가병>,<지취위호산>,<기습백호단>,<해강>과 발레극<홍색낭자군>,<백모녀> 그리고 교향악<사가병> 을 가리킨다. 이 8편의 양판희는 강청(江青)의 지시에 따라 더 수정되어 1970년부터 1972년 사이에 최종 완결본으로 정리되었고 영화로 제작되어 보급되었다. 이후에도 양판희가 추가로 제작되기는 했지만 작품의 수준 측면이나 대중의 호응 측면에서 이 8편에 미치지 못했다.

경극<홍등기(红灯记)>

혁명 현대경극 중 하나로 양판희 가운데 가장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동북 항일 연합군 시기의 동북 인민 항일 투쟁을 반영하여 1962년에 만들어진 영화 <자유후래인(自有后来人)>에서 소재를 취하여 개작한 것으로 중일 전쟁 기간에 일본군에 맞서서 지하투쟁을 벌이다 희생되는 한 철도 역무원과 그 모친, 딸의 이야기이다. 영화가 상영된 뒤 1963년, 상해 호극단에 의해 호극으로 수정되었고 이를 본 강청이 경극으로 제작하도록 함으로써 1964년 현대경극 <홍등기>가 완성되었다. 이후 수정작업을 거쳐 모택동(毛泽东)과 강청의 승인을 얻은 뒤 전국 각지에서 공연되어 큰 호응을 얻었으며 양판희의 대표 작품으로 자리잡았다.

경극<지취위호산(智取威虎山)>

1958년에 상해경극원이 장편소설<임해설원(林海雪原)>을 경극으로 각색한 것으로 국공간의 내전이 한창이던 1946년 겨울, 36명의 중국공산당 병사들이 중국 남부에 있는 한 국민당 군대의 요새로 침투하여 마침내 그것을 장악한다는 내용이다. 1963년 강청의 주목을 받고 강청의 지시에 따라 원작 소설의 필자인 곡파(曲波)가 참여하여 수정작업을 했고 강청의 승인을 얻었다. 그러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1967년 8대 양판희의 북경 공연에서 모택동이 직접 내린 수정 지시를 받음으로써 다시 양판희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경극<해강(海港)>

1964년 강청이 노동자 문제를 다룬 극의 필요성을 제시하며 이효민이 창작한 회극 <해강적조신(海港的早晨)>을 경극으로 수정하기로 결정했다. 원작인 <해강적조신(海港的早晨)>은 부두 노동자들의 생활을 소재로 삼아 만든 극이었는데 양판희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건국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부두 노동자들이 당의 지도에 따라 반동적인 음모를 전멸한다는 내용이다. 여러 차례에 걸쳐 수정이 이루어지다가 심지어는 폐기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1966년 강청에게 승인을 얻고 1967년 북경공연에서 모택동에게 승인받았다.

경극<기습백호단(奇袭白虎团)>

한국전쟁에 종군한 중국인민지원군 경극단이 귀국을 준비할 때 주은래(周恩来)가 참전경험을 경극으로 만들 것을 권유함으로써 구상된 작품이다. 한국전쟁 중 중국인민지원군 정찰병 부대장 양육재(杨育才)가 금성전투에서 백호부대 기습작전을 벌여 백호기를 뺏어온 영웅기를 소재로 하여 만들어졌다. 귀국 후 지원군 경극단이 산동성 경극단으로 편입되며 작품을 재구성하여 기습백호단이라는 제목으로 완성했으며, 이후 1964년 모택동의 인정을 받았지만 자신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아 불만을 품은 강청으로부터 계속적인 수정 지시를 받았다.

경극<사가병(沙家浜)>

최좌부(崔左夫)의 혁명회고록 <혈염착적성명:삼십육개상병원적투쟁기실(血染着的姓名:三十六个伤病员的斗争纪实)>을 원작으로한 현대경극이며 일본군 처하에서 비밀 투쟁을 벌이던 중국공산당 지하 첩보원이 부상당한 공산당 병사를 구출하여 안전하게 도피시키는 내용이다. 이후 1950년대 말에 상해인민호극단이 호극 <로탕화종(芦荡火种)>으로 개작했고 이를 강청이 북경경극단에 추천하여 <지하연락원(地下连络员)>이라는 경극으로 만들어져 초연되었지만 반응이 좋지 못해 수정작업을 거쳤고 1967년 다시 <로탕화종(芦荡火种)>이라는 제목으로 공연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마오가 관람한 뒤 제목을 <사가병(沙家浜)>으로 바꿀 것을 지시해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발레극<홍색낭자군(红色娘子军)>

주은래 총리의 발레의 “혁명화, 민족화, 대중화”라는 직접적인 관심 하에 창작된 것으로 원래 영화로 만들어졌던 작품을 1963년에 발레극으로 개작한 것이다. 1964년 9월 당 간부들에게 극찬을 받고 10월에는 마오에게 “혁명은 성공적이며 방향도 적절하고 예술적으로도 좋다”며 격찬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강청이 개입하여 대대적으로 수정되어갔으나 차차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된 뒤 67년 양판희로 정립되었다.

발레극<백모녀(白毛女)>

1945년의 가극 <백모녀(白毛女)>가 원본이며 역시 주은래의 건의에 따라 1964년 상해 무용학교에서 발레극으로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소형발레극으로 상연되었지만 점차 대형 발레극으로 발전하였다. 1967년 4월에는 마오와 강청이 관람하고 수정지시를 했지만 실제로 수정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후 강청에 지시에 따라 수정에 들어갔으나 실패해 문혁이 끝날때까지 작품의 공연에 제한을 받았다.

교향악<사가병(沙家浜)>

1964년 강청의 지시에 따라 중앙악단이 음악에서의 중서결합을 모색하던 중 경극 <사가병>의 한 대목을 관현악 반주의 합창곡으로 개작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중앙악단은 이를 전곡으로 확대하여 작품을 완성했고 새롭게 만들어진 형식의 명칭을 정함에 있어서는 강청이 “교향음악”을 주장해 “교향합창”으로 타협되었다. 그러나 66년 발표된 문예규범 <기요(纪要)>에서 강청은 자신이 주장한 “교향음악”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했고 이후 교향음악이라는 명칭이 최종적 공인을 받았다.

평가

참고문헌

문화대혁명시기 양판의 형성과정, 김진공 양판희에 관한 몇가지 오해에 대한 변, 김형란 바이두 <样板戏>,<8大样板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