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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안목과 기개: 기화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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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상업을 통해 재산을 늘려가던 그는 조나라 수도 한단에서 그동안의 진귀한 물건들과는 비교도 안 될 값어치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진나라 태자 [[안국군]](安國君)의 아들 이인이 그‘기화(奇貨: 뜻밖의 이익을 얻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였다.
 
그렇게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상업을 통해 재산을 늘려가던 그는 조나라 수도 한단에서 그동안의 진귀한 물건들과는 비교도 안 될 값어치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진나라 태자 [[안국군]](安國君)의 아들 이인이 그‘기화(奇貨: 뜻밖의 이익을 얻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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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핏줄이라기엔 너무 초라하게 사는 이인을 보고 여불위는 동정과 함께 투기 감각을 느꼈다. 기화인 이인을 ‘차지할 수 있는지(可居)’가 여불위에겐 중요했다. 아무리 값이 나가는 물건이라 해도 차지할 수 없으면 무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이인이 태자였다면’ 또는 ‘그의 모친 하희가 총애를 받는 부인이었다면’ 아마 그의 가치는 ‘조나라 인질 이인’과는 확연히 달랐을 것이고, 여불위는 이인에게 접근조차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인은 진나라에 쓸모없는 존재였고 여불위는 그를 차지할 기회가 생겼다. 여기서 ‘기화가거(奇貨可居)’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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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책에 여불위가 궁핍하게 사는 이인을 보고 그의 부친과 나눈 대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여불위의 뛰어난 안목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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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경전(耕田)의 이익은 몇 배입니까? 열 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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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옥(珠玉)의 이익은 몇 배입니까? 백 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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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주인을 세운 이익은 몇 배입니까? 헤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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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밭에서 땀 흘려 일해도 따듯한 의복과 남아도는 음식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나라를 세울 주군을 세우면 그 혜택을 후세의 자손까지 남길 수가 있습니다. 진나라 공자인 이인이 조나라의 인질로 와 있습니다. 가서 그에게 봉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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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그는 직접 이인을 만나 인사를 했다. 사기 여불위 열전에 여불위와 이인이 나눈 대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여불위의 당찬 모습과 기개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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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여, 제가 귀하의 가문을 크게 높여드리겠습니다.” 여불위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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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당신의 가문을 크게 한 뒤 내 가문을 크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라고 실소와 함께 힘없는 어조로 이인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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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모르시겠지만, 내 가문은 당신의 가문이 커진 후에야 커질 것입니다.”라며 여불위는 눈을 반짝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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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이 관심을 보이자 여불위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제게 공자를 왕위에 올릴 계책이 있습니다.”
  
 
=== 화양부인을 사로잡은 그의 재력과 지력 ===
 
=== 화양부인을 사로잡은 그의 재력과 지력 ===

2019년 6월 25일 (화) 22:12 판

여불위

출생 ??
??(한나라 사람임)
사망 ?? 진시황 10년 권력에서 물러난 뒤, 자살한 것으로 기록됨.
생존시기 전국시대
주요 작품 여씨춘추

개요

여불위 그는 누구인가?

그는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 보고 투자할 가치가 있는 대상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거상(巨商)이었다.

그러나 그는 물건만을 사고파는 상인이 아니었다. 그는 사람에게서도 가치를 찾아내 사람마저도 투자대상으로 판단하는 비범한 상인이었고, 더 나아가 킹메이커이자 한 나라의 실세로 군림한 권신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이인(異人)은 장양왕(莊襄王)이 되지 못했을 테고, 진시황(秦始皇)은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즉, 그가 없었다면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인 (秦)나라 또한 없었다. 이 정도로 그는 중국 역사에 영향력이 큰 존재이다.

그러나 그의 최후는 처절하다. 주변인의 실수를 말미암아 여불위는 진시황에게 협박을 받아 끝내 자결하고 말았다.

여불위 관련 인물관계도

여불위 관련 인물은 얽힌 관계가 많고 각자마다의 이름이 많아 부연 설명이 시각적으로 필요합니다.

생애

불분명한 출생연도와 출신

그의 출생연도는 불분명하다. 한중교류 채널 봉황망(凤凰网)에서는 여불위가 B.C.292년에 태어났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신빙성이 그다지 크지는 않다. 그리고 출생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진 않았다. 그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첫 번째로 그가 (韓)나라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 이는 사마천 사기(史記)의 여불위 열전에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그를 “양적(陽翟)의 대고인(大賈人)”이라고 설명한다. 이때, ‘양적’은 한나라에 있는 큰 읍이고, ‘대고인’은 점포를 가지고 장사를 크게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그가 (衛)나라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 이는 유향전국책(戰國策)에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복양(濮陽) 사람 여불위 한단(邯鄲)에서 장사를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복양’은 (衛)나라의 도시 중 하나이고, ‘한단’은 (趙)나라의 수도이다. 또, 봉황망(凤凰网)에서 “그의 아버지 여충의(呂忠义)는 위나라 성내에서 진귀한 한약재를 파는 유명한 상인이었다.”라는 설명이 있는데, 이는 간접적으로 여불위 집안이 위나라 상인 집안이고 그로 인해 여불위가 위나라 사람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의 안목과 기개: 기화가거

여불위는 상인이면서도 학문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상업적 능력은 여타 상인들에 비해 뛰어났다. 싸게 구매하여 비싸게 팔아 집에 천금을 마련했다고 사기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그는 사업적 수완이 밝았다.

그렇게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상업을 통해 재산을 늘려가던 그는 조나라 수도 한단에서 그동안의 진귀한 물건들과는 비교도 안 될 값어치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진나라 태자 안국군(安國君)의 아들 이인이 그‘기화(奇貨: 뜻밖의 이익을 얻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였다.

왕의 핏줄이라기엔 너무 초라하게 사는 이인을 보고 여불위는 동정과 함께 투기 감각을 느꼈다. 기화인 이인을 ‘차지할 수 있는지(可居)’가 여불위에겐 중요했다. 아무리 값이 나가는 물건이라 해도 차지할 수 없으면 무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이인이 태자였다면’ 또는 ‘그의 모친 하희가 총애를 받는 부인이었다면’ 아마 그의 가치는 ‘조나라 인질 이인’과는 확연히 달랐을 것이고, 여불위는 이인에게 접근조차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인은 진나라에 쓸모없는 존재였고 여불위는 그를 차지할 기회가 생겼다. 여기서 ‘기화가거(奇貨可居)’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

전국책에 여불위가 궁핍하게 사는 이인을 보고 그의 부친과 나눈 대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여불위의 뛰어난 안목이 드러난다.

“아버지, 경전(耕田)의 이익은 몇 배입니까? 열 배이다.”

“주옥(珠玉)의 이익은 몇 배입니까? 백 배이다.” “국가의 주인을 세운 이익은 몇 배입니까? 헤아릴 수 없다.” “논밭에서 땀 흘려 일해도 따듯한 의복과 남아도는 음식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나라를 세울 주군을 세우면 그 혜택을 후세의 자손까지 남길 수가 있습니다. 진나라 공자인 이인이 조나라의 인질로 와 있습니다. 가서 그에게 봉사하고 싶습니다.”

이후, 그는 직접 이인을 만나 인사를 했다. 사기 여불위 열전에 여불위와 이인이 나눈 대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여불위의 당찬 모습과 기개가 드러난다.

“공자여, 제가 귀하의 가문을 크게 높여드리겠습니다.” 여불위가 말했다.

“우선 당신의 가문을 크게 한 뒤 내 가문을 크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라고 실소와 함께 힘없는 어조로 이인이 말했다. “공자는 모르시겠지만, 내 가문은 당신의 가문이 커진 후에야 커질 것입니다.”라며 여불위는 눈을 반짝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인이 관심을 보이자 여불위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제게 공자를 왕위에 올릴 계책이 있습니다.”

화양부인을 사로잡은 그의 재력과 지력

대업을 위해 바친 애첩

하늘도 도와주는 순풍 여불위

노애의 오만함, 여불위의 몰락

보이지 않는 미래, 눈앞에 놓인 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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