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진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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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씨

출생 727년 즈음으로 추정
절강성(浙江省) 오흥(吴兴)
사망 미상
생존시기 당나라
관련 활동 정치


개요

예진황후. 당나라 덕종德宗의 어머니. 당 대종代宗 어린시절의 부인. 오흥(吴兴)사람이며, 성은 심沈씨이며 이름은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아버지는 이직易直이며, 이후, 비서감을 지낸 사람이다. 개원(开元) 말년, [1] 그의 아버지는 그녀를 동궁(东宫)의 궁녀로 입궁 시켰다. 742년 15세 때 당나라 대종(이숙李俶)의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가 바로 이후 덕종德宗이 된다. 안사의 난 이후, 현종은 촉(蜀)지역으로 피난을 가지만, 왕자나 비 공주들 중 이를 따라가지 못한 이들은 침략해온 군사들을 만나게 되고, 심씨는 낙양의 궁에 붙잡히고 만다. 이후, 당나라 대종이 안록산의 군을 물리치고 낙양을 다시 수복하고, 이곳에 남으며 북벌의 계략을 세운다. 이때 장안은 아직 수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곧 사사명이 다시금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이때 심씨는 실종이 된다. 대종은 사자를 파견해 심씨를 찾았으나, 10여년간 어느 곳에도 심씨의 소식은 없었다.


생애

입궁과 안사의 난

대종代宗 이예李豫의 예진황후 심씨는 절강성 오흥(현재 후난성)사람이며, 명문가 출신이다. 당나라 현종 개원시기 말, 동궁(东宫)으로 뽑혀 궁에 입궐했다. 숙종肃宗 이형李亨이 황태자가 되었을 때, 심씨는 이예李豫(숙종의 장자. 이후 대종이 된다)에게 하사된다.심씨의 미모는 꽃과 같았으며 품성이 곧고 선량하며 어질었다. 때문에 이예의 총애를 받았고 천보(天宝당현종 말기의 연호742~756)원년 742년 이예의 장자인 이괄李适(이후의 덕종)을 출산한다.

천보天宝15년(756년), 안록산의 난이 발생해 그의 군대는 장안으로 처들어 오고, 당 현종양귀비와 황자 및 황손들을 데리고 피난을 떠난다. 이형李亨과 이예李豫 그리고 이괄李适은 자연스레 그곳에 남아있게 되었고, 제황자들과 황손들의 첩들 및 많은 수의 황실 외척들을 그곳에 남아있게되어 반란군에게 포로로 잡히게 된다. 서경西京인 장안에서 약탈을 하고 낙양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속에서 심씨는 계속하여 그들의 포로였다.

이형은 영무灵武[2]에서 제후를 칭하게 되고, 장자인 아들 이형을 천하병마대원사天下兵马大元帅로 봉한다. 지덕至德[3]2년인 757년, 이예는 동도东都인 낙양을 수복하고 낙양의 한 별궁에서 1년 넘게 수감되어 있는 심씨를 발견하게 된다. 건원[4] 원년인 758년 이예는 황태자에 봉해진다. 하지만 정식으로 결혼을 한 상태가 아니었는지 심씨는 황태자비가 될수 있는 명분이 없었고, 이에 심씨를 장안으로 불러들일 명분 또한 없었다. 때문에 심씨는 계속해서 낙양의 궁궐에 남게 된다. 건원 2년인 759년 사사명이 재차 반란을 일으켜 낙양을 점령하고 심씨는 이때부터 실종이된다.

황제가 어머니를 찾다

이예가 제위에 오르고 난뒤, 광덕广德[5]2년인 764년, 자신의 장자인 이괄을 황태자에 봉하고, 동시에 심씨를 찾는 조서를 내린다. 파견된 사람들이 도처에서 심시를 수소문하였으나, 10여년이 넘도록 심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기간중에 자신이 바로 심씨라고 칭하는 사람이 여러 명 있었는데, 한 예로 어떤 여승이 자신이 태자를 낳았다고 칭하였다. 하지만 결국 모든게 다 거짓이었다. 대력大历[6]14년인 779년, 숙종은 세상을 떠났고, 태자 이괄이 황위에 오른다. 이괄은 즉위한 이듬해인 건중建中[7]원년인 780년, 자신의 생모인 심씨를 "예진황태후"로 봉하였고, 함원전(含元殿)에 황후의 조복을 구비하였다. 덕종은 스스로 책(册- 여기서는 책봉을 명령하는 문서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당해보인다.)을 봉헌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계속해 목놓아 울었는데 주위에 있는 모든 신하들 또한 울었다.

자신의 생모를 찾기위해, 덕종인 이괄은 중서사인中书舍人[8]의 건의를 받아들여, 목왕 이술李述을 봉영사奉迎使로 임명하고, 심씨의 가족들을 판관判官[9]으로 임명한다. 여러 사람들을 각지에 파견하여 찾도록 하였고, 사방으로 수색하였으며, 다방면으로 알아보았다. 동시에 자신의 어머니와의 재회를 위하여, 심씨의 가족들에게 더 많은 땅들을 하사하였다.

건중建中2년인 781년, 심씨 태후를 낙양에서 찾았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장안성은 기쁨으로 가득찼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 '심태후'는 한 장정의 양녀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 양녀는 나이대와 생김새가 심씨와 매우 유사하였는데, 때문에 심씨를 사칭해 궁궐에서 부귀를 얻으려고 하였다. 덕종의 신하들을 모두 분노하여 잇달아 이들을 엄벌에 처하라고 청하였으나, 어머니가 생각난 덕종은 어떠한 벌에도 처하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신하들에게 "진짜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라면 나는 수백번의 사기꾼들을 만나는 것도 괜찮다."라고 말했다. 이 일이 있고 난뒤, 사칭하는 사람들을 더욱 더 늘어났다. 하지만 덕종이 생을 다 할때 까지, 진짜 심씨는 찾지 못하였다.

덕종은 제위한지 26년이 되는해에 세상을 떠난다. 장자인 순종顺宗은 즉위한지 7개월 만에 죽는다. 그리곤 그의 아들인 헌종宪宗이 즉위한다. 이때, 심씨를 찾는 행위는 벌써 수십년째 진행중에 있었으나 어떠한 소식도 없었다. 몇몇 관리들이 심씨를 찾는 행위를 중단하기를 건의하였고, 동시에 조서를 내려 황궁의 내전肃章内殿에서 심씨의 장례를 치른다. 상태황태후의 연호와 의관묘[10]를 대종릉(代宗)과 종묘 옆에 건립한다.


평가

심씨의 인생을 살펴보면, 운명이 박복하고, 숱한 고난들을 만났으며, 그 마지막에는 게다가 실종이 되어 지금까지도 수수께끼가 되었다. 때문에 많은 소설가들은 자신들의 상상력을 가미하여 전국에 있는 수많은 비구니들에게 심씨에 대한 출가의 전설을 만들어 내었는데, 꽤나 전설적인 색채가 강하다.

한국에서는 wikipedia와 같은 홈페이지에서 조차도 그 이름만 있을뿐 자료를 찾기가 어렵다. 그만큼 한국 대중에게는 친숙하지 않은 존재로 보인다. 바이두 백과에서 심씨의 이력을 나타낸 표를 보면 주요 성과가 "덕종의 출산"이라고 되어있는데 그 이름조차 예진황후의 성인 '심'씨만 전해질 뿐 정보가 많지 않을 뿐더러 역사적으로 보면 큰 비중이나 영향력이 없는 사람은 이견이 없어 보인다. 다만 말년이 수수께끼 였던 점과 실종이 된 뒤 남편, 아들, 손자까지 삼부자가 자신을 수소문했던 점들이 여러 이야기꾼들의 관심을 자극했고 때문에 만들어진 이야기는 꽤나 많은 듯 하다.


문예에서의 예진황후

소설로는 전기소설(传奇小说 大唐妃传之珍珠传奇)이 있으며,

드라마로는 1987년도의 대만에서 방영된 <珍珠传奇>와

2016년 인기리에 방송되었던 대당영요(大唐荣耀)에서 심씨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참고

  • 당나라 현종시대를 가르키며 개원의치(开元之治)라고도 불린다.
  • 현재 녕하 회족 자치구 북부의 한 지명
  • 숙종 초기 연호756~758)
  • 숙종시기 두번째 연호. 758~760
  • 대종代宗초기의 연호. 763~764
  • 대종 말기의 연호 766~779
  • 덕종의 초기 연호. 780 ~ 783
  • 관직의 이름. 이후 고려의 중서문하성과 연관이 있다.
  • 판관이란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판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신이 심씨라고 거짓말을 치는 사람들이 많기에 그들이 진짜인지 구별하는 사람이라고 보면 될 것같다.
  • 죽은 자의 의복과 갓 등을 매장한 무덤_네이버 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