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케 몽골 울루스 - 대몽골국

ChineseWiki
Wedidie (토론 | 기여)님의 2015년 11월 23일 (월) 22:17 판
이동: 둘러보기, 검색
여러분의 적극적인 토론 참여가 문서의 내용을 더 충실하게 만듭니다.


칭기즈 칸의 등장

칭기즈 칸 이전의 몽골 초원은 분열기였다. 12세기 몽골리아 초원에는 여러 개의 대형 울루스들이 존재했다. 가장 서쪽인 알타이 산맥 부근에는 나이만이라는 울루스가 있었으며, 그 동쪽에는 케레이트라는 울루스가 있었다. 케레이트의 동쪽, 즉 케룰렌 강에서 훌룬 부이르 호수에 이르는 지역에 타타르 울루스가 있었다. 이외에 초원과 삼림이 경계를 이루는 북방에는 오이라트와 메르키트라는 이름의 울루스들이 있었다. 이 당시 초원 지역 여기저기에 분포한 울루스들은 이미 치열한 대립과 전쟁으로 밤낮을 지새우고 있었고, 몽골인들도 이 싸움에 휘말려 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몽골 씨족 내에서도 타이치우트와 예수게이와 테무친이 소속된 키야드 집단 간의 경쟁이 심했다. 예수게이가 독살 당했을 때, 칭기즈 칸의 씨족은 타이치우트 집단에게 흡수되었다. 수많은 전사와 추종자들을 거느린 가문이 한순간에 아무런 보호도 없이 외톨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이 당시 몽골초원의 현실이었다. 모두에게서 버림을 받은 테무친 가족은 산악지역으로 들어가 작은 동물과 새를 사냥하고 물고기를 잡으며 야생에서 음식물을 채취하며 생존하였다. 그러나 테무친이 성인이 되어 복수할 것을 두려워한 타이치우트가 테무친의 천막을 습격하여 포로로 잡았지만 테무친은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 이후 테무친은 아버지의 의형제였던 옹칸에게 가서 도움을 얻으며 세력을 키워갔다. 마침내 테무친은 케레이트와 나이만을 격파하며 몽골 초원지역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1]

칭기즈 칸 시기의 조직 개편과 제도 개혁

칭기즈 칸의 본격적인 정벌은 내부 조직 개편과 제도 개혁이 끝난 이후에 시작되었다. 1206년 ‘건국’ 직후 칭기즈 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울루스를 함께 세우며, 함께 행하던 자들에게 1천 호씩 나누어 천호를 맡기는 상을 내리겠다.”고 하면서 몽골 울루스를 구성하는 95개의 천호를 조직하고 그것을 지휘할 88명의 천호장을 임명한 것이었다.[2] 각각의 천호는 다시 백호로, 백호는 다시 십호로 나뉘어, 각각 백호장과 십호장도 임명되었다. 95개의 천호는 크게 3개의 만호로 묶여, 무칼리 휘하의 좌익 만호는 만주와의 경계인 흥안령 방면에, 보오르추 휘하의 우익 만호는 중앙아시아와의 경계인 알타이 방면에, 그리고 보로굴 휘하의 중군 만호는 몽골리아 본지에 배치되었다.[3] 이 중에서 칭기즈 칸의 가장 혁신적인 조직 개편은 친위대의 설치였다. 친위대의 원형은 칭기즈 칸을 호위한 70명의 주간 호위병과 80명의 야간 호위병이었다. 그러나 1206년에는 전 군대의 모든 단위에서 뽑은 인원으로 충원하여 10,000명으로 수가 증가하였고 10개의 천호가 설립되었다. 칭기즈 칸은 모든 계급층에서 친위대를 뽑았다. 이렇게 여러 부족의 아들과 동생을 제국의 군대로 선발하였기에 그들 가족의 충성을 보장을 인질의 역할을 하였고 나아가 부족이 아닌 제국의 통치기구를 통해 출세를 한 첫 대규모 집단이었다. 친위대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칭기즈 칸은 친위대가 일반 군대 대부분을 통솔한 부족 관료보다 우월하다고 선포하였다. 이 정책은 매우 유효하여 제국이 팽창하면서 이전 부족 간의 경계는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 정책은 이전 초원에서 볼 수 없었던 큰 안정성을 몽골 군대에 제공하였다. [4] 천호제 및 케식제와 함께 칭기즈 칸의 신생 국가의 토대를 이룬 것은 자삭이라 불렸던 법령이었다. 새로운 통치체제 아래에서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법령의 제정과 시행은 불가피한 조치였다. 자삭은 칭기즈 칸이 내린 법적인 구속력을 지닌 명령과 훈시들을 지칭하는 말이었고, 그 명령은 서기들에 의해 문서화되어 남겨지고 축적되어 일종의 판례 법전 같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5]

칭기즈 칸 시기의 정벌 - 서하와 북중국 공략

그 후 칭기즈 칸은 서하를 침공하는 것으로 북중국 정복을 시작하였다. 칭기즈 칸은 여러 차례(1205-1207, 1209) 서하를 공격하여 황폐화 시켰지만, 공성전에 있어서 어려움을 드러내었다. 평지에서는 백전노장들이었던 그의 기병들이 공성전에 있어서는 초보였던 것이다. 1209년에 칭기즈 칸은 오늘날의 영하에 해당하는 중흥을 포위하고 황하의 물줄기를 돌려 함락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몽골인들에게 댐 건설이 너무나 복잡한 일이었고 결국 의도하던 방향으로 강을 범람시키는데 실패하였다. 그러나 장기간의 봉쇄 끝에 마침내 서하는 항복했다. 이안전은 자기 딸을 칭기즈 칸에게 바침으로써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6] 이를 통해 칭기즈 칸은 서하 영토의 지배자가 됨으로써, 중국에서 투르키스탄까지의 교통로를 장악하였고 동시에 몽골의 숙적인 금의 영토를 서쪽에서 포위하였다.
칭기즈 칸은 서하의 침공이 끝나고 난 1211년부터 곧바로 금나라를 공략하기 시작한다. 그는 몽골과 금 사이의 이 분쟁을 일종의 민족 전쟁의 성격으로 만들었다. 그는 여진인들이 말뚝으로 찌르고 나무 당나귀에 못 박아 죽인 옛 몽골의 칸들을 상기하면서 엄숙하게 텡그리의 도움을 빌었다. 동시에 칭기즈칸은 북경의 옛 주인이었으나 금에 의해 대체된 거란인들의 복수를 자처하면서 명분을 얻었다. [7] 칸은 후방에 소수의 병력만을 남겨 놓고, 전군을 동원해서 금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금나라는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강력한 기마병과 대규모의 군대를 유지한 금왕조는 몽골의 침략 바로 전에도 송과 탕구트를 패퇴시킨 바 있었다. 그럼에도 1211년 9월에 몽골은 환아자에서 금나라 대군을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고 중원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관문들을 장악하였다. 이 전쟁은 몽골제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였다. 여러 사서에 기록된 금군의 수는 약 15만 정도로 추정되며, 칭기즈 칸 군대의 수는 10만 이내였다. 이 전투에서 금나라 군대의 핵심이 파괴되었고 몽골은 본격적으로 제국의 팽창을 시작하였다.[8]
그 뒤 옛 거란 왕족 야율 씨의 왕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야율유가가 칭기즈 칸을 위하여 1212년 가을 거란의 옛 영토인 만주 서남부의 요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칭기즈 칸은 야율유가로부터 충성의 맹세를 받자 제베가 지휘하는 구원군을 그에게 보냈다. 1213년 1월 제베는 거짓 후퇴 작전으로 야율유가가 금으로부터 요양을 빼앗고 조상들의 땅에서 몽골을 종주로 인정하며 스스로 ‘요왕’을 칭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금의 국경은 동북쪽 방면에서도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9]
1213년 칭기즈 칸은 군대를 세 개의 군단으로 나누었다. 그의 아들들인 조치와 차가타이, 우구데이가 지휘하는 제 1군단이 산서 중부를 돌파하여 태원과 평양을 빼앗았으나 약탈물을 북으로 가져가기 위하여 다시 철수하였다. 칭기즈칸은 막내아들인 톨루이와 함께 제 2군단을 이끌고 허베이와 산동 평원을 가로질러 내려와 하간을 점령하고 제남을 함락시켰다. 북경과 허베이의 진정과 대명을 비롯한 몇 안 되는 요새화된 도시들만 진격의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칭기즈 칸의 동생인 카사르와 막내 동생인 테무게 옷치긴이 제 3군단을 이끌고 발해만을 따라 영평과 요서의 문턱으로 향했다. 이렇게 나누어진 기병들을 진격시킨 뒤 칭기즈 칸은 최소한의 봉쇄 작전을 시도하기 위해 군대를 재편성하였다. 금 조정에서는 바로 그 직전에 궁정 분란이 일어났다. 금의 지배자 영제는 1213년 장군 홀사호에게 암살당했고, 무능했던 새 군주는 별 수 없이 화의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금나라 조정이 중도에 전선 사령부를 남긴 채 남쪽 개봉을 향해 몽진하는 일이 벌어졌다. 게다가 조정의 행렬이 수도인 중도 교외에 이르렀을 때, 시종하던 ‘주’ 군단이 반란을 일으켰다. 거란계 등 여러 종족의 혼성군이었던 주군은 중도를 공격함과 동시에 칭기즈 칸에게 원군을 청하였다. 당초에 칭기즈 칸의 의도는 금왕조의 섬멸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타격을 주어 경제적 이익을 얻음과 동시에 군사상의 위협을 없애려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사태는 급변했다.결국 칭기즈 칸은 본래 의도와 다르게 중도를 함락하게 되었다. 금왕조는 1214년 황하 이북을 완전히 포기한 채 남쪽으로 이동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고, 이로 인해 하남과 섬서성의 일부만을 차지한 지방정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몽골은 남몽골 초원과 만주, 연운 16주를 얻으며 아시아 동방의 패자가 되었다.[10]
칭기즈 칸은 서쪽으로 관심을 돌리기에 앞서 가장 우수한 지휘관들 가운데 하나인 무칼리에게 ‘태사․국왕’ 칭호를 주어 ‘오투하’라 불린 5개 유력 부족 집단을 비롯한 좌익 24개 천호와 새로 편성한 거란, 주군 등 20개 천호를 배속시켜 중국에서의 작전을 일임하였다. 무칼리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병력을 이끌고, 끈기와 계획성 있게 작전을 벌여 상당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무칼리는 7년간의 끊임없는 전쟁 끝에(1217~1223) 금을 다시 허난 성 일대에 가두는 데 성공 하였다. 1218년에는 산서의 도읍인 태원과 평양을 금으로부터 탈환하였고, 1220년에는 산동의 도읍인 제남을 탈환하였다. 그 해 무칼리의 부장은 황하 북부에 있는 허난 성 창덕을 점령하였다. 무칼리는 1221년에 보안, 부주를 비롯한 섬서 북부의 도시들을 빼앗고, 1222년에는 위수 남쪽 섬서의 옛 도읍 장안을 손에 넣었다. 1223년에 무칼리는 중요한 요새인 하중을 기습 공격하여 빼앗았으나 기진하여 죽고 말았다. 무칼리가 죽은 뒤 하중은 다시 금으로 넘어갔다. 그리하여 전투 양상은 끊임없는 공성전으로 변화되어갔다.[11]

칭기즈 칸 시기의 정벌 - 서요와 호레즘 왕조, 서하 정벌

몽골군 전체에게 주어진 2년 정도의 휴식이 끝나고 난 뒤, 칭기즈 칸은 다음 대상이었던 키라 키타이(=서요)와 호레즘 왕조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다. 서요국의 왕은 1208년 그가 초원을 통합할 때 그에게 패하고 도망쳤던 나이만의 왕자 쿠출룩이었다. 그는 서요국 국왕의 사위가 되었지만 곧 국왕을 배신하고 서요국을 찬탈한다. 그러나 그는 불교 강요 정책으로 인해서 무슬림들에게 총체적인 반발을 사고 있었다. 칭기즈 칸은 그의 숙적이 서요국 군주로 남아 있는 것을 놓아둘 수 없었기 때문에, 1218년에 제베에게 2만의 병력을 주어 공격하게 하였다. 그가 도착했을 때 이미 쿠출룩은 나라를 떠나 카쉬가리아로 피신한 뒤였다. 제베는 그의 군대를 엄격한 기율로 통제 했을 뿐 아니라 모든 약탈을 금하였기 때문에 그의 출현은 환영받았다. 쿠출룩은 파미르 쪽으로 달아났으나 제베의 부하들에게 붙잡혀 사리콜강 부근에서 살해되었다. 동투르키스탄 전지역, 즉 일리, 이식쿨, 추, 탈라스 지역은 이제 몽골 제국에 합병되었다.[12]
이제 몽골은 서쪽으로 호레즘 왕국과 맞닿게 되었다. 1219년 가을, 칭기즈 칸은 동생 테무게 옷치긴에게 몽골 수비를 맡기고 서방 원정을 시작한다. 이 원정의 명분은 1218년에 칭기즈 칸이 파견한 통상 단이 호레즘 왕조의 마을이었던 오트라르에서 학살당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러나 칭기즈 칸은 금왕조 원정에서 귀환한 1216년부터 이미 서방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몽골의 공격은 실로 치밀하게 진행되었다. 미리 정해진 계획에 따라 호레즘 측의 국경선에 있는 도시와 요새를 착실하게 포위하며 함락시키고 있었다.[13] 그러나 호레즘 제국은 도시와 농경지대의 이란계 주민들인 타직인들과 군대를 구성한 투르크인들 사이에서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호레즘 왕조는 셀주크의 한 귀족가문에서 나온 것으로써 씨족적인 배경이 없었고, 호레즘 본토는 투르크멘 봉건체제를 확고히 지원하기에는 너무 작았다. 따라서 군대는 키르기즈 초원의 캉글리의 여러 부족에서 채워졌는데, 그들에게는 충성심이 없었을 뿐더러 얼마든지 주인을 배신할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술탄의 가족들은 뿌리 깊은 증오심으로 갈라져 있었다. 술탄 무함마드의 어머니인 투르칸 카툰은 자신의 손자인 잘랄 웃 딘을 끔찍이 미워하고 반대하였다.[14] 호레즘의 무함마드는 이런 내부 갈등을 두려워하여 군대를 여러 거점에 분산 배치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각 지점에서는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칭기즈 칸은 공작과 정보 수집을 통해 이 점을 간파하였다. 그의 두 아들 차가타이와 우구데이가 지휘하는 몽골군 1개 군단이 오트라르를 포위하고 오랜 공성전 끝에 함락시켰다. 장남 조치가 지휘하는 군단은 시그나히(현재 투르키스탄시의 반대편)와 젠드(오늘날의 페로브스크 부근)를 함락시키면서 시르다리아를 따라 내려갔다. 시르다리아 상류로 파견된 5000명의 몽골군은 바나카트를 함락시키고 호젠트를 포위하였다. 칭기즈 칸 자신은 막내아들 톨루이와 함께 주력군을 이끌고 곧바로 부하라로 진격하여 1220년 2월에 도착하였다. 칭기즈 칸은 부하라에서 사마르칸트를 향하여 진군해 그 도시 앞에서 오트라르를 함락한 두 아들 차가타이와 우구데이와 합류하였다. 결국 사마르칸트는 1220년 3월에 함락되었다. 사마르칸트는 철저하게 약탈당하였고 주민들은 작전수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성 밖으로 끌려 나갔다. 그 중에서 장인들은 몽골리아로 보내졌으며, 종교지도자들은 대부분 구제되었다. 그러나 사마르칸트의 인구는 4분의 1정도로 줄어들었다고 추정된다. 호레즘 본토의 옛 수도 구르간지는 1221년 4월에야 함락되었는데, 칭기즈 칸의 아들인 조치와 차가타이, 우구데이까지 참전했다. 그들은 이 도시를 강물에 잠기게 함으로써 파괴를 완결하였다.[15] 이후 도망간 술탄을 잡기 위해 칭기즈 칸은 그의 가장 우수한 장군인 제베와 수베테이를 보내어 그를 추격하였다. 그들은 추격하는 과정에서 항복하지 않는 수많은 도시들을 파괴하고 남자들을 죽였다. 술탄 무함마드는 카스피 해의 작은 섬에서 1220년 12월경에 지쳐 죽었다. 그러나 제베와 수베테이는 아제르바이잔을 지나 계속해서 코카서스와 남부 러시아를 침공하게 된다.
다음 해 몽골은 호라산과 아프가니스탄을 정복하기 위해 나섰다. 발흐와 메르브, 헤라트, 니샤푸르가 함락당하여 그 과정에서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의 능묘가 파괴되었으며, 아랍 - 페르시아 문명의 영광을 이루던 것들이 단계적으로 파괴되었다. 호라산 지역 정복을 끝낸 이후에 칭기즈 칸은 잠시 사마르칸트에 머무른 후 몽골리아로 돌아갔다. 그가 무함마드를 추적하기 위해 보냈던 제베와 수베테이는 2만 5000에 달하는 기병군단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하였다. 그들은 그루지야 군을 격파하고 킵차크 인들과 충돌하면서 그들을 돕기 위해 온 러시아 군대와 교전하여 승리하게 되었다. 그 뒤 캉글리 투르크인들과 불가르인들을 격파하는 것으로 원정을 마치고 칭기즈 칸과 합류하게 된다.
1226년에 칭기즈 칸은 곧바로 서하 원정길에 나서게 된다. 서하가 서방 정벌 때 종군에 임하지 않은 것이 그 이유였다. 몽골 군대는 서하국의 각 도시를 함락하고 수도를 포위한 뒤에 공성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칭기즈 칸은 1227년 8월 18일 60세의 나이로 명을 달리하게 된다. 이후 서하의 수도 영하는 함락된 뒤에 칭기즈 칸의 유언에 따라 철저히 파괴되었다.[16]

우구데이 칸의 선출과 등극

칭기즈 칸이 죽은 뒤 막내아들이었던 톨루이는 몽골 법에 따라, 새로운 대 칸이 선출될 때까지 국권을 대행했다. 쿠릴타이, 즉 대 칸 선출을 위한 몽골 왕족들의 대 집회가 케룰렌 강가에서 열린 것은 1229년 봄이나 되어서였다. 이 쿠릴타이에서 칭기즈 칸의 유언대로 셋째 아들인 우구데이가 2대 칸에 등극하게 된다. 우구데이 칸은 즉위 후 거란인 야율초재와 케레이트 출신의 네스토리우스교도 친 카이를 신임하였다. 야율초재는 중국식 행정조직을 설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야율초재는 오래 전부터 군사적 필요에 부응하기 위한 역참체계를 따라 곡물 창고를 설치하였다. 무엇보다도 야율초재는 몽골제국에 일종의 고정 예산제도를 마련해 한인들은 이에 따라 가호별로 사정된 세금을 냈고, 몽골인들도 그들의 가축의 10퍼센트를 냈다. 그 결과 약탈대상으로만 간주되던 중국의 정복지가 1230년에는 몽골 관리들과 중국인 지식인 출신의 행정요원을 갖춘 10개 지구로 나뉘게 되었다. 야율초재는 젊은 몽골 주인들의 ‘유교’ 교육을 위하여 북경과 평양에 학교를 열었으며 몽골 행정사무를 위해 막대한 수의 한인들을 채용하였다. 친카이는 일찍이 칭기즈 칸에게도 존경받았고 카르피니의 묘사에도 재상이라고 묘사될 정도의 인물이었다. 펠리오에 의하면 “북중국에서는 어떠한 칙령도 친카이가 위구르 문자로 한 줄 적지 않고는 공포될 수 없었다.”고 한다.[17]

우구데이 칸 시기의 정벌 - 금 정복

우구데이는 무칼리의 죽음 이후 점차 세력을 회복하려고 하는 금나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 작전에는 제국을 대표하는 4명의 유력자가 모두 참가했는데, 제국의 서방을 막고 있던 차가타이는 몽골 본토를 맡았고, 톨루이는 우익군을 이끌고 섬서로부터 크게 우회하여 금왕조의 수도인 개봉 남쪽에서 돌아 들어갔다. 새로운 제왕 우구데이는 중군을 이끌고 산서를 남하하여 적의 정면에 해당하는 황하의 방어선에 육박했고, 제국 동방을 대표하는 옷치긴은 좌익군을 이끌고 허베이를 경유하여 황하 동쪽에 해당하는 산동으로부터 개봉에 이른다. 황하 수비에 사활을 건 금왕조를 북․남․동에서 크게 포위하여 섬멸하려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금왕조도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금왕조는 거의 30만에 가까운 병력을 동관과 개봉사이에 집중배치하고 있었다.[18] 톨루이의 우익군은 송의 영토를 지나 위수 계곡에서 한수 상류를 지나 한중을 점령하고, 사천의 자링 강 계곡을 따라 나아가 보녕지역을 황폐화시켰다. 그러고 나서 군대를 동북으로 돌려 한수의 중류 유역을 가로질러(1232년 1월에 횡단) 남양 근처 남부 하남의 금 영토에 홀연히 나타났다. 동시에 우구데이와 주력 부대는 하중을 취하고 황하를 건너 하남을 북쪽에서 침공하였다. 두 몽골군은 하남의 심장부이자 며칠 전 톨루이가 금을 격파한 균주에서 합류하였다. 북서쪽에서는 마침내 동관을 점령하였다.(1232년 3월)[19]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을 한 것은 옷치긴의 좌익군이었다. 타이항 산맥에서 동쪽의 화북평원을 놀라울 정도로 천천히, 마치 양을 몰듯이 남하했다. 옷치긴 좌익군의 움직임은 황하 북쪽에 살고 있던 주민들의 공포를 불러왔다. 황하 북쪽의 주민들은 황급히 황하를 건너 개봉지역으로 도망쳤다. 도망쳐 온 황하 북쪽 주민들로 개봉성 안팎의 인구는 급격히 팽창하여 적게는 3백만, 많게는 5백만을 넘게 늘어났다. 단번에 사회 불안과 식량 부족이 촉발되었다. 이로써 금군은 적과 싸우기 전에 배고픔이라는 내부의 적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20] 우구데이는 페르시아와 러시아전의 승장이며 최상의 전략가인 수베테이에게 금의 수도인 개봉을 포위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결국 도시는 1233년 5월에 마침내 함락되었다. 야율초재의 설득으로, 도시는 파괴되지 않았다. 개봉에서 떠나 지방에서 저항을 조직하려고 했던 금왕조는 채주에서 1234년 1월에 몽골과 남송의 연합부대에 의해 멸망한다. 그 때부터 몽골인들은 한족의 제국 송과 바로 이웃하게 되었다. 우구데이는 금과의 마지막 전투를 원조한 대가로 송으로 하여금 오늘날의 하남 동남단의 일정 지역을 보유하도록 하였다.[21]

우구데이 칸 시기의 내정

1235년에 우구데이 정권은 몽골 고원의 중앙부에 카라코룸 도성을 건설했다. 카라코룸은 몽골이 처음으로 가진 수도였다. 오르콘 강 상류에 펼쳐진 이 땅은 몽골 고원의 한가운데였다. 카라코룸은 방대한 주민들을 살도록 하기 위한 마을이 아니라, 몽골 정권의 중앙 기능을 한 지점에 집중시킨 도시였다. 이 초원의 메트로폴리스에서 제국 각 지역을 향해 역전 망이 연결되었다. 카라코룸은 제국지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새로운 도읍지 카라코룸의 조영이 진행되고 있던 1235년에, 근교인 야영지에는 몽골 제실 및 여러 장수에 의한 쿠릴타이가 열렸다. 회의 의제의 하나는 금왕조 멸망 뒤의 북중국 지역에 대한 전후 처리 문제였다. 몽골의 장수 중 하나인 시기 쿠투쿠가 수반이 되어 북중국에 대한 호구조사가 실시되었다. 이를 통해 몽골의 좌, 중, 우 3극 구조의 원칙에 준하여 산동 방면에 동방 3왕가, 허베이와 하남 지역에는 우구데이 가와 톨루이 가를 비롯한 중앙 울루스 소속의 왕족과 여러 장수들 그리고 서쪽에 해당하는 산서 방면에는 우익왕가의 조치가와 차가타이가가 각각 영지를 가지게 되었다. 또 하나의 의제는 동서로의 대 원정이었다. 동쪽에서는 우구데이의 서장자인 구육이 한 부대를 이끌고 만주의 두만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여진족을 멸했다. 서쪽에서는 호레즘 왕조의 잘랄 웃 딘이 서북 이란을 중심으로 왕조 부흥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1229년, 부장 초르마간에게 탐마군 3만을 이끌게 하여 서정시켰다. 이 두 가지 동서 작전은 비교적 조촐한 규모였다. 그러나 금왕조를 섬멸한 뒤에 기획된 이번의 동서 대원정은 그 규모를 웃도는 거대한 규모로 이루어졌다.[22]

우구데이 칸 시기의 서방 원정

우선 킵차크 지역을 정복하기 위해 15만 정도의 몽골 대군이 러시아와 유럽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명목상의 지휘자는 아랄 초원과 우랄 지역의 칸이었던 바투였으며, 그의 주위에 칭기즈 칸 가문 모든 지파의 대표가 모이게 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지휘자는 백전노장이었던 60살의 수베테이였다. 무슬림 사료에 따르면 전쟁은 1236년 가을 카마 불가르인들의 영토를 파괴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볼가 강과 카마 강의 합류점 남쪽에 있는 볼가르를 약탈하고 파괴하였다. 1237년 이른 봄 몽골인들은 무슬림들이 킵착이라고 부르던 러시아 초원의 이교도 유목민이자 반야만인인 투르크인들을 공격하였다. 1239년-1240년 겨울 몽골인 들은 뭉케의 지휘 아래 마가스를 점령함으로써 남러시아 초원 정복을 완료하였다.[23] 킵착족 가운데 저항하거나 서방으로 도주, 이동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바투 서정군은 킵착 여러 집단의 대부분을 흡수하여, 일거에 거대한 군단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모두 유목민의 기마군단이었다. 게다가 몽골이라는 통제가 확실한 군사조직에 배속, 편성됨에 따라 제각각이었던 킵착 유목민들은 강력한 대 군단으로 변신했다. 바투 등은 이 새롭게 편성된 대 군단을 이끌고 러시아 지역으로 향했다. 이미 킵착족을 정벌하여 섬멸하는 한편, 볼가 강 중상류 유역의 볼가르 왕국을 석권하고 후환을 없앴다. 이 무렵 러시아는 수많은 여러 공국으로 나뉘어져 분열과 반목이 한창이었다. 따라서 몽골군은 쉽게 러시아의 공국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몽골군은 2개부대로 나뉘어 주력 부대는 헝가리로, 일부 부대는 폴란드로 침공했다. 차가다이가의 바이다르 등이 이끄는 별동대는 크라코우를 거쳐 1241년 4월 9일, 리그니츠 동남쪽 평원에서 실레지아공 헨리 2세가 이끄는 폴란드 군과 독일기사단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바투 휘하의 본대는 그 이틀 뒤인 1241년 4월 11일 사요 강변에서 헝가리 국왕 벨라 4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 전투 뒤에 도나우 강을 둘러싼 부다와 페스트라는 이름의 두 도시를 비롯하여 헝가리는 몽골의 침입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때 1241년 3월, 바투에게 우구데이가 죽었다는 소식과 서방 정벌군의 귀환 명령이 도착했다. 그러나 바투는 곧바로 병사를 철수시키지 않은 채 헝가리 등을 유린하면서 천천히 회군한다. 서유럽은 파멸직전에 그렇게 구해졌던 것이다.[24]

우구데이 칸의 죽음과 구육 칸의 등극

우구데이가 죽으면서 몽골은 혼란 상황에 접어들게 되었다. 우구데이는 죽으면서 자신의 셋째 아들인 쿠추의 아들인 시레문을 상속자로 지명하였다. 그러나 그의 아내였던 투르게네는 자신의 아들이었던 구육을 칸의 위치에 올려놓고 싶어 했다. 섭정을 맡게 된 투르게네는 쿠릴타이가 열리기 전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포섭하기 시작했다. 결국 1246년에 열린 쿠릴타이에서 구육은 칸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애주가이자 느긋한 성격을 가진 부친 우구데이에 비해 구육은 가혹한 평판을 가졌다. 구육은 즉시 권력을 확대하고 제국의 통제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계승권을 우구데이의 가계에 제한함으로써 황실의 다른 가계들을 권력에서 배제하고 자치권을 약화시켰다. 그는 먼저 칸의 지위를 넘보았던 자신의 작은 아버지 테무게 옷치긴의 측근들을 처단한다. 또 그는 부정부패를 억제하고 유명 관료들의 악행을 공개하고 처벌하였다. 구육은 차가타이의 아들인 이수 뭉케를 차가타이 울루스의 후계자로 지지함으로써 차가타이 지역의 충성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구육이 1248년에 갑자기 사망하면서 제국은 다시 칸의 지위를 놓고 투쟁하기 시작하였다.[25]

구육 칸의 죽음과 뭉케 칸의 등극. 내부 권력 갈등

구육의 이른 죽음으로 제국은 다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볼가 강 유역에 머물고 있던 바투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서진하여 중앙아시아에서 쿠릴타이를 개최한다. 그러나 뭉케를 지지한 것은 조치와 뭉케 집안의 대표자들뿐이었다. 우구데이와 차가타이 가문의 대표들은 쿠릴타이에 불참하거나 문제의 결말이 나기 전에 쿠릴타이를 떠났다. 바투는 이 같은 반대를 무시하고 동생 베르케에게 케룰렌의 쿠데에 아랄에서 재소집 된 쿠릴타이의 책임을 맡겼다. 자신들이 밀려난 것에 대해 항의하는 우구데이가 사람들과 그 지지자인 차가타이 울루스의 수령 이수 뭉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베르케는 뭉케를 대 칸으로 선언하였다. 뭉케는 권력 싸움에서 밀려난 사촌들을 가혹하게 처벌하였다. 차가타이 울루스의 우두머리였던 이수 뭉케를 사형에 처하고 차가타이의 다른 손자 부리는 바투에게 넘겨 사형시켰다.

뭉케 칸 시기의 정벌 - 서역과 남송 원정

권력 싸움이 진정되고 난 뒤에 뭉케는 친동생 쿠빌라이에게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 경략 작전을 발표하여 중국 공략을 맡긴다. 이와 병행해서 화북, 중앙아시아, 이란의 3대 속령 재무와 징세기구의 담당자도 임명했다. 인구조사와 세수의 재조사도 시행되었다. 여러 면에 걸쳐서 중앙 통제를 확립하고자 했던 것이 그의 뜻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친동생 훌레구에게 이란의 땅으로부터 서쪽 모든 땅의 경략을 위임한다는 발표를 했다. 이미 부임한 쿠빌라이와 함께 몽골제국은 다시 동․서 양면 작전을 행하려 했던 것이다.[26] 남송 공략을 시행하기 위해서 그는 운남 지역과 대리에 대한 원정을 개시했다. 이 작전에는 최대목표인 남송을 측면 내지 배후로부터 공격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쿠빌라이는 남송 여러 도시에 대해 성급한 정면공격보다는 장기전에 대한 구상을 선명히 했다. 그러나 몽케는 이에 불만을 느끼며 단기 결전을 바랬다. 결국 몽케는 자신에 의한 남송 친정을 발표했다. 그는 몽골전통의 3군단 방식을 따라 좌익 군단에 타가차르, 자신은 중앙군, 서로군은 우량카다이 군을 배치했다. 그런데 좌익군이 1주일 만에 철수해 버림에 따라, 뭉케의 작전은 시작부터 크게 어긋났다. 몽케는 스스로 전선에 나섰다. 그 때 사천의 몽케 군을 덮친 전염병이 그를 쓰러뜨리고 말았다.[27]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의 권력 갈등

뭉케에게는 세 아우가 남았는데 쿠빌라이, 훌레구, 아릭 부케였다. 이 중에서 훌레구는 페르시아를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가 남은 것이다. 막내인 아릭 부케는 몽골 본토의 총독이며 수도 카라코룸의 지배자였다. 그는 몽골리아의 지배자로서 쿠릴타이를 그 땅에서 소집하여, 자신의 칸 선출을 확실하게 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그를 앞질렀다. 그는 자신의 본부가 있던 상도에서 자신의 일파의 추대를 받아 칸으로 선언되었다. 칭기즈 칸 가문의 법에 따르면 서두른 이 선출은 무효였다. 전통적으로 쿠릴타이는 몽골리아에서 적절하게 미리 소집된 칭기즈 칸 일족인 네 울루스의 대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려야 했다. 결국 아릭 부케도 카라코룸에서 칸의 칭호를 취함에 따라 둘의 대결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쿠빌라이는 중국의 장군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뒤에 북진을 시작했다. 쿠빌라이는 1260년 말 옹긴 강까지 북진해 겨울을 나고, 아릭 부케는 예니세이 강 상류로 후퇴하였다. 그러자 쿠빌라이는 전쟁이 끝난 것으로 여기는 실수를 저질러, 카라코룸에는 평범한 수비대만 남기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결국 1261년 말 아릭 부케가 돌아와 수비대를 몰아내고 고비 변두리에서 두 번의 전투가 있었다. 그러나 아릭 부케는 차가타이 울루스를 지배하고 있던 알루구가 쿠빌라이의 편으로 돌아서면서 마침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28]

쿠빌라이 칸 시기의 정벌 - 남송 정복

가족 간의 경쟁을 종결지은 쿠빌라이는 송 제국에 대한 자신의 시도를 재개할 수 있었다. 그는 유능한 지휘관인 바얀과 아주를 거느리고 위구르인 아릭 카야의 지원을 받는 행운을 누렸다. 1268년 아주는 양양과 번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슬람 기술자와 공성기계를 통해 1273년에 그들은 번성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고, 곧 이어 양양의 수비자인 여문환이 양양을 바쳤다. 그 뒤 바얀과 아주는 양자강 하류로 내려가 동부 호북, 안휘 그리고 강소의 거점들을 굴복시켰다. 다음에 절강을 침공하여 상주를 취하고, 송의 수도인 항주를 1276년 1월에 점령하였다. 아릭 카야는 호남의 중요한 도시인 장사와 광서의 계림을 함락하였다. 중국의 마지막 저항군들은 장세걸의 지도아래 그들의 함대를 끌고 해외로 피난하였다. 1279년 4월 3일 이 함대는 광주 남서쪽 애산도 근처에서 몽골 함대의 공격을 받아 파괴되고 흩어졌다. 이로써 마침내 몽골은 중국 전역을 장악하게 되었다.[29]

훌레구의 중동 정벌

뭉케 칸 때 서쪽으로 향했던 훌레구의 군대는 몽골 천호에서 10호당 2명의 비율로 공출한 소년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는 여러 가지 목적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데, 그것은 암살자 교단이라 불리는 이스마일파의 타도, 두 번째로는 바그다드의 아바스 조 칼리프 정권의 토벌이었다. 몽골 서방정벌군 가운데 훌레구 자신이 이끄는 본대의 행군 속도는 이상할 정도로 느렸다. 몽골 고원에서 출발한지 2년 정도를 허비하여 중앙아시아를 유람이라도 하듯이 천천히 나아갔다. 그러면서 병량도 준비하고, 병사들도 합류하여 차츰차츰 대군단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1255년 가을, 케쉬에서 이란 총독 아르군의 마중을 받은 훌레구는 첫 번째 공격 목표를 이스마일파와 산성들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때 생각지 못한 사태가 발생했다. 1255년 12월, 이스마일파의 교주가 측근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보다 훨씬 온건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훌레구는 스스로의 본영을 후방에 물려둔 채 휘하의 부대를 이란 동부에서부터 교섭을 되풀이 하면서 조금씩 포위망을 적의 중추인 알라무트 지방으로 좁혀갔다. 훌레구는 양보안을 얻을 때마다 더욱 새로운 양보와 명확한 태도를 요구했다. 이스마일 교단의 결속은 점차 무너지고 있었다. 1256년 가을을 맞자 훌레구는 전투태세에 돌입할 것을 명령하고 교주가 머물고 있던 마이문디즈를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내게 된다. 이로써 그는 첫 번째 목표인 이스마일 파를 타도하는데 성공하였다. 두 번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는 빠른 진격을 통해 바그다드를 포위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교섭과 교란 책을 사용해 적들을 혼란스럽게 하여 칼리프에게 압력을 가해 항복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아바스 조는 500년에 걸친 역사를 마감하였다.[30]

주석

  1.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김호동 2010년 87-94p 참조
  2. 몽골비사(유원수 역주, 사계절, 2004) 202절, 197-198쪽
  3.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김호동 2010년 103-104p
  4. 위태로운 변경, 토마스 바필드 p 401-403
  5.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김호동 2010년 110p
  6. 元史, krause역, cingis han, p 28
  7.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르네 그루세 지음, 김호동 옮김 p 335
  8. 위태로운 변경, 토마스 바필드 p 408
  9.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르네 그루세 지음, 김호동 옮김 p 335
  10. 몽골 세계제국, 스기야마 마사야키 p 45
  11.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르네 그루세 지음, 김호동 옮김 p 341
  12. 몽골 세계제국, 스기야마 마사야키 p 46
  13. 몽골 세계제국, 스기야마 마사야키 p 48
  14.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르네 그루세 지음, 김호동 옮김 p 347
  15.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르네 그루세 지음, 김호동 옮김 p 349-350
  16.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르네 그루세 지음, 김호동 옮김 p 351-360
  17.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르네 그루세 지음, 김호동 옮김 p 371-373
  18. 몽골 세계제국, 스기야마 마사야키 p 57
  19.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르네 그루세 지음, 김호동 옮김 p 374
  20. 몽골 세계제국, 스기야마 마사야키 p 58
  21.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르네 그루세 지음, 김호동 옮김 p 375
  22. 몽골 세계제국, 스기야마 마사야키 p 63~72
  23.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르네 그루세 지음, 김호동 옮김 p 383
  24. 몽골 세계제국, 스기야마 마사야키 p 75~80
  25. 위태로운 변경, 토마스 바필드 p 440~441
  26. 몽골 세계제국, 스기야마 마사야키 p 91~92
  27. 몽골 세계제국, 스기야마 마사야키 p 122~126
  28.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르네 그루세 지음, 김호동 옮김 p 412~414
  29.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르네 그루세 지음, 김호동 옮김 p 415~416
  30. 몽골 세계제국, 스기야마 마사야키 p 145~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