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니 탐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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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토진종본원사파(淨土眞宗本願寺派) 제22대 법주(法主)인 오타니 고즈이가 파견한 세 차례의 중앙아시아 탐험대는 중앙아시아, 특히 신장과 인도 지역을 중심으로 티베트와 서남 중국 지역 및 미얀마까지 탐험했다.

제1차 탐험

오타니 고즈이는 영국 유학 중에 영국 및 네덜란드의 유학생들과 탐험대를 조직하여 1902년 8월 런던을 출발하여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바쿠, 카스피해를 지나 서투르키스탄으로 들어섰다. 여기서 파미르 고원을 넘어 신장 카슈가르에 도착한 후 일행은 인도 탐험대와 신장 탐험대로 나뉘어 활동하였다. 신장 탐험대는 오아시스로 남도와 북도에서 허톈이나 키질 석굴 등의 유적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한편 인도 탐험대는 북인도 조사에 집중해 간다라 불적과 아소카 석주 비문 등을 조사하였다. 두 지역의 조사를 마친 탐험대는 1904년 2월 말 서안(西安)에 도착해 제1차 탐험을 마무리하였다.


제2차 탐험

러일전쟁의 발발로 탐험은 일시 중단되었다가 1906년과 1907년 사이에 고즈이 부부의 중국여행에 제1차 탐험에 나섰던 일부 수행원들이 합류해 러일전쟁의 발발로 탐험은 일시 중단되었다가 1906년과 1907년 사이에 고즈이 부부의 중국여행에 제1차 탐험에 나섰던 일부 수행원들이 합류해 (唐)대의 여러 왕릉에 관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1908년 4월 고즈이는 다치바나와 왕묘 조사에 참여할 한 대원을 파견했는데, 이것이 제2차 탐험의 시작이다.

그들은 베이징과 장자커우(張家口)를 지나 몽골에 이르러 돌궐과 위구르의 비문들을 조사하고 나서 서진(西進), 홉트를 거쳐 신장에 들어갔다. 거기서 우루무치와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 등을 조사하였다. 누란(樓蘭)에서 이백문서(李柏文書)를 얻은 다음, 각각 오아시스로 남도와 북도로 서진해 카슈가르에서 합류하였다. 이때 고즈이 부부는 영국으로 갔고, 탐험에 함께한 대원들은 수집품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제3차 탐험

오타니 탐험대는 영국에서 헤딘 및 스타인과 만나고 나서 1910년 8월 영국을 떠나 제3차 탐험에 나섰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차로 옴스크를 거쳐 증기기관차와 마차를 번갈아 타고 신장 우루무치에 들렀다. 그들은 투루판을 거쳐 미란(米蘭)에 도착해 벽화를 수집하였다.

한편 일본에서도 탐험대 대원 하나가 출발해 중국 상하이와 란저우(蘭州)를 거쳐 둔황에 이르러 영국에서 출발한 탐험대 대원과 합류해 막고굴을 조사하였다. 두 사람은 하미와 투루판을 답사하고 나서 한 명은 북행해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한반도를 경유해 1912년 6월에 귀국하였다. 다른 한 명은 오아시스 남 · 북로의 여러 유적을 두루 조사해 방대한 수집품을 가지고 1914년 7월 귀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