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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1년

4월, 손권은 공안에서 악성으로 천도하고 이름을 무창으로 고쳤으며, 무창, 하치, 심양, 양신, 사이의 여섯 현으로 무창군을 만들었다. 8월, 무창성을 수축하며 손권이 말하길,

“생존할 때는 멸망을 잊지 말며, 안정되었을 때 반드시 위험을 생각해야 된다는 것은 고대의 유익한 교훈이오. 옛날 준불의는 한나라의 명신인데, 태평스러운 세상에서도 칼을 몸에서 떨어지게 하지 않았소. 군자는 무비에 느슨할 수 없소. 하물며 현재 우리들의 몸은 변방에 있고, 시랑이 같은 악인들과 접하고 있는데, 경솔하게 갑작스런 사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소? 최근에 듣기로는, 장수들이 출입할 때 각자 겸손과 절약을 숭상하여 시종과 병사를 따르게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자기를 아끼려고 생각한 행위가 아닌 것이오. 자신을 보전하고 명성을 남겨 군주와 부모를 안심시키는 것이 어찌 위험에 처하고 치욕을 받는 것이겠소? 응당 깊이 경계하고 그 큰 생명을 힘껏 숭상해야만 하며, 이것이 나의 생각과 부합하는 것이오.”

이후 손권은 위문제에게 사자를 보내 번국이 되기를 요청하여 오왕에 봉하여졌으며, 포로로 잡고 있던 우금 등을 반환하였다.

  • 222년

유비가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공격해오자,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으로 삼아 막아내도록 하였다. 유비가 오반으로 하여금 5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전초전을 벌이도록 하자 오나라의 장수들이 공격하려 하였지만, 육손은 유비의 계략이 숨어있음을 간파하고 상대해주지 않았다. 육손이 유비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한 장수들이 반발하자, 육손은 군령의 지엄함을 들어 "유비는 천하에 이름이 알여졌으며 조조도 그를 두려워하고 있다. 오늘 그가 우리의 경내에 있는데, 이것은 강대한 적수인 것이다. 여러분들은 모두 국가의 은혜를 받았으니, 마땅히 서로 화목해야 하며 함께 이 적을 무찔러서 위에서 받은 은혜를 보답해야만 하는데, 서로 순종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우리들이 해야만 되는 일이 아니다.나는 비록 서생이지만, 주상의 명령을 받았다. 국가에서 여러분들을 굽혀 나의 명령을 받도록 한 까닭은 나에게 칭찬할 만한 약간의 장점이 있어 치욕을 참아내고 중임을 담당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각자 맡은 일을 해야지, 또 어찌 말을 하겠는가! 군령(軍令)은 영원한 것이니, 범할 수 없다." 라고 말하니, 뭇 장수들이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하였다. 육손은 유비의 군대가 지쳐있을 때를 노려 진영에 불을 지르고 길게 늘어진 유비의 진영을 일거에 격파하였다. 손권은 육손의 말에 따라, 위나라가 침략할 것을 두려워하여 유비를 더 이상 뒤쫓지 않고 화해를 청하였고, 유선이 제위를 세습하면서 촉과 다시 결맹을 맺는다.

  • 228년

4월, 위나라가 오 침공을 계획하여 사마의는 강릉, 조휴는 심양으로 향하자, 오의 파양태수 주방은 거짓 항복을 통해 조휴를 유인하려는 계략을 세운다. 주방은 조휴가 의심할 것을 우려하여 7번 편지를 보내어 그를 설득하니, 조휴는 마침내 주방을 믿고 보병과 기병 10만을 이끌고 환성으로 입성하였다. 9월, 주방은 주환, 전종 등과 함께 온 육손을 도와 조휴의 군대를 대파하였다.

  • 229넌

220년 조비가, 221년 유비가 제위에 오른 것에 반해 손권은 이때까지 제위에 오르지 않고 있었다. 4월, 하구와 무창에서 길조가 있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손권은 7일에 황제에 즉위했다. 부친 파로장군 손견을 무열황제에, 어머니 오씨를 무열무황후에, 형 손책을 장사환촹에 추증했다. 자신이 제위에 오르는 것을 다음과 같은 말로 정당화한다. “한조가 향국한지 24세이고 보낸 해가 434년인데 기의 움직이는 수가 끝나고 복록의 운행이 다하여 천하가 진멸하고 영토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불충한 신하 조비가 마침내 신기를 침탈하였고 조비의 아들인 조예는 세를 이어 간특한 짓을 벌여 명분에 넘치는 행동을 하고 제도를 어지럽혔습니다. 손권은 동남에서 태어나 시기가 움직이는 때를 당하여 하늘을 받들어 군대를 이끌고 뜻이 세상을 태평하게 하는데 있으며 견책과 형벌을 행하는 것이 모두 백성을 위함입니다. 군신, 장상, 주 와군, 모든 성 그리고 자기의 일을 가진 백성들은 모두 하늘의 뜻이 한조에서 떠나고 한씨가 이미 하늘에 제사 지내기를 끊었으므로 황제의 자리가 비었고 제사를 지냄에 있어 주인이 없다고 여깁니다. 상서로운 징조가 앞뒤로 잇달아 발생하고 천명이 저에게 이르렀으니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손권은 천명을 두려워하여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으니 삼가 훌륭한 날을 택하여 단에 올라 요제(땔감을 쌓아두고 그 위에 불을 질러 하늘에 지내는 제사의 일종)를 드리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자 합니다. 오직 그대 신명께서 이를 흠향하시고 오나라를 도와 영원히 천록을 마치도록 해주십시오.“ 촉의 유선이 제위를 축하하는 사자로 진진을 보내자, 손권은 그와 맹약을 나누고 협의하여 서주, 예주, 유주, 청주를 오나라에 귀속시키고, 병주, 양주, 연주는 촉에 귀속시키며, 함곡관을 사주의 경계로 삼기로 하였다. 9월, 손권은 건업으로 천도하였으며 육손으로 하여금 무창에서 태자 손등을 보필하도록 하였다.

  • 230년

손권은 위완과 제갈직에게 군사 1만을 주며 바다 건너에 있는 이주(대만)와 단주(종자도)를 찾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단주는 너무 먼 곳에 있었으므로, 위온 등은 결국 단주에는 이르지 못하고 이주에 들러 수천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 231년

결국 위온와 제갈직은 공로가 없다는 이유로 하옥되어 참수되었다.

  • 232년

3월에 주하와 배잠을 파견하여 뱃길을 통해 요동으로 파견하였으나, 위의 전예는 9월에 이들을 맞아 반격하여 주하의 목을 벤다. 10월, 요동의 태수인 공손연이 숙서와 손중을 파견하여 손권에게 번국이 되기를 청하며 모피와 준마를 바치니, 손권은 기꺼워하며 공손연에게 작위를 수여한다.

  • 233년

3월, 손권은 숙서와 손종을 요동으로 귀국시키며, 장미, 허안, 하달 등을 사자로 임명하여 병사 1만 명을 인솔하여 진귀한 보물를 가져가 공손연에게 주도록 하였다. 고옹 등의 대신들은 공손연의 충섬심은 의심스러운 것인데, 대우는 지나치게 후하다며 반대하였지만, 손권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공손연은 과연 장미 등을 참수하여 위나라에 보내고, 모든 물자를 빼앗았다. 이에 분노한 손권이 “짐의 나이가 60으로, 세상사의 어려움과 쉬움을, 맛보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근래에 쥐새끼에게 마음대로 다루어지니, 노기가 산과 같이 오르게 하는구나. 친히 쥐새끼의 머리를 끊어서 바다에 던지지 않고는, 다시 만국에 임할 낯이 없다. 설령 엎어지고 자빠지더라도, 한스럽지 않으리라.”라며 공손연을 토벌하려 하였으나, 설종 등이 간절하게 말렸기 때문에 그만두었다. 손권은 합비신성으로 진격하며 전종에게 육안을 공격하도록 하였으나, 모두 이기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 234년

정월, 손권은 “전쟁이 장기간 그치지 않아 백성들은 부역으로 고통을 당하며, 세금이 간혹 거두어지지도 아니하니, 각종 세금을 느슨하게 하고 다시는 재촉하여 징수하지 말라.” 는 조서를 내렸다. 5월, 손권은 육손과 제갈근을 강하, 면구에 주둔케 하고, 손소와 장승은 광릉, 회양으로 진군하게 한 뒤 몸소 대군을 이끌고 합비 신성을 포위했고, 위의 만총이 이를 방어하였다. 손권은 위가 촉의 침공 때문에 합비신성을 방어할 여력이 없으리라 판단하였지만, 7월에 위 명제가 직접 수군을 이끌고 동쪽 정벌에 나서니, 손권은 군대를 물려 퇴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