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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년, 옹친왕(雍親王)에 봉해졌고, 1722년 11월, 황위를 이었다. 다음 해 연호를 옹정으로 고쳤다. 즉위한 뒤 문무 관료들에게 훈칙을 내려 폐단을 열거하면서 철저하게 정리할 것을 요구했다. 이전에 그와 권력 투쟁을 벌였던 형제들을 진압하여 구금하거나 폐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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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년, 옹친왕(雍親王)에 봉해졌고, 1722년 11월, 황위를 있고 다음 해 연호를 옹정으로 고쳤다. 즉위한 뒤 문무 관료들에게 훈칙을 내려 폐단을 열거하면서 철저하게 정리할 것을 요구했다. 이전에 그와 권력 투쟁을 벌였던 형제들을 진압하여 구금하거나 폐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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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역사서를 읽은 뒤 아침식사를 하고 오후까지 정치 고문들과 함께 회의를 진행했다. 자정이 넘어서까지 서류를 읽고 조언을 할 때도 있었다.
 
옹정제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역사서를 읽은 뒤 아침식사를 하고 오후까지 정치 고문들과 함께 회의를 진행했다. 자정이 넘어서까지 서류를 읽고 조언을 할 때도 있었다.

2020년 12월 24일 (목) 14:09 기준 최신판

옹정제

옹정제(康熙帝)

출생 1678년 12월 13일
사망 1735월 8월 22일
활동 기간 1722~1735
전임자 강희제
후임자 건륭제

개요

청나라의 5대 황제. 강희제의 넷째 아들. 묘호는 세종(世宗)이고, 시호는 헌제(憲帝)이며 연호는 옹정(雍正)이다. 1735년 8월 병으로 죽었다.

즉위

임종하기 전 강희제가 보군통령 융과다만 입회한 자리에서 후계자를 선포했다. 원명원에서 융과다는 강희제의 유해를 싣고 북경성으로 들어가 문을 전부 닫아 걸어 다른 황자가 들어오지 못하게 한 상태에서 즉위를 진행했고 옹정제는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1709년, 옹친왕(雍親王)에 봉해졌고, 1722년 11월, 황위를 있고 다음 해 연호를 옹정으로 고쳤다. 즉위한 뒤 문무 관료들에게 훈칙을 내려 폐단을 열거하면서 철저하게 정리할 것을 요구했다. 이전에 그와 권력 투쟁을 벌였던 형제들을 진압하여 구금하거나 폐출했다.

업무방식

옹정제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역사서를 읽은 뒤 아침식사를 하고 오후까지 정치 고문들과 함께 회의를 진행했다. 자정이 넘어서까지 서류를 읽고 조언을 할 때도 있었다. 옹정제가 유일하게 즐긴 오락은 불교 예식에 헌신적으로 참여하는 것과 북경 서북부의 황실 정원에서 휴식을 즐기는 것이었다.

행정 제도

주접

옹정제는 중앙집권적 전제 군주제를 강화하고자 했다. 강희제주접을 발전시켜 지방에 나가있는 고위관료들과 직접 친전서를 주고받았다. 회답할 때는 붉은 글씨로 주비유지라고 써서 했다. 후에 이는 엮어서 『옹정주비유지(雍正硃批諭旨)』로 편찬되었다.

군기처

최고 정무 기관인 군기처를 신설했다. 만, 한, 동수의 군기대신으로 구성된 군기처에서 모든 문서를 처리했다. 군기대신은 보통 약 7명으로 만인과 한인, 간혹 몽골인도 임명되었다. 정해진 임기가 없고 모든 것을 비밀로 했다. 여기에 속한 32명의 속료인 군기장경은 전도유망한 젊은이들로 구성되었다. 군기권의 결재권은 황제가 독점했고 황제의 명령은 군기처를 통해 직접 지방의 독무에 전해졌다. 가장 중요한 문서는 만주어로 쓰였다.

조세 제도

지방 관리의 봉급이 적어 부정이 일어닜다. 특히 강남지역에서 지주들이 관아의 서리와 공모해 세액을 줄이고 그 부담을 농민들에게 전가시켰다. 옹정제는 지방관의 봉급에 양렴은이라는 수당을 추가 지급해 생계를 도와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막고자 했다. 인정수를 기준으로 은납시키던 정은을 토지를 단위로 한 조세에 통합시켰다. 조세와 요역 등 잡다한 부가세들을 모두 전부인 지정으로 통합해 단일세로 만든 것이다. 이로 인해 이갑제가 유지될 수 없어 농민들의 현실적인 생활 기반은 촌락이 농민지배의 기본 단위가 되었다.

정치 체제

천민들을 일정한 기준을 세워 양민으로 편입시켰다. 장기적으로 천시 받던 계층들이 사회에서 더 안정적인 지위를 갖게 되었다. 소수민족 역시 여러 행정적 편의를 제공하고 생활을 향상시켜 내지화했다. 또 운남(雲南)과 귀주(貴州), 광서(廣西)의 산간에 사는 토착민인 묘족(苗族)이 토사(土司) 밑에서 반독립의 상태에 있는 것을 철폐했다. 즉 정부에서 파견하는 관리인 유관(流官)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는 ‘개토귀류(改土歸流)’의 정책을 펴서 내지화(內地化)를 꾀했다.

또 학교에 『성유광훈(聖諭廣訓)』이라는 민중교화를 위한 교육칙어를 배포하여 시험 때 베끼도록 했다. 강희제에 이어 박학홍사과를 시행해 인재들을 발굴, 등용하고 배만반청 사상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면서도 몇 차례의 문자옥을 통해 청 왕조 통치의 건위에 저촉되거나 해를 끼치는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했다.

증정이라는 젊은 학자는 여류량의 책을 보고 옹정제가 황위 찬탈자라는 생각에 악종기 장군에게 반란을 일으킬 것을 종용했다. 여류량의 책은 중화주의를 내세워 만주족과 다른 야만족에 대한 조소로 가득 차있었다. 악종기는 옹정제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증정은 젊기 때문에 속기 쉬웠다는 이유로 훈계 정도의 가벼운 처벌을 내렸으나 유류량의 시신을 부관참시하고 가족들을 모두 노비로 만드거나 유배시켰다.

손수 대의각미록이라는 책을 지어 자신이 강희제가 선택한 후계자가 맞다는 사실을 세세하게 증명하고 청의 중국 통치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했다. 중국은 고래로 다민족 국가이고 청조도 한민족 외에 만주인과 몽골인등을 포함하는 중화제국의 체현이라고 주장했다.

태자건밀법

옹정제는 후계자 지명으로 인한 혼란을 피하기 위해 살아생전 황태자를 공표하지 않고 이름을 휼갑에 넣어 봉한 후 쳰칭궁의 ‘정명관대’ 편액 뒤에 보관했다. 황제가 서거한 후 꺼내 공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이것이‘태자건밀법’이었다.

대외정책

대외적으로는 청해와 티베트의 동란을 평정하고 지배체제를 확립했다. 대다수 성에서는 탄정입무 정책을 시행했다. 서북 방면에 대해서는 나복장단진의 반란을 진압하고 회부준갈이 단책령의 소요를 진정시켰다. 1724년 기독교를 이단으로 금지시켰다. 대외적으로는 서양 선교사의 선교 활동을 금지시켰고, 북경에 거주하는 사람 이외의 서양인들은 모두 오문에 머물도록 했다. 1727년, 카흐타 조약으로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이 확정되었다.

참고문헌

조관희, 『조관희 교수의 중국사 강의』, 궁리, 2011.

존 킹 페어뱅크, 멀 골드만, 『신중국사』, 까치글방, 2005.

임종욱, 『중국역대 인명사전』, 이회문화사,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