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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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정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12월 22일 (화) 21:41 판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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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왕국유

왕국유(王國維, 1877~1927)는 청말 민국초에 활동한 학자이다. 절강(浙江)성 해녕(海寧) 출신으로, 자는 정안(靜安). 호는 예당(禮堂), 백우(伯隅)이며 만년에는 관당(觀堂), 영관(永觀) 등으로 불리었다. 문학과 역사학, 고고학 등 다양한 학문을 연구하여 각 영역에서 커다란 공적을 세웠다. 문학 방면에서는 서구사상과 중국전통사상을 비교분석하고 이를 융합하는 시도를 하였다. 역사학, 고고학에서는 갑골문, 금문(金文)을 연구하여 고고학적 업적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사학과 연결시켜 갑골문 등의 기록에 근거하여 고대사의 일부를 복원하는 작업을 하였다. 일생 동안 《송원희곡고(宋元戱曲考)》, 《은주제도론(殷周制度論)》 등 60여 종의 저서를 남겼다.

생애

출생과 유년시절

1877년(光緖 3년) 음력 10월 29일(양력 12월 3일) 절강성 해녕 쌍인항(雙仁港)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국정(國禎)이었고, 나중에 국유(國維)로 고쳤다. 부친 왕내예(王乃譽)는 장군 왕품(王稟)[1]의 32대 손으로, 생계를 위해 객지를 떠돌며 상인 활동을 하였다. 어머니 릉씨(凌氏)는 왕국유가 네 살 되던 해에 병사하여 어릴 때부터 작은 할머니와 고모와 자랐다.

열한 살에 부친이 조부의 상을 치르러 귀향하자 부친은 왕국유가 서당에서 돌아오면 직접 교육을 맡았다. 주로 과거시험에 필요한 팔고문(八股文)과 시첩시를(試帖詩) 연습하는 것이었다. 왕내예는 서화(書畫)와 전각(篆刻) 등을 수집하였고, 시와 사, 고문에 능하였다. 잠시 강소(江蘇) 표양현(漂陽縣)의 막료(幕僚)를 지낸 적이 있을 정도로 학문과 예술에 조예가 깊었는데, 이는 왕국유에게 소양을 기르는 데 영향을 주었다.

1892년 과거의 동시(童試)에 합격한 이후 왕국유는 해녕에서 ‘네 명의 재주꾼’ 중의 으뜸으로 꼽혔다. 그러나 과거에 흥미가 없고 《사기(史記)》·《한서(漢書)》 등 역사서와 고증학에 관심이 있던 그는 1893년 항주에서 향시(鄕試)를 다 치르지 않고 돌아왔다.

나진옥과의 만남과 학문 융합

낙방한 이후 진매숙(陳枚肅)의 집에서 훈장을 하다가 상해로 가 1898년에 언론사 《시무보(時務報)》에 들어갔다. 서기일을 하면서 나진옥(羅振玉)이 번역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동문학사(東文學社)에서 일어와 영어, 수리학 등 자연과학을 배웠다. 이 시기 일본인 교사 후지타 도요하찌(藤田豊八)와 타오카 사요지(田岡佐代治)에 의해 서양 학문에 대한 기반을 쌓고 독일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1년 나진옥의 지원 아래 일본 동경물리학교(東京物理學校)에서 유학하였으나 각기병이 재발해 5, 6개월 만에 귀국하였다. 1903년에 나진옥의 추천으로 강소(江蘇)에 있는 통주사범(通州師範)에서 심리학, 논리학 등을 가르치고, 1904년에는 강소사범학교로 옮겨 윤리학, 사회학 등을 가르쳤다. 이 시기에 헵딩(Höffding)의 《심리학 개론》을 번역하였고 《정안시고(靜安詩稿)》 1권, <홍루몽평론(紅樓夢評論)> 등을 집필하였다.

1907년 봄 학부(學部, 교육부)에서 일하는 나진옥의 추천으로 학부총무사행주(學部總務司行走)가 되어, 그 후에 교육부에서 도서관(東師圖書館)을 만들면서 도서관의 편역 작업도 하게 된다. 편집자, 번역자, 행정가로 겸직하면서 관심 분야인 희곡을 연구하여 1913년 초 《송원희곡고(宋元戱曲考)》를 출판한다.

국학으로의 전향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자 왕국유는 나진옥과 일본으로 망명하여 교토(東都) 다나카촌(田中村)에 정착하였다.[2] 그는 나진옥을 도와 매일 교토대학으로 가서 그의 장서를 정리하여 생활을 유지하였다. 학자적 의무로 국학을 연구하기를 바란 나진옥의 권유와 왕국유의 학문적 관심, 고고학적 유물이 다수 발견되던 당시 상황에서 그는 중국 속문학에서 국학으로 학문을 전향한다. 귀국 전까지 중국 고대의 사료(史料), 기물(器物), 문자, 음운 등의 고증 작업에 종사하였다.

1916년에 상해로 돌아와 유태인 하둔(Silas A. Hardoon)의 제안으로 창성명지대학(倉聖明智大學)에서 학술 간행물인 《학술잡지》의 편집자로 일하였다. 1917년에는 《은복사중소견선공선왕고(殷卜辭中所見先公先王考)》과 《은주제도론(殷周制度論)》을 저술했다.

1923년 청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의 부름을 받고 남서방행주(南書房行走)[3]로 임명되었다.[4]

1925년 청화대학(清華大學) 국학연구원 역사학과 교수로 초빙되었다.[5] 그곳에서 서북변경지리와 요(遼), 금(金), 원(元)대 역사를 연구하였다. 왕국유는 양계초(梁啓超), 진인각(陳寅恪)과 함께 가장 명성이 높아 ‘삼거두(三巨頭)’로 불리었다.

죽음

청화원에 위치한 기념비

개인적인 사건[6]과 청 왕가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비관하던 중 1927년 6월 2일 베이징에 위치한 황실정원 이화원(颐和園) 곤명호(昆明湖)에 투신하여 자살했다. 그가 입은 옷 속에서 삼남 정명(貞明) 앞으로 쓰인 유서가 발견되었다.

오십 평생에 다만 죽음 하나가 모자라는구나, 이 세상의 변화를 겪게 되었으니, 옳음으로 다시는 욕되지 않으리라. 내가 죽은 뒤에는 마땅히 대강대강 염을 해서, 즉시 청화 묘지에 장사를 지내어라. 너희들은 남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잠시 성내에 거주해도 좋다. 너희 형 또한 급히 상을 치르러 달려올 필요는 없다. 도로가 불통되었고 또한 일찍이 집 밖을 나가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적은 진인각, 오복(吳宓)[7] 두 선생에게 처리해달라고 부탁해라. 집안사람들은 알아서 수습하여 반드시 남쪽으로 돌아가지 못해서는 안 된다. 내가 비록 너희들에게 남겨줄 재산이 없지만 그러나 만약에 근신하고 근검하면 또한 반드시 굶어죽는 데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6월 초이틀에. 아비 씀.

그의 자살 이유에 대해서는 청나라를 위한 순국, 비관주의적 인생관 등 지금까지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다.

갑골학 성과

은의 초기 조상

나진옥이 1914-1915년에 발견한 정복문(貞卜文)에서 상의 선조 왕해(王亥)에 대한 연구는 그의 방대한 문헌자료 지식을 조합한 예이다. 왕해의 정체에 대한 의문은 《사기》에서 언급한 선공(先公)의 이름에 왕해가 보이지 않는 것에 있다. 관련 문헌의 고찰에 근거하여 그는 왕해(갑골문과 《산해경(山海經)》), 왕자해(王子亥, 古文經 《竹書紀年》), 후자해(候子亥, 今文經 《竹書紀年》), 진(振)과 해(垓), 핵(核), 해(胲), 왕영(王永), 해(該)는 모두 동일한 은의 조상으로 문헌자려에서 첫 번째 목자로 묘사된다고 한다. 무정(武丁)·조경(祖庚) 시기와 같은 갑골문의 초기 단계에서 ‘ 왕 갑골문.jpg ’에 관하여 왕국유는 ‘왕()’으로 보았다. 손이양(孫詒讓)은 ‘입()’자로 잘못 해석하였고, 나진옥은 ‘왕(王)’ 혹은 ‘입(立)’으로 혼동하였다. 왕해(王亥), 두 자를 인명으로 인식함으로써 문헌의 착오를 정리하였다.

은왕의 계보

사마천은 기원전 1세기의 인물로 《사기·은본기(殷本紀)》의 은대(殷代)는 기원전 20세기에서 15세기에 해당한다. 왕국유는 안양 소둔현(小屯縣)에서 출토된 갑골문자로부터 은왕조의 세계(世系)를 찾아내었다. 갑골문자는 상왕조가 선조를 제사지낼 때의 점사를 기록한 것으로 믿을 수 있는 원시자료이다. 왕국유는 순서에 따라 상토(相土), 계(季), 왕해(王亥), 왕항(王恒), 상갑(上甲), 보정(報丁), 보병(報丙), 보을(報乙), 주임(主壬), 주계(主癸), 대을(大乙) 등에 대해 고증하였다.

왕국유는 《사기·은본기》에 나타나는 은의 인물의 이름에 관해서는 주로 나진옥의 관점을 따랐다. 나진옥은 사마천이 왕조 건설자의 이름을 대을(大乙) 보다는 천을(天乙)이라고 쓰는 실수를 범하였다고 하였는데, 왕국유는 천()과 대()가 유사하여 사마천이 혼동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왕조 건설자의 정확한 이름이 대을이라는 것은 갑골문에 나타난 다른 상왕들의 이름도 대(大)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증명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왕조 건설자 ‘탕()’의 본래 형태는 당()이며, 당(唐)은 갑골문에서 대을의 이름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이 고찰은 《사기》가 신뢰성 있는 역사이며, 근거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또한, 그는 《사기·은본기》에 기재된 은 왕조의 배열순서상의 착오를 바로 잡았다. 점사에 따르면 보정(報丁)은 당연히 보을(報乙), 보병(報丙)의 뒤에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성과를 통해 고대사 연구는 문건상의 자료와 유물을 상호 참고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갑골의 시대구분과 연결

은은 자주 거주지를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왕국유는 갑골문자가 실제로 출토된 소둔(小鈍)은 반경(盤庚)이라는 임금이 거기로 수도를 옮긴이래 제신(帝辛)에 이르러 멸망할 때까지 거의 270년에 걸쳐 도읍이었다는 것을 고증하였다. 그는 친족의 직함에 근거하여 탁본의 시기구분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아버지에 대해 언급한 것이라면 이것은 그의 아들 세대에 행해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왕조가계도에 따라 탁본의 시기를 확인하는 것에는 자체적인 한계가 있었다. 1927년 은허에서 큰 거북이 네 판이 발굴되어 동작빈(董作賓)이 이에 대해 시대구분을 하였다. 동작빈은 열 가지를 시대 구분의 기준으로 삼았는데, 그 중 점쟁이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이를 ‘점쟁이 시대 구분’이라고 한다.

왕국유는 《은허서계후편》과 《진수당 소장 은허문자》에 보이는 다음의 점사를 각각 하나의 갑골로 보고 연결시켰다.

乙未,고문자1.jpg 고문자2.jpg 上甲十, 報乙三, 報丙三, 報丁三, 示壬三, 示癸三, 大丁三, 大甲十...

이것은 위의 갑골이 시계(示癸)까지 이르는 육시 점사(六示卜辭)인데, 여기에서 은왕이 선조를 제사지낼 때 세대 계보의 배열이 정제되어 있고, 희생물 역시 일정한 예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후에 이 두 조각은 유체지(劉體智)가 소장한 한 조각과 연결되어 위의 갑골은 조을(祖乙)까지 이르는 십시(十示) 점사로 판명되었다.

은주제도론

왕국유는 《은주제도론(殷周制度論)》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중국의 정치와 문화의 변혁은 은에서 주로 넘어가는 시기보다 더 심각한 때가 없었다. 주의 제도가 은의 것과 크게 다른 것은 첫째, 아들을 세우고 적장자를 세우는 제도로 이로 말미암아 종법(宗法)과 상복(喪服) 제도가 생겨났고, 봉건자제(封建子弟)의 제도, 천자를 임금으로, 제후를 신하로 삼는 제도가 생겨났다. 둘째, 묘수(廟數)의 제도, 셋째, 동성불혼(同姓不婚)의 제도이다. 이 몇 가지는 모두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이며, 그 요지는 상하에 도덕을 주입시켜 천자, 제후 경, 대부, 선비, 서민에 이르기까지 도덕적 체계를 이루게 하는 데 있다. 주공(周公)이 제도를 만든 본의는 실로 여기에 있다.”

이 글은 후대 학자들에 의해 착오임이 밝혀졌으나 학문방법상 고문자 연구와 고대사 연구를 서로 결합시켜 전통적 사학방법과는 과정이 다르다. 그는 갑골금문연구를 문자범위에 제한하지 않고 종합적으로 운용하여 고대사회제도 연구로 연결하였다.

저서

《관당집림(觀堂集林)》

《고사신증(古史新證)》

《송원희곡고(宋元戱曲考)》

《은복사중소견선공선왕고(殷卜辭中所見先公先王考)》

《은주제도론(殷周制度論)》

《위석경고(魏石經考)》

《인간사화(人間詞話)》

《정안시고(靜安詩稿)》

<홍루몽평론(紅樓夢評論)>

여담

유년시절부터 몸이 쇠약했다고 전해진다. 각기병으로 일본에서 중도 귀국할 정도로 눈병, 치통, 폐결핵 등 늘 병을 앍고 있었는데, 이는 우울하고 비관적인 성격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철학개론과 철학사 같은 책을 읽어 가면서 칸트라는 인물이 서양 철학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흥미와 달리 칸트의 글은 난해하여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었는데 매우 흥미로워 하였다. 쇼펜하우어가 쓴 <칸트철학에 대한 비판>을 칸트철학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로 잡아 다시 칸트 공부를 하였다.[8]

나진옥의 인정을 받아 만년에 이르기까지 왕국유의 삶과 학문은 모두에서 그에게 특별한 도움을 받았으며, 둘은 사돈관계이기도 하였다. 고힐강(顧頡剛)은 이에 대하여 “그는 가난한 서생으로 나진옥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바깥일을 하나도 묻지 않고 독서에 전심할 수 있었겠는가? 그의 학문이 어떻게 오늘날 이처럼 훌륭할 수 있었겠는가? 나진옥의 도움을 받아 학문의 성공을 얻었으니 그가 또한 어떻게 나진옥과 달리 제 갈 길을 가서 서로 모른 채 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하였다.[9]

참고문헌

단행본

김경일, 『갑골문이야기』, 바다출판사, 1999.

류창교, 『왕국유 평전』, 영남대학교출판부, 2005.

아잉철자, 김언종·박재양 역, 『한자의 역사』, 학민사, 1999.

오호곤·반유, 『중국갑골학사』, 동문선, 2002.

  1. 왕품(王稟)은 북송 말년에 태원(太原)을 사수한 부총관(副總管)이다. 금나라 침입 당시 금나라 군대와 시가전을 하다가 수십 군데의 상처를 입고 태원의 사당에 들어가 태종의 어용을 업고 그의 아들 순(筍)과 함께 분수(汾水)에 뛰어들어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듬해 1127년, 휘종의 아들인 고종이 즉위하여 금과의 전쟁 끝내 항주(臨安)에 정착하면서 왕품의 공덕을 기려 그에게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려주고 안화군왕(安化郡王)에 봉하였다. 왕품의 후손들은 해녕 땅에서 부와 관직을 누리며 살게 되었다.
  2. 나진옥이 혁명을 두려워하여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 데는 강소사범학교에 있을 때 대학벌(大學閥) 장건(張謇)에 의해 쫓겨났기 때문이다. 후에 장건이 학부의 전국교육회장을 맡았을 때도 나진옥과 의견이 어긋났다. 이 때 입헌파의 대두목인 장건은 원세개(袁世凱)와 긴밀하게 결탁하고 있었다. 동시에 나진옥은 혁명당원의 미움을 산 일이 적지 않았다.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그때부터 정권이 혁명당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반드시 원세개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고 보니 양자 모두 그에게는 불리하여 멀리 도망가지 않을 수 없었다.
  3. 남서방은 황제가 독서하던 곳으로 남재(南齋)라고도 하며, 고궁(故宮) 건청문(乾淸門) 서남쪽에 있다. 이곳은 동시에 황제의 개인비서실의 성격을 가진다. ‘행주’는 당직근무를 한다는 뜻이다. 남서방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모두 진사나 한림(翰林) 출신이며 학문으로 저명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직무는 학문강론, 서족 조사, 시낭송, 그림그리기, 골동품 감상 등으로 청반(淸班), 즉 소위 문학(文學) 시종지신(侍從之臣)에 속하였다.
  4. 왕국유를 추천한 사람은 몽고인(蒙古人) 승윤(升允)이다. 왕국유는 1919년 후반에 나진옥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가 남서방행주가 된 데에는 <이화원사(颐和圓詞)>, <촉도난(蜀道難)> 등을 지어 청조를 동정하고 극찬한 것이 유로들에게 알려지면서라고 추정된다.
  5. 일본 영사관으로 피신해 있던 황제의 권유도 있었다.
  6. 1926년 장남 잠명(潛明)이 상해에서 중병에 걸려 스물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외에도 잠명의 장례 문제로 며느리(나진옥의 딸)와의 갈등이 생겼다.
  7. 당시 청화대학 국학연구원 주임
  8. 《海寧王靜安先生遺書4》, p.1786.
  9. 顧頡剛,<禱王靜安先生>, 《文學週報,王靜安先生追悼專號》 127년 5권 合訂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