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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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토론 | 기여)님의 2017년 6월 24일 (토) 17:12 판 (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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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타환첩목이(妥懽貼睦爾)는 토곤 테무르(Togun-Temǖr)의 음역으로 “솥의 철”이란 뜻의 몽골어이다.

사후 명나라에서는 순제(順帝), 북원에서는 혜종(惠宗)이라고 추증되었는데 이는 서로간의 입장차이 때문이다. 순제(順帝)라는 명칭은 토곤 테무르 칸이 천명에 순응해 대도에서 퇴거했다는 의미로 주원장[1]이 지어준 호다. 주원장은 선천학(先天學)이라는 철학 사상을 신봉하였다. 이 철학사상은 역사에서 숙명론과 순환론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주원장은 토곤 테무르가 대도(大都)로부터 도망친 것을 황제로서의 천명이 다한 것으로 인식하여 그의 시호를 순제라 했던 것이다.

어린시절(유배생활)

토곤 테무르는 명종(明宗) 코살라(Khusala, 1329.1~1329.8)의 아들로 1320년에 태어났다. 그는 계승 투쟁의 여파로 11살 때인 1330년 7월 고려의 서해안인 대청도(大靑島)에 유배되어 1년 5개월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런데 지순(至順) 2년(1331) 12월에 대원조정은 대청도에 있던 토곤테무르를 소환하였다. 대원 조정에서는 명종(明宗)이 토곤테무르는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평소에 말했다는 점을 언급하며 토곤테무르를 광서의 정강(현재 광서성 길림시)로 이주하였던 것이다. 즉, 토곤테무르는 명종의 아들이 아니므로 몽골 황실의 인물들을 포함하여 고귀한 신분에 해당되는 자만이 귀양을 가는 대청도에 머무를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즉위과정

문종이 사망하면서 그 뒤를 이을 황제를 결정하는 문제로 정국이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엘테무르는 문종의 아들 엘테구스(El-Tegus)를 지명했는데, 엘테구스는 문종의 지시로 엘테무르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엘테무르는 자신과 친밀한 엘테구스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종의 황후는 독살된 명종의 아들 토곤테무르를 보위에 올리라는 문종의 유언을 언급하면서 엘테무르를 압박했다. 엘테무르는 문종이 지순 원년(1330)에 토곤테무르를 황제에 등극시키려고 하는 음모가 있었다고 하면서 이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숙청하고 토곤테무르를 고려로 쫓아낸 적이 있었다. 그 이후에 고려와 요양(遼陽)에서 토곤테무르를 받들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엘테무르는 재빨리 토곤테무르를 정강로(靜江路 ; 현재 광서성 계림시)로 보내버렸다. 이렇게 엘테무르는 자신이 독살한 명종의 장남 토곤테무르의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문종의 황후가 토곤테무르를 지원하면서 엘테무르는 커다란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갈등은 7살된 명종의 차남인 이린친발(Irincinbal)을 황제(즉, 寧宗)로 즉위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듯 했으나, 영종이 즉위한 지 53일 만에 사망하면서 정국은 다시 안개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엘테무르는 다시 엘테구스를 즉위시키려고 했으나, 영종의 즉위 이후 황태후가 된 문종 황후는 엘테구스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고 광서에 있던 토곤테무르를 소환하여 즉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아들이 즉위하는 것마저 미루고 문종의 유언을 따른다는 이유로 토곤 테무르의 즉위를 밀어붙인 것은 결국에는 엘테무르를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결국 토곤테무르는 대도(大都)로 소환되었고 도중에 엘테무르가 토곤테무르를 만나 현재의 정국(政局)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지만 토곤테무르는 엘테무르와의 대화에 응하지 않았다. 엘테무르는 토곤테무르의 태도를 보고 난 이후 그를 즉위시키면 자신이 위험해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엘테무르가 살아있는 동안 토곤테무르는 즉위할 수 없었고, 엘테무르가 사망하고 난 이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황제가 될 수 있었다. 그가 바로 순제 토곤테무르 칸이다.

즉위이후

제국 궁정에서 지지기반이 미약했던 토곤 테무르로서는 당시 실세였던 문종(文宗) 톡 테무르의 정후인 보타시리에게 차기 계승권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토곤 테무르의 즉위 초에는 보타시리가 실권을 장악하고 바얀과 결탁해 국정 운영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1339년(지원 5)에 아유시리다라(Ayusiridara)의 출생을 계기로, 토곤 테무르는 바얀과 보타시리의 결탁에 대한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결국 토곤 테무르는 즉위 8년만인 1340년(지원 6)에 보타시리의 아들 엘 토구스를 제거하고 명실상부하게 친정을 시간했다. 그의 재위기간 동안 기황후를 중심으로 한 황태자파가 끊임없이 양위를 요청했으나, 토곤 테무르는 끝까지 권좌를 포기하지 않을 정도로 권력에 대한 의지가 강한 인물이었다. 오히려 볼로르 테무르와 쿠케 테무르의 개인적 원한을 이용해, 난마와 같이 얽힌 복잡한 정치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기도 했다. 흔히들 토곤 테무르의 방탕한 생활이 민심을 도탄에 빠트리고 실정을 불러 왔다고 하나, 이것은 망국의 군주에 대한 잔혹한 평과와 함께 중국 중심적 세계관이 자아낸 허구로써, 사실과 다른 면이 많다. 원의 쇠퇴는 토곤 테무르의 개인적 성향의 문제는 아니었고, 제위 계승 분쟁에 따른 권력 쟁탈이라는 유목제국의 한계성과 더불어 황하의 범람에 따른 민심 이완이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다.


탐라궁전耽羅宮殿

토곤 테무르 칸은 탐라에 궁전을 짓고 옮겨 살기를 희망했다. 이를 위해 금과 비단을 탐라로 보내 1367년(至正 27) 2월 이전부터 본격적으로 궁전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학계에서는 피난 궁전을 조성한 이유가 원이 기울어짐에 따라 토곤테무르가 탐라로 피난하고자 했다고 보고 있다. 피난 목적이 홍건적(紅巾賊)[2]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한 중원으로 멀리 떨어진 탐라로 피신함으로서 세력을 축적한 후에 재차 중원으로 입성하기 위한 포석을 다지려 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위의 분석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탐라궁전을 조성하려 했던 1367년 2월 이전에 토곤 테무르 카안 스스로 홍건적이나 농민반란세력을 위협적이라고 판단해야 가능해질 수 있다. 그런데 이 시기 토곤 테무르 카안은 피난을 준비해야 할 정도로 이들 세력을 위협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1368년 1월에 주원장(朱元璋)이 북벌의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해 공격해 왔을 때조차도 안일하게 대처했다. 그들이 통주(通州)에 도착했음을 알고 나서야 급하게 북상을 결정할 정도로 당시의 정세 변동에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탐라궁전 조성의 목적을 ‘피난의 목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당시 토곤 테무르에게 발생한 가장 큰 사건은 기황후(奇皇后)[3]로 대표되는 황태자 권력의 2차례에 걸친 내선(內禪)시도와 군벌 간의 대립으로 그가 실권을 상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대도(大都)에서 잇달아 전염병이 발병하자, 황태자 아유시라다라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자신은 탐라에 궁전을 조성하고 옮겨 살기를 희망했다고 볼 수 있다.

토곤 테무르 카안은 많은 통치지역 가운데서 왜 탐라에 궁전을 만들려고 한 것일까? 앞에서 살핀 것처럼 궁전 조성의 목적이 원말의 궁정투쟁에 대한 염증과 계속되는 역병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도피하려 했던 이유에서 볼 때 탐라가 가장 적합한 장소가 될 수 있다. 기황후의 요청대로 대칸의 자리를 아유시리다라에게 양위한다면, 토곤 테무르가 거처할 수 있는 장소로는 초원이 있는 몽골리아, 요동일대 그리고 고려 등이 있다. 그런데 쿠빌라이와 아릭부케의 대칸 쟁탈전 이후 몽골 스텝에서는 쿠빌라이계의 집권을 반대해 1276년에 시리기와 카이두 등의 반란이 연속해서 일어났다. 또한 토곤 테무르 재위기인 1360년에는 우구데이의 후선 아르히 테무르가 토곤 테무르 집권에 반대해 군사를 일으켜 서북 제왕들의 호응을 얻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토곤 테무르가 몽골리아로 돌아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또한 고려는 기황후의 출신지역으로 향후 아유시리다라 정권이 창출되었을 때를 생각한다면 고려에 궁전을 조성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반해 탐라는 이미 그 당시 몽골화(化)되어 하나의 작은 몽골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14세기 탐라는 국영목장이자 황실목장으로 대원제국 내에서 위상이 높아졌고 많은 몽골의 관원, 주둔군과 목호들이 이주해 왔다. 이때 몽골인들이 개경을 거치지 않고 집접 대도에서 배를 타고 탐라로 오면서 탐라는 빠르게 대도의 물질문명과 교류하게 되었다. 여기에 몽골인들과 탐라인들 사이에 혼인이 빈번해지면서 탐라는 빠르게 몽골화가 진행되었다. 즉 토곤테무르가 자신의 거처를 탐라로 옮겨도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할 만큼 안정적인 형태로 변모해 있었다.

참고문헌

박원길, 「몽골역사 : 몽골과 바다」, 『몽골학 26』, 한국몽골학회, 2009, p.133.
『元史』 권 47, 「順帝本紀」 10, 至正 30년 5월 癸卯條.
權容徹, 「大元제국 말기 權臣 바얀의 정치적 行蹟」, 『동양사학연구 120』, 동양사학회, 2012 p.239-241.
윤은숙, 「고려의 북원(北元)칭호 사용과 동아시아 인식 – 고려의 양면 외교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연구 12』, 중앙아시아학회, 2010, p.192.
윤은숙, 「원말(元末) 토곤 테무르 카안의 탐라궁전」, 『탐라문화 53』,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2016, p.195-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