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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15일 (일) 15:27 판

개요

카안 울루스.png
이 문서에서 다루는 것은 모든 몽골 울루스의 역사가 아닌, 중국과 몽골 초원을 중심으로 하는 칸 울루스, 대원의 역사를 중심으로 한다. 칸 울루스와 대원 성립 이전의 역사는 예케 몽골 울루스 - 대몽골국 문서를 참조할 것

역사

쿠빌라이 칸의 시기(원세조, 1260~1294)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의 권력 갈등

뭉케가 사천 조어산에서 갑자기 죽으면서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권력 다툼이 일어났다. 뭉케는 세 아우가 있었는데 바로 쿠빌라이, 훌레구, 아릭 부케였다. 이 중에서 훌레구는 페르시아를 담당하고 있었으므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 사이의 경합이 벌어졌다. 막내인 아릭 부케는 몽골 본토의 총독이며 수도 카라코룸의 지배자였다. 그는 몽골리아의 지배자로서 쿠릴타이를 그 땅에서 소집하여, 자신의 칸 선출을 확실하게 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그를 앞질렀다. 쿠빌라이는 자신의 본부가 있던 상도에서 자신의 일파의 추대를 받아 칸으로 선언되었다. 칭기즈 칸 가문의 법에 따르면 서두른 이 선출은 무효였다. 전통적으로 쿠릴타이는 몽골리아에서 적절하게 미리 소집된 칭기즈 칸 일족인 네 울루스의 대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려야 했다. 결국 아릭 부케도 카라코룸에서 칸의 칭호를 취함에 따라 둘의 대결은 시간 문제가 되었다. 쿠빌라이는 중국의 장군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뒤에 북진을 시작했다. 쿠빌라이는 1260년 말 옹긴 강까지 북진해 겨울을 나고, 아릭 부케는 예니세이 강 상류로 후퇴하였다. 그러자 쿠빌라이는 전쟁이 끝난 것으로 여기는 실수를 저질러, 카라코룸에는 평범한 수비대만 남기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에 1261년 말 아릭 부케가 돌아와 수비대를 몰아내면서 고비 변두리에서 두 번의 전투가 있었다. 그러나 아릭 부케는 차가타이 울루스를 지배하고 있던 알구가 쿠빌라이의 편으로 돌아서면서 마침내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러운 이런 배신은 쿠빌라이가 훌레구와 알구에게 정치적 자유를 약속해주고, 그들이 장악하고 있던 제국의 지배권을 분할해줬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쿠빌라이 칸 시기의 정벌 - 남송 정복

가족 간의 경쟁을 종결지은 쿠빌라이는 송 제국에 대한 자신의 시도를 재개할 수 있었다. 그는 유능한 지휘관인 바얀과 아주를 거느리고 위구르인 아릭 카야의 지원을 받는 행운을 누렸다. 1268년 아주는 양양과 번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슬람 기술자와 공성기계를 통해 1273년에 그들은 번성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고, 곧 이어 양양의 수비자인 여문환이 양양을 바쳤다. 그 뒤 바얀과 아주는 양자강 하류로 내려가 동부 호북, 안휘 그리고 강소의 거점들을 굴복시켰다. 다음에 절강을 침공하여 상주를 취하고, 송의 수도인 항주를 1276년 1월에 점령하였다. 아릭 카야는 호남의 중요한 도시인 장사와 광서의 계림을 함락하였다. 중국의 마지막 저항군들은 장세걸의 지도아래 그들의 함대를 끌고 해외로 피난하였다. 1279년 4월 3일 이 함대는 광주 남서쪽 애산도 근처에서 몽골 함대의 공격을 받아 파괴되고 흩어졌다. 이로써 마침내 몽골은 중국 전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쿠빌라이 칸과 카이두의 대결 – 계속되는 내분

쿠빌라이의 집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쿠빌라이가 속한 톨루이 가문의 탄압과 숙청에 반발한 우구데이⋅차가다이 가문이 반발하면서 초원 지대의 내전은 격화되었다. 우구데이 가문의 지도자였던 카이두는 탈라스에서 독자적으로 쿠릴타이를 열어 초원지대의 지배권을 칸의 동의 없이 분할했으며, 마침내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것은 쿠빌라이를 배제한 채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쿠빌라이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카이두는 쿠빌라이의 계속된 복속 요구를 거절함으로써 내전은 격화되었다. 이 내전은 쿠빌라이의 생전에는 진압되지 않았고, 쿠빌라이의 다음 칸이었던 테무르의 시대에 카이두가 사망하면서 진압되었다.

쿠빌라이 시대와 칸 울루스의 성립

쿠빌라이가 칸의 위치에 올라가면서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알구와 훌레구에게 정치적 자유를 약속했기 때문에, 쿠빌라이의 직접적인 통치가 미치는 지역은 몽골 초원과 북중국, 티베트와 하서 지방 정도였다. 당시 몽골인들은 쿠빌라이와 그의 후계자들이 통치하던 이 지역을 ‘칸 울루스’라고 불렀다. 쿠빌라이는 제국의 수도를 카라코룸에서 상도로 옮겼으며, 폐허가 된 여진의 수도인 중도 부근에 새 도성을 축조했는데, 이것이 지금의 베이징 지역에 위치한 대도였다. 칸은 상도와 대도를 왕복하며 여름과 겨울을 보냈다. 이렇게 계절에 따라 수도를 옮기는 것은 유목민 계열 국가들의 특징으로, 후에 등장하는 청 역시 여름과 겨울을 다른 수도에서 보냈다.
칸 울루스는 중서성과 그 파견 기관인 10여 개의 행중서성이 관할하는 지역들로 나뉘었다. 만주와 몽골 초원에는 요양행성과 영북행성이, 고려에는 정동행성이 설치되었다. 중서성과 행성 아래에는 로⋅부⋅주⋅현을 두었고 일부 지역에는 행정과 군사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선위사를 두었다. 또한 군사를 담당하는 추밀원과 감찰을 담당하는 어사대가 있었고, 지방에는 행추밀원과 행어사대가 설치되었다.
쿠빌라이는 수적으로 절대 열세인 몽골인들로 넓은 지역을 통치해야 했기 때문에 다양한 제도를 도입했다. 그는 몽골인을 다루가치로 삼고 한인과 색목인들을 하위 직책에 배치해 영토를 통치하려 했다. 한인과 남인은 고위직과 중요 직책에서 배제되었으며, 차별 대우를 받았다.

티무르 울제이투 칸의 시기(원성종, 1294~1307)

티무르 칸의 즉위

쿠빌라이 칸이 타계하였을 때, 티무르 칸과 그의 형 카말라 사이에 보좌를 둘러싸고 언쟁과 이견이 있었다. 쿠케진 카툰은 쿠빌라이 칸의 말을 빌려 현명한 판결을 내주었다. “쿠빌라이 칸께서는 ‘누구라도 칭기스 칸의 성훈을 더 잘 알고 있는 자를 보좌에 앉혀라’라고 말씀하였다. 너희는 각자 그분의 성훈을 말해 보아라, 그래서 여기에 있는 모든 대인들이 누가 더 잘 알고 있는지 알도록 하여라!” 카말라보다는 티무르 칸이 말을 하는 데 훨씬 더 능숙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카말라는 서툰 말솜씨로 조금 더듬거렸고, 티무르 카안은 좋은 성훈들을 깨끗한 발음으로 유창하게 말했다. 이를 본 모두가 티무르 칸이 보좌에 오르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인정하였다. 따라서 티무르 칸은 그들의 관례와 관습에 맞게 왕위에 올랐다.

왕국의 정비 -왕자들과 아미르들을 파견

티무르 칸이 왕위에 오르고, 왕자들과 아미르들을 각 지방으로 파견하고, 각 디반의 장관과 재상들을 임명했다. 카말라는 카라코룸 지역으로 파견되어 카라코룸부터 키르키즈, 부르칸 칼둔에 이르는 모든 지역을 관할하였다. 아난다 왕자는 탕쿠트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쿠케추쿠르구즈 쿠레겐카이두두아가 있는 변경으로 파견되었다.

탕쿠트 지방과 이슬람교

아난다 왕자가 관할하는 탕쿠트 지방의 주민들은 대부분 이슬람교이다. 아난다 왕자는 어렸을 때, 투르키스탄 출신의 무슬림 미흐타르 하산 아크타치라는 사람에게 보내져 양육되었다. 따라서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이슬람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코란을 배우고 예배를 드리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며 자랐다. 아난다 왕자가 탕쿠트 왕국의 군주의 자리에 오른 후, 그 지역의 이슬람 강화시켰다. 이 때, 가잔 칸이 이슬람교로 개종한 것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탕쿠트 지방의 이슬람교가 단시간에 퍼져나갔다. 그의 휘하에 15만 명 정도의 몽골군은 거의 무슬림이 되었다. 그 중 사르탁이라는 아미르가 무슬림이 되기를 거부하고 티무르 칸에게 가서 “아난다가 항상 모스크에서 코란을 읽거나 기도하며 시간을 보내고, 몽골 아이들을 할례 시키고, 군인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킨다”고 불평하였다. 이 말을 들은 티무르 칸은 사람을 보내 아난다에게 예배를 멈추고, 무슬림을 멀리하며, 부처를 모시도록 하였다. 아난다는 “부처는 사람이 만든 것인데 어떻게 그를 경배하겠는가? 나는 나와 칸을 창조하신 그분을 경배할 뿐이다.”라며 그의 신앙을 확고하게 고집하였다. 이에 티무르 칸은 분노하여 아난다를 감금하였다. 그러나 쿠케진 카툰이 조언하기를, “당신은 왕국을 물려받은지 2~3년도 채 되지 않아 아직 불안정한 반면, 아난다는 수많은 군대를 가지고 있다. 그 군대와 탕쿠트 지역의 주민들은 모두 무슬림으로 그들의 신앙과 종교를 지키고 싶어한다. 탕쿠트 지방은 반도들의 지방과 가깝기 때문에 그 지역의 사람들이 변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티무르 칸은 그의 충고에 동의하며 아난다를 탕쿠트 왕국으로 돌려보냈다.

카이두 및 두아의 군대와 충돌

보르지긴 토곤테무르 칸의 시기(원혜종, 1333~1370)

토곤테부르의 즉위

원나라에서는 영종이 살해당한 이후 13년 동안 황제가 7번 바뀌는 등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고, 1333년 토곤 테무르가 즉위했다. 토곤 테무르가 즉위할 당시의 나이는 14세로 정권을 장악하기에는 너무나 어린 나이였다. 즉위하기 전부터 토곤 테무르가 왕이 되는 것을 반기지 않던 엘 테무르로 인해 엘 테무르가 병사한 뒤에야 황제로 즉위를 할 수 있었고, 즉위한 뒤에도 엘 테무르의 아들인 타라카이와 탕기쉬가 실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토곤 테무르는 메르키트 바얀을 기용했다. 1335년 엘 테무르 일족이 탕기쉬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바얀에게 진압당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실권은 바얀에게 넘어가게 된다. 바얀은 과거제도로 인해 한족의 권력이 커진다고 생각하여 과거제도를 폐지하였고, 이는 한족들에게 몽골족에 의한 지배에 대한 반발심을 키우는 계기를 가져다주었다. 바얀의 세력이 점점 커져가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토곤 테무르는 1340년 바얀의 조카인 토구다를 끌어들여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쿠데타의 결과로 바얀은 실각하여 유배를 가는 도중 사망하게 되고, 실권은 토구다와 바얀의 동생인 마자르타이 부자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처럼 이 시기 원나라 조정에서는 내정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원의 문화적 발전

숙부인 바얀을 쫓아내고 집권한 타쿠타는 중원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은 문화주의자였다. 그는 송ㆍ요ㆍ금(宋遼金) 세 나라의 역사 편찬을 주관하여 <요금송삼사>를 완성하고, 바얀이 폐지한 과거를 재개하는 등의 개혁도 실시하는 등 문화적으로 크게 발전하고 정국 또한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그러나 타쿠타의 세력이 강화되어가는 것을 두려워한 토콘 테무르는 1347년 마자르타이와 타쿠타 부자를 유배 보내게 된다.

반란의 시작

왕실 내부에서는 이러한 분열이 일어나고 외부에서는 전염병과 함께 자연재해, 황하의 범람 등 천재지변이 동시에 일어났다. 천재지변으로 몽골인들은 점차로 남하하고, 원나라의 차별정책으로 예전 남송인들의 불만도 점점 커져가고, 상업 중심의 발달로 피폐해져가는 농민들의 삶 등을 이유로 각 지방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커져갔지만 토곤 테무르를 비롯한 권력자들은 내부 권력 다툼을 하기에 바빠 이러한 백성들의 어려움에 조치를 취해주지 못했다. 그러던 중 1348년 소금상인 출신인 방국진이 바다길로 운반되는 물품을 약탈하는 반란을 일으켜 바다길과 대운하를 통해 물자를 받던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에서 식량이나 물자를 조달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각 지방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홍건적의 출현과 타쿠타의 죽음

마자르타이가 1349년에 유배지에서 죽자, 토곤 테무르는 타쿠타를 복귀시켰다. 복귀한 타쿠타는 대운하 정비 사업을 추진하여 홍수로 인한 피해를 어느 정도 막았지만, 개수공사를 지도하던 백련교 지도자 가문의 홍건적이 봉기했다. 그리고 타쿠타는 대운하 정비 사업이 끝난 후 일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반란세력에 가담하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이러한 홍건적들의 반란을 홍건적의 난이라 부른다. 그러나 1352년 타쿠타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다니며 반란을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한산동이 죽게된다. 하지만 그 뒤를 유복통이 이어 받아, 한산동의 아들을 황제로 삼고 송의 후계자라 주장했다. 홍건적의 수가 점점 불어나자 타쿠타는 대규모 토벌군을 이끌고 홍건적에게 대항했다. 하지만 1354년 타쿠타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는 것을 견제한 토곤 테무르는 타쿠타를 해임하고 유배지에서 살해했다. 이로 인해 칸의 권력은 커졌지만 원나라의 자랑이자, 대정복사업이 가능했던 이유인 강대한 군사력이 약해지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조정 내에서 기황후의 아들인 아유시리다라와 그 반대 세력이 권력다툼을 벌이게 되고 이는 반원세력인 주원장에게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명나라 건국과 북원

이렇게 혼란스러운 틈을 타 주원장은 기타 반란세력들을 물리치고 화남을 통일한 뒤, 1368년 난징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명나라를 세웠다. 주원장은 명나라 건국 이후 북벌을 추진하여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까지 위협하게 되었고, 토곤 테무르는 이에 대도를 버리고 북쪽으로 피신했다. 이 시기부터 원 왕조를 북원이라 부른다.

사회‧문화

쿠빌라이 칸과 원대 국제적 문화 교류

사회적 배경

쿠빌라이 칸은 금나라와 남송을 몰아내고 중원 대륙에 원나라를 세웠다. 연이어 그는 베트남‧미얀마 등 동남아시아와 대만‧오키나와‧고려 등을 장악했다. 13세기 초에 건설된 몽골 제국은 이러한 쿠빌라이칸 시대에 접어들며, 건국 이후 70여년 만에 유럽과 인도 일부를 제외한 유라시아 대륙 거의 대부분을 석권하였다. 중국 역대 수많은 왕조가 수도로 택했던 중원지방을 차지하며 원대로 들어서자, 몽골 제국은 광대한 토지‧방대한 인구‧풍부한 물산으로 제국의 번영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러한 드넓은 영토와 방대한 자원, 그리고 몽골제국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정책과 더불어 동‧서는 역사상 전례 없는 광역적인 교통의 네트워크를 구성하였고,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문물을 교류하고 융합하는 거대한 경제‧문화권이 조성되었다.
제국의 광대한 영토를 관리한 해답은 ‘역참제’이다. 몽골족은 제국의 교통을 위해 도로가 아니라 역참을 건설하였다. 몽골족은 칭기스 칸 시대 때부터 새로운 정복지가 생겨날 때마다 몇 킬로미터에 하나씩 역을 만들고 그 사이를 말들이 달리게 했는데, 이는 칸의 명령‧보고 사항들을 역에서 역으로 연결하여 신속하게 광활한 대지를 하나로 묶어주었다. 몽골족은 기동성을 생명처럼 여기는 유목민이었기에, 말을 활용하여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교통 네트워크를 창출‧운영했던 것이다. 몽골제국 당시 중국 안에 두어진 역참의 숫자는 1519개소에 이르렀고, 5만여 마리의 말‧노새, 9천여 마리의 소, 6천여 척의 배가 존재했다. 역참 네트워크는 황실의 정치‧재정을 위해 설계되었기 때문에 일반인이나 상인들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를 토대로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교통망을 확립하였고, 이는 분명 동‧서 교류의 밑받침이 되었다.
이러한 효율적인 영토 교통망뿐만 아니라, 제국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정책도 국제교류를 한층 촉진시켰다. 몽골 제국의 대규모 정복전으로 인해 수많은 민족과 문화가 뒤섞이게 되었는데, 몽골족은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와 풍습을 복속민족들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본속주의(本俗主義)를 기반으로 한 유연한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특히 쿠빌라이 칸은 몽골 제국을 한화(漢化)시킨 인물이다. 그는 원나라를 건립하면서 중국 땅으로 수도(대도-지금의 베이징)를 옮기고 대운하 확장공사를 하는 등 중국식 전제 국가로의 전환을 꾀하였다. 행정 및 중앙 관제도 중국 전통을 많이 따랐다. 그런데 쿠빌라이 칸은 늘 성 밖에 겔을 치고 그 속에서 잠을 잤는데, 이는 유목과 농경의 장단점을 정확하게 파악해 몽골 제국의 뿌리를 생산성이 뛰어난 농경지대로 옮기고, 그러면서도 농경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유목민의 정신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쿠빌라이 칸은 서방에서 건너온 색목인들에게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중국 문화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한인 지식인들을 기용하여 그들의 견해를 경청했다. 즉, 단일한 민족과 문화를 고집하지 않았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각자의 고유한 풍습과 문화를 보장하면서 제국의 통치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넓게 열어 준 것이다. 또한 쿠빌라이 칸은 1265년 파스파문자라는 공용 몽골어를 제정하긴 했지만, 서로 다른 수많은 언어가 존재했기에 광범위하게 통역‧번역사를 두었다. 이는 몽골의 다언어·다문화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또 한편으로 몽골 제국은 한족에 대한 보수적인 대항의식을 보였다. 원 지배하의 인민을 4등급으로 나누었는데, 몽골족 1등급, 아랍이나 투르크 등 서방민족인 색목인이 2등급으로서 지배층을 형성했고, 옛 금조 치하의 유민은 3등급인 한인(漢人), 남송 치하의 유민은 4등급인 남인(南人)으로서 피지배층을 구성했다. 이러한 비교적 차등대우의 기준은 대외정복전쟁시의 협력 정도에 따라 결정된 것인데, 정복왕조로서 원나라가 갖는 독특한 특성이었다. 또한 쿠빌라이 칸은 중국 사상을 공부하면서도 끝내 한문과 중국어를 배우지 않았고, 한인들의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과거제를 끝내 실시하지 않았다.(원대 말기에 이르러, 과거제가 서서히 실시되었다.) 이 또한 정복왕조로서 원나라가 한인 관료들이 중앙정부를 장악하는 일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이렇듯, 쿠빌라이 칸으로 대표되는 원나라(몽골제국)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던 진보세력과, ‘몽골지상주의’를 내세우며 정복왕조의 특징을 보여주던 보수세력이 함께 공존하던 마치 현대국가와 같은 다이내믹한 사회였다. 이러한 역동적인 사회분위기가 원활한 국제적 교류의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활발한 동서 국제 교류

이와 같이, 광활한 영토와 방대한 자원, 효율적 교통시스템, 그리고 다양성이 존재함과 동시에 진보‧보수 세력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는 역동적인 사회분위기 속에서 쿠빌라이 칸으로 대표되는 시기에 국제적 문물 교류가 세계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융성했다. 많은 유럽인과 아라비아인이 육로‧해로를 통해 중국에 찾아와 자신들의 학술과 종교를 전했다. 몽골족의 종교에 대한 관대한 태도 덕택에 서방의 종교, 티베트 불교인 라마교, 도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였다. 이 중 원대 조정에서 가장 크게 세력을 떨친 것은 라마교이다. 당시 우수한 문화수준을 지니고 있던 이슬람교도들은 천문과 역법 및 자연과학 방면에서 중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몽골 제국은 우수한 이슬람 문화를 종합하여 새로운 천문관측기, 역법, 지도, 대포 등 새로운 수준을 개척하였다. 희곡문화 등 예술적 발전도 물론 있었다. 또한 역으로 동방을 서방으로 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 가장 유명한 여행기는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렸다는 마르코 폴로가 쓴 『동방견문록』이다. 또한 이븐 바투타와 같이 아랍 출신의 여행가도 중국을 방문했으며, 교황의 특사로 칸을 알현한 카르피니는 쿠릴타이에 참관하여 그에 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중국의 특산물 역시 교류되었는데, 도자기가 가장 유명해 당시 서방 세계로 많은 양이 수출되었으며, 중국의 4대 발명품 가운데 나침반‧화약‧인쇄술 역시 서방세계에 전해졌다. 이러한 활발한 교류와 더불어 원나라는 지폐를 발달시켜 전 제국에 걸쳐 강력하게 유통시켰는데, 이는 거대한 경제권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쿠빌라이 칸의 원나라는 용맹한 몽골인 장군, 박식한 중국인 유학자, 티베트의 라마승, 이슬람 상인, 중앙아시아에서 온 천문학자, 유럽의 가톨릭 선교사 등으로 북적거리는 세계정부의 모습을 띠었으며, 이러한 ‘팍스 몽골리카(몽골족 지배 아래의 평화)’ 아래 정치‧경제‧문화‧종교 등 다방면을 아우르는 거대한 국제교류로 전 지구권이 소통할 수 있었고, 비약적인 인류발전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서양의 ‘대항해시대’의 길을 열어주었다.

원대의 문학

원대에는 과거제가 거의 시행되지 않았으므로 한족 지식인들은 거의 발붙일 곳이 없었다. 그리고 유생 역시 가장 천시 받는 존재였다. 결국 지식인들은 문학 창작 활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식인들은 금나라에서 생기기 시작한 곡을 이어받아 새로운 문학으로 발전시킨다. 본래 중국의 전해지던 민간 가요에 가사를 섞어 부르는 설창 혹은 강창의 형식이 금대와 원대에 계속해서 발전했다. 마침내 원대 들어서 정립된 새로운 형식의 시인 산곡과 새로운 형식의 희곡인 잡극이 성행했다. 산곡과 잡극의 경우 음악적인 성격 면에서 유사하지만, 산곡은 서정적인 짧은 노래 중심이라면, 잡극은 여러 곡의 산곡이 모여 이루어진 투수로 일정한 이야기를 연출하는 것이다. 원곡의 대표적인 작가들은 대부분 대도를 중심으로 한 북방 사람들로써, 관한경, 백박, 마치원 등의 인물들이 있다.

인물

칭기스 일족의 주요 인물 계보도

  • 칭기스 칸(太祖, 1206-1227)
  • 우구데이 (太宗, 1229-1241)
  • 구육 (定宗, 1246-1248)
  • 뭉케 (憲宗, 1251-1259)
  • 쿠빌라이 (世祖, 세첸 카안, 1260-1294)
  • 티무르 (成宗, 울제이투 카안, 1294-1307)
  • 카이샹 (武宗, 쿨룩 카안, 1307-1311)
  • 아유르바르와다 (仁宗, 부얀투 카안, 1311-1320)
  • 시데발라 (英宗, 게겐 카안, 1320-1323)
  • 이순 티무르 (泰政帝, 1323-1328)
  • 아라기박 (1328)
  • 코실라 (明宗, 쿠툭투 카안, 1329)
  • 툭 티무르 (文宗, 자야투 카안, 1328-1332)
  • 이린지발 (寧宗, 1332)
  • 토곤 티무르 (順帝, 우하투 카안, 1333-1370)
  • 아유르시리다라 (1370-1378)
  • 투쿠스 티무르 (1379-1388)

참고도서

  • 김호동,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 토마스 바필드, 위태로운 변경,
  • 김호동,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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