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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바람까마귀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6월 6일 (월) 11:2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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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경제의 시작

 중국 역대 왕조는 동전만을 법정화폐로 고정했다.지배층이 금 • 은을 독점하고, 잇따라 장식물로 했기 때문이다. 유통경제가 확대됨에 따라 동전만으로는 조달할 수 없기 때문에 지폐에 의지했었고 은이 일반화 되어도 중량을 재서 그 교환 가치를 헤아려 쓰는 칭량화폐가 되어버렸다. 명대부터 세의 은납이 일어났어도, 농민은 생산물을 팔아 납세에 필요한 은을 사서 납세하기 때문에 그들의 일상생활에서는 동전의 테두리에 머물렀다. 그러나 상공업이 번성해지면서 상인과 민중의 손에도 약간 건너오게 된다. 이것은 도시의 민중도 마찬가지 이지만 명 • 청 사이에 도시 • 농촌을 통하여 민중생활 중에서도 은이 비축만이 아니라 유통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여 동전과 은 사이에 시세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칭량화폐로서의 은

마제은.jpg
 민중들의 손으로 들어온 은의 형태는 분동형으로 원보은(元寶銀)이라고 통칭하였다. 그 주조법에서 분동형의 가운데가 움푹 들어가 양측에 귀라 불리는 것이 만들어져 청대의 마제은(馬蹄銀)이 되었다. 마제은은 대체로 3종의 크기로 만들어졌다. 대(大)는 무게 50량 전후로 원보은이라 하고, 중(中)은 10량 전후로 마제형의 것은 소원보(小元寶), 그외 원추형의 것 등은 중정(中錠)이라 하고, 소(小)는 3량 전후 과자(錁子)라는 마제형이 있다. 이것은 모두 그 품질과 중량을 헤아려 거래하는 칭량화폐였다. 품질은 천분의 일의 시금석으로 검사했지만 중량은 지방에 따라 도량형기가 달라, 그 환산에도 매우 번거로웠다. 그 때문에 청대 중국을 여행했던 외국인은 그 성가심에 거의 기절할 정도였다고 호소하고 있다. 그 때문에 마제은을 주조하는 노방을 비롯하여 교환을 취급하는 은장 • 전포 등 많은 전문점이 생기고, 그 번잡함을 영업수단으로 했다. 명조에는 스페인 멕시코 은화가 홍수처럼 유입되고, 게다가 그것이 그대로 통화가 되지 않았던 것은 전문점이 개재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은의 유입

원조(元朝)까지의 은 유입

 1400년경 중국은 경제 운용상의 문제로 불가피하게 통화를 개혁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원 왕조 시기(1279-1368년)에 지폐 유통 시도의 연이은 실패와 동전을 잘못 관리하는 와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당시 원에는 통화 매개체로 널리 사용하기에 적절한 것이 없었다. 이 같은 과정에서 은이 통화 가치를 보존했고, 대규모 거래의 계산 화폐(실질적인 통화 매개체)가 되었다. 아울러 은은 이런 엄청난 규모의 상업화된 경제의 국가 지불 수단이었다. 이처럼 거대한 은 수요로 인해 전 세계 어느 지역보다 은이 훨씬 더 귀중해졌다. 게다가 중국 땅에는 은을 캐낼 광산은 거의 없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서양의 선박이 아시아에 도달하기 전 중국은 이미 일본, 인도, 동남아를 통해 엄청난 양의 은을 수입하고 있었다.

명조(明代)이후의 은 유입

 16세기 중국의 해외 무역에 보이는 변화는 서구인의 등장이었다. 1514년 중국에 도착한 포르투갈인이 그 선두를 끊었다. 그 후 스페인인, 네덜란드인, 영국인이 중국에 도달했다. 중국은 광대하고 기본적으로 자급자족 경제였기 때문에 해외 무역은 늘 경제 전체 속에서는 주변에 있었다. 수출의 절대량이 많았다 하더라도 중국 전체 생산량에서 볼 때 미량이었고, 대부분의 중국인은 해외 무역의 영향을 직접 받지 않았다. 이들은 중국의 견직물과 모직물을 수입하고 이에 대한 대가로 유럽의 모직물, 금사, 일본의 동, 유황, 도검, 동남아시아의 후추, 산호, 다목 등을 중국에 수출했다. 그러나 중국의 시장은 동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상품에 대해 수요가 적었다. 해외 무역업자들은 당시 중국의 산물을 구입할 때 주로 은으로 지불했다.


화폐와 은

은 이전의 화폐

 중국에서는 한대에 백금(白金), 피(皮), 적동(赤銅) 등의 화폐를 썼지만, 주로 쓰인 것은 청동으로 만든 오수전(五銖錢)이었다. 당대에는 개원통보(開元通寶)라는 동전을 주로 썼다. 남송• 금• 원 및 명대 초기에는 정부가 발행한 지폐가 사용되기도 했지만, 지폐제도의 혼란으로 인해 동전 사용이 일반적이었다.

세금납부의 은

 명대 중엽에 이르면 세금을 은으로 내게 할 정도로 은(銀)의 사용이 활발해 지게 된다. 이갑제의 해체와 더불어 현물로 납부하던 세금과 노동력을 제공하는 요역(徭役)이 점차 은으로 납부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어 갔다. 납세방법은 납세자가 직접 현의 역소(役所)에서 관리하는 나무상자 안에 종이로 밀봉한 은을 집어 넣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변화에 발맞추어 일조편법(一條鞭法)이라는 새로운 징세법이 시행되었다. 일조편법은 세금을 계산해서 그것을 전체 현(縣)의 정(丁, 만 16세에서 60세까지 요역을 부담하는 성인남성)과 토지에 할당해 그 현에서 일괄적으로 징수하는 방식이다. 이 결과 현의 행정기관이 징세의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현의 책임자인 지현(知縣)은 세금 징수가 원활하지 못할 경우 져야 할 책임이 두려워 세금 징수에 집착하게 되었다. 세금을 잘 징수하려면 우선 어떤 자연재해가 닥쳐도 곡식을 잘 추수할 수 있도록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때문에 이 시기에는 수리사업이 매우 번창하였다. 또한 그 지방을 잘 다스리기 위해 지방의 유지, 즉 신사와의 연대도 필요하였다.
 은의 산출량은 풍부하지 못했지만 명조가 은을 화폐로 사용하게 된 배경에는 북방 변경의 긴장의 고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북방 변경의 몽골세력은 무역의 확대를 요구하며 끊임없이 침입하여 명을 괴롭혔다. 명 조정은 몽골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중엽부터 만리장성을 정비하고, 대량의 군대를 배치했다. 이에 군수물자를 북방으로 운반하는 데에는 비용이 매우 많이 들어갔으며, 또한 운반하는데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점차로 가치가 큰 은으로 세금을 징수해서 이것을 가지고 북방에서 군수물자를 매입하게 된 것이다. 북방으로 흘러 들어간 많은 양의 은이 다시 돌아 나오지 않게 되자 중국 내부는 극심한 은 부족현상에 시달리게 되었지만, 세금이나 요역의 은납화는 더욱 가속되었다. 이에 은을 입수하지 못해 세금이나 요역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 농민은 토지를 버리고 도망가는 등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명 향촌지배 질서 근간을 무너뜨리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은 부족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중국은 일본의 은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명나라 초기부터 해금정책을 취해 일본과의 무역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 교류는 해금정책을 위반하는 불법적인 교류를 통해서 이뤄졌다. 명이 극단적인 폐쇄 정책을 취해 사무역이 힘들어지자, 밀무역을 통해 이익을 보려고 했던 것이 바로 왜구이다. 중국 내의 은 부족이 심각해질수록 밀무역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명 중엽은 북방변경의 긴장고조와 함께 남쪽에서는 왜구의 활동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로 이를 '북로남왜'라고 한다.
 중국으로 흘러 들어온 은은 비단 일본은 뿐만이 아니다. 저 멀리 신대륙의 은도 중국에 엄청나게 유입되었다. 이 은을 중국인은 주위에 새긴 자국이 있다고 해서 '화변은(花邊銀)', 국왕의 초상을 부처의 상으로 착각해 '불두은(佛頭銀)'이라 불렀다. 신대륙에서 생산된 은은 영국인, 프랑스인, 네덜란드인, 포르투갈인의 손을 거쳐 동인도로 옮겨진 후 다시 네덜란드인, 페르시아인, 아라비아인, 무갈인을 거쳐 결국에는 은의 집중지인 중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에 걸쳐 전 세계의 은은 마치 중국으로 모두 모인 듯 하였다. 중국은 말 그대로 전 세계 은의 블랙홀이었다.


국가로 보는 은 유입

일본

 16세기 중국과 일본의 교역은 명조 정부의 법으로 보면 대부분이 위법이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중국의 생사에 대한 수요가 컸고, 중국에서는 일본의 은이 필요했기 때문에 중국 정부의 금령도 이 교역을 막을 수 없었다. 일본의 밀수상인이 중국의 남부 해안에 들어왔고, 중국 상인은 적어도 1540년대부터 일본의 남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교역은 동남아시아의 항구에서 중국과 일본 상인들에 의해 간접적인 형태로도 취해졌다. 또 1542년경부터 포르투갈인이 양국 교역의 중요한 중개자가 되었다.
 중국과 일본 사이의 교역은 대부분이 은밀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16세기 일본에서 중국으로 유입된 은의 정확한 양은 분명치 않다. 믿을 만한 한 계산에 따르면, 16세기 마지막 40년 동안 매년 평균 3만 4,000에서 4만 9,000킬로그램이 교역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전초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의 정련기술이 개선되고 도쿠가와 막부가 정치적인 안정을 찾게 되면서 중국과 일본의 교역은 17세기 초 공전의 규모에 도달했다. 어림잡더라도 은수출이 절정에 달했던 1615년부터 1625년 사이에 일본의 은수출량은 연평균 13만에서 16만 킬로그램이었다. 이것은 당시 일본을 제외한 세계의 은산출량의 30~40%에 해당한다. 그 은의 대부분이 결국 중국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서양

 세계 어느 곳보다 풍요로운 광산(1500~1800년 전 세계 은의 약 85퍼센트를 라틴아메리카에서 생산했다)에서 은을 발견한 서양인은 이것을 중국에 수출함으로써 크고 확실한 중개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그 수익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상인들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그 밖의 다른 물건을 대량으로 중국에 실어 보낼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은을 자국에 보유하려 한 서양의 여러 지식인과 정치가들은 끊임없이 은을 대신해 다른 상품을 중국에 수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헌에 기록된 서양인의 이런 노력에서 눈에 띄는 점은 '아시아인들'에게 외국 제품을 판매하기 위해 '서양'이 필사적인 시도를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인은 지나치게 자기 민족 중심적이어서 이런 시도가 먹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논리에 치우치다 보면 조공 무역의 시행에서 적절한 형식과 범위에 대한 중국 황제의 공식 의견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처럼 사회가 전반적으로 소수 정치 지도자들의 의견만 앞세웠다고 오해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중국이나 서양 모두 교역 상품에 대한 실질적 결정권은 시장에 개입한 상인들에게 있었다.
 은 자체를 상품, 즉 광물이라는 기반을 가진 세련된 상품으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 서양에서는 아시아 어느 지역보다도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은을 생산할 수 있었다. 지리적 행운이 따라주지 않아 중국은 은을 거의 생산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은은 서양에서 원자재를 공급받을 수 있고 발전된 생산 기술까지 배울 수 있는 이점을 가진 몇몇 제조 상품 중 하나였다. 중국인은 은괴 형태로 은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런 주화 제조 기술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은을 대량 취급하는 남아시아인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이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그 이유는 초기에 그들이 유럽에서 많은 양의 은을 구입한 후 자신만의 교역망을 통해 중국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상품 대신 동아시아로 보낸 은을 중국에서는 통화 매개체로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