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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왕(燕王) 조우 등의 관직을 면하라는 조서가 있다. 조우 등은 궁성 내에 머물지 마라."'''
 
'''"연왕(燕王) 조우 등의 관직을 면하라는 조서가 있다. 조우 등은 궁성 내에 머물지 마라."'''
  
이렇게 하여, 조우, 조조, 하후헌, 진랑등은 모두 울면서 집으로 되돌아갔다. <한진춘추><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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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여, 조우, 조조, 하후헌, 진랑등은 모두 울면서 집으로 되돌아갔다. <한진춘추></ref>
  
 
사마의가 요동에서 돌아오자, 조예는 병상에 누워 사마의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사마의가 요동에서 돌아오자, 조예는 병상에 누워 사마의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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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선왕이 잘못을 깨닫고 말했다, '''“이 사마의가 늙어서 정신이 오락가락해 군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구려. 이제 본주 자사로 돌아가면 성덕장렬(盛德壯烈)히 공훈을 세우도록 하시오. 이제 군과 헤어지면 내 기력이 쇠해 뒤에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것이니, 내 힘으로는 주인의 예도 다하지 못하니 죽을 날이 가까웠구려. 사마사, 사마소 형제는 군과 우의로 맺어져 있으니 서로 저버리지 마시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구구한 바램이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었다. 이승 또한 크게 탄식하며 대답했다, '''“마땅히 가르침을 받들고, 황제의 칙명에 따르겠습니다” '''
 
이에 선왕이 잘못을 깨닫고 말했다, '''“이 사마의가 늙어서 정신이 오락가락해 군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구려. 이제 본주 자사로 돌아가면 성덕장렬(盛德壯烈)히 공훈을 세우도록 하시오. 이제 군과 헤어지면 내 기력이 쇠해 뒤에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것이니, 내 힘으로는 주인의 예도 다하지 못하니 죽을 날이 가까웠구려. 사마사, 사마소 형제는 군과 우의로 맺어져 있으니 서로 저버리지 마시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구구한 바램이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었다. 이승 또한 크게 탄식하며 대답했다, '''“마땅히 가르침을 받들고, 황제의 칙명에 따르겠습니다” '''
 
   
 
   
이승이 작별인사하고 나와 조상과 만났다. 이승이 말했다, '''“태부의 말씀이 혼란스럽고 입으로는 그릇의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남쪽을 가리키면 북쪽을 보는 식입니다. 또 내가 병주로 간다고 말하기에 내가 형주로 가는 것이지 병주가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니 그제야 제가 형주로 간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또한 주인의 예도 행하지 못해 전송할 때 방에서 나오지도 못했습니다.”''' 다시 조상등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태부의 병환이 다시 회복되기 어려운 지경이니 애처로운 일입니다.” <위말전>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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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이 작별인사하고 나와 조상과 만났다. 이승이 말했다, '''“태부의 말씀이 혼란스럽고 입으로는 그릇의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남쪽을 가리키면 북쪽을 보는 식입니다. 또 내가 병주로 간다고 말하기에 내가 형주로 가는 것이지 병주가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니 그제야 제가 형주로 간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또한 주인의 예도 행하지 못해 전송할 때 방에서 나오지도 못했습니다.”''' 다시 조상등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태부의 병환이 다시 회복되기 어려운 지경이니 애처로운 일입니다.” <위말전> </ref>
  
 
그리하여 조방이 고평릉을 참배하러 나가는 길에 방심한 조상 형제가 모두 따라나서자 사마의는 성내의 무기고를 장악한 채 낙수의 부교에 진을 친 채 조상의 죄를 낱낱이 상주하였다.  
 
그리하여 조방이 고평릉을 참배하러 나가는 길에 방심한 조상 형제가 모두 따라나서자 사마의는 성내의 무기고를 장악한 채 낙수의 부교에 진을 친 채 조상의 죄를 낱낱이 상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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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서신으로 불러서는 오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이오.”'''
 
'''“그대는 서신으로 불러서는 오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이오.”'''
  
왕릉은 수도로 가는 길에 가규의 무덤에 들러  '''“가양도! 나 왕릉이 대위(大魏)의 충신임을, 그대의 신령이 있다면 잘 알 것이오!”''' 라고 한 뒤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조표는 죽음을 당하고, 왕릉과 영호우의 무덤이 파헤쳐졌으며, 이 일에 관련된 이들의 삼족이 처형당했다.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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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은 수도로 가는 길에 가규의 무덤에 들러  '''“가양도! 나 왕릉이 대위(大魏)의 충신임을, 그대의 신령이 있다면 잘 알 것이오!”''' 라고 한 뒤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조표는 죽음을 당하고, 왕릉과 영호우의 무덤이 파헤쳐졌으며, 이 일에 관련된 이들의 삼족이 처형당했다. </ref>
  
 
6월, 사마의는 영릉과 가규가 자신을 섬기는 꿈을 꾸고 난 뒤 찝찝해하다가 8월에 7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사마의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인 사마사가 정권을 잡는다.
 
6월, 사마의는 영릉과 가규가 자신을 섬기는 꿈을 꾸고 난 뒤 찝찝해하다가 8월에 7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사마의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인 사마사가 정권을 잡는다.

2016년 5월 15일 (일) 04:25 판

  • 220년

조조(曹操)가 사망하자 조비(曹丕)가 위를 이어받아 승상 위왕에 올랐다. 연호를 건안(建安) 25년에서 개원하여 연강 원년(延康元年)으로 바꾸었다. 10월, 헌제는 어사대부 장음(張音)에게 조서를 들게 하고, 옥새를 받들어 조비에게 제위를 선양하며 말했다.

“짐이 재위한지 삼십년 동안 천하가 흔들리고 뒤집혔으나 다행히 조종(祖宗)의 혼령 덕분에 위기를 벗어나 다시 존립했소. 그러나 이제 천상(天象)을 우러르고 민심을 굽어 살피니 화정(炎精)의 기수 이미 끝나고 행운(行運)이 조씨에게 있소. 이에 전왕(前王: 조조)은 이미 신무 (神武)의 공을 세우고 금왕(今王: 조비)도 명덕을 비춰 그 기대에 응했소. 역수(曆數)가 이렇게 분명하니 믿어 알 수 있소. 무릇 대도지행(大道之行: 대도가 행해짐)이면 천하위공(天下為公: 천하를 모두 향유하게 됨)이라 했소. 당요(唐堯: 요임금)는 아들을 위해서 삿되지 아니해 이름을 무궁히 전하소. 짐도 남몰래 이를 우러러 본받고자 했소. 이제 마땅히 요임금의 모범을 따라 승상 위왕에게 선위하니 위왕은 사양치 마시오!"

조비는 몇 번이나 사양했으나, 여러 번 권한 후 10월 28일에 비로소 번양(翻揚)에 제단을 세워 관위에 따라 백관을 배석시키고 제위에 올랐다. 연호를 연강에서 황초(黃初)로 바꾸고 전국적으로 대사면령을 내렸다. 위문제(魏文帝-조비)는 황초 원년(220) 11월 1일 헌제 유협에게 1만 호의 식읍을 주고 산양공(山陽公)으로 봉하였다.-조부인 태왕 조숭(曹嵩)을 태황제(太皇帝)라고 하였으며, 부친 무왕에게 무황제(武黃帝)의 칭호를 바쳤다.

  • 221년

6월, 조비는 부인 견씨가 자신에 대한 총애가 줄었다는 이유로 자신을 원망하자 견씨를 죽이고 업에 매장한다. 8월, 손권이 몸소 번국이 되기를 청하자 그를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오왕으로 봉하였다. 조비는 포로로 사로잡혀 있던 우금이 돌아오자, 그를 위로하며 안원장군으로 삼았다. 그러나 우금이 참배하러 간 조조의 묘에 자신이 수치스럽게 항복하는 모습을 그려놓게 하였다. 우금은 그것을 보고 화병으로 앓다가 죽었다.

  • 226년

5월, 조비가 제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깊은 병을 얻었고, 조예를 황태자로 책봉한다. 위문제는 조진, 진군, 조휴, 사마의 등으로 하여금 조예를 보필하게 하고, 17일에 4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6월, 조예는 조비의 손에 죽은 견씨에게 문소황후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이후 견씨의 친족들을 중용하는 등 어머니의 죽음을 늘 신경 쓰며 살았다. 8월, 손권이 강하를 공격하지만, 태수인 문빙이 굳건히 지켰다. 조정에서 구원군을 보낼 것을 건의하지만, 조예는“손권은 수전에 익숙한데, 감히 배에서 내려 뭍에서 공격하는 까닭은 (우리가) 대비하지 못한 것을 엄습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오. 지금은 문빙과 서로 대치하고 있으며, 공격이란 수비하는 세력보다 두 배는 있어야 하므로, 끝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오.” 라 하였고, 이내 손권은 퇴각하였다. 또한 제갈근이 양양을 공격하였으나 사마의가 이를 격파하였다.

  • 228년

220년, 촉장이었던 맹달은 유장을 배신하고 유비에게 귀순하였으나, 조비가 제위에 올랐을 때 다시 위에 투항하고, 재주가 뛰어나 조비의 총애를 받았다. 사마의는 그러한 그를 신임해서는 안 된다고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맹달은 신성태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226년 조비가 사망하자 그의 위치는 불안해졌고, 이에 227년에 제갈량이 평소 맹달을 미워하던 신의에게 곽모를 거짓 투항시켜 위나라와 맹달의 사이를 이간함으로써 요지인 상용을 지키고 있는 그가 촉으로 다시 귀순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사마의는 맹달에게 그를 신임한다는 전언을 보냄으로써 그를 안심시키고, 신속하게 진군하여 방심하고 있는 맹달을 공격하여 그를 사로잡아 참수한다.

4월, 위나라는 오 토벌군을 일으켜 강릉과 심양에 각각 사마의와 조휴를 주둔시킨다. 조휴는 오의 파양태수 주방의 거짓 투항에 속아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가 육손과 주방의 군대에 참패하고 석정으로 후퇴한다. 가규가 급히 와서 조휴를 구원했음에도, 조휴는 평소 사이가 나빴던 가규를 모함한다. 조휴는 이 일로 인해 등에 악성 종기가 생겨 죽었다.

  • 230년

대장군 조진은 촉을 토벌할 것을 건의하였고, 조예가 이를 승낙하였다. 8월, 대사마 조진과 대장군 사마의는 조예의 조칙을 받아, 조진은 자오곡에서 남쪽을 향해 진군하였고, 사마의는 한수를 따라 서성을 통하여 한중에서 합류하기로 하였다. 9월, 폭우가 계속되어 이수, 낙수, 황하, 한수 등이 범람하여 잔도가 끊어지자 조진 등은 퇴각하였다.

  • 231년

제갈량이 또다시 군사를 보내 기산을 포위하자, 병든 조진 대신에 사마의가 장합, 비요, 대릉, 곽회 등을 지휘하여 출진한다. 사마의는 비요로 하여금 상규를 지키게 하고 기산을 구원하였다. 곽회와 비요는 제갈량에게 패퇴하였고, 사마의는 영채를 지어 방비를 굳힌 채 출진하지 않았다. 장합은 사마의에게 "저들이 멀리서 와서 우리와 맞서는데 싸우기를 청하여도 공께 허락을 얻지 못하는 것은 저들과 싸우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이롭다 여기시고, 장구(長久)한 계책으로 저들을 제압하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물며[且] 기산의 백성은 우리의 대군(大軍)이 근처에 있음을 알고 사람마다 지켜내고자 하는 마음이 절로 굳세게 되었을 것이니 이곳에 잠시 주둔하였다가 군사를 나누어 기병(奇兵)으로 삼아 제갈량의 후방을 칠 것처럼 보이시면 제갈량은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감히 기산을 더 이상 핍박치도 못할 터이니, 이대로 주저앉아 민망(民望)을 잃지 마소서. 제갈량은 현군(縣軍-후방의 지원이 없는 군대)으로 군량이 적으니 역시 얼마 안 있어 떠나갈 것입니다." 하며, 제갈량을 기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사마의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이에 제장들이 사마의가 촉을 겁내는 것이라 여기자, 사마의는 한스러워하며 5월에 군사를 출진시키지만 위연, 고상, 오반 등에게 패배한 후 다시 방어를 굳혀 출진하지 않는다. 제갈량이 군량이 떨어져 퇴각하려 하자 장합에게 제갈량을 추적할 것을 요구한다. 장합이 말하길, “군법(軍法-병법)에서 성을 포위할 때는 반드시 출로를 열어두고, 퇴각하는 군사는 쫓지 말라 했습니다.” 그러나 사마의가 이를 들어주지 않자 장합은 부득이하게 진군하였으나, 제갈량의 복병에 의해 오른쪽 다리에 화살을 맞고 죽는다.

  • 234년

3월, 산양공 유협이 세상을 떠나니, 명제는 유협의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4월, 제갈량이 10여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위남에 영루를 세우니, 조예는 진랑에게 보병과 기병 2만을 주어 사마의를 돕도록 하였다. 제갈량은 사마의를 도발하기 위해 사마의에게 자주 사자를 보내 편지를 전하고, 건괵(여성이 쓰던 두건과 머리장식)을 보냈다. 이에 사마의는 제갈량과 싸우기를 원했으나, 조예는 “단지 성벽을 굳게 지켜 촉나라 군대의 날카로운 기운을 꺾음으로 그들로 하여금 나아가 공격할 수 없게 하고, 물러나 싸울 수 없게 하여 오랫동안 머물게 하면 군량미가 부족할 것이다. 설령 사방에서 약탈을 자행해도 얻는 것이 없다면 반드시 군대를 물릴 것이다. 달아나는 적을 추격할 때는 아군을 안전한 상태에 놓고 오랜 시일 동안 피곤해진 적군을 공격하여 완전한 승리를 얻어야 한다.”라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에 또 제갈량이 싸움을 걸자 사마의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출전하려 하였지만, 명제가 신비로 하여금 부절을 지니고 막아서게 하니, 사마의는 결국 싸우러 나가지 못하였다. 8월, 병이 깊어진 제갈량이 병사했고, 촉의 군대는 물러갔다. 사마의는 촉의 군대가 후퇴한 진영을 살펴본 뒤, “천하의 기재로다.” 라며 감탄하였다. 신비가 아직 제갈량이 죽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고 하자 사마의는 “군가에서 중히 여기는 것이 군서(軍書), 밀계(密計), 병마(兵馬-병졸과 군마)가 먹는 양곡(糧穀)인데, 이제 이들을 모두 내버렸으니 자신의 오장(五藏)을-오장에서 五는 숫자 5라기 보다는 중요한 것을 나타내는 의미 정도로 쓰인 것이다-내버린 자가 어찌 살아 있겠소? 의당 급히 추격해야 하오.” 라며 촉군의 후미를 추격했다. 그러나 촉군이 갑자기 뒤돌아서 공격해오는 듯 하자 사마의는 놀라서 군대를 퇴각시켰다. 이에 백성들이 “죽은 제갈(諸葛)이 살아있는 중달(仲達)을 달아나게 했다.”(死諸葛走生仲達) 고 하였다. 그러자 이야기를 들은 사마의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산 자를 헤아릴 수는 있으나 죽은 자를 헤아릴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 238년

1월, 사마의는 조예의 명에 따라 237년 공손연을 토벌하러 떠났다가 장마로 인해 후퇴했던 관구검을 부장으로 하여 우금, 호군 등과 함께 요동으로 4만의 군사를 이끌고 떠난다.

천자가 이르길, “갔다가 돌아오는데 얼마나 걸리겠소?”라 하자 사마의가 대답했다, “가는데 백일, 돌아오는데 백일, 공격하는데 백일이 걸리며 휴식하는데 60일을 잡으면 1년이면 족합니다.”

이 때에도 역시 장마가 몰아쳤으나, 조예는 “사마공(司馬公)은 위기에 처해 변화를 제어할 수 있으니, 오래지 않아 공손연을 붙잡아 올 것이오.” 라고 하였다. 9월, 사마의는 양평에서 공손연의 군을 대파하고, 요동 지역을 평정하였다.

  • 239년

조예는 병이 위독해지자, 조우를 대장군으로 임명하며 후헌, 조상, 조조, 진랑으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였다. 그러나 진랑 등과 사이가 좋지 않던 유방, 손자 등은 자신들이 숙청될 것을 우려하여 조예에게 그들을 쓰지 말 것을 간언하였고, 조예는 평소에 총애하던 유방과 손자의 의견을 따라 조우 등을 파면하고, 조상을 대장군으로 임명하며 사마의가 정치를 이끌도록 하였다.

[1]

사마의가 요동에서 돌아오자, 조예는 병상에 누워 사마의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짐은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그대를 기다리느라 죽음을 참고 견디었소. 그대는 조상과 함께 이 아이를 보좌해 주시오.” 사마의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폐하께옵서는 선제께서 신께 폐하를 부탁한 것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그렇게 조예는 36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조방이 3대 황제로 즉위한다. 당시 조방의 나이는 8살이었다.

  • 244년

조상은 조예가 실속 없는 자들이라 하여 내쫓았던 하양, 등양, 정밀 등을 다시 등용하여 심복으로 삼았고, 조상은 사마의를 두려워하면서도 질시하였기에 때문에 사마의를 밀어내 실권을 잡고자 하였으니, 사마의는 조상과 다투다 화를 입을 것을 우려하여 병을 핑계로 정무를 보지 않게 되었다. 등양 등은 조상에게 위명을 떨치기 위해 촉을 토벌해야 한다고 진언하였고, 사마의가 이를 말리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2월, 조상은 6~7만의 대군을 이끌고 장안을 걸쳐 진군하였으나, 촉군이 산을 끼고 방어하자 조상은 퇴로마저 끊긴 채로 고전하다 겨우 후퇴하였다.

  • 249년

조상이 하안, 등양 등과 더불어 전횡을 일삼자 사마의는 은밀하게 이들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였다. 조상 등이 사마의가 방비하는 것을 의심하자, 248년 형주자사로 임명된 이승이 사마의를 방문하였을 때 사마의는 병이 깊어 위독한 체 하였고, 이승은 그것을 그대로 믿어 조상에게 사마의가 완전히 노쇠하였다고 보고했다.

[2]

그리하여 조방이 고평릉을 참배하러 나가는 길에 방심한 조상 형제가 모두 따라나서자 사마의는 성내의 무기고를 장악한 채 낙수의 부교에 진을 친 채 조상의 죄를 낱낱이 상주하였다.

“선제(즉 명제)께서 폐하와 진왕(秦王-조순), 그리고 신을 불러 어상에 오르게 해 신의 팔을 잡고 이르길 ‘심히 뒷일을 염려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대장군 조상은 고명을 저버리고 나라의 제도을 어지럽히니, 안으로는 참람되게 스스로를 윗사람에 견주고 밖으로는 위엄와 권력을 전단하고 있습니다. 백관의 요직에는 모두 자신과 친한 사람을 두고 예전부터 숙위하던 자들은 모두 내쫓겼습니다. 조정에 뿌리를 내리고 점거해 서로 결탁하니 그렇게 제멋대로 방자하게 구는 것이 날로 심해졌습니다. 또한 황문(黃門) 장당(張當)을 도감(都監)으로 삼고 오로지 함께 결탁하며 신기(神器)를 정탐하니 천하가 흉흉하고 사람들마다 두려움을 품게 되었습니다. 폐하가 다만 기좌(寄坐-남에게 빌붙어 있음, 손님의 지위에 있음) 하니 어찌 오래도록 안전하겠습니까? 이는 선제께서 폐하와 신을 어상(御床)에 오르게 한 본뜻이 아닙니다.

신이 비록 늙고 쇠약한 몸이나 어찌 감히 지난 날 선제의 말씀을 잊겠습니까. 옛날 조고(趙高)가 전횡하니 진(秦)나라가 이 때문에 망했고, 여씨와 곽씨를 일찍 끊어냈기에 한나라 제업은 오래도록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는 폐하가 본보기로 삼아야 할 전대의 일이며 지금은 신이 목숨을 바칠 때입니다. 공경 군신들이 모두 이르길 조상이 무군지심(無君之心)을 지녔고 그 형제가 군사를 거느리며 숙위(宿衛)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하여 황태후께 상주하니 상주한 대로 시행하라고 황태후께서 명하셨습니다. 주관하는 자와 황문령(黃門令)에 신이 임의로 명해 조상, 조희(曹羲), 조훈(曹訓)의 관직과 병권을 파하고 각기 원래 관직과 후(侯)의 신분으로 사저로 돌아가게 하고, 만약 황제의 수레를 계속 억류시킨다면 군법에 따라 처리하도록 했습니다. 신이 병든 몸으로 임의로 군사를 거느리고 낙수 부교(浮橋)로 온 것은 비상사태를 살피기 위함입니다.”

환범이 조상을 돕기 위해 달려가자 장제가 이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사마의가 말리며 말하길, “조상은 환범과 더불어 안으로 소원하고 지혜가 미치지 못하며 굼뜬 말은 작은 콩에 연연하는 법이니(駑馬戀短豆-노마연단두) 필시 그를 제대로 쓰진 못할 것이오.” 사마의의 예상대로 환범은 조상에게 황제를 허창으로 데려갈 것을 진언하였지만 조상은 환범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결국 조상은 허윤과 진태의 설득에 스스로 죄를 받겠다고 한 뒤 파면되었고, 하안, 등양 등과 함께 처형당한 뒤 삼족이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다. 조상 등이 처형당한 후 사마의는 하후현을 수도로 불러들이고, 대신 곽회를 정서장군 직에 임명한다. 평소에 조상에게 후대받았으며, 곽회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하후패는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하후현에게 같이 촉으로 망명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하후패가 촉으로 가던 중 길을 잃고 기진해있을 때 촉에서 사람을 보내 그를 맞이하였고, 하후패는 촉에서 거기장군직을 수여받는다.

사공 왕릉과 연주자사이자 그의 외조카인 영호우는 조방의 나이가 어려 천자의 지위를 수행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여, 조조의 아들이며 재능 있는 초왕 조표를 천자로 세우려고 비밀스럽게 모의하였다. 9월, 영호우는 장식을 조표에게 보내 서로 묻고 왕래하였다. 11월, 영호우는 왕식을 보내 또 조표를 만나게끔 하였는데, 그가 돌아오기도 전에 질병으로 사망한다.

  • 250년

왕릉은 별을 보고는 “남두 가운데 화성이 있으니, 갑작스럽게 고귀하게 되는 자가 있을 것이다.” 라며 뜻을 정하였다.

  • 251년

1월, 오나라의 군대가 도수를 막자, 왕릉은 이를 이용해 거사를 일으키려는 마음을 먹고 오를 토벌하도록 요청하는 상주를 올렸지만 허락받지 못하였다. 왕릉은 양홍을 파견하여 폐립하는 일을 연주자사 황하에게 알리도록 하였으나, 둘은 사마의에게 왕릉의 계략을 밀고한다. 4월, 사마의는 직접 중군을 이끌고 왕릉에게 갔으니, 왕릉은 하급관원인 왕욱을 보내 사죄하고 인수와 절월을 반납하였다. 왕릉은 자신을 묶게 한 뒤 그들을 맞이하였으나, 사마의는 포박을 풀고 그를 수도로 송환한다.

[3]

6월, 사마의는 영릉과 가규가 자신을 섬기는 꿈을 꾸고 난 뒤 찝찝해하다가 8월에 7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사마의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인 사마사가 정권을 잡는다.

  • 254년

이풍은 맑고 청렴하며 사람을 잘 알아보기로 유명하여, 오나라에까지 명성이 퍼진 인물이었다. 이후 승진을 거듭하였는데, 몸이 아프다는 것을 핑계로 봉급을 받을 수 있는 날짜만을 출석한 뒤 수십 일을 결근하기가 일쑤였고, 아들 이도가 공주의 남편감으로 뽑혔을 때 겉으로는 사양하는 척 하였지만 속으로는 꺼리지 않았다. 또, 두 아우가 군수 직을 역임하면서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도 꾸짖지 않았다. 이풍은 조상과 사마의 사이에서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적절하게 권력을 유지했다. 사람들은 “조상은 끓는 물과 같고, 사마의는 차가운 물과 같으며, 이풍은 작은 틈으로 새어드는 빛과 같다.”고 이풍을 비웃었다. 이풍은 조방과 단둘이서 이야기를 자주 나눴고, 사마사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물어보았지만 이풍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 때 이풍은 조상이 죽은 이후로 억압받던 하후현과 딸이 황후가 되어 실권을 잃은 장집 등이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을 알고, 사마사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하후현을 앉힐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풍의 계획은 들통났고, 사마의가 이풍을 불러놓고 비난하자 이풍은 “경의 부자는 간악한 마음을 품고 사직을 기울게 하고 있소. 나는 애석하게도 힘이 부족하여 그것을 막지 못했을 뿐이오.” 라고 하였다. 분노한 사마의는 이풍을 때려죽였고, 이풍, 하후현, 장집의 삼족을 멸하였다.

9월, 사마사는 조방을 폐위시키기 위해 황태후를 찾아갔다. 황태후는 조서를 내려 조방을 폐하니 이 때 조방의 나이 23세였다.

“황제 조방은 이미 성년이 되었지만, 국가의 정무를 직접 처리하지 않고, 부인에게 탐닉하고 여색에 빠져 매일 배우들을 불러들여 추악한 유희를 즐기고 있고, 후궁 여자들을 맞아 내전에 머물게 하여 인륜의 질서를 파괴하고 남녀의 정절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소. 공손함과 효도하는 마음은 날마다 줄어들고, 도리에 역행하는 오만함만이 점점 심해져 하늘이 명한 대업을 잊고 종묘를 받들 수 없게 되었소. 겸태위(兼太尉) 고유에게 간책(簡冊)을 받들어 종묘에 제사지내어 보고하고 조방을 제나라로 돌려보내 옛날대로 번왕을 담당하도록 하여 황제의 자리에서 떠나도록 하시오.”

사마사는 팽성왕 조거를 황제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황태후가 조거가 자신의 숙부라는 것을 꺼려하였기 때문에 조비의 손자인 조모가 즉위하게 되었다.

  • 255년

하후현이나 이풍 등과 친분이 있었던 관구검과, 성격이 포악하여 계속하여 관직에서 내쫓겼지만 조상에게 후대받던 문흠은 그들과 함께 처벌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둘은 수십 장에 이르는 혜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상서로운 징조로 여겨 사마사의 죄상을 적은 조칙을 전국에 돌린 후 반란을 일으켰다. 사마사는 친히 군을 거느리고 종회와 함께 관구검을 토벌하러 나섰다. 여기에 제갈탄을 호준을 시켜 퇴로를 막았으니, 관구검은 싸울 수도 퇴각할 수도 없는 형세가 되어 항복하는 병사가 속출하였다. 문흠은 상황이 어려워지자 오로 망명하였고, 관구검은 병사들을 버리고 동생들과 도망가다가 일반 백성인 장속에게 잡혀 활을 맞고 죽었다.

사마사는 난을 토벌하는 와중에 문흠의 아들인 문앙이 공격해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눈알이 빠져나왔지만 옷으로 가려 그것을 숨겼다. 병세가 악화된 사마사는 2월에 48세로 사망하였고 동생인 사마소가 대장군직을 이어받았다.

  • 256년

8월, 촉의 대장군 강유에게 옹주자사 왕경이 맞서 대패하고 적도성은 포위당했는데, 등애와 진태가 이를 구원하였다. 위에서는 강유가 힘이 다해 더 공격해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등애는

"왕경이 조서에서 패배한 일은 작은 실책이 아닙니다. 우리 군을 격파시키고 장수를 죽였으며, 창고는 모두 텅 비었고, 백성들은 갈 곳을 잃어 떠돌아다녀 거의 멸망 상태까지 되었습니다. 지금 작전상에서 말하면, 적에게는 승기를 타고 공격하는 기세가 있으며, 우리는 허약한 체질입니다. 이것이 첫째 이유입니다.

저들은 위아래가 서로 익숙하게 훈련되었고, 병기는 예리한데, 우리는 장수를 바꾸고 병사를 새로 증원하고 손상된 병기는 아직 수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둘째 이유입니다.

적은 배로 행군하고 우리는 육로로 걸으니, 수고로움이 같지 않습니다. 이것이 셋째 이유입니다.

적도, 농서, 남안, 기산은 각기 지켜야만 합니다. 적은 병력을 한곳에 집중시키지만, 우리는 네 곳으로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넷째 이유입니다.

남안과 농서를 향한다면 강인의 곡식을 먹을 수 있고, 만일 기산으로 향한다면 1천 이랑이나 되는 잘 익은 보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적을 유인하는 먹이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다섯째 이유입니다.

적군은 교활하고 책략에 뛰어나므로 그들이 오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라고 하여 강유가 반드시 공격해올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예상대로 강유는 기산을 공격해왔으나 등애가 기다리고 있자, 남안으로 향했다. 6월에 등애는 단곡에서 강유와 싸워 크게 이겼다.

  • 257년

제갈탄은 하후현과 친했는데, 그 때문에 하후현을 싫어한 조예에 의해 면직당하였다. 조예가 죽은 후 그는 양주자사에 임명된다. 제갈탄은 관구검의 난을 진압하여 공을 세웠으나, 자신도 관구검이나 왕릉처럼 죽임당할 것을 두려워해 재물을 풀고 빈객들을 대접하여 민심을 샀다. 256년 겨울에 오가 침입하자 제갈탄은 10만의 병사를 요구하였는데, 이 일로 의심을 샀다. 5월, 조정에서는 제갈탄에게 사공직을 수여하겠다며 그를 불러들였는데, 제갈탄은 두려워하며 반란을 일으켜 양주자사 악침을 죽이고 회남과 회북 지방에서 십수만의 병사와 양주에서 5만의 병사를 모아 1년을 버틸 양곡을 갖고 성을 지켰다. 오는 제갈탄을 돕기 위해 3만의 병사를 보냈다. 사마소는 26만의 정병을 이끌고 나아가 수춘을 포위하였다. 제갈탄을 돕기 위해 온 문흠은 포위망을 뚫으려 하다가 역으로 공격당한 뒤 도망갔고, 주이는 주태에게 번번히 패하니 손침에게 죽임당하였다. 식량이 부족해지고 패색이 짙어지자 제갈탄의 심복들마저 사마소에게 투항하였고, 문흠과 제갈탄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다투다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게 되었다. 제갈탄이 문흠을 죽이자 문흠의 아들인 문앙과 문호는 사마소에게 투항하였고, 이내 수춘은 함락되고 제갈탄과 그 수하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사마소는 오의 구원군은 모두 오나라로 귀환시켰다.

  • 260년

조모는 사마소가 제위를 찬탈하려 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왕침, 왕경, 왕업 등과 함께 사마소를 죽일 것을 논의하였다. 왕침과 왕업은 사마소에게 그것을 밀고하였고, 불과 수백을 이끌고 거병한 조모는 가충과 맞서다가 그의 부하인 성제의 칼에 찔려 사망한다. 사마소는 “저는 이 소식을 들은 후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슬프고 애상하여 어느 곳에서 이 생명을 끊어야 될지를 몰랐습니다. 법률에 따르면 임금에게 대역무도한 죄를 지으면 그 부모와 처자를 모두 죽인다고 합니다. 성제는 흉악모두한 반역자로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여 주살되는 것을 용서받지 못할 만큼의 죄를 지었습니다. 즉시 시어사에게 명하여 성제 일족을 체포하고 정위로 넘겨 그들의 죄를 판단하도록 하십시오.” 라며 성제의 삼족을 멸하며 사건을 수습하였다. 그리하여 5월에 조모가 사망한 뒤, 6월에 조환이 제위에 올랐다.

  • 263년

4월, 위에서 촉의 토벌을 결정하자 등애는 3만의 군사를 이끌고 답중으로 나아가 강유를 공격하고, 제갈서는 3만의 군사를 이끌고 무도와 고루로 진군하여 퇴로를 막기로 하였다. 종회는 10만의 병력으로 사곡과 낙곡에서 촉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등애는 왕기, 견홍등을 강유와 싸우게 하고 양흔을 감송으로 보냈다. 강유는 종회의 군대가 한중으로 들어선 것을 알고 한중으로 물러나는데 양흔이 강천구까지 추격하여 크게 싸웠다. 강유는 패하여 돌아가던 중, 제갈서가 교두를 막고 있는 것을 알고 공함곡을 통해 제갈서의 후방을 치려고 하였다. 제갈서는 이것을 듣고 30리를 후퇴하였다. 강유는 제갈서의 군대가 퇴각하자 교두를 통과하였고, 제갈서가 급히 돌아갔으나 하루 차이로 강유를 놓쳐버렸다. 강유는 이내 검각을 방어하였는데, 종회는 검각을 돌파하지 못했다. 이에 등애는 정예 700명을 추려서 음평 땅의 험한 산길을 통과하여 진군하였고, 선두 진영이 강유(江由)에 도착하자 마막이 놀라 항복하였다. 제갈첨은 부성에서 면죽으로 돌아와 진영을 세우고 등애를 맞이하였다. 등애는 항복을 권하였으나 제갈첨은 크게 노하여 사자를 죽였다. 등애는 등충과 사찬으로 하여금 싸우게 하였으나 그들은 상황이 불리하자 퇴각하였고, 등애가 "존망의 구분은 이 한 싸움에 달려 있다. 어찌 불가능함이 있겠는가?" 라며 목을 치려 하자 그들은 다시 돌아가 대승하였다. 이 싸움에서 제갈첨과 장준이 죽고, 등애는 낙성까지 진군했다. 유선은 위군이 들이닥치자 곧바로 사자를 보내 옥새와 인수를 받들며 투항을 청하였다. 강유는 제갈첨이 패한 소식을 듣고 파로 들어가 방비를 굳히고 있었는데, 유선이 강유에게 사자를 보내 종회에게 투항하도록 명령하자 강유는 병기를 모두 버리고 종회에게 투항하였다. 등애는 성도에 도착하자 유선의 결박을 풀고 그와 회견하며, 촉의 백성들을 약탈하지 않으니 칭송이 자자하였다. 등애는 자신의 전공을 촉의 관료들에게 뽐내며 말했다. "여러분들은 다행스럽게 나를 만났기 때문에 오늘이 있을 수 있었을 뿐이다. 만일 오나라나 한나라 같은 무리들을 만났다면 이미 주살되었을 것이다." 또 말하길, "강유는 본래 한 시대의 영웅이었지만, 나를 만났기 때문에 곤궁해진 것일 뿐이다." 학식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를 비웃었다. 등애는 태위에, 종회는 사도에 임명되었는데, 내심 모반을 꾀하고 있던 종회는 오히려 등애가 모반할 조짐이 있다며 상소를 올렸다. 종회는 위관을 시켜 등애를 체포하게 하였는데, 이는 위관의 병사가 적었으므로 등애로 하여금 위관을 죽이게 하여 등애의 죄를 더하려는 계략이었다. 이를 눈치 챈 위관은 투항하는 자는 상을 내리고, 반항하는 자는 삼족을 멸하겠다는 격문을 돌려 미리 등애의 수하들을 회유한 뒤 등애를 체포하였다. 등애는 체포당하며 "나 등애는 충신이거늘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백기의 잔혹한 운명이 오늘 또 재현되었구나." 라고 탄식하였다.

  • 264년

종회는 등애가 체포된 이후 즉시 성도에 도착하여 대군을 통솔하니, 그 위세가 사뭇 대단한 것이었다. 이 때 사마소는 종회에게 등애가 복종하지 않을 지도 모르니 가충을 낙성에 보내고, 종회는 장안에 주둔할 것을 명령하였으니, 종회는 모반의 계획을 들킨 것이라 여겨 즉시 반란을 행동에 옮기고자 하였다. 종회는 황태후의 죽음을 발표하며, 사마소를 폐해야 한다는 거짓 조서를 만들어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이후 자신의 부하들을 임명하여 군사를 지휘하게 하고 나머지 장수들은 가두었다. 그런데 갇혀 있던 호열은 아들 호연에게 몰래 편지를 보내 이 사실을 알리니, 호연은 장수들을 이끌고 성으로 쳐들어가 종회와 강유를 주살한다. 종회가 죽은 후 함거에 실려가던 등애는 부하에 의해 구출되었으나, 종회와 공모하여 등애를 가둔 것을 두려워한 위관이 수하인 전속을 보내 면죽에서 등애와 아들 등충을 살해한다.

  • 265년

8월, 사마소가 55세의 나이로 죽자 태자 사마염이 뒤를 이었다. 이 때 양무현에서 거인이 목격되었는데, 그는 “지금 응당 천하가 태평하다.”고 말했다. 12월, 조환은 태보 정충에게 사마염에게 제위를 선양하겠다고 하였고, 사마염은 예의에 따라 이를 사양하다가 선양을 받아들인다. 남교에 단을 쌓고 제위를 넘겨받으니, 이로써 위나라는 멸망했고 조환의 나이 20세였다. 사마염은 연호를 바꾸고 조환을 진류왕에 봉하였다.

  1. 명제는 연왕 조우를 대장군으로 삼고, 영군장군(領軍將軍) 하후헌(夏侯獻), 무위장군(武衛將軍) 조상(曹爽), 둔기장군(屯騎校尉) 조조(曹肇), 효기장군(驍騎將軍) 진랑(秦朗)에게 섭정하도록 했다. 중서감(中書監) 유방(劉放)과 손자(孫資)는 오랫동안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진랑 등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래서 혹시 진랑 등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 하여 조우 세력을 제거할려고 몰래 꾸미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조우가 황제 곁에 있어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갑신(甲申)일에, 황제의 의식이 혼미해지자 조우는 조조(曹肇)와 상의할 일이 있다며 궐 밖으로 나가서 안 들어왔고, 황제는 얼마 동안은 오로지 조상(曹爽)하고만 같이 있게 되었다. 유방은 이것을 알고 손자와 불러서 음모를 꾸몄다. 손자가 말했다. "지금 나서는 것은 불가합니다." 유방이 대답했다. "함께 끓는 가마솥으로 들어가게 생겼는데 어찌 불가능한 게 무엇이 있겠소?" 하고는 곧바로 황제 앞으로 달려가서 엎드려 울면서 말했다. “폐하께서 이처럼 쇠약하시니 만약 피할 수 없는 일이 생긴다면 장차 천하를 누구에게 부탁하시렵니까" 황제가 말했다. "경은 연왕을 대장군으로 임용한 사실을 듣지 못했는가" 유방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선제의 조칙을 잊으셨습니까? 선제께서는 번왕(籓王)은 정사를 보필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폐하께서 막 병이 심해지시자 조조(曹肇)와 진랑(秦朗) 등이 곧바로 입궁해 궐내의 재인(才人)을 데리고 놀고 병수발을 드는 궁녀들을 말로 희롱했습니다.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아니었습니다. 또 연왕(燕王)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스스로 남면하고는 조신들은 전각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조고(趙高)와 마찬가지로 국권을 훔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황태자께서 유약하시어 정사를 통할할 수 없는데 바깥에는 강하고 난폭한 도적들이 있고 안에는 노역으로 인해 원망하는 백성들이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멀리 존망을 생각하시지 아니하시고 옛정과 온정에 얽매여 조종의 기업을 이 두세 사람에게 위탁하려 하십니다. 폐하께서 앓아누우신지 며칠 동안 안팎에 차단되어 사직이 위태로운 지경이나 이를 알지 못하시니 이는 신들이 마음 아파하는 까닭입니다.” 황제는 유방의 말을 듣자 크게 노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그럼 누가 태자를 보필할 만하오?" 유방과 손자는 이내 조상(曹爽)이 조우를 대신할 수 있다고 하면서 말했다. "마땅히 사마선왕을 불러들여서 상의하십시오." 황제는 이 말에 따르기고 했고, 유방과 손자는 밖으로 나왔다. 조조가 다시 황제에게 와서 울면서 간하였고, 황제는 다시 조조에게 명하여, (방금 전에 행했던) 칙서를 정지시키도록 하였다. 조조가 물러갔다. 유방과 손자가 다시 재빨리 들어와 황제를 다시 설득했다. 황제가 다시 유방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유방은 황제에게 말했다. "마땅히 친필로 쓴 칙서를 만드십시오." 황제가 말했다. "나는 힘이 없어서 만들 수 없소." 유방이 즉시 천자의 침상 위로 올라가 조예의 손을 잡고 힘을 주어 조서를 쓰게 했다. 유방은 조서 쓰기를 마치자 옥새를 내와 조서에 찍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연왕(燕王) 조우 등의 관직을 면하라는 조서가 있다. 조우 등은 궁성 내에 머물지 마라." 이렇게 하여, 조우, 조조, 하후헌, 진랑등은 모두 울면서 집으로 되돌아갔다. <한진춘추>
  2. 조상 등은 이승에 명해 선왕(宣王-사마의)에게 작별인사를 고하며 그의 동태를 살피게 했다. 선왕은 이승을 접견할 때, 이승은 스스로 별다른 공로도 없이 특은을 입어 본주(本州-이승이 형주 남양 출신이기에 형주를 본주라 일컬음)에 부임하여 작별인사를 드린다 했다. 선왕은 두 명의 계집종에게 부축하게 하고 옷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옷자락이 흘러내렸다. 또 위로 입을 가리켜 목마르다고 하자 계집종이 죽을 올리는데 선왕은 죽그릇을 손에 쥐고 먹는데 모두 흘러내려 가슴팍을 적셨다. 이승은 이를 사실로 여기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지금 주상이 아직 어리셔서 천하가 명공을 믿고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명공의 옛 풍질이 재발했다고 하더니 존체가 이 지경일줄 어찌 짐작했겠습니까!” 선왕은 느릿느릿 호흡을 가다듬어 겨우 말을 이었다, “나이들고 병에 걸려 죽음이 눈앞에 닥쳤소. 군이 병주(幷州)로 가거든 호(胡)와 가까우니 그들을 잘 방비해야 할 것이오. 다시 보지 못할까 두렵소이다.” 이승이 말했다, “송구스럽게도 본주로 돌아가는 것이지 병주가 아닙니다” 이에 선왕이 또 혼동하며 말했다, “군이 병주에 도착하거든 노력해서 자신의 몸을 잘 지키시오.” 혼동하여 헛소리를 계속 하자 이승이 다시 말했다, “송구스럽게도 병주가 아니라, 형주(荊州)입니다” 이에 선왕이 잘못을 깨닫고 말했다, “이 사마의가 늙어서 정신이 오락가락해 군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구려. 이제 본주 자사로 돌아가면 성덕장렬(盛德壯烈)히 공훈을 세우도록 하시오. 이제 군과 헤어지면 내 기력이 쇠해 뒤에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것이니, 내 힘으로는 주인의 예도 다하지 못하니 죽을 날이 가까웠구려. 사마사, 사마소 형제는 군과 우의로 맺어져 있으니 서로 저버리지 마시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구구한 바램이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었다. 이승 또한 크게 탄식하며 대답했다, “마땅히 가르침을 받들고, 황제의 칙명에 따르겠습니다” 이승이 작별인사하고 나와 조상과 만났다. 이승이 말했다, “태부의 말씀이 혼란스럽고 입으로는 그릇의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남쪽을 가리키면 북쪽을 보는 식입니다. 또 내가 병주로 간다고 말하기에 내가 형주로 가는 것이지 병주가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니 그제야 제가 형주로 간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또한 주인의 예도 행하지 못해 전송할 때 방에서 나오지도 못했습니다.” 다시 조상등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태부의 병환이 다시 회복되기 어려운 지경이니 애처로운 일입니다.” <위말전>
  3. “저 왕릉에게 죄가 있으면 공이 서신을 보내 저를 부르면 되지 어찌하여 몸소 오셨습니까!” 선제가 말했다, “그대는 서신으로 불러서는 오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이오.” 왕릉은 수도로 가는 길에 가규의 무덤에 들러 “가양도! 나 왕릉이 대위(大魏)의 충신임을, 그대의 신령이 있다면 잘 알 것이오!” 라고 한 뒤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조표는 죽음을 당하고, 왕릉과 영호우의 무덤이 파헤쳐졌으며, 이 일에 관련된 이들의 삼족이 처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