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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는 촉한(蜀漢)의 초대 황제이며 그의 자는 현덕(玄德)이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돗자리를 짜며 어렵게 생계를 유지했다. 조조와 같이 어느 정도 기반이 있었던 동시대 다른 인물들과 달리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능력으로만 황제까지 오른 인물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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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그는 전한(前漢) 경제의 황자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손이며 한을 부활시키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유비는 그가 세운 나라를 한으로 명명했으나 전대의 한과 구분하기 위해 촉 지역에 기반을 둔 한, 즉 촉한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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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는 [[촉|촉한(蜀漢)]]의 초대 황제이며 그의 자는 현덕(玄德)이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돗자리를 짜며 어렵게 생계를 유지했다. [[조조]]와 같이 어느 정도 기반이 있었던 동시대 다른 인물들과 달리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능력으로만 황제까지 오른 인물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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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한|전한(前漢)]] [[한 경제|경제]]의 황자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손이며 [[한]]을 부활시키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유비는 그가 세운 나라를 한으로 명명했으나 전대의 한과 구분하기 위해 촉 지역에 기반을 둔 한, 즉 [[촉|촉한(蜀漢)]]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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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적의 난부터 촉한의 건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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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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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말 황건적의 난이 발생하자 유비는 [[관우]], 장비와 거병한다. 그들과 만나 의형제를 맺은 것에서 도원결의(桃園結義)라는 성어가 생겨났다. 도원결의란 원래 삼국지에서 이 세 사람이 만나 의형제를 맺은 일화를 의미했지만 여럿이 뭉쳐 의기투합하는 것을 의미하는 쪽으로 변화했다. 이는 정사 삼국지가 아닌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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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적에 맞설 관군을 모집하는 방을 보고 난세를 탄식하던 돗자리 장수 유비에게 장비가 다가와 "사나이가 되어서 어찌 울기만 하고 있는가?"라고 물으면서 술집에 들어가서 술자리를 가진다. 여기에 의용군에 지원하려던 관우가 합세, 함께 천하를 평정하자면서 그 날로 바로 복숭아 밭에 가서 의형제를 맺고 황건적과 싸울 의병을 일으킨다. 덤으로 탁군의 청년 수백 명도 함께 도원에서 술을 마시고 의병이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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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내용은 유비를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리와 지도자의 면모가 있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에 큰 일조를 하여, 후대의 평가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 비록 이러한 장면이 정사 삼국지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다른 정사에 유추할 만한 내용이 다수 존재한다. <관우전>에 따르면 관우는 유비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함께 죽기로 맹세하였다고 언급하기도 하고 그 세 명이 잠을 잘 때도 함께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장비전>에는 [[관우]]가 장비보다 나이가 더 많아 장비가 관우를 형으로 섬겼다는 부분이 있다. 후에 관우가 [[오|오나라]]의 포로가 되고 참수당하자 유비가 원수를 갚기 위해 이릉대전을 일으킨 것만 보아도 그들의 사이가 얼마나 두터웠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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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세술 및 인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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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적의 난에서 공을 세운 유비는 처음으로 정식 관료가 되지만 공손찬, 도겸, [[조조]], 원소, 유표에게 의탁하여 이곳저곳 옮겨다니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적은 그의 사람을 끄는 면모를 보여준다. 또한 공손찬, 도겸 등에게 의탁하여 지내는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도겸의 부하 미축, 손건은 끝까지 그를 도와 [[촉|촉한(蜀漢)]]을 건국하는데 기여했다는 것도 그러한 면을 잘 나타낸다. 또한 유비와 가까이 한 사람들은 그의 인간성에 매료되었다는 정사의 내용도 다수 존재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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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 시절 노식 문하에서 수학할 때부터 개나 말, 음악, 아름다운 의복 등을 좋아했으며 호걸들과 결의를 맺기 좋아해 젊은이들이 다투어 귀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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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손찬 밑에 있을때 조운과 전예가 스스로 그에게 의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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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자 유비가 구원하러 왔었는데 유비에게 굶주린 백성 수천 명이 따라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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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표가 병세가 위독해지자 자신이 평생 일구어 온 형주를, 식객에 불과한 유비에게 넘기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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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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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는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뛰어난 인물이다. 그의 인재 등용에 대한 안목과 정성은 삼고초려(三顧草廬) 일화로 유명하다. 삼고초려란 허름한 초가집을 세 번 찾아간다는 뜻으로,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에 등장하였다. 유비가 유표 휘하에서 세력 확장의 야망을 품고 적당한 인물을 찾고 있을 때 그의 군사 서서(徐庶)가 보기 드문 재능을 가진 선비라며 제갈량을 찾아갈 것을 권하였다. 그는 힘들게 융중의 와룡강에 있는 초가집을 찾아갔지만 제갈량은 집을 비운 상태였다. 그 후 제갈량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한겨울에 눈보라를 맞으며 다시 찾아갔지만 그는 또 없었다. 세 번째로 찾아갔을 때 유비는 제갈량이 잠든 것을 보았는데, 그를 바로 깨우지 않고 근처에서 공손하게 서있었다. 그 정성에 감탄한 제갈량은 그를 따르기로 하고 손권과 연합한 뒤 [[조조]]를 칠 것을 권하였으며 훗날 유비가 [[촉|촉한(蜀漢)]]을 세우는 데 공을 세웠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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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통찰력은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성어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울며 마속을 벤다는 뜻으로, 마속을 전적으로 믿은 제갈량보다 마속을 의심한 유비의 안목이 더 옳았던 일화에서 유래했다. 유비는 마속이 말을 할 때 과장이 많으니 크게 기용할 수 없다며 제갈량에게 그를 더 살펴볼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마속과 가까운 사이이며 그를 믿은 제갈량은 1차 북벌의 지휘 책임자로 마속을 썼는데 크게 패하였고, 이를 계기로 유비가 두려워했던 [[위|위나라]]의 장수 장합은 더 세력을 키웠다. 제갈량은 사적인 감정을 버리고 그 책임을 묻기 위해서 마속을 사형시켜야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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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도 유비는 장비가 아랫사람에게 너무 가혹하게 대한다며 충고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장비는 이를 알아듣지 못하였고 부하 장달과 범강에게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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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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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릉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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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는 이릉대전에서 생애 가장 큰 패배를 겪는다. 219년 [[관우]]가 형주 공방전에서 북진하던 중 패배하고, 형주의 남군을 기습 공격한 손권의 오군에게 형주를 잃고 참수당하는 일이 일어난다. 유비는 [[관우]]의 원수를 갚고 형주를 되찾기 위해 222년 형주를 공격하였는데, 이릉에서 육손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는 700리 길이의 나무 울타리를 설치하고 그 뒤에 군을 배치하였는데, 이 방법은 기동에 제약이 생기게 하였고 육손은 이 약점을 이용하여 유비군 진영을 불태운다. 이 탓에 촉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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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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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년, 유비는 63세 되던 해 백제성에서 병사한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복수를 위해 일으킨 이릉대전의 대패와 [[관우]]와 장비의 죽음과 같은 사건으로 받은 충격을 원인으로 추정한다.  그는 죽기 전 유명한 구절을 유언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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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일을 작다고 아니하면 안되고, 악한 일은 작다고 하면 안된다. (勿以善小而不爲 勿以惡小而爲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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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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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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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비의 숙부 유원기(刘元起) “우리 집안에는 이러한 사람이 있는데 범상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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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조|조조(曹操)]] “지금 천하의 영웅은 그대(유비)와 나 조조뿐이오”, “무릇 유비는 인걸이라 지금 공격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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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등(陈登) “영웅으로서의 자태가 뛰어나고 왕의 면모가 있어 나는 유현덕을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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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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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오쩌둥|모택동]] “유비는 주로 사람을 다루는 데 능해서, 각 방면의 사람들을 단결시키는 데 뛰어나다. 그러나 그의 결점은 두 측면에서 나타난다. 첫번째는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주된 것과 부차적인 것의 갈등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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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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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위키백과 유비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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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신기(2015), “삼국지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 성격 연구”, 조형미디어학, 한국일러스트아트학회 Vol 18 No. 4, 135-145p
  
  
 
[[분류:인물]]
 
[[분류:인물]]

2017년 6월 24일 (토) 03:54 판

유비(劉備)

출생 161년
사망 223년
생존시기 삼국시대
관련 활동 정치

개요

유비는 촉한(蜀漢)의 초대 황제이며 그의 자는 현덕(玄德)이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돗자리를 짜며 어렵게 생계를 유지했다. 조조와 같이 어느 정도 기반이 있었던 동시대 다른 인물들과 달리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능력으로만 황제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는 전한(前漢) 경제의 황자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손이며 을 부활시키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유비는 그가 세운 나라를 한으로 명명했으나 전대의 한과 구분하기 위해 촉 지역에 기반을 둔 한, 즉 촉한(蜀漢)으로 부른다.

황건적의 난부터 촉한의 건국까지

도원결의

후한 말 황건적의 난이 발생하자 유비는 관우, 장비와 거병한다. 그들과 만나 의형제를 맺은 것에서 도원결의(桃園結義)라는 성어가 생겨났다. 도원결의란 원래 삼국지에서 이 세 사람이 만나 의형제를 맺은 일화를 의미했지만 여럿이 뭉쳐 의기투합하는 것을 의미하는 쪽으로 변화했다. 이는 정사 삼국지가 아닌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건적에 맞설 관군을 모집하는 방을 보고 난세를 탄식하던 돗자리 장수 유비에게 장비가 다가와 "사나이가 되어서 어찌 울기만 하고 있는가?"라고 물으면서 술집에 들어가서 술자리를 가진다. 여기에 의용군에 지원하려던 관우가 합세, 함께 천하를 평정하자면서 그 날로 바로 복숭아 밭에 가서 의형제를 맺고 황건적과 싸울 의병을 일으킨다. 덤으로 탁군의 청년 수백 명도 함께 도원에서 술을 마시고 의병이 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유비를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리와 지도자의 면모가 있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에 큰 일조를 하여, 후대의 평가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또, 비록 이러한 장면이 정사 삼국지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다른 정사에 유추할 만한 내용이 다수 존재한다. <관우전>에 따르면 관우는 유비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함께 죽기로 맹세하였다고 언급하기도 하고 그 세 명이 잠을 잘 때도 함께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장비전>에는 관우가 장비보다 나이가 더 많아 장비가 관우를 형으로 섬겼다는 부분이 있다. 후에 관우가 오나라의 포로가 되고 참수당하자 유비가 원수를 갚기 위해 이릉대전을 일으킨 것만 보아도 그들의 사이가 얼마나 두터웠는지 알 수 있다.

처세술 및 인품

황건적의 난에서 공을 세운 유비는 처음으로 정식 관료가 되지만 공손찬, 도겸, 조조, 원소, 유표에게 의탁하여 이곳저곳 옮겨다니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적은 그의 사람을 끄는 면모를 보여준다. 또한 공손찬, 도겸 등에게 의탁하여 지내는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도겸의 부하 미축, 손건은 끝까지 그를 도와 촉한(蜀漢)을 건국하는데 기여했다는 것도 그러한 면을 잘 나타낸다. 또한 유비와 가까이 한 사람들은 그의 인간성에 매료되었다는 정사의 내용도 다수 존재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청소년 시절 노식 문하에서 수학할 때부터 개나 말, 음악, 아름다운 의복 등을 좋아했으며 호걸들과 결의를 맺기 좋아해 젊은이들이 다투어 귀부했다고 한다.
* 공손찬 밑에 있을때 조운과 전예가 스스로 그에게 의탁했다.
*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자 유비가 구원하러 왔었는데 유비에게 굶주린 백성 수천 명이 따라다녔다. 
* 유표가 병세가 위독해지자 자신이 평생 일구어 온 형주를, 식객에 불과한 유비에게 넘기려 했다.

인재 등용

유비는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뛰어난 인물이다. 그의 인재 등용에 대한 안목과 정성은 삼고초려(三顧草廬) 일화로 유명하다. 삼고초려란 허름한 초가집을 세 번 찾아간다는 뜻으로,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에 등장하였다. 유비가 유표 휘하에서 세력 확장의 야망을 품고 적당한 인물을 찾고 있을 때 그의 군사 서서(徐庶)가 보기 드문 재능을 가진 선비라며 제갈량을 찾아갈 것을 권하였다. 그는 힘들게 융중의 와룡강에 있는 초가집을 찾아갔지만 제갈량은 집을 비운 상태였다. 그 후 제갈량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한겨울에 눈보라를 맞으며 다시 찾아갔지만 그는 또 없었다. 세 번째로 찾아갔을 때 유비는 제갈량이 잠든 것을 보았는데, 그를 바로 깨우지 않고 근처에서 공손하게 서있었다. 그 정성에 감탄한 제갈량은 그를 따르기로 하고 손권과 연합한 뒤 조조를 칠 것을 권하였으며 훗날 유비가 촉한(蜀漢)을 세우는 데 공을 세웠다.
뛰어난 통찰력은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는 성어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울며 마속을 벤다는 뜻으로, 마속을 전적으로 믿은 제갈량보다 마속을 의심한 유비의 안목이 더 옳았던 일화에서 유래했다. 유비는 마속이 말을 할 때 과장이 많으니 크게 기용할 수 없다며 제갈량에게 그를 더 살펴볼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마속과 가까운 사이이며 그를 믿은 제갈량은 1차 북벌의 지휘 책임자로 마속을 썼는데 크게 패하였고, 이를 계기로 유비가 두려워했던 위나라의 장수 장합은 더 세력을 키웠다. 제갈량은 사적인 감정을 버리고 그 책임을 묻기 위해서 마속을 사형시켜야 했다.
그 밖에도 유비는 장비가 아랫사람에게 너무 가혹하게 대한다며 충고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장비는 이를 알아듣지 못하였고 부하 장달과 범강에게 살해당했다.

말년

이릉대전

유비는 이릉대전에서 생애 가장 큰 패배를 겪는다. 219년 관우가 형주 공방전에서 북진하던 중 패배하고, 형주의 남군을 기습 공격한 손권의 오군에게 형주를 잃고 참수당하는 일이 일어난다. 유비는 관우의 원수를 갚고 형주를 되찾기 위해 222년 형주를 공격하였는데, 이릉에서 육손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는 700리 길이의 나무 울타리를 설치하고 그 뒤에 군을 배치하였는데, 이 방법은 기동에 제약이 생기게 하였고 육손은 이 약점을 이용하여 유비군 진영을 불태운다. 이 탓에 촉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사망

223년, 유비는 63세 되던 해 백제성에서 병사한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복수를 위해 일으킨 이릉대전의 대패와 관우와 장비의 죽음과 같은 사건으로 받은 충격을 원인으로 추정한다. 그는 죽기 전 유명한 구절을 유언으로 남겼다.

“착한 일을 작다고 아니하면 안되고, 악한 일은 작다고 하면 안된다. (勿以善小而不爲 勿以惡小而爲之)”


평가

당대의 평가

  • 유비의 숙부 유원기(刘元起) “우리 집안에는 이러한 사람이 있는데 범상치 않다”
  • 조조(曹操) “지금 천하의 영웅은 그대(유비)와 나 조조뿐이오”, “무릇 유비는 인걸이라 지금 공격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이다”
  • 진등(陈登) “영웅으로서의 자태가 뛰어나고 왕의 면모가 있어 나는 유현덕을 존경한다”

후대의 평가

  • 모택동 “유비는 주로 사람을 다루는 데 능해서, 각 방면의 사람들을 단결시키는 데 뛰어나다. 그러나 그의 결점은 두 측면에서 나타난다. 첫번째는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주된 것과 부차적인 것의 갈등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참고자료

중국 위키백과 유비 항목 민신기(2015), “삼국지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 성격 연구”, 조형미디어학, 한국일러스트아트학회 Vol 18 No. 4, 135-145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