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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國古文의 根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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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육국고문이 字形上의 기풍은 다르지만 글자의 구조에 있어서는 커다란 차이가 없다.  
 
첫째, 육국고문이 字形上의 기풍은 다르지만 글자의 구조에 있어서는 커다란 차이가 없다.  
  
둘째, 춘추시기에 齊(제)의 소국이었던 邾國의 銅器銘文을 보면, 字形이 비록 五方形으로 整齊되었지만 여전히 서주(西周) 후기 銘文의 기풍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데, 이는 서주시기의 [[금문]](金文)이 육국고문으로 발전된 것이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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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춘추시기에 齊(제)의 소국이었던 주(邾)나라의 청동기 명문(銘文)을 보면, 자형(字形)이 비록 오방형(五方形)으로 整齊되었지만 여전히 서주(西周) 후기 銘文의 기풍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데, 이는 서주시기의 [[금문]](金文)이 육국고문으로 발전된 것이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셋째, 춘추말기의 초(楚)나라 명문(銘文) 인 증희무혈호(曾姬無卹壺)의 명문(銘文)은 서방(西方)의 자형(字形)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데, 이는 당시의 동방(東方) 문자에는 서방의 字形과 같은 것도 함께 존재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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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춘추말기의 초(楚)나라 명문(銘文) 인 증희무휼호(曾姬無卹壺)의 명문(銘文)은 서방(西方)의 자형(字形)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데, 이는 당시의 동방(東方) 문자에는 서방의 字形과 같은 것도 함께 존재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2021년 3월 20일 (토) 01:34 판

개요

春秋战国.png

고문(古文)은 육국고문(六國古文) 혹은 육국문자(六國文字)라고 하며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진(秦)나라를 제외한 동쪽의 六國에서 사용한 한자를 가리킨다.

六國古文의 정의

전국시대에는 각 나라별로 한자 자형이 복잡하게 변화하였다. 일곱 개의 제후국이 각각의 세력을 형성하며 난립하였고 한자 자형 역 시 나라별로 약간씩 다르게 발전하였다.

그 중 서쪽에는 나중에 전국을 통일 한 秦나라가 자리 잡고 있었고 동쪽에는 나머지 육국(六國)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육국은 다시 春秋時代의 晉(진)이 셋으로 갈라지면서 세워진 韓(한),魏(위),趙(조) 및 燕(연)나라가 북쪽에 위치하고 동쪽에는 齊(제)나라 남쪽에는 楚(초)나라가 있었다. 서쪽의 秦나라에서 사용한 한자와 동쪽의 육국에서 사용한 한자는 자형상 차이가 컸기 때문에 전국시대의 한자 자체(字體)를 秦나라에서 사용한 진계문자(秦系文字)와 六國에서 사용한 육국문자(六國文字)로 나누고 이들을 戰國文字로 통칭하기도 한다. 여기서 진계문자(秦系文字)는 주문(籒文) 혹은 대전(大篆)이라고 부른다.

六國古文의 根源

일반적으로 육국고문을 금문이나 주문, 소전과는 완전히 다른 字體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주문(籒文)과 육국고문(六國古文)을 은주(殷周)의 명문(銘文)과 비교해보면, 字形上으로는 분명히 주문(籒文)이 육국고문에 비해 은주의 문자에 근접되어 있다. 이는 춘추전국시기의 진(秦)이 위치한 곳이 서주(西周)가 자리잡고 있었던 지역이었으므로 사회적으로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고, 이에 따라 자형(字形)의 변화가 그리 심하지 않았을 것이었지만, 반대로 동방(東方)의 육국들은 지형적으로는 서주(西周)와 멀리 떨어져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周가 동천(東遷)한 이후에는 周의 통치를 받지 않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예악(禮樂)을 정하고 율령(律令)을 정하여 시행하는 등, 비교적 독립된 사회의 운영을 하였기 때문에 언어와 문화에도 변화가 있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 육국의 고문이 殷周의 문자와 별도로 생성된 것은 결코 아니었으며, 그 변화의 과정은 서서히 일어났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육국고문이 字形上의 기풍은 다르지만 글자의 구조에 있어서는 커다란 차이가 없다.

둘째, 춘추시기에 齊(제)의 소국이었던 주(邾)나라의 청동기 명문(銘文)을 보면, 자형(字形)이 비록 오방형(五方形)으로 整齊되었지만 여전히 서주(西周) 후기 銘文의 기풍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데, 이는 서주시기의 금문(金文)이 육국고문으로 발전된 것이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셋째, 춘추말기의 초(楚)나라 명문(銘文) 인 증희무휼호(曾姬無卹壺)의 명문(銘文)은 서방(西方)의 자형(字形)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데, 이는 당시의 동방(東方) 문자에는 서방의 字形과 같은 것도 함께 존재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참고문헌

강창화, 『草書의 生成과 變遷에 關한 硏究 : 本人 作品을 中心으로』 수원대학교 미술대학원, 2007 석사논문

李圭甲, 『再論漢字字體之變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