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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다 데스유키,『문자의 발견 역사를 흔들다』, 너머북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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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다 데쓰유키,『문자의 발견 역사를 흔들다』, 너머북스, 2016.
 
#  張光直,『중국 청동기 시대 上』, 학고방, 2013.
 
#  張光直,『중국 청동기 시대 上』, 학고방, 2013.

2020년 12월 22일 (화) 21:42 판

개요

利簋.jpg

이궤는 중국국가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는 청동기로써, 국가 차원에서 출국을 금지한 64점의 귀중한 문물 중 하나다. 높이는 28센치미터이며 구경은 22센치미터이다. 윗부분은 원형에 크게 벌어진 입구에 통통한 배처럼 볼룩한 모양을 지니고 있으며, 양쪽에는 짐승의 귀와 그 귀에 귀고리가 두 개 달려 있는 모양을 가지고 있다. 아랫부분은 네모난 받침대가 있어 듬직하고 위엄이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현존하는 서주 청동기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기물이다.


궤簋란?

궤簋는 상나라에서 춘추전국시대까지 유행한 청동기 중 하나다. 주로 음식을 담는 데 사용되었으며, 벼와 수수 등을 삶아 익혀서 담았던 옛날 그릇이다. 상주商周시대에는 궤簋는 음식을 담는 그릇의 용도 이외에 중요한 예기로서 향응과 제사를 지낼 때 짝수로 배열되어 鼎정과 함께 사용되었다.

출토

1976년 3월 상순에 섬서성陝西省 임동현臨潼県의 영구공사서단대대零口公社西段大隊가 경작하던 중 동기 여러 점을 발견하였다. 보고를 받은 임동현의 문화관 관원이 현장에 도착해서 보니 출토 지점이 2만 여 제곱미터에 걸친 주나라 유적의 한 구획이었으며, 이미 출토된 뒤여서 발굴된 당시 상황은 분명하지 않지만 절벽 위에 동기가 매장되어 있던 깊이 2미터, 너비 70센치미터 크기의 움막이 있었다. 출토된 동기는 60여 점이었는데, 그 가운데 네모 반듯한 대좌台座 위에 녹청으로 뒤덮인 궤로 불리는 제기 하나가 있었다, 그릇 안쪽 바닥에는 4행 32자의 명문이 주조되어 있었으며, 이후 명문의 보이는 그릇을 제작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이 동기는 이궤로 불린 것이다.


이궤의 특징

명문

원문

利簋銘文4행 32자

珷征商, 隹甲子朝, 歲

鼎, 克䎽, 夙又商. 辛未

王在闌師錫又事利

金. 用作檀公寶尊彝.


해석

주 무왕武王께서 상商나라를 정벌하였을 때는 갑자일 아침 목성이 나타날 때 쯤이였다.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신속하게 상商나라 땅을 점령하였다. 신미일에 무왕武王께서는 ‘간’ 땅에 머무시면서 왕을 모시고 참전했던 ‘이利’에게 청동을 상으로 하사하셨다. 이를 기념하여 ‘이利’는 ‘단공檀公’의 제사에 사용할 진귀한 제기를 만들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1. 후쿠다 데쓰유키,『문자의 발견 역사를 흔들다』, 너머북스, 2016.
  2. 張光直,『중국 청동기 시대 上』, 학고방,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