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의 두 판 사이의 차이

Chines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방랑 10년(745~755))
 
(사용자 2명의 중간 판 19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8번째 줄: 8번째 줄:
 
| 성            =  
 
| 성            =  
 
| 출생일        = 701년
 
| 출생일        = 701년
| 출생지        = 쓰촨 성
+
| 출생지        = 사천성
 
| 사망일        = 762년
 
| 사망일        = 762년
 
| 사망지        = [[당나라]] 안후이 성  
 
| 사망지        = [[당나라]] 안후이 성  
24번째 줄: 24번째 줄:
 
}}
 
}}
  
이백(701년~762년)은 중국의 시인이다.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촉나라 쓰촨 성 쑤이예 출생이다.<br> [[두보]]와 함께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힌다. 이 두 사람을 합쳐서 "이두(李杜)"라고 칭하고 이백을 "시선(詩仙)"이라 부른다. 현재 약 1100여 수의 시들이 남아 있다.
+
이백과 어울리는 단어: 에너지가 넘침. 방랑벽. 낭비벽. 기분파. 허풍끼 있음. 요란함. 기발함. 다양함. 독특함. 술을 좋아함. 명예욕이 매우 강력함.<br />
 +
 
 +
이백(701년~762년)은 중국의 시인이다.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촉나라 사천성 쑤이예 출생이다.[[두보]]와 함께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힌다. 이 두 사람을 합쳐서 "이두(李杜)"라고 칭하고 이백을 "시선(詩仙)"이라 부른다. 현재 약 1100여 수의 시들이 남아 있다.
 +
 
 
==생애==
 
==생애==
 +
 
===초반기(701년~726년)===
 
===초반기(701년~726년)===
이백은 촉나라 쓰촨 성 쑤이예에서 태어났다. 25~26세에 고향을 떠날 때까지 촉 지역에 머물렀다. 이백의 촉 시절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 여기서는 아버지와 성씨, 칼과 관련된 일화, 그리고 도교 공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
이백은 촉나라 [[사천]]성 쑤이예에서 태어났다. 25~26세에 고향을 떠날 때까지 [[]] 지역에 머물렀다. 이백의 촉 시절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 여기서는 아버지와 성씨, 칼과 관련된 일화, 그리고 도교 공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
 
 
====이백의 성씨 논란====
 
====이백의 성씨 논란====
이백 아버지의 이름은 이객(李客)으로, 일반적으로 원래 그 지역 사람이 아니면서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을 '객'이라고 하는데, '타관 사람' 정도의 의미이다. 관리로 부임했거나 장사를 하기 위해 그 지역에 들어온 사람은 십 여년을 넘게 살았더라도 '객'인 것이다. 아마도 이객은 이런 이유에서 '객'으로 불렸을 것이다. 이 때, '객' 뿐만 아니라, 이백의 아버지 이객의 성씨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원래 이씨가 아니었는데 촉 지역에 들어오며 이씨로 바꾼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추측이 있는데, 이객이 본래 호인(胡人), 즉 이민족인 투르크나 혹은 다른 중앙 아시아계 민족이었는데 귀화했다는 추측과, 관헌의 수배를 받거나 원수에게 쫓겨 도주해서 성을 바꾸었다는 추측이 그것이다. 만약 이백의 아버지가 중앙 아시아 출신의 상인이었다고 한다면, 문벌을 중시하는 당시 시대적 상황에 따라 성씨를 이씨라고 말하고 다니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당시 성씨에 관한 관념은 지금 우리나라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민식과 하정우가 성씨 하나만으로 연이 맺어졌던 것처럼, 당시 중국에도 그런 풍습이 있었다. 일단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서로 친하게 지내고 상부상조하는 것이다. 아마 타지 출신의 상인이 중국에 들어와 살게 된 경우였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기 편한 선택을 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황실이 이씨였던 만큼 이씨가 가장 흔한 성씨였고, 때문에 다른 성씨가 아닌 황실의 성씨인 농서 이씨를 선택할 수 있다면 삶이 비교적 편해질 것이다. 이 탓에 이백의 성씨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이백은 평생동안 자신이 농서 이씨, 즉 황실의 친척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백의 경우에는 대체 농서 이씨의 어느 세대에 해당하는지가 불분명했고, 또 이백이 농서 이씨가 아니라 조군 이씨를 보고도 친척이라고 했다거나, 다른 계통의 이씨에게도 '종형' 혹은 '종제'라고 했다고도 한다. 즉, 실제로는 이씨가 아닌데 이씨라고 주장하고 다닌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br>
+
이백 아버지의 이름은 [[이객]](李客)으로, 일반적으로 원래 그 지역 사람이 아니면서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을 '객'이라고 하는데, '타관 사람' 정도의 의미이다. 관리로 부임했거나 장사를 하기 위해 그 지역에 들어온 사람은 십 여년을 넘게 살았더라도 '객'인 것이다. 아마도 이객은 이런 이유에서 '객'으로 불렸을 것이다. <br />
 +
이 때, '객' 뿐만 아니라, 이백의 아버지 이객의 성씨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원래 이씨가 아니었는데 촉 지역에 들어오며 이씨로 바꾼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추측이 있는데, 이객이 본래 호인(胡人), 즉 이민족인 투르크나 혹은 다른 중앙 아시아계 민족이었는데 귀화했다는 추측과, 관헌의 수배를 받거나 원수에게 쫓겨 도주해서 성을 바꾸었다는 추측이 그것이다. <br />
 +
만약 이백의 아버지가 중앙 아시아 출신의 상인이었다고 한다면, 문벌을 중시하는 당시 시대적 상황에 따라 성씨를 이씨라고 말하고 다니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당시 성씨에 관한 관념은 지금 우리나라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민식과 하정우가 성씨 하나만으로 연이 맺어졌던 것처럼, 당시 중국에도 그런 풍습이 있었다. 일단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서로 친하게 지내고 상부상조하는 것이다. <br />
 +
아마 타지 출신의 상인이 중국에 들어와 살게 된 경우였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기 편한 선택을 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황실이 이씨였던 만큼 이씨가 가장 흔한 성씨였고, 때문에 다른 성씨가 아닌 황실의 성씨인 농서 이씨를 선택할 수 있다면 삶이 비교적 편해질 것이다. 이 탓에 이백의 성씨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이백은 평생동안 자신이 농서 이씨, 즉 황실의 친척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백의 경우에는 대체 농서 이씨의 어느 세대에 해당하는지가 불분명했고, 또 이백이 농서 이씨가 아니라 조군 이씨를 보고도 친척이라고 했다거나, 다른 계통의 이씨에게도 '종형' 혹은 '종제'라고 했다고도 한다. 즉, 실제로는 이씨가 아닌데 이씨라고 주장하고 다닌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br>
  
 
====칼? 무협?====
 
====칼? 무협?====
위호의 「이한림집서」에는 이백이 "젊은 시절 협에 임하며, 여러 사람을 베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협에 임한다는 것은 사내로서 자존심을 세우거나 폭력으로 고집을 관철시키는 것에 해당한다. 이백이 칼도 휘두르고 사람도 죽여본 호걸이라는 이미지는 이 기록으로 인해 매우 유명하다. 위호는 실제로 이백과 교류했던 사람이므로, 이런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이백에게 술자리 혹은 다른 자리에서 직접 전해들었을 것이다. 만약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이백은 사람도 죽여본 살인자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사실인가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볼만하다. 예를 들어, 이백이 장안에 머물던 시절 불량배에게 둘러 쌓여 곤란을 겪고 있을 때 육조라는 사람이 나타나 불량배들을 쫓아내고 이백을 구해줬던 일화가 있다. 이에 이백이 육조에게 감사의 시를 지어바친 적이 있다. 젊은 시절 검으로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여러 사람을 베어보았다면 검술과 완력이 뛰어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항상 하인과 함께 칼을 지니고 다녔던 이백이 불량배들을 스스로 퇴치하지 못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면, 과연 검술과 완력이 뛰어난 사내였을까? 물론 정확히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검술과 완력이 뛰어나고 사람을 죽여본 것이 사실이지만 당시 상황이 여의치 않아 불량배들을 스스로 쫓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고, 반대로 불량배들을 스스로 쫓아내지는 못할 만큼 검술과 완력이 뛰어나지 않았고, 그러므로 여러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다는 말도 거짓말일 수도 있다. 이 일화에서 중요시 해야 할 것은, 이백이 진실이든 거짓말이든 간에 자신이 칼로 사람을 베고 다닌 적이 있다고 말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백은 협에 대한 찬양시를 많이 남기기도 했기 때문에, 아마 이런 것을 자랑스레 여기는 사내였음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백은 항상 하인에게 칼을 가지고 다니게 시켰고, 술자리에서는 이따금씩 검을 들고 칼춤을 추었다고 했으니 말이다.  
+
[[위호]]의 「[[이한림집서]]」에는 이백이 "젊은 시절 협에 임하며, 여러 사람을 베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협에 임한다는 것은 사내로서 자존심을 세우거나 폭력으로 고집을 관철시키는 것에 해당한다. 이백이 칼도 휘두르고 사람도 죽여본 호걸이라는 이미지는 이 기록으로 인해 매우 유명하다. <br />
 +
위호는 실제로 이백과 교류했던 사람이므로, 이런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이백에게 술자리 혹은 다른 자리에서 직접 전해들었을 것이다. 만약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이백은 사람도 죽여본 살인자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사실인가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볼만하다. 예를 들어, 이백이 장안에 머물던 시절 불량배에게 둘러 쌓여 곤란을 겪고 있을 때 [[육조]]라는 사람이 나타나 불량배들을 쫓아내고 이백을 구해줬던 일화가 있다. 이에 이백이 육조에게 감사의 시를 지어바친 적이 있다. 젊은 시절 검으로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여러 사람을 베어보았다면 검술과 완력이 뛰어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항상 하인과 함께 칼을 지니고 다녔던 이백이 불량배들을 스스로 퇴치하지 못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면, 과연 검술과 완력이 뛰어난 사내였을까? <br />
 +
물론 정확히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검술과 완력이 뛰어나고 사람을 죽여본 것이 사실이지만 당시 상황이 여의치 않아 불량배들을 스스로 쫓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고, 반대로 불량배들을 스스로 쫓아내지는 못할 만큼 검술과 완력이 뛰어나지 않았고, 그러므로 여러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다는 말도 거짓말일 수도 있다. 이 일화에서 중요시 해야 할 것은, 이백이 진실이든 거짓말이든 간에 자신이 칼로 사람을 베고 다닌 적이 있다고 말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백은 협에 대한 찬양시를 많이 남기기도 했기 때문에, 아마 이런 것을 자랑스레 여기는 사내였음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백은 항상 하인에게 칼을 가지고 다니게 시켰고, 술자리에서는 이따금씩 검을 들고 칼춤을 추었다고 했으니 말이다.
  
 
====도교 공부====
 
====도교 공부====
이백이 젊은 시절부터 도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유명하다. 신선이나 도사와 관련된 이러한 일화가 이백에게 신비하고 독특한 이미지를 불어넣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절 도교를 공부해 도사가 된다는 것이 정말 속세로부터 멀리 떨어진 죽림칠현의 모습처럼 신비한 것이었는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왜 그렇냐 하면, 우선 당시 도사가 되는 것은 우리가 대학 간판을 얻는 것처럼 대표적인 출세 루트 중 하나였다. 당나라 때 출세하는 방법에는 크게 3가지가 있었는데, ①글(시)을 잘 써서 낙하산을 타거나, ②과거 시험에 합격하거나, ③도사가 되거나 도사들과 어울리는 것 세 가지였다. 이 중에서 2번 선택지의 경우 이백은 할 수 없었다. 과거시험은 원칙적으로 누구나 응시하고 합격할 수 있는 시험이었지만, 당나라 때만 해도 일명 '빽'이 굉장히 중요했던 시절이었다. 시험관을 미리 조우하고 자신의 글 실력을 뽐내놓는 '온권'을 통해 시험 전에 눈도장을 받아야지만 합격할 수 있었다. 즉 시험관의 입김이 강했던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문벌 가문 등 권세있는 집안 출신이어야 했다.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송나라 때부터 비로소 시험지의 이름을 보지 않고 채점하게 하고, 그럼에도 필체를 보고 알 수 있으므로 한 명을 시켜 모든 시험지를 베껴 쓰게 하고, 시험기간에는 시험관이 그 누구와도 교류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의 정책을 시행하여 오늘날 '수능'과 비슷한 모습을 띠게 된 것이다. 이백이 자신이 황실의 친척이라고 주장하고 다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의 주장에 불과했다.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인맥, 가문이 중요시 되었으므로 이백은 ②과거 시험 루트가 차단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방법은 글 공부와, 도사가 되거나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었다. <br><br> 이때 도사가 되는 것은 숲속에 은거하며 권력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과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했다. 당나라 황실은 도교를 존숭했고, 도교 지도자는 조정에 자주 초청을 받아 포상이나 관직을 받았다. 천자가 도관(도교 사원)을 직접 방문하기도 하였다. 당시 도사들은 대개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부적을 팔거나 기도를 해주면서 그들의 생활과 불만을 위로하는 역할을 했기에, 천자가 도교를 존숭하며 도사와 친하게 지내며 교단을 장악해두는 것은 천자에게도 이익이 되는 장사였다. 종교 교단이 불만 많은 백성들을 조직하게 되면 황건적이나 손은의 난 같은 무서운 사례가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도사가 되려면 도사 스승에게 접근하여 가르침을 전수받아야 했다. 이백이 자랐던 촉 지역은 도교가 성행하여 도사가 많았다. 촉 지역은 산이 많고, 경제력이 풍부하여 종교인들도 먹고 살기 좋았기 때문이다. 이백은 어렸을 때부터 도교 공부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5세 때 육갑(六甲)을 배웠다", "15세에 기서(奇書)를 읽었다"고 후일 스스로 썼다. 유교에 사서삼경이 있듯, 도교에도 가르치는 책이 있었던 셈이다. 육갑이란 도교의 점치는 방법 등을 기록한 책이고, 기서란 기이한 책, 즉 정통 학문 서적 이외의 노장, 신선에 관한 책들을 말한다. 10대 후반부터는 아예 동암자라는 도사를 모시며 가르침을 전수받았다. 종합하면 이백은 글 솜씨를 다지며 낙하산을 노리거나, 동시에 도교를 공부하며 도사에게 가르침을 전수받는 두 가지 출세 루트를 착실히 밟았던 것이다.
+
이백이 젊은 시절부터 [[도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유명하다. 신선이나 도사와 관련된 이러한 일화가 이백에게 신비하고 독특한 이미지를 불어넣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절 도교를 공부해 도사가 된다는 것이 정말 속세로부터 멀리 떨어진 죽림칠현의 모습처럼 신비한 것이었는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왜 그렇냐 하면, 우선 당시 도사가 되는 것은 우리가 대학 간판을 얻는 것처럼 대표적인 출세 루트 중 하나였다. <br />
 +
당나라 때 출세하는 방법에는 크게 3가지가 있었는데, ①글(시)을 잘 써서 낙하산을 타거나, ②[[과거]] 시험에 합격하거나, ③도사가 되거나 도사들과 어울리는 것 세 가지였다. 이 중에서 2번 선택지의 경우 이백은 할 수 없었다. 과거시험은 원칙적으로 누구나 응시하고 합격할 수 있는 시험이었지만, 당나라 때만 해도 일명 '빽'이 굉장히 중요했던 시절이었다. 시험관을 미리 조우하고 자신의 글 실력을 뽐내놓는 '[[온권]]'을 통해 시험 전에 눈도장을 받아야지만 합격할 수 있었다. 즉 시험관의 입김이 강했던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문벌 가문 등 권세있는 집안 출신이어야 했다. <br />
 +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송나라 때부터 비로소 시험지의 이름을 보지 않고 채점하게 하고, 그럼에도 필체를 보고 알 수 있으므로 한 명을 시켜 모든 시험지를 베껴 쓰게 하고, 시험기간에는 시험관이 그 누구와도 교류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의 정책을 시행하여 오늘날 '수능'과 비슷한 모습을 띠게 된 것이다. <br />
 +
이백이 자신이 황실의 친척이라고 주장하고 다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의 주장에 불과했다.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인맥, 가문이 중요시 되었으므로 이백은 ②과거 시험 루트가 차단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방법은 글 공부와, 도사가 되거나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었다. <br />
 +
이때 도사가 되는 것은 숲속에 은거하며 권력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과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했다.<br />
 +
당나라 황실은 도교를 존숭했고, 도교 지도자는 조정에 자주 초청을 받아 포상이나 관직을 받았다. 천자가 도관(도교 사원)을 직접 방문하기도 하였다. 당시 도사들은 대개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부적을 팔거나 기도를 해주면서 그들의 생활과 불만을 위로하는 역할을 했기에, 천자가 도교를 존숭하며 도사와 친하게 지내며 교단을 장악해두는 것은 천자에게도 이익이 되는 장사였다. 종교 교단이 불만 많은 백성들을 조직하게 되면 [[황건적]]이나 [[손은]]의 난 같은 무서운 사례가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br />
 +
당시 도사가 되려면 도사 스승에게 접근하여 가르침을 전수받아야 했다. 이백이 자랐던 촉 지역은 도교가 성행하여 도사가 많았다. 촉 지역은 산이 많고, 경제력이 풍부하여 종교인들도 먹고 살기 좋았기 때문이다. 이백은 어렸을 때부터 도교 공부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5세 때 [[육갑]](六甲)을 배웠다", "15세에 [[기서]](奇書)를 읽었다"고 후일 스스로 썼다. 유교에 사서삼경이 있듯, 도교에도 가르치는 책이 있었던 셈이다. 육갑이란 도교의 점치는 방법 등을 기록한 책이고, 기서란 기이한 책, 즉 정통 학문 서적 이외의 노장, 신선에 관한 책들을 말한다. 10대 후반부터는 아예 동암자라는 도사를 모시며 가르침을 전수받았다. <br />
 +
종합하면 이백은 글 솜씨를 다지며 낙하산을 노리거나, 동시에 도교를 공부하며 도사에게 가르침을 전수받는 두 가지 출세 루트를 착실히 밟았던 것이다.
  
 
===구직기(726년~742년)===
 
===구직기(726년~742년)===
 +
 
====호북의 강릉====
 
====호북의 강릉====
이백은 725~726년, 즉 25~26세 될 때 촉 지역을 떠나 구직을 시작했다. 이후 742년 장안에 들어갈 때까지 16~17년 동안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다. 강소성, 안휘성, 하남성,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절강성 등 광범위한 지역을 모두 돌아다녔던 것 같은데, 우선은 장강을 따라 배로 내려가 호북의 강릉에서 도교 교단의 최고 지도자 사마승정을 만났던 듯하다. 이때 사마승정이 이백에게 '선풍도골(仙風道骨)'이 있다, 즉 신선과 도사의 풍격이 있다는 신탁을 주었는데, 듣기 좋으라고 한 빈말이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우선 도교 최고 지도자에게 칭찬을 들은 셈이었으므로 이백은 굉장히 기뻐했다. 이때 이백은 자신을 '대붕'(장자에 나오는 아주 거대한 새), 사마승정을 '희유조'(대붕보다도 더욱 거대한 새)에 비유하며 두 마리 거대한 새가 서로를 인정한다는 문장을 지었다. 이백 본인은 사마승정이 훗날 함께 넓은 하늘을 날아보자고 자신에게 전했다고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이 약속이 이백의 허풍이었는지, 아니면 빈말에 김칫국을 마셨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결국 잘 지켜지지 않았던 듯하다. 이백은 앞으로 16년간이나 낭인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
이백은 725~726년, 즉 25~26세 될 때 촉 지역을 떠나 구직을 시작했다. 이후 742년 [[장안]]에 들어갈 때까지 16~17년 동안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다. [[강소성]], [[안휘성]], [[하남성]],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절강성]] 등 광범위한 지역을 모두 돌아다녔던 것 같은데, 우선은 장강을 따라 배로 내려가 호북의 강릉에서 도교 교단의 최고 지도자 [[사마승정]]을 만났던 듯하다. 이때 사마승정이 이백에게 '선풍도골(仙風道骨)'이 있다, 즉 신선과 도사의 풍격이 있다는 신탁을 주었는데, 듣기 좋으라고 한 빈말이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우선 도교 최고 지도자에게 칭찬을 들은 셈이었으므로 이백은 굉장히 기뻐했다. <br />
 +
이때 이백은 자신을 '대붕'(장자에 나오는 아주 거대한 새), 사마승정을 '희유조'(대붕보다도 더욱 거대한 새)에 비유하며 두 마리 거대한 새가 서로를 인정한다는 문장을 지었다. 이백 본인은 사마승정이 훗날 함께 넓은 하늘을 날아보자고 자신에게 전했다고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이 약속이 이백의 허풍이었는지, 아니면 빈말에 김칫국을 마셨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결국 잘 지켜지지 않았던 듯하다. 이백은 앞으로 16년간이나 낭인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
 
 
====금릉, 양주 일대====
 
====금릉, 양주 일대====
호북의 강릉 다음으로는 금릉, 양주 일대를 돌아다녔던 것 같다. 이 지역은 남조 3백 년의 수도 지역으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중국 최대의 향락의 도시 일대를 돌아다니며 이백은 돈을 탕진했다고 한다. 본인은 30여만 금을 몰락한 귀공자를 모조리 구하느라 탕진했다고 말하지만, 정말로 그랬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본인이 직접 유흥하느라 탕진해놓고 귀공자 핑계를 대는 경우나, 정말로 몰락한 귀공자를 큰 돈을 써서 구제하는 경우나 이백이 씀씀이가 헤픈 인물이었던 것 만큼은 확실하다.
+
 
 +
호북의 강릉 다음으로는 [[금릉]], [[양주]] 일대를 돌아다녔던 것 같다. 이 지역은 [[남조]] 3백 년의 수도 지역으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중국 최대의 향락의 도시 일대를 돌아다니며 이백은 돈을 탕진했다고 한다. 본인은 30여만 금을 몰락한 귀공자를 모조리 구하느라 탕진했다고 말하지만, 정말로 그랬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본인이 직접 유흥하느라 탕진해놓고 귀공자 핑계를 대는 경우나, 정말로 몰락한 귀공자를 큰 돈을 써서 구제하는 경우나 이백이 씀씀이가 헤픈 인물이었던 것 만큼은 확실하다.
 +
 
 
====호북의 안륙====
 
====호북의 안륙====
이백은 돈을 다 쓰고 병까지 들었다고 적었는데, 그 이후 30세 무렵에는 호북의 안륙 지역에 머물렀던 모양이다. 이 때 돈도 없고 직업도 없는 사내가 어떻게 결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지역 명문가였던 허(許)씨 가문의 딸과 결혼했다. 이백이 장강을 따라 금릉으로 향하는 도중 잠시 안륙에 들러, 즉 거액의 돈이 아직 수중에 있을 때 만나서 결혼하고 다시 금릉에서 돈을 탕진한 후 초라한 행색으로 안륙에 돌아갔을 가능성도 있다. 이백이 안륙 지역에 머물 때 지은 시에서 자신이 안륙에 "돌아왔다(歸來)"고 표현했기 때문에, 진실은 그래도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추측은 꽤나 신빙성이 있다. 이백은 이 안륙 지역을 거점으로 삼아, 기본적으로는 이곳에 머물면서 때때로 근처 먼 지역까지 나가 출세길을 계속 모색했던 것 같다. 나이는 서른을 넘어 어느덧 마흔에 가까워졌는데, 이때 출세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①안륙, 양양 등 지방 고관과 친하게 지내며 접근하기, ②수주(지금의 수현)에 있던 도사 호자양의 집을 출입하며 도사들과 어울리기가 그것이다. 이때 지방의 고관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뽐내며 발탁해달라고 청하면서도 비굴하거나 권력욕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 미묘한 편지들을 써서 보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백의 경우 이 미묘한 줄타기가 끝에 가면 살짝씩 엇나가서 "당신이 청을 듣지 않는다면 두번 다시 당신을 보지 않겠다. 큰 새는 비좁은 땅을 돌아보지 않고 넓은 하늘로 나아가는 법이다"라는 등 협박조로 말할 때도 있었다. 호방함을 미묘하게 어필하려던 것이 글을 쓰다보니 솔직한 감정의 분출로 이어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뛰어난 예술가들에게는 이런 일들은 으레 있는 것으로, 가수나 배우들이 작품에 정말로 몰입하게 되면 공연이나 연기를 하는 도중 사전 계획과는 다른 애드리브나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 모습은 생각보다 많이 목격할 수 있다. 이것이 엇나가면 프로페셔널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겠지만, 뛰어난 예술가라고 칭송받는 이들은 대개 이런 면모를 지닌 경우가 많다. 자신의 감정에 과하게 몰입하여서 자신도 모르는 결과를 초래하는 행위인 것인데, 이백의 경우에도 구직이라는 행위에 있어서 굉장히 아마추어적인 실수를 범한 것이 되겠지만 이런 예술가적인 면모 덕분에 후대에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 받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 만약 정말 프로페셔널해서 구직을 청하는 시까지 미묘하게 잘 짓고 일생을 출세가도를 달렸다면 이백이 시인으로서 매력있는 인물로 다가왔을 지는 미지수다. 어쨌든, 당시 선비나 도사에게 있어서 권력을 멀리하는 것은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덕목과도 같았기 때문에 구직자들은 이 미묘한 줄타기를 연마해야 했던 것 같다. 이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백에게 '우화등선'(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라는 것도 사실은 선결조건이 있었다. 신선이 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탈속을 노래하는 것이지만, 사실 이백에게 우화등선이란 신선이 되기 전에 먼저 권세를 떨쳐야만 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이름이 없는 무명의 인물이 탈속을 노래하며 은거하겠다고 고집을 피워봤자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은거하겠다더니 왜 세상으로 나왔냐는 의문을 사게 되어 운신의 폭을 좁히기 십상이다. 때문에 우선 이름을 날리는 것이 먼저였다. 이때 이름 날리는 것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되므로, 적당히 속세에 관심을 표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는 본래 산을 좋아하니 쉽게 나서지 않는다는 이미지를 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하지만 당신의 청이니 특별히 산에서 나와주겠다"는 식의 거드름도 피울 수 있기 때문에 유리하다. 이백은 권력욕이 없고 세속을 초월한 신선이라는 이미지가 유명하지만, 사실 이백은 구직 편지를 많이 지어 보냈다. 아마 신선은 권력을 얻어 유명세를 떨친 후에 되려고 했을 것이다. "주군을 도와 공업을 이루고 나면 본래 있던 숲 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공업이 이뤄지면 옷을 털어 작별하고 신선이 사는 섬 근처에서 한가로이 살겠다", "공업이 이뤄지면 주군과 이별을 고하고 낚싯줄이나 드리우겠다"는 편지들을 보면, 우선 천자를 도와 공업을 이룩하고 미련 없이 은퇴하는 유명인의 삶을 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방 고관들에게 미묘한 줄타기를 하며 구직 편지를 보내는 루트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br><br> 위의 경우처럼 고관들에게 편지를 보내 관직을 청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른 출세길, 즉 ②호자양 등 도사들과 어울리기라는 방법도 남아있었다. 이백은 도사 호자양의 집을 출입하며 도사 원단구와 맹호연과 사귀게 되었다.
 
====낙양과 산동====
 
30대 중반이 지날 무렵에는 아예 멀리까지 나가기도 했다. 낙양은 서쪽의 수도 장안, 동쪽의 수도 낙양이라고 할 만큼 관청이 크고 발달한 곳이라 고관들도 많았다. 우선은 고관들에게 잘 보임과 동시에, 이 지역의 영산이었던 숭산에서 도사들과 어울리기 좋은 곳이었다. 이백은 그 후 제와 노 지방, 즉 산동 지방을 돌아다니다가 이 지역에 꽤 오래 살았던 것 같다. 이 때문인지 원진이나 두보 같은 사람도 이백을 산동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고 『구당서』의 이백 열전에도 산동 사람이라고 나와있다. 이백이 산동 지방에 머무를 무렵에는 이미 40세에 가까웠는데, 고향을 떠난지 어언 십여 년이 흘렀지만 이룬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굉장히 초조했던 듯하다. "나는 훌륭한 보석을 갖고 있지만, 오랫동안 더러운 진흙 속에 파묻힌 채 버려져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경멸하며, 하찮은 물건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깨끗이 닦아서 드리고 싶지만 그럴 방도가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금향현의 범 장관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편지 한 통을 화살에 매달고 쏘면 고을 하나를 떨어뜨릴 만한 사내지만, 허나 끝내 은상을 받지 못하고 시정잡배나 다름이 없어 부끄럽다", "강가의 늙은이가 나를 비웃는다"는 내용의 시도 지었다. 물론 이렇게 치욕스럽고 부끄러우며, 초조했던 나날들도 있었지만 타지를 떠돌아다니는 이백에게 따뜻한 술을 내어주며 환대해주는 집주인을 만나 기뻤던 날들도 있었다. <객중작> 이라는 시에서는 "난릉의 좋은 술엔 울금초 향이 나고 옥잔에 따르니 호박 빛을 띤다. 주인이 나를 많이 취하게만 해주면 도대체 어디를 타향이라 할 것인가" 라고 노래했다.
 
  
===장안에서의 한림원 생활(742~744)===
+
이백은 돈을 다 쓰고 병까지 들었다고 적었는데, 그 이후 30세 무렵에는 호북의 [[안륙]] 지역에 머물렀던 모양이다. 이 때 돈도 없고 직업도 없는 사내가 어떻게 결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지역 명문가였던 허(許)씨 가문의 딸과 결혼했다. <br />
40세 혹은 41세가 되었을 무렵 이백은 남쪽으로 내려가 절강의 섬계에서 도사 오균과 함께 지냈다. 도사 오균은 사마승정과 사형제였던 사람으로, 도교계의 거물이었다. 742년, 오균은 현종 황제의 초빙을 받고 장안으로 나가 한림원에 들어갔다. 오균은 원래 유학을 공부해 관리가 되려고 몇 차례나 과거를 보았지만 실패해서 도교 쪽으로 바꿔 성공했던 사람이었다. 먼저 한림원에 들어갔던 오균은 정세가 뒤숭숭해지고 조정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화를 피하기 위해 자신은 산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며 조정을 빠져나왔다. 이 과정에서 오균이 이백을 현종 황제에게 추천했다. 조정의 분위기가 뒤숭숭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몸을 보전하려고 자신이  피했던 자리에 이백을 추천한 것이다. 어쨌든 도교계 거물의 추천이었으므로 현종 황제는 이백을 초빙하였다. 이백은 이윽고 742년 43세에 현종의 칙령을 받아 한림공봉(翰林供奉)의 자리에 올라가게 되었다. 출세 루트 중 두번째 루트인 도사 루트가 성공했던 것이다. <br><br> 하지만, 이백은 한림공봉이라는 직책을 맡고도 정치적 포부를 실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①일단 한림공봉이라는 직책은 한림원에 배속된다. 한림원은 궁중에서 학문과 문학을 하는 선비들을 배치해 놓은 부서인데, 이 부서가 굉장히 애매모호한 부서였다. 이 부서에 배속되었다고 해도 관직에 올랐다는 의미는 아니었고, 딱히 정해진 직무도 없었다. 한림원의 공식적 임무는 조칙의 문안을 작성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꼭 한림원에서만 작성해야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한림원이란, 천자가 시키고 싶은 일이 있으면 부르고, 없으면 부르지 않는, 이렇다 할 직무가 없는 애매모호한 부서였다. 그래서 매일 출근할 필요도 없었다. 한림원에 배속이 됨으로써 변하는 것은, 그저 궁중도서관을 출입할 수 있게 되어 그곳에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것과, 말을 한 필 대여 받을 수 있는 정도였다. 후일 전승되기를 천자가 부를 때마다 이백이 술에 취해 있었다고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술을 좋아하는 사내라면, 직무가 딱히 없기 때문에 어디서 무얼하든 관계 없었으므로 감히 술을 마시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②이백은 종종 ‘천자를 수종(隨從)’ 하는 일을 담당했는데, 이것은 천자의 여행이나 궁중의 연회, 꽃놀이, 뱃놀이 등에 불려나가 시를 한 수 지어 바치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호화롭고 현란한 시를 지어야 했다. 하지만, 이백은 궁중의 연회나 놀이를 호화롭고 현란하며, 화려하게 묘사하는 시에는 능하지 않았다고 한다. 즉, 한림공봉은 천자를 도와 정치적 포부를 펼치는 일과는 거리가 먼 직책인데다가, 이백이 본디 능한 시가 아닌 다른 종류의 시를 지어 바쳐야했던 것이다. 그래도 이백은 직무에 충실하며 열심히 시를 지었는데, <춘일행(春日行)>,<궁중행락사(宮中行樂詞)>같은 시가 이에 해당한다고 한다. 특히 <궁중행락사>같은 경우는 이백이 가장 자신 없었던 오언율시 형식에다가, 이백의 문학적 신념과 반대되는, 육조시대의 아리땁고 고운 시어를 대량으로 구사했다고 한다. 이런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백 자신 역시 궁중 생활에 대해 회의감을 표했고, 한편으로 (회의감이 원인이 됐을 수도 있는) 항상 술에 취해있던 것이 화근이 되어 환관 고역사(高力士) 등 권문세력들의 미움을 받아 궁정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아마 반쯤은 쫓겨난 것이고, 반쯤은 자신이 그만두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
이백이 [[장강]]을 따라 금릉으로 향하는 도중 잠시 안륙에 들러, 즉 거액의 돈이 아직 수중에 있을 때 만나서 결혼하고 다시 금릉에서 돈을 탕진한 후 초라한 행색으로 안륙에 돌아갔을 가능성도 있다. <br />
 +
이백이 안륙 지역에 머물 때 지은 시에서 자신이 안륙에 "돌아왔다(歸來)"고 표현했기 때문에, 진실은 그래도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추측은 꽤나 신빙성이 있다. 이백은 이 안륙 지역을 거점으로 삼아, 기본적으로는 이곳에 머물면서 때때로 근처 먼 지역까지 나가 출세길을 계속 모색했던 것 같다. <br />
 +
나이는 서른을 넘어 어느덧 마흔에 가까워졌는데, 이때 출세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①안륙, 양양 등 지방 고관과 친하게 지내며 접근하기, ②수주(지금의 [[수현]])에 있던 도사 호자양의 집을 출입하며 도사들과 어울리기가 그것이다. <br />
 +
이때 지방의 고관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뽐내며 발탁해달라고 청하면서도 비굴하거나 권력욕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 미묘한 편지들을 써서 보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백의 경우 이 미묘한 줄타기가 끝에 가면 살짝씩 엇나가서 "당신이 청을 듣지 않는다면 두번 다시 당신을 보지 않겠다. 큰 새는 비좁은 땅을 돌아보지 않고 넓은 하늘로 나아가는 법이다"라는 등 협박조로 말할 때도 있었다. 호방함을 미묘하게 어필하려던 것이 글을 쓰다보니 솔직한 감정의 분출로 이어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br />
 +
뛰어난 예술가들에게는 이런 일들은 으레 있는 것으로, 가수나 배우들이 작품에 정말로 몰입하게 되면 공연이나 연기를 하는 도중 사전 계획과는 다른 애드리브나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 모습은 생각보다 많이 목격할 수 있다. 이것이 엇나가면 프로페셔널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겠지만, 뛰어난 예술가라고 칭송받는 이들은 대개 이런 면모를 지닌 경우가 많다. 자신의 감정에 과하게 몰입하여서 자신도 모르는 결과를 초래하는 행위인 것인데, 이백의 경우에도 구직이라는 행위에 있어서 굉장히 아마추어적인 실수를 범한 것이 되겠지만 이런 예술가적인 면모 덕분에 후대에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 받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 만약 정말 프로페셔널해서 구직을 청하는 시까지 미묘하게 잘 짓고 일생을 출세가도를 달렸다면 이백이 시인으로서 매력있는 인물로 다가왔을 지는 미지수다. <br />
 +
어쨌든, 당시 선비나 도사에게 있어서 권력을 멀리하는 것은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덕목과도 같았기 때문에 구직자들은 이 미묘한 줄타기를 연마해야 했던 것 같다. 이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백에게 '우화등선'(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라는 것도 사실은 선결조건이 있었다. <br />
 +
신선이 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탈속을 노래하는 것이지만, 사실 이백에게 우화등선이란 신선이 되기 전에 먼저 권세를 떨쳐야만 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이름이 없는 무명의 인물이 탈속을 노래하며 은거하겠다고 고집을 피워봤자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은거하겠다더니 왜 세상으로 나왔냐는 의문을 사게 되어 운신의 폭을 좁히기 십상이다. 때문에 우선 이름을 날리는 것이 먼저였다. 이때 이름 날리는 것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되므로, 적당히 속세에 관심을 표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는 본래 산을 좋아하니 쉽게 나서지 않는다는 이미지를 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하지만 당신의 청이니 특별히 산에서 나와주겠다"는 식의 거드름도 피울 수 있기 때문에 유리하다. 이백은 권력욕이 없고 세속을 초월한 신선이라는 이미지가 유명하지만, 사실 이백은 구직 편지를 많이 지어 보냈다. 아마 신선은 권력을 얻어 유명세를 떨친 후에 되려고 했을 것이다. "주군을 도와 공업을 이루고 나면 본래 있던 숲 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공업이 이뤄지면 옷을 털어 작별하고 신선이 사는 섬 근처에서 한가로이 살겠다", "공업이 이뤄지면 주군과 이별을 고하고 낚싯줄이나 드리우겠다"는 편지들을 보면, 우선 천자를 도와 공업을 이룩하고 미련 없이 은퇴하는 유명인의 삶을 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방 고관들에게 미묘한 줄타기를 하며 구직 편지를 보내는 루트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br />
 +
위의 경우처럼 고관들에게 편지를 보내 관직을 청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른 출세길, 즉 ②호자양 등 도사들과 어울리기라는 방법도 남아있었다. 이백은 도사 호자양의 집을 출입하며 도사 [[원단구]]나 [[맹호연]] 같은 시인과 사귀게 되었다.
 +
 
 +
====[[낙양]]과 [[산동]]====
 +
 
 +
30대 중반이 지날 무렵에는 아예 멀리까지 나가기도 했다. 낙양은 서쪽의 수도 장안, 동쪽의 수도 낙양이라고 할 만큼 관청이 크고 발달한 곳이라 고관들도 많았다. 우선은 고관들에게 잘 보임과 동시에, 이 지역의 영산이었던 숭산에서 도사들과 어울리기 좋은 곳이었다. <br />
 +
이백은 그 후 제와 노 지방, 즉 산동 지방을 돌아다니다가 이 지역에 꽤 오래 살았던 것 같다. 이 때문인지 원진이나 두보 같은 사람도 이백을 산동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고 『[[구당서]]』의 이백 열전에도 산동 사람이라고 나와있다. <br />
 +
이백이 산동 지방에 머무를 무렵에는 이미 40세에 가까웠는데, 고향을 떠난지 어언 십여 년이 흘렀지만 이룬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굉장히 초조했던 듯하다. "나는 훌륭한 보석을 갖고 있지만, 오랫동안 더러운 진흙 속에 파묻힌 채 버려져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경멸하며, 하찮은 물건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깨끗이 닦아서 드리고 싶지만 그럴 방도가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금향현의 범 장관에게 보내기도 했다. <br />
 +
그리고 "나는 편지 한 통을 화살에 매달고 쏘면 고을 하나를 떨어뜨릴 만한 사내지만, 허나 끝내 은상을 받지 못하고 시정잡배나 다름이 없어 부끄럽다", "강가의 늙은이가 나를 비웃는다"는 내용의 시도 지었다. 물론 이렇게 치욕스럽고 부끄러우며, 초조했던 나날들도 있었지만 타지를 떠돌아다니는 이백에게 따뜻한 술을 내어주며 환대해주는 집주인을 만나 기뻤던 날들도 있었다. <객중작> 이라는 시에서는 "난릉의 좋은 술엔 울금초 향이 나고 옥잔에 따르니 호박 빛을 띤다. 주인이 나를 많이 취하게만 해주면 도대체 어디를 타향이라 할 것인가" 라고 노래했다.
 +
 
 +
===장안에서의 [[한림원]] 생활(742~744)===
 +
 
 +
40세 혹은 41세가 되었을 무렵 이백은 남쪽으로 내려가 [[절강]]의 [[섬계]]에서 도사 [[오균]]과 함께 지냈다. 도사 오균은 사마승정과 사형제였던 사람으로, 도교계의 거물이었다. 742년, 오균은 현종 황제의 초빙을 받고 장안으로 나가 한림원에 들어갔다. 오균은 원래 유학을 공부해 관리가 되려고 몇 차례나 과거를 보았지만 실패해서 도교 쪽으로 바꿔 성공했던 사람이었다. 먼저 한림원에 들어갔던 오균은 정세가 뒤숭숭해지고 조정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화를 피하기 위해 자신은 산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며 조정을 빠져나왔다. 이 과정에서 오균이 이백을 [[현종]] 황제에게 추천했다. <br />
 +
조정의 분위기가 뒤숭숭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몸을 보전하려고 자신이  피했던 자리에 이백을 추천한 것이다. 어쨌든 도교계 거물의 추천이었으므로 현종 황제는 이백을 초빙하였다. <br />
 +
이백은 이윽고 742년 43세에 현종의 칙령을 받아 [[한림공봉]](翰林供奉)의 자리에 올라가게 되었다. 출세 루트 중 두번째 루트인 도사 루트가 성공했던 것이다. <br />
 +
하지만, 이백은 한림공봉이라는 직책을 맡고도 정치적 포부를 실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①일단 한림공봉이라는 직책은 한림원에 배속된다. 한림원은 궁중에서 학문과 문학을 하는 선비들을 배치해 놓은 부서인데, 이 부서가 굉장히 애매모호한 부서였다. 이 부서에 배속되었다고 해도 관직에 올랐다는 의미는 아니었고, 딱히 정해진 직무도 없었다. <br />
 +
한림원의 공식적 임무는 조칙의 문안을 작성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꼭 한림원에서만 작성해야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한림원이란, 천자가 시키고 싶은 일이 있으면 부르고, 없으면 부르지 않는, 이렇다 할 직무가 없는 애매모호한 부서였다. 그래서 매일 출근할 필요도 없었다. 한림원에 배속이 됨으로써 변하는 것은, 그저 궁중도서관을 출입할 수 있게 되어 그곳에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것과, 말을 한 필 대여 받을 수 있는 정도였다. 후일 전승되기를 천자가 부를 때마다 이백이 술에 취해 있었다고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술을 좋아하는 사내라면, 직무가 딱히 없기 때문에 어디서 무얼하든 관계 없었으므로 감히 술을 마시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을 수도 있다. <br />
 +
이런 상황에서, ②이백은 종종 ‘천자를 수종(隨從)’ 하는 일을 담당했는데, 이것은 천자의 여행이나 궁중의 연회, 꽃놀이, 뱃놀이 등에 불려나가 시를 한 수 지어 바치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호화롭고 현란한 시를 지어야 했다. <br />
 +
하지만, 이백은 궁중의 연회나 놀이를 호화롭고 현란하며, 화려하게 묘사하는 시에는 능하지 않았다고 한다. 즉, 한림공봉은 천자를 도와 정치적 포부를 펼치는 일과는 거리가 먼 직책인데다가, 이백이 본디 능한 시가 아닌 다른 종류의 시를 지어 바쳐야했던 것이다. 그래도 이백은 직무에 충실하며 열심히 시를 지었는데, <춘일행(春日行)>,<궁중행락사(宮中行樂詞)>같은 시가 이에 해당한다고 한다. 특히 <궁중행락사>같은 경우는 이백이 가장 자신 없었던 [[오언율시]] 형식에다가, 이백의 문학적 신념과 반대되는, [[육조시대]]의 아리땁고 고운 시어를 대량으로 구사했다고 한다. <br />
 +
이런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백 자신 역시 궁중 생활에 대해 회의감을 표했고, 한편으로 (회의감이 원인이 됐을 수도 있는) 항상 술에 취해있던 것이 화근이 되어 환관 [[고역사|고력사]](高力士) 등 권문세력들의 미움을 받아 궁정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아마 반쯤은 쫓겨난 것이고, 반쯤은 자신이 그만두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유랑기(744~755)===
 
===유랑기(744~755)===
 +
 
====두보와의 여행(744~745)====
 
====두보와의 여행(744~745)====
사직 후에 자신의 친구이자 시(詩)적 라이벌인 [[두보]]와 함께 낙양에서 산둥까지 여행하였다. 이때 이백의 나이 44세, 두보의 나이 33세였다. 이백은 이미 문단에서 글로 유명했던 인물이었지만, 두보는 신인 격으로 이제 막 두각을 나타낼 때였다. 고작 일년 남짓한 기간을 함께 여행했지만, 일생 동안 서로 주고받은 편지들을 통해 둘 사이가 꽤 돈독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백이 시를 통해 교우한 사람의 총수는 400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백의 두보에 대한 시는 4수가 남아 있고, 두보의 이백에 대한 시는 15수가 남아 있다. 두보가 이백을 좀 더 존경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백이 한번 떠난 지역이나 사람은 좀처럼 되돌아보지 않는 성격임을 감안하면 잠깐 만난 두보에 대해 4수나 지은 것이 오히려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br><br> 당시 이백은 장안에서 끝내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던 상황이었고, 두보는 과거 시험에 낙방하여 실의에 빠져있던 상황으로 둘 모두 유랑하는 신세이며 정치적으로 이룬 것이 아직 없을 때였다. 이 무렵 이백이 지은 시 <추엽맹제야귀치주선보동루관기>에서는 속세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호방함과 동시에 다시 천거되기를 바라는 출사에 대한 마음이 동시에 느껴진다.
+
 
 +
사직 후에 자신의 친구이자 시(詩)적 라이벌인 [[두보]]와 함께 낙양에서 산둥까지 여행하였다. 이때 이백의 나이 44세, 두보의 나이 33세였다. <br />
 +
이백은 이미 문단에서 글로 유명했던 인물이었지만, 두보는 신인 격으로 이제 막 두각을 나타낼 때였다. 고작 일년 남짓한 기간을 함께 여행했지만, 일생 동안 서로 주고받은 편지들을 통해 둘 사이가 꽤 돈독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br />
 +
이백이 시를 통해 교우한 사람의 총수는 400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백의 두보에 대한 시는 4수가 남아 있고, 두보의 이백에 대한 시는 15수가 남아 있다. 두보가 이백을 좀 더 존경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백이 한번 떠난 지역이나 사람은 좀처럼 되돌아보지 않는 성격임을 감안하면 잠깐 만난 두보에 대해 4수나 지은 것이 오히려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br />
 +
당시 이백은 장안에서 끝내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던 상황이었고, 두보는 과거 시험에 낙방하여 실의에 빠져있던 상황으로 둘 모두 유랑하는 신세이며 정치적으로 이룬 것이 아직 없을 때였다. 이 무렵 이백이 지은 시 <추엽맹제야귀치주선보동루관기>에서는 속세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호방함과 동시에 다시 천거되기를 바라는 출사에 대한 마음이 동시에 느껴진다.
 +
 
 
====방랑 10년(745~755)====
 
====방랑 10년(745~755)====
745년 가을 석문에서 두보와 헤어진 후 이백은 병을 얻어 누웠다. 이듬해 병석에서 일어나 강남으로 길을 떠났다. 이백은 이후 755년까지 세 곳에 거점을 두고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산동의 연주, 하남성 황하 강변 지역인 낙양, 그리고 환남 지방인 남릉이나 금릉, 양주 등이었다. 이 무렵 이백의 심정은 "서리는 머리에 내려 사내를 놀라게 하고, 눈물은 쫓겨난 신하(축신)의 의복을 흠뻑 적신다", "슬픔에 잠겨 출새의 곡을 들으니, 눈물은 축신의 갓끈을 적신다"는 시구들에서 잘 드러난다. 자신을 쫓겨난 신하로 표현하면서 늙음과 눈물을 노래했다. 이 시기 이백 본인은 계속 속세를 떠나 산으로 들어가 선약을 제조하거나 호숫가에 배를 띄우겠다는 등의 시를 썼지만, 정작 행선지는 도시를 위주로 이루어졌었다. 이백은 일반적인 은퇴한 관리처럼 쌓아 놓은 토지나 재산이 없었고, 방랑하던 습성이 있어서 어떤 후원자가 토지를 주고 그곳에서 농민들을 감독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여도 쉽사리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때문에 이백은 '손님'으로서 도시 여기저기를 옮겨다니며 지냈던 것 같다. 당시 이백이 되려고 했던 '손님'이란, 지방 고관에게는 사설 비서이자 정치 참모이면서 동시에 학문이나 문학을 논할 수 있는 상대를 말한다. 지방관은 보통 혼자서 낯선 타지에 부임하기 때문에 자신의 개인적인 심복이나 사적인 벗을 필요로 했는데,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존재가 바로 '손님'이었다. 지방관은 수입이 매우 풍족했기 때문에 5명에서 10명 정도를 개인적으로 먹여 살리는 일 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지방관 입장에서도 뛰어난 '손님'들과 많이 교우하는 것은 이득이었다. 다른 지방관들 사이에서 자신의 품위도 자랑할 수 있고 학식이 높다는 명성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손님'의 입장에서는 공문서나 편지를 대필해주거나, 지방관의 술 상대가 되어주거나, 연회 등 행사 때 모셔주다가 만약 지방관이 중앙으로 승진하면 자신도 덩달아 관직을 얻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만약 그런 행운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일단 먹고 자는 문제는 해결될 수 있었다. 이백도 이러한 기회를 노리고 도시에서 도시 사이로 움직이며, 지방관들에게 접근했던 것 같다. <br><br> 일단 이백은 이미 시인으로서 명성이 있었기 때문에, 어디를 가더라도 지방관이 대놓고 홀대하지는 않았다. 일단 들르면 적어도 며칠에서 몇 달 정도는 머물게 해주었고, 떠날 때는 어느 정도 돈도 챙겨주었다. 이백은 이 시기에 지방관들에게 보내는 데에 이용했던 시들을 많이 지었다. 그 시들은 대체로 내용이 같다. "당신이 계신 곳에는 농작물도 잘 자라고, 백성들은 당신을 칭송한다. 부랑자들이 소문을 듣고 이곳으로 몰려오고, 문을 열어놓고 잠을 자도 도둑이 들지 않는다. 형벌할 때 쓰는 몽둥이는 쓸 데가 없다." 등의 내용이다. 이 시들은, 지명이나 인명을 서로 바꾸더라도 딱히 문제가 없을 만큼 비슷했다. 실제로 시를 받는 상대가 누구인지는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일화를 들으면 이백에 대한 환상이 다소 깨지는 감이 있겠지만, 오히려 이 시기에 이백의 걸작들도 많이 쏟아졌다. 사실 '손님'으로 이 도시 저 도시를 옮겨다니며 얻어 먹고 다니는 것은 걸식 혹은 기식 생활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비참한 것이었다. 특히 장안에서 천자에게 쫓겨났다는 사실은 자존심이 강했던 이백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 특히 이백의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의 강렬함과, 반대로 자아추구가 좌절되며 나타나는 탈주, 탈속에 대한 의지, 동시에 한편으로는 여전히 체제의 내부를 지향하는 모순된 고뇌가 담긴 걸작들이 많다. 인생의 유한함, 부귀공명의 허망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 순간을 즐기자', 슬픔을 술이나 자연물 등을 통해 극복하자는 주제를 기발하고 독특한 상상력을 통해 노래한 것인데, 많은 사람들은 이백 시의 백미가 여기에 있다고 평가한다. <br><br> 그렇게 여기 저기를 다니며 '손님'이 되고자 노력하던 중 안사의 난 직전, 선주 장관이 경질되어 조열이라는 사람이 부임했다. 이백은 일찍이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있어서 즉시 발탁을 청했다. 이것이 성공해서 이백은 조열의 '손님'이 되는 데에 성공했다. 조열이 별관을 지었을 때 이백이 쓴 비문과 이백이 대필한, 양국충에게 보내는 편지가 남아있다. 하지만, 드디어 안정된 지위를 얻었다고 생각하던 찰나 안사의 난이 발발했다.
 
  
===안사의 난 이후(755~762)===
+
745년 가을 석문에서 두보와 헤어진 후 이백은 병을 얻어 누웠다. 이듬해 병석에서 일어나 강남으로 길을 떠났다.<br />
54세에 다시 강남으로 돌아와 56세에 현종의 16번째 아들인 영왕 인(永王 璘)의 군대에 참여하였으나 영왕의 군대가 숙종에 의해 반란군으로 지목되어 군대에 함께 있던 이백도 지금의 구이저우 성인 야랑(夜郞)에 유배되었다.  
+
이백은 이후 755년까지 세 곳에 거점을 두고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산동의 연주, 하남성 황하 강변 지역인 낙양, 그리고 환남 지방인 남릉이나 금릉, 양주 등이었다. <br />
그러나 759년 다행히도 삼협(三峽) 부근까지 갔을 때에 숙종의 은사(恩赦)를 받아 다시 강남으로 돌아왔다.<br>
+
이 무렵 이백의 심정은 "서리는 머리에 내려 사내를 놀라게 하고, 눈물은 쫓겨난 신하(축신)의 의복을 흠뻑 적신다", "슬픔에 잠겨 출새의 곡을 들으니, 눈물은 축신의 갓끈을 적신다"는 시구들에서 잘 드러난다. 자신을 쫓겨난 신하로 표현하면서 늙음과 눈물을 노래했다. 이 시기 이백 본인은 계속 속세를 떠나 산으로 들어가 선약을 제조하거나 호숫가에 배를 띄우겠다는 등의 시를 썼지만, 정작 행선지는 도시를 위주로 이루어졌었다. <br />
760년 가을부터는 강남의 각지를 유람하였고, 2년 뒤 762년에 안후이 성 당도(安徽省 當塗)의 현령(縣令)이었던 종숙 이양빙(李陽冰)의 집에서 사망하였다.
+
이백은 일반적인 은퇴한 관리처럼 쌓아 놓은 토지나 재산이 없었고, 방랑하던 습성이 있어서 어떤 후원자가 토지를 주고 그곳에서 농민들을 감독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여도 쉽사리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때문에 이백은 '손님'으로서 도시 여기저기를 옮겨다니며 지냈던 것 같다. <br />
 +
당시 이백이 되려고 했던 '손님'이란, 지방 고관에게는 사설 비서이자 정치 참모이면서 동시에 학문이나 문학을 논할 수 있는 상대를 말한다. 지방관은 보통 혼자서 낯선 타지에 부임하기 때문에 자신의 개인적인 심복이나 사적인 벗을 필요로 했는데,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존재가 바로 '손님'이었다. 지방관은 수입이 매우 풍족했기 때문에 5명에서 10명 정도를 개인적으로 먹여 살리는 일 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지방관 입장에서도 뛰어난 '손님'들과 많이 교우하는 것은 이득이었다. 다른 지방관들 사이에서 자신의 품위도 자랑할 수 있고 학식이 높다는 명성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손님'의 입장에서는 공문서나 편지를 대필해주거나, 지방관의 술 상대가 되어주거나, 연회 등 행사 때 모셔주다가 만약 지방관이 중앙으로 승진하면 자신도 덩달아 관직을 얻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만약 그런 행운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일단 먹고 자는 문제는 해결될 수 있었다. 이백도 이러한 기회를 노리고 도시에서 도시 사이로 움직이며, 지방관들에게 접근했던 것 같다.<br />
 +
일단 이백은 이미 시인으로서 명성이 있었기 때문에, 어디를 가더라도 지방관이 대놓고 홀대하지는 않았다. 일단 들르면 적어도 며칠에서 몇 달 정도는 머물게 해주었고, 떠날 때는 어느 정도 돈도 챙겨주었다. 이백은 이 시기에 지방관들에게 보내는 데에 이용했던 시들을 많이 지었다. 그 시들은 대체로 내용이 같다. "당신이 계신 곳에는 농작물도 잘 자라고, 백성들은 당신을 칭송한다. 부랑자들이 소문을 듣고 이곳으로 몰려오고, 문을 열어놓고 잠을 자도 도둑이 들지 않는다. 형벌할 때 쓰는 몽둥이는 쓸 데가 없다." 등의 내용이다.<br />
 +
이 시들은, 지명이나 인명을 서로 바꾸더라도 딱히 문제가 없을 만큼 비슷했다. 실제로 시를 받는 상대가 누구인지는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일화를 들으면 이백에 대한 환상이 다소 깨지는 감이 있겠지만, 오히려 이 시기에 이백의 걸작들도 많이 쏟아졌다. 사실 '손님'으로 이 도시 저 도시를 옮겨다니며 얻어 먹고 다니는 것은 걸식 혹은 기식 생활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비참한 것이었다. 특히 장안에서 천자에게 쫓겨났다는 사실은 자존심이 강했던 이백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br />
 +
이 시기에 특히 이백의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의 강렬함과, 반대로 자아추구가 좌절되며 나타나는 탈주, 탈속에 대한 의지, 동시에 한편으로는 여전히 체제의 내부를 지향하는 모순된 고뇌가 담긴 걸작들이 많다. 인생의 유한함, 부귀공명의 허망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 순간을 즐기자', 슬픔을 술이나 자연물 등을 통해 극복하자는 주제를 기발하고 독특한 상상력을 통해 노래한 것인데, 많은 사람들은 이백 시의 백미가 여기에 있다고 평가한다.<br />
 +
그렇게 여기 저기를 다니며 '손님'이 되고자 노력하던 중 안사의 난 직전, 선주 장관이 경질되어 조열이라는 사람이 부임했다. 이백은 일찍이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있어서 즉시 발탁을 청했다. 이것이 성공해서 이백은 조열의 '손님'이 되는 데에 성공했다. 조열이 별관을 지었을 때 이백이 쓴 비문과 이백이 대필한, 양국충에게 보내는 편지가 남아있다. 하지만, 드디어 안정된 지위를 얻었다고 생각하던 찰나 안사의 난이 발발했다.
 +
 
 +
===[[안사의 난]] 이후(755~762)===
 +
 
 +
환남 지방에 있던 이백이 안사의 난(755) 소식을 들은 것은 756년 초였던 듯하다. 이백은 당시 산동 지방에 있던 아들을 걱정하여 사람을 보내 아들을 챙기도록 하는 동시에, 본인은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남쪽으로 피난했다. <br />
 +
이백은 선성 현령에게 보내는 시에서 자신은 우선 "남산의 표범에게 배우기로 했다(남산의 표범은 비가 올 때는 털이 젖지 않게 하려고 밖으로 나오지 않고 숨어 있는다)"며, 자신도 안전을 도모하며 숨어 있겠다고 전했다. <br />
 +
당시 안사의 난으로 장안이 함락되자 현종은 측근만을 데리고 서쪽으로 피신해 촉 지역에 도달했고, 그 와중에 숙종은 이민족 위구르의 지원을 받기 위해 감숙의 영무로 갔다가 아버지 현종과 연락도 없이 제멋대로 황제가 되었다. 숙종의 즉위 이후 촉의 깊은 산중에 있던 현종은 실질적으로 정치적 힘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나, 촉 지역에 도착하자 아들인 [[영왕 인]]을 강릉 대도독에 임명하며 강남 지방 제압을 명했다. <br />
 +
이는 이미 힘을 잃은 현종 측의 비장의 카드였다. 이때 영왕의 군대가 이백을 참모로 불렀다. 이백의 <왕판관에게 주다>는 시를 보면, "대악당이 국토를 강탈했고, 나는 천하를 구할 힘이 있지는 않아서 노산에 숨어있다. 넓은 하늘을 바라보니 그대를 만나고 싶어 참을 수가 없지만, 내일 아침이면 나는 여기를 떠나 갈매기 무리로 들어가버릴 것이다" 라고 노래하며 자신을 빨리 불러달라는 듯이 넌지시 전하고 있다. <br />
 +
이백 본인은 영왕이 자신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이백 쪽에서도 불러 달라는 공작을 했던 것이다. 이백의 입장에서 이 기회는 장안에서 쫓겨난 후 자아추구, 즉 정치적 희망이 없었던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돌파구였다. 이백은 이 시기에 군가와 같이 위풍당당한 군대의 모습에 대해서 시를 짓거나 막료들의 연회에 따라가 시를 짓는 역할을 했다. <영왕동순가>를 보면 의기양양하고 시원한 작풍이 드러난다. <br />
 +
 
 +
영왕의 군대가 숙종에 의해 번번히 패하고, 장군들은 승기가 없다고 판단하여 군사들을 데리고 도망쳤다. 영왕의 군대는 숙종에 의해 반란군으로 지목되어 군대에 함께 있던 이백도 붙잡혔다. 반란은 대역죄에 해당했으므로, 가만히 있다가는 사형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br />
 +
이백은 이미지와는 다르게 정말 열성적으로 자신뿐 아니라 아내까지 불러들여 고관들에게 도와달라는 탄원을 돌렸다. 이백의 입장에서는 그저 관군이라고 생각해서 가담했을 수도 있지만, 감옥에서 미친듯이 고관들에게 돌린 탄원서들을 보면 속세를 초탈하는 노래를 짓던 시선(詩仙), 은사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다. 이백은 적군인지 몰랐다는 변명이 통하지 않자 나중에는 자신이 협박을 받아서 억지로 따라가게 되었다고 했고, 그래서 도중에 군대에서 이탈해 도망쳤지만 억울하게 붙잡혔다고 한결같이 주장했다. <br />
 +
이 소식은 심지어 사천에 있던 두보에게까지 전해졌던 듯하다. 두보는 "이백을 못 본지 오래 됐다. 미치광이 노릇을 하고 있다니 매우 애처롭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죽이라 하지만, 그 재능을 아까워하는 이는 나 한 사람 뿐"이라는 내용의 시를 지었다. 이백의 평판은 그만큼 좋지 않은 방식으로 널리 퍼졌던 것이다. <br />
 +
운이 좋게도 송약사라는 사람이 이백을 위해 힘 써주고 숙종에게 관직 추천장을 제출했는데, 이 추천장도 사실 이백이 대필했다고 한다. 즉 자신의 추천장을 자신이 쓴 셈이다. 이 추천장에는 "나 송약사가 곁에 두고 있는 이 사내 이백(사실 이백이 본인이 쓴 것이다)은 협박을 받고 영왕의 군대를 따라 다니다가 도중에 간신히 빠져나온 것이므로 잘못이 없으며, 재주가 뛰어나 전설상의 현인에 버금간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있었다. <br />
 +
하지만 이러한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백은 지금의 [[구이저우]] 성인 [[야랑]](夜郞)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759년 다행히도 삼협(三峽) 부근까지 갔을 때에 숙종의 은사(恩赦)를 받아 다시 강남으로 돌아왔다.<br />
 +
말년에는 에너지가 사방으로 분출되고 범람하여 요란한 시풍보다는, 자신과 주변을 되돌아보고 인간이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감사하고 축복하게 만드는 시들이 특징이다. 760년 가을부터는 강남의 각지를 유람하였고, 2년 뒤 762년에 안후이 성 당도(安徽省 當塗)의 현령(縣令)이었던 종숙 이양빙(李陽冰)의 집에서 사망하였다.
  
 
==작품==
 
==작품==
대표적으로 산중문답(山中問答)과 청평조사(淸平調詞)가 있다. 그는 절구와 고시를 특기로 한 시인으로서 그의 시는 스케일이 크고 자유분방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
 
 +
대표적으로 산중문답(山中問答)과 청평조사(淸平調詞)가 있다. 그는 절구와 고시를 특기로 한 시인으로서 그의 시는 스케일이 크고 자유분방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백은 다른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입신출세에 입각하여 국사에 관심을 가지고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등 적극성을 보여주었으나 그의 정치적인 활동은 모두 실패하였다. <br />
 +
이로 인한 좌절감은 한편으로 탈속을 추구하게 만들지만 한편으로는 체제 내부에 포함되고 싶은 모순된 감정을 낳았다. 그 와중에, 이백은 명산을 찾아 유람하는 등 자연을 좋아했다. 때문에 이백은 산수 자연을 읊거나, 출세를 위해 지방관리들에게 바치는 시들을 지었다. 도교에 심취하여 신선을 추구하거나, 도사들과의 교우를 묘사한 현실 초월적인 시들도 상당수다.
 +
 
 +
아래는 이백의 작품들을 다음 카테고리에 묶어 정리하면 한 눈에 보기 좋다고 생각하여 적어놓은 것이다. 이백의 시가 다음 중 꼭 하나의 카테고리에만 해당되지 않고, 말하는 바가 여러 카테고리에 걸치는 경우가 많겠지만 우선 크게 보면 다음과 같이 분류해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카테고리에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작품들이 추가되었으면 좋겠다.
 +
 
 +
*산수 자연을 읊은 시 : <북산에서 홀로 술을 마시며 위씨에게 부치다>, <홀로 경정산에 앉아>
 +
*출세를 위해 지방관리들에게 바친 시 : <금향현 범 장관에게 드림>
 +
*도교에 심취, 신선을 추구하는 시 : <고풍 59수> 중 제41수, <아미산에 오르다>, <신선을 그리워하다>
 +
*도사들과의 교우를 묘사하거나, 현실 초월적인 시 : <은좌명께서 오운구를 주신 것에 보답하다>, <왕익 보궐과 송체 혜장태자묘승이 헤어지면서 준 시에 답하다>
 +
*이백의 정치적 포부, 참여의 욕구가 드러나는 시 : <광릉의 여러 공들을 떠나다>, <고시를 본뜨다 12수>, <한림원에서 글을 읽다 감회를 말하여 집현전 학사들에게 주다>, <서역 사람이 피리 부는 것을 보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 <<이백(영원한 대자연인)>>, 안치, 신하윤 외 옮김, 이끌리오
+
* 안치, 신하윤 외 옮김, 『이백(영원한 대자연인)』,  이끌리오
 +
* 다카시마 도시오 지음, 『이백, 두보를 만나다』, 이원규 옮김, 심산
 +
*  임도현 지음, 『쫓겨난 신선 이백의 눈물』,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
* 이해원 지음, 『이백의 삶과 문학』,  고려대학교 출판부
 +
 
 
[[분류:당나라| ]]
 
[[분류:당나라| ]]
 
[[분류:인물]]
 
[[분류:인물]]

2018년 6월 28일 (목) 19:23 기준 최신판

이백
李白

출생 701년
사천성
사망 762년
당나라 안후이 성
국적 나라
별칭 자(字)는 태백(太白, 타이바이)
호(號)는 청련거사(靑蓮居士)
별명(別名)은 시선
직업 시 (문학)
종교 도교
주요 작품 산중문답(山中問答)
청평조사(淸平調詞)

이백과 어울리는 단어: 에너지가 넘침. 방랑벽. 낭비벽. 기분파. 허풍끼 있음. 요란함. 기발함. 다양함. 독특함. 술을 좋아함. 명예욕이 매우 강력함.

이백(701년~762년)은 중국의 시인이다.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촉나라 사천성 쑤이예 출생이다.두보와 함께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힌다. 이 두 사람을 합쳐서 "이두(李杜)"라고 칭하고 이백을 "시선(詩仙)"이라 부른다. 현재 약 1100여 수의 시들이 남아 있다.

생애

초반기(701년~726년)

이백은 촉나라 사천성 쑤이예에서 태어났다. 25~26세에 고향을 떠날 때까지 지역에 머물렀다. 이백의 촉 시절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다. 여기서는 아버지와 성씨, 칼과 관련된 일화, 그리고 도교 공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이백의 성씨 논란

이백 아버지의 이름은 이객(李客)으로, 일반적으로 원래 그 지역 사람이 아니면서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을 '객'이라고 하는데, '타관 사람' 정도의 의미이다. 관리로 부임했거나 장사를 하기 위해 그 지역에 들어온 사람은 십 여년을 넘게 살았더라도 '객'인 것이다. 아마도 이객은 이런 이유에서 '객'으로 불렸을 것이다.
이 때, '객' 뿐만 아니라, 이백의 아버지 이객의 성씨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원래 이씨가 아니었는데 촉 지역에 들어오며 이씨로 바꾼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추측이 있는데, 이객이 본래 호인(胡人), 즉 이민족인 투르크나 혹은 다른 중앙 아시아계 민족이었는데 귀화했다는 추측과, 관헌의 수배를 받거나 원수에게 쫓겨 도주해서 성을 바꾸었다는 추측이 그것이다.
만약 이백의 아버지가 중앙 아시아 출신의 상인이었다고 한다면, 문벌을 중시하는 당시 시대적 상황에 따라 성씨를 이씨라고 말하고 다니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당시 성씨에 관한 관념은 지금 우리나라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민식과 하정우가 성씨 하나만으로 연이 맺어졌던 것처럼, 당시 중국에도 그런 풍습이 있었다. 일단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서로 친하게 지내고 상부상조하는 것이다.
아마 타지 출신의 상인이 중국에 들어와 살게 된 경우였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기 편한 선택을 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황실이 이씨였던 만큼 이씨가 가장 흔한 성씨였고, 때문에 다른 성씨가 아닌 황실의 성씨인 농서 이씨를 선택할 수 있다면 삶이 비교적 편해질 것이다. 이 탓에 이백의 성씨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이백은 평생동안 자신이 농서 이씨, 즉 황실의 친척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백의 경우에는 대체 농서 이씨의 어느 세대에 해당하는지가 불분명했고, 또 이백이 농서 이씨가 아니라 조군 이씨를 보고도 친척이라고 했다거나, 다른 계통의 이씨에게도 '종형' 혹은 '종제'라고 했다고도 한다. 즉, 실제로는 이씨가 아닌데 이씨라고 주장하고 다닌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칼? 무협?

위호의 「이한림집서」에는 이백이 "젊은 시절 협에 임하며, 여러 사람을 베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협에 임한다는 것은 사내로서 자존심을 세우거나 폭력으로 고집을 관철시키는 것에 해당한다. 이백이 칼도 휘두르고 사람도 죽여본 호걸이라는 이미지는 이 기록으로 인해 매우 유명하다.
위호는 실제로 이백과 교류했던 사람이므로, 이런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이백에게 술자리 혹은 다른 자리에서 직접 전해들었을 것이다. 만약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이백은 사람도 죽여본 살인자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사실인가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생각해볼만하다. 예를 들어, 이백이 장안에 머물던 시절 불량배에게 둘러 쌓여 곤란을 겪고 있을 때 육조라는 사람이 나타나 불량배들을 쫓아내고 이백을 구해줬던 일화가 있다. 이에 이백이 육조에게 감사의 시를 지어바친 적이 있다. 젊은 시절 검으로 한 두 사람도 아니고 여러 사람을 베어보았다면 검술과 완력이 뛰어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항상 하인과 함께 칼을 지니고 다녔던 이백이 불량배들을 스스로 퇴치하지 못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면, 과연 검술과 완력이 뛰어난 사내였을까?
물론 정확히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검술과 완력이 뛰어나고 사람을 죽여본 것이 사실이지만 당시 상황이 여의치 않아 불량배들을 스스로 쫓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고, 반대로 불량배들을 스스로 쫓아내지는 못할 만큼 검술과 완력이 뛰어나지 않았고, 그러므로 여러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다는 말도 거짓말일 수도 있다. 이 일화에서 중요시 해야 할 것은, 이백이 진실이든 거짓말이든 간에 자신이 칼로 사람을 베고 다닌 적이 있다고 말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백은 협에 대한 찬양시를 많이 남기기도 했기 때문에, 아마 이런 것을 자랑스레 여기는 사내였음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백은 항상 하인에게 칼을 가지고 다니게 시켰고, 술자리에서는 이따금씩 검을 들고 칼춤을 추었다고 했으니 말이다.

도교 공부

이백이 젊은 시절부터 도교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유명하다. 신선이나 도사와 관련된 이러한 일화가 이백에게 신비하고 독특한 이미지를 불어넣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절 도교를 공부해 도사가 된다는 것이 정말 속세로부터 멀리 떨어진 죽림칠현의 모습처럼 신비한 것이었는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왜 그렇냐 하면, 우선 당시 도사가 되는 것은 우리가 대학 간판을 얻는 것처럼 대표적인 출세 루트 중 하나였다.
당나라 때 출세하는 방법에는 크게 3가지가 있었는데, ①글(시)을 잘 써서 낙하산을 타거나, ②과거 시험에 합격하거나, ③도사가 되거나 도사들과 어울리는 것 세 가지였다. 이 중에서 2번 선택지의 경우 이백은 할 수 없었다. 과거시험은 원칙적으로 누구나 응시하고 합격할 수 있는 시험이었지만, 당나라 때만 해도 일명 '빽'이 굉장히 중요했던 시절이었다. 시험관을 미리 조우하고 자신의 글 실력을 뽐내놓는 '온권'을 통해 시험 전에 눈도장을 받아야지만 합격할 수 있었다. 즉 시험관의 입김이 강했던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문벌 가문 등 권세있는 집안 출신이어야 했다.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송나라 때부터 비로소 시험지의 이름을 보지 않고 채점하게 하고, 그럼에도 필체를 보고 알 수 있으므로 한 명을 시켜 모든 시험지를 베껴 쓰게 하고, 시험기간에는 시험관이 그 누구와도 교류하지 못하도록 하는 등의 정책을 시행하여 오늘날 '수능'과 비슷한 모습을 띠게 된 것이다.
이백이 자신이 황실의 친척이라고 주장하고 다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의 주장에 불과했다.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인맥, 가문이 중요시 되었으므로 이백은 ②과거 시험 루트가 차단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방법은 글 공부와, 도사가 되거나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었다.
이때 도사가 되는 것은 숲속에 은거하며 권력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과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했다.
당나라 황실은 도교를 존숭했고, 도교 지도자는 조정에 자주 초청을 받아 포상이나 관직을 받았다. 천자가 도관(도교 사원)을 직접 방문하기도 하였다. 당시 도사들은 대개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부적을 팔거나 기도를 해주면서 그들의 생활과 불만을 위로하는 역할을 했기에, 천자가 도교를 존숭하며 도사와 친하게 지내며 교단을 장악해두는 것은 천자에게도 이익이 되는 장사였다. 종교 교단이 불만 많은 백성들을 조직하게 되면 황건적이나 손은의 난 같은 무서운 사례가 발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도사가 되려면 도사 스승에게 접근하여 가르침을 전수받아야 했다. 이백이 자랐던 촉 지역은 도교가 성행하여 도사가 많았다. 촉 지역은 산이 많고, 경제력이 풍부하여 종교인들도 먹고 살기 좋았기 때문이다. 이백은 어렸을 때부터 도교 공부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5세 때 육갑(六甲)을 배웠다", "15세에 기서(奇書)를 읽었다"고 후일 스스로 썼다. 유교에 사서삼경이 있듯, 도교에도 가르치는 책이 있었던 셈이다. 육갑이란 도교의 점치는 방법 등을 기록한 책이고, 기서란 기이한 책, 즉 정통 학문 서적 이외의 노장, 신선에 관한 책들을 말한다. 10대 후반부터는 아예 동암자라는 도사를 모시며 가르침을 전수받았다.
종합하면 이백은 글 솜씨를 다지며 낙하산을 노리거나, 동시에 도교를 공부하며 도사에게 가르침을 전수받는 두 가지 출세 루트를 착실히 밟았던 것이다.

구직기(726년~742년)

호북의 강릉

이백은 725~726년, 즉 25~26세 될 때 촉 지역을 떠나 구직을 시작했다. 이후 742년 장안에 들어갈 때까지 16~17년 동안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다. 강소성, 안휘성, 하남성,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절강성 등 광범위한 지역을 모두 돌아다녔던 것 같은데, 우선은 장강을 따라 배로 내려가 호북의 강릉에서 도교 교단의 최고 지도자 사마승정을 만났던 듯하다. 이때 사마승정이 이백에게 '선풍도골(仙風道骨)'이 있다, 즉 신선과 도사의 풍격이 있다는 신탁을 주었는데, 듣기 좋으라고 한 빈말이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우선 도교 최고 지도자에게 칭찬을 들은 셈이었으므로 이백은 굉장히 기뻐했다.
이때 이백은 자신을 '대붕'(장자에 나오는 아주 거대한 새), 사마승정을 '희유조'(대붕보다도 더욱 거대한 새)에 비유하며 두 마리 거대한 새가 서로를 인정한다는 문장을 지었다. 이백 본인은 사마승정이 훗날 함께 넓은 하늘을 날아보자고 자신에게 전했다고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이 약속이 이백의 허풍이었는지, 아니면 빈말에 김칫국을 마셨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결국 잘 지켜지지 않았던 듯하다. 이백은 앞으로 16년간이나 낭인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금릉, 양주 일대

호북의 강릉 다음으로는 금릉, 양주 일대를 돌아다녔던 것 같다. 이 지역은 남조 3백 년의 수도 지역으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중국 최대의 향락의 도시 일대를 돌아다니며 이백은 돈을 탕진했다고 한다. 본인은 30여만 금을 몰락한 귀공자를 모조리 구하느라 탕진했다고 말하지만, 정말로 그랬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본인이 직접 유흥하느라 탕진해놓고 귀공자 핑계를 대는 경우나, 정말로 몰락한 귀공자를 큰 돈을 써서 구제하는 경우나 이백이 씀씀이가 헤픈 인물이었던 것 만큼은 확실하다.

호북의 안륙

이백은 돈을 다 쓰고 병까지 들었다고 적었는데, 그 이후 30세 무렵에는 호북의 안륙 지역에 머물렀던 모양이다. 이 때 돈도 없고 직업도 없는 사내가 어떻게 결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지역 명문가였던 허(許)씨 가문의 딸과 결혼했다.
이백이 장강을 따라 금릉으로 향하는 도중 잠시 안륙에 들러, 즉 거액의 돈이 아직 수중에 있을 때 만나서 결혼하고 다시 금릉에서 돈을 탕진한 후 초라한 행색으로 안륙에 돌아갔을 가능성도 있다.
이백이 안륙 지역에 머물 때 지은 시에서 자신이 안륙에 "돌아왔다(歸來)"고 표현했기 때문에, 진실은 그래도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추측은 꽤나 신빙성이 있다. 이백은 이 안륙 지역을 거점으로 삼아, 기본적으로는 이곳에 머물면서 때때로 근처 먼 지역까지 나가 출세길을 계속 모색했던 것 같다.
나이는 서른을 넘어 어느덧 마흔에 가까워졌는데, 이때 출세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①안륙, 양양 등 지방 고관과 친하게 지내며 접근하기, ②수주(지금의 수현)에 있던 도사 호자양의 집을 출입하며 도사들과 어울리기가 그것이다.
이때 지방의 고관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뽐내며 발탁해달라고 청하면서도 비굴하거나 권력욕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 미묘한 편지들을 써서 보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백의 경우 이 미묘한 줄타기가 끝에 가면 살짝씩 엇나가서 "당신이 청을 듣지 않는다면 두번 다시 당신을 보지 않겠다. 큰 새는 비좁은 땅을 돌아보지 않고 넓은 하늘로 나아가는 법이다"라는 등 협박조로 말할 때도 있었다. 호방함을 미묘하게 어필하려던 것이 글을 쓰다보니 솔직한 감정의 분출로 이어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뛰어난 예술가들에게는 이런 일들은 으레 있는 것으로, 가수나 배우들이 작품에 정말로 몰입하게 되면 공연이나 연기를 하는 도중 사전 계획과는 다른 애드리브나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 모습은 생각보다 많이 목격할 수 있다. 이것이 엇나가면 프로페셔널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겠지만, 뛰어난 예술가라고 칭송받는 이들은 대개 이런 면모를 지닌 경우가 많다. 자신의 감정에 과하게 몰입하여서 자신도 모르는 결과를 초래하는 행위인 것인데, 이백의 경우에도 구직이라는 행위에 있어서 굉장히 아마추어적인 실수를 범한 것이 되겠지만 이런 예술가적인 면모 덕분에 후대에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 받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 만약 정말 프로페셔널해서 구직을 청하는 시까지 미묘하게 잘 짓고 일생을 출세가도를 달렸다면 이백이 시인으로서 매력있는 인물로 다가왔을 지는 미지수다.
어쨌든, 당시 선비나 도사에게 있어서 권력을 멀리하는 것은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덕목과도 같았기 때문에 구직자들은 이 미묘한 줄타기를 연마해야 했던 것 같다. 이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백에게 '우화등선'(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라는 것도 사실은 선결조건이 있었다.
신선이 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탈속을 노래하는 것이지만, 사실 이백에게 우화등선이란 신선이 되기 전에 먼저 권세를 떨쳐야만 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이름이 없는 무명의 인물이 탈속을 노래하며 은거하겠다고 고집을 피워봤자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은거하겠다더니 왜 세상으로 나왔냐는 의문을 사게 되어 운신의 폭을 좁히기 십상이다. 때문에 우선 이름을 날리는 것이 먼저였다. 이때 이름 날리는 것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되므로, 적당히 속세에 관심을 표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는 본래 산을 좋아하니 쉽게 나서지 않는다는 이미지를 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하지만 당신의 청이니 특별히 산에서 나와주겠다"는 식의 거드름도 피울 수 있기 때문에 유리하다. 이백은 권력욕이 없고 세속을 초월한 신선이라는 이미지가 유명하지만, 사실 이백은 구직 편지를 많이 지어 보냈다. 아마 신선은 권력을 얻어 유명세를 떨친 후에 되려고 했을 것이다. "주군을 도와 공업을 이루고 나면 본래 있던 숲 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공업이 이뤄지면 옷을 털어 작별하고 신선이 사는 섬 근처에서 한가로이 살겠다", "공업이 이뤄지면 주군과 이별을 고하고 낚싯줄이나 드리우겠다"는 편지들을 보면, 우선 천자를 도와 공업을 이룩하고 미련 없이 은퇴하는 유명인의 삶을 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지방 고관들에게 미묘한 줄타기를 하며 구직 편지를 보내는 루트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위의 경우처럼 고관들에게 편지를 보내 관직을 청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른 출세길, 즉 ②호자양 등 도사들과 어울리기라는 방법도 남아있었다. 이백은 도사 호자양의 집을 출입하며 도사 원단구맹호연 같은 시인과 사귀게 되었다.

낙양산동

30대 중반이 지날 무렵에는 아예 멀리까지 나가기도 했다. 낙양은 서쪽의 수도 장안, 동쪽의 수도 낙양이라고 할 만큼 관청이 크고 발달한 곳이라 고관들도 많았다. 우선은 고관들에게 잘 보임과 동시에, 이 지역의 영산이었던 숭산에서 도사들과 어울리기 좋은 곳이었다.
이백은 그 후 제와 노 지방, 즉 산동 지방을 돌아다니다가 이 지역에 꽤 오래 살았던 것 같다. 이 때문인지 원진이나 두보 같은 사람도 이백을 산동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고 『구당서』의 이백 열전에도 산동 사람이라고 나와있다.
이백이 산동 지방에 머무를 무렵에는 이미 40세에 가까웠는데, 고향을 떠난지 어언 십여 년이 흘렀지만 이룬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굉장히 초조했던 듯하다. "나는 훌륭한 보석을 갖고 있지만, 오랫동안 더러운 진흙 속에 파묻힌 채 버려져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경멸하며, 하찮은 물건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깨끗이 닦아서 드리고 싶지만 그럴 방도가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금향현의 범 장관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편지 한 통을 화살에 매달고 쏘면 고을 하나를 떨어뜨릴 만한 사내지만, 허나 끝내 은상을 받지 못하고 시정잡배나 다름이 없어 부끄럽다", "강가의 늙은이가 나를 비웃는다"는 내용의 시도 지었다. 물론 이렇게 치욕스럽고 부끄러우며, 초조했던 나날들도 있었지만 타지를 떠돌아다니는 이백에게 따뜻한 술을 내어주며 환대해주는 집주인을 만나 기뻤던 날들도 있었다. <객중작> 이라는 시에서는 "난릉의 좋은 술엔 울금초 향이 나고 옥잔에 따르니 호박 빛을 띤다. 주인이 나를 많이 취하게만 해주면 도대체 어디를 타향이라 할 것인가" 라고 노래했다.

장안에서의 한림원 생활(742~744)

40세 혹은 41세가 되었을 무렵 이백은 남쪽으로 내려가 절강섬계에서 도사 오균과 함께 지냈다. 도사 오균은 사마승정과 사형제였던 사람으로, 도교계의 거물이었다. 742년, 오균은 현종 황제의 초빙을 받고 장안으로 나가 한림원에 들어갔다. 오균은 원래 유학을 공부해 관리가 되려고 몇 차례나 과거를 보았지만 실패해서 도교 쪽으로 바꿔 성공했던 사람이었다. 먼저 한림원에 들어갔던 오균은 정세가 뒤숭숭해지고 조정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화를 피하기 위해 자신은 산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며 조정을 빠져나왔다. 이 과정에서 오균이 이백을 현종 황제에게 추천했다.
조정의 분위기가 뒤숭숭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몸을 보전하려고 자신이 피했던 자리에 이백을 추천한 것이다. 어쨌든 도교계 거물의 추천이었으므로 현종 황제는 이백을 초빙하였다.
이백은 이윽고 742년 43세에 현종의 칙령을 받아 한림공봉(翰林供奉)의 자리에 올라가게 되었다. 출세 루트 중 두번째 루트인 도사 루트가 성공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백은 한림공봉이라는 직책을 맡고도 정치적 포부를 실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①일단 한림공봉이라는 직책은 한림원에 배속된다. 한림원은 궁중에서 학문과 문학을 하는 선비들을 배치해 놓은 부서인데, 이 부서가 굉장히 애매모호한 부서였다. 이 부서에 배속되었다고 해도 관직에 올랐다는 의미는 아니었고, 딱히 정해진 직무도 없었다.
한림원의 공식적 임무는 조칙의 문안을 작성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꼭 한림원에서만 작성해야하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한림원이란, 천자가 시키고 싶은 일이 있으면 부르고, 없으면 부르지 않는, 이렇다 할 직무가 없는 애매모호한 부서였다. 그래서 매일 출근할 필요도 없었다. 한림원에 배속이 됨으로써 변하는 것은, 그저 궁중도서관을 출입할 수 있게 되어 그곳에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것과, 말을 한 필 대여 받을 수 있는 정도였다. 후일 전승되기를 천자가 부를 때마다 이백이 술에 취해 있었다고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술을 좋아하는 사내라면, 직무가 딱히 없기 때문에 어디서 무얼하든 관계 없었으므로 감히 술을 마시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②이백은 종종 ‘천자를 수종(隨從)’ 하는 일을 담당했는데, 이것은 천자의 여행이나 궁중의 연회, 꽃놀이, 뱃놀이 등에 불려나가 시를 한 수 지어 바치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호화롭고 현란한 시를 지어야 했다.
하지만, 이백은 궁중의 연회나 놀이를 호화롭고 현란하며, 화려하게 묘사하는 시에는 능하지 않았다고 한다. 즉, 한림공봉은 천자를 도와 정치적 포부를 펼치는 일과는 거리가 먼 직책인데다가, 이백이 본디 능한 시가 아닌 다른 종류의 시를 지어 바쳐야했던 것이다. 그래도 이백은 직무에 충실하며 열심히 시를 지었는데, <춘일행(春日行)>,<궁중행락사(宮中行樂詞)>같은 시가 이에 해당한다고 한다. 특히 <궁중행락사>같은 경우는 이백이 가장 자신 없었던 오언율시 형식에다가, 이백의 문학적 신념과 반대되는, 육조시대의 아리땁고 고운 시어를 대량으로 구사했다고 한다.
이런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백 자신 역시 궁중 생활에 대해 회의감을 표했고, 한편으로 (회의감이 원인이 됐을 수도 있는) 항상 술에 취해있던 것이 화근이 되어 환관 고력사(高力士) 등 권문세력들의 미움을 받아 궁정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아마 반쯤은 쫓겨난 것이고, 반쯤은 자신이 그만두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유랑기(744~755)

두보와의 여행(744~745)

사직 후에 자신의 친구이자 시(詩)적 라이벌인 두보와 함께 낙양에서 산둥까지 여행하였다. 이때 이백의 나이 44세, 두보의 나이 33세였다.
이백은 이미 문단에서 글로 유명했던 인물이었지만, 두보는 신인 격으로 이제 막 두각을 나타낼 때였다. 고작 일년 남짓한 기간을 함께 여행했지만, 일생 동안 서로 주고받은 편지들을 통해 둘 사이가 꽤 돈독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백이 시를 통해 교우한 사람의 총수는 400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백의 두보에 대한 시는 4수가 남아 있고, 두보의 이백에 대한 시는 15수가 남아 있다. 두보가 이백을 좀 더 존경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백이 한번 떠난 지역이나 사람은 좀처럼 되돌아보지 않는 성격임을 감안하면 잠깐 만난 두보에 대해 4수나 지은 것이 오히려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당시 이백은 장안에서 끝내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던 상황이었고, 두보는 과거 시험에 낙방하여 실의에 빠져있던 상황으로 둘 모두 유랑하는 신세이며 정치적으로 이룬 것이 아직 없을 때였다. 이 무렵 이백이 지은 시 <추엽맹제야귀치주선보동루관기>에서는 속세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호방함과 동시에 다시 천거되기를 바라는 출사에 대한 마음이 동시에 느껴진다.

방랑 10년(745~755)

745년 가을 석문에서 두보와 헤어진 후 이백은 병을 얻어 누웠다. 이듬해 병석에서 일어나 강남으로 길을 떠났다.
이백은 이후 755년까지 세 곳에 거점을 두고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산동의 연주, 하남성 황하 강변 지역인 낙양, 그리고 환남 지방인 남릉이나 금릉, 양주 등이었다.
이 무렵 이백의 심정은 "서리는 머리에 내려 사내를 놀라게 하고, 눈물은 쫓겨난 신하(축신)의 의복을 흠뻑 적신다", "슬픔에 잠겨 출새의 곡을 들으니, 눈물은 축신의 갓끈을 적신다"는 시구들에서 잘 드러난다. 자신을 쫓겨난 신하로 표현하면서 늙음과 눈물을 노래했다. 이 시기 이백 본인은 계속 속세를 떠나 산으로 들어가 선약을 제조하거나 호숫가에 배를 띄우겠다는 등의 시를 썼지만, 정작 행선지는 도시를 위주로 이루어졌었다.
이백은 일반적인 은퇴한 관리처럼 쌓아 놓은 토지나 재산이 없었고, 방랑하던 습성이 있어서 어떤 후원자가 토지를 주고 그곳에서 농민들을 감독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여도 쉽사리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때문에 이백은 '손님'으로서 도시 여기저기를 옮겨다니며 지냈던 것 같다.
당시 이백이 되려고 했던 '손님'이란, 지방 고관에게는 사설 비서이자 정치 참모이면서 동시에 학문이나 문학을 논할 수 있는 상대를 말한다. 지방관은 보통 혼자서 낯선 타지에 부임하기 때문에 자신의 개인적인 심복이나 사적인 벗을 필요로 했는데,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존재가 바로 '손님'이었다. 지방관은 수입이 매우 풍족했기 때문에 5명에서 10명 정도를 개인적으로 먹여 살리는 일 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지방관 입장에서도 뛰어난 '손님'들과 많이 교우하는 것은 이득이었다. 다른 지방관들 사이에서 자신의 품위도 자랑할 수 있고 학식이 높다는 명성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손님'의 입장에서는 공문서나 편지를 대필해주거나, 지방관의 술 상대가 되어주거나, 연회 등 행사 때 모셔주다가 만약 지방관이 중앙으로 승진하면 자신도 덩달아 관직을 얻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만약 그런 행운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일단 먹고 자는 문제는 해결될 수 있었다. 이백도 이러한 기회를 노리고 도시에서 도시 사이로 움직이며, 지방관들에게 접근했던 것 같다.
일단 이백은 이미 시인으로서 명성이 있었기 때문에, 어디를 가더라도 지방관이 대놓고 홀대하지는 않았다. 일단 들르면 적어도 며칠에서 몇 달 정도는 머물게 해주었고, 떠날 때는 어느 정도 돈도 챙겨주었다. 이백은 이 시기에 지방관들에게 보내는 데에 이용했던 시들을 많이 지었다. 그 시들은 대체로 내용이 같다. "당신이 계신 곳에는 농작물도 잘 자라고, 백성들은 당신을 칭송한다. 부랑자들이 소문을 듣고 이곳으로 몰려오고, 문을 열어놓고 잠을 자도 도둑이 들지 않는다. 형벌할 때 쓰는 몽둥이는 쓸 데가 없다." 등의 내용이다.
이 시들은, 지명이나 인명을 서로 바꾸더라도 딱히 문제가 없을 만큼 비슷했다. 실제로 시를 받는 상대가 누구인지는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일화를 들으면 이백에 대한 환상이 다소 깨지는 감이 있겠지만, 오히려 이 시기에 이백의 걸작들도 많이 쏟아졌다. 사실 '손님'으로 이 도시 저 도시를 옮겨다니며 얻어 먹고 다니는 것은 걸식 혹은 기식 생활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비참한 것이었다. 특히 장안에서 천자에게 쫓겨났다는 사실은 자존심이 강했던 이백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 특히 이백의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의 강렬함과, 반대로 자아추구가 좌절되며 나타나는 탈주, 탈속에 대한 의지, 동시에 한편으로는 여전히 체제의 내부를 지향하는 모순된 고뇌가 담긴 걸작들이 많다. 인생의 유한함, 부귀공명의 허망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 순간을 즐기자', 슬픔을 술이나 자연물 등을 통해 극복하자는 주제를 기발하고 독특한 상상력을 통해 노래한 것인데, 많은 사람들은 이백 시의 백미가 여기에 있다고 평가한다.
그렇게 여기 저기를 다니며 '손님'이 되고자 노력하던 중 안사의 난 직전, 선주 장관이 경질되어 조열이라는 사람이 부임했다. 이백은 일찍이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있어서 즉시 발탁을 청했다. 이것이 성공해서 이백은 조열의 '손님'이 되는 데에 성공했다. 조열이 별관을 지었을 때 이백이 쓴 비문과 이백이 대필한, 양국충에게 보내는 편지가 남아있다. 하지만, 드디어 안정된 지위를 얻었다고 생각하던 찰나 안사의 난이 발발했다.

안사의 난 이후(755~762)

환남 지방에 있던 이백이 안사의 난(755) 소식을 들은 것은 756년 초였던 듯하다. 이백은 당시 산동 지방에 있던 아들을 걱정하여 사람을 보내 아들을 챙기도록 하는 동시에, 본인은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남쪽으로 피난했다.
이백은 선성 현령에게 보내는 시에서 자신은 우선 "남산의 표범에게 배우기로 했다(남산의 표범은 비가 올 때는 털이 젖지 않게 하려고 밖으로 나오지 않고 숨어 있는다)"며, 자신도 안전을 도모하며 숨어 있겠다고 전했다.
당시 안사의 난으로 장안이 함락되자 현종은 측근만을 데리고 서쪽으로 피신해 촉 지역에 도달했고, 그 와중에 숙종은 이민족 위구르의 지원을 받기 위해 감숙의 영무로 갔다가 아버지 현종과 연락도 없이 제멋대로 황제가 되었다. 숙종의 즉위 이후 촉의 깊은 산중에 있던 현종은 실질적으로 정치적 힘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나, 촉 지역에 도착하자 아들인 영왕 인을 강릉 대도독에 임명하며 강남 지방 제압을 명했다.
이는 이미 힘을 잃은 현종 측의 비장의 카드였다. 이때 영왕의 군대가 이백을 참모로 불렀다. 이백의 <왕판관에게 주다>는 시를 보면, "대악당이 국토를 강탈했고, 나는 천하를 구할 힘이 있지는 않아서 노산에 숨어있다. 넓은 하늘을 바라보니 그대를 만나고 싶어 참을 수가 없지만, 내일 아침이면 나는 여기를 떠나 갈매기 무리로 들어가버릴 것이다" 라고 노래하며 자신을 빨리 불러달라는 듯이 넌지시 전하고 있다.
이백 본인은 영왕이 자신의 명성을 듣고 찾아왔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이백 쪽에서도 불러 달라는 공작을 했던 것이다. 이백의 입장에서 이 기회는 장안에서 쫓겨난 후 자아추구, 즉 정치적 희망이 없었던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돌파구였다. 이백은 이 시기에 군가와 같이 위풍당당한 군대의 모습에 대해서 시를 짓거나 막료들의 연회에 따라가 시를 짓는 역할을 했다. <영왕동순가>를 보면 의기양양하고 시원한 작풍이 드러난다.

영왕의 군대가 숙종에 의해 번번히 패하고, 장군들은 승기가 없다고 판단하여 군사들을 데리고 도망쳤다. 영왕의 군대는 숙종에 의해 반란군으로 지목되어 군대에 함께 있던 이백도 붙잡혔다. 반란은 대역죄에 해당했으므로, 가만히 있다가는 사형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백은 이미지와는 다르게 정말 열성적으로 자신뿐 아니라 아내까지 불러들여 고관들에게 도와달라는 탄원을 돌렸다. 이백의 입장에서는 그저 관군이라고 생각해서 가담했을 수도 있지만, 감옥에서 미친듯이 고관들에게 돌린 탄원서들을 보면 속세를 초탈하는 노래를 짓던 시선(詩仙), 은사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다. 이백은 적군인지 몰랐다는 변명이 통하지 않자 나중에는 자신이 협박을 받아서 억지로 따라가게 되었다고 했고, 그래서 도중에 군대에서 이탈해 도망쳤지만 억울하게 붙잡혔다고 한결같이 주장했다.
이 소식은 심지어 사천에 있던 두보에게까지 전해졌던 듯하다. 두보는 "이백을 못 본지 오래 됐다. 미치광이 노릇을 하고 있다니 매우 애처롭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죽이라 하지만, 그 재능을 아까워하는 이는 나 한 사람 뿐"이라는 내용의 시를 지었다. 이백의 평판은 그만큼 좋지 않은 방식으로 널리 퍼졌던 것이다.
운이 좋게도 송약사라는 사람이 이백을 위해 힘 써주고 숙종에게 관직 추천장을 제출했는데, 이 추천장도 사실 이백이 대필했다고 한다. 즉 자신의 추천장을 자신이 쓴 셈이다. 이 추천장에는 "나 송약사가 곁에 두고 있는 이 사내 이백(사실 이백이 본인이 쓴 것이다)은 협박을 받고 영왕의 군대를 따라 다니다가 도중에 간신히 빠져나온 것이므로 잘못이 없으며, 재주가 뛰어나 전설상의 현인에 버금간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백은 지금의 구이저우 성인 야랑(夜郞)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759년 다행히도 삼협(三峽) 부근까지 갔을 때에 숙종의 은사(恩赦)를 받아 다시 강남으로 돌아왔다.
말년에는 에너지가 사방으로 분출되고 범람하여 요란한 시풍보다는, 자신과 주변을 되돌아보고 인간이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감사하고 축복하게 만드는 시들이 특징이다. 760년 가을부터는 강남의 각지를 유람하였고, 2년 뒤 762년에 안후이 성 당도(安徽省 當塗)의 현령(縣令)이었던 종숙 이양빙(李陽冰)의 집에서 사망하였다.

작품

대표적으로 산중문답(山中問答)과 청평조사(淸平調詞)가 있다. 그는 절구와 고시를 특기로 한 시인으로서 그의 시는 스케일이 크고 자유분방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백은 다른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입신출세에 입각하여 국사에 관심을 가지고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등 적극성을 보여주었으나 그의 정치적인 활동은 모두 실패하였다.
이로 인한 좌절감은 한편으로 탈속을 추구하게 만들지만 한편으로는 체제 내부에 포함되고 싶은 모순된 감정을 낳았다. 그 와중에, 이백은 명산을 찾아 유람하는 등 자연을 좋아했다. 때문에 이백은 산수 자연을 읊거나, 출세를 위해 지방관리들에게 바치는 시들을 지었다. 도교에 심취하여 신선을 추구하거나, 도사들과의 교우를 묘사한 현실 초월적인 시들도 상당수다.

아래는 이백의 작품들을 다음 카테고리에 묶어 정리하면 한 눈에 보기 좋다고 생각하여 적어놓은 것이다. 이백의 시가 다음 중 꼭 하나의 카테고리에만 해당되지 않고, 말하는 바가 여러 카테고리에 걸치는 경우가 많겠지만 우선 크게 보면 다음과 같이 분류해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카테고리에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작품들이 추가되었으면 좋겠다.

  • 산수 자연을 읊은 시 : <북산에서 홀로 술을 마시며 위씨에게 부치다>, <홀로 경정산에 앉아>
  • 출세를 위해 지방관리들에게 바친 시 : <금향현 범 장관에게 드림>
  • 도교에 심취, 신선을 추구하는 시 : <고풍 59수> 중 제41수, <아미산에 오르다>, <신선을 그리워하다>
  • 도사들과의 교우를 묘사하거나, 현실 초월적인 시 : <은좌명께서 오운구를 주신 것에 보답하다>, <왕익 보궐과 송체 혜장태자묘승이 헤어지면서 준 시에 답하다>
  • 이백의 정치적 포부, 참여의 욕구가 드러나는 시 : <광릉의 여러 공들을 떠나다>, <고시를 본뜨다 12수>, <한림원에서 글을 읽다 감회를 말하여 집현전 학사들에게 주다>, <서역 사람이 피리 부는 것을 보다>

참고문헌

  • 안치, 신하윤 외 옮김, 『이백(영원한 대자연인)』, 이끌리오
  • 다카시마 도시오 지음, 『이백, 두보를 만나다』, 이원규 옮김, 심산
  • 임도현 지음, 『쫓겨난 신선 이백의 눈물』,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 이해원 지음, 『이백의 삶과 문학』, 고려대학교 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