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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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여
생존시기 전국시대

개요

인상여(藺相如, 생몰미상)는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대신으로 상경의 지위까지 오른 인물이다. 생몰은 전해지는 바가 없으며 대략 B.C. 315年~ B.C. 260여년으로 추정된다. 환자령(宦者令) 무현(繆賢)의 가신이었으며 완벽귀조(完璧歸趙), 민지지회(澠地之會), 부형청죄(負荊請罪) 등의 고사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사마천의 『史記』「염파인상여열전(簾波藺相如列傳」에서 볼 수 있으며 이외의 다른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생애

무현의 가신으로 이름나다

인상여가 아직 세상에 이름을 떨치기 이전에 무현의 가신으로 있었을 때였다. 무현이 조혜문왕(惠文王)에게 죄를 짓고 평소 친분이 있었던 연(燕)왕에게 도망가려 하였다. 이 때 인상여는 무현에게 도망가지 말라고 만류하며 연왕과 어떻게 친분을 쌓았는지에 대해 물었다. 무현이 대답하기를 “예전에 대왕을 따라 연나라 왕과 함께 변경 근처의 모임에 간 적이 있는데, 이 때에 연왕과 친분을 쌓았다”하니 인상여가 말하기를 “조나라는 강하고 연나라는 약합니다. 게다가 선생께서 조왕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연왕이 조나라에 잘 보이기 위해 나리와 친분을 쌓은 것입니다. 만일 지금 조나라를 떠나 연나라로 가신다면, 연나라는 조나라의 응징을 두려워하여 선생을 연나라로 들이지 않을 것이며, 뿐만 아니라 선생을 포박하여 조나라로 보낼 것입니다. 차라리 우리 왕께 솔직히 용서를 구하는 것이 낫습니다.”하였다. 무현이 인상여의 계책대로 하였는데, 요행히 죄를 면할수 있었다. 이 일을 말미암아 진나라가 화씨벽을 요구하였을 때, 무현이 조왕에게 인상여를 사신으로 조낼 것을 추천한다.

구슬을 조나라에 돌려보내다

이 당시 ‘화씨지벽(華氏之璧, 이하 화씨벽)’이라는 진귀한 보물이 있었다. 조혜문왕이 그것을 우연히 얻게 되었는데, 기원전 283년 이 소식을 들은 진(秦)소양왕(昭襄王)이 조왕에게 사신을 보내 성 15개와 화씨벽을 바꿀 것을 요구한다. 조왕은 성을 얻지 못하고 화씨벽만 빼앗길까 염려하였지만, 당시 진나라의 세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에 거절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이 때 무현이 그의 가신인 인상여의 지혜를 칭찬하며 그를 사신으로 보낼 것을 추천하였다. 혜문왕은 인상여를 불러 화씨벽을 진나라의 성과 바꾸는 것이 좋을지 물었고 인상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나라는 강하고 조나라는 약하므로 수락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진나라가 성을 줄테니 화씨벽을 달라고 하였는데, 조나라가 성을 주지 않고 화씨벽만을 취한다면 이는 잘못이 진나라에 있습니다. 반면 조나라가 진나라의 요구를 거절하고 화씨벽을 주지 않는다면 제안을 거절한 조나라에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대책을 비교해볼 깨 차라리 그들의 말을 들어주어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진나라에 지우는 것이 낫습니다.”인상여는 스스로 사신 갈 것을 청하며 만일 화씨벽을 주었는데도 성을 주지 않는다면 반드시 화씨벽을 온전히 조나라로 갖고 오겠다는 맹세를 한다.[1]


마침내 왕은 상여를 사신으로 삼아 화씨벽을 진나라로 전한다. 상여가 진나라 왕을 접견하고 화씨벽을 바쳤다. 이 때 인상여는 진왕이 화씨벽을 받았는데도 성을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는 진왕에게 아뢰었다. “그런데 이 화씨벽에도 하자(瑕疵) 지금 대왕께 보여드리겠습니다.” 진왕에게서 화씨벽을 건내 받자 인상여는 이를 들고 물러나기둥에 기대어서서 말하였다. “대왕께서는 큰 나라간의 교제에 있어 어찌 거짓 사기극을 할 수 있습니까. 조나라 왕은 대국의 위엄을 존중하여 경의를 표하고자 5일간 재계하고 저를 보내셨는데, 지금 대왕께서는 화씨벽을 받고도 조나라에 대가를 줄 마음이 없으십니다. 이 때문에 신이 화씨벽을 돌려받은 것이며, 만일 대왕께서 신을 팝박하신다면, 신의 머리를 이 화씨벽과 함께 기둥에 부닺쳐 깨뜨려 버릴 것입니다!”라 하며 기둥을 노려보자 진왕이 사과하며 조나라에게 성 15개를 주겠다 말하였다. 그러나 인상여는 조왕이 여전히 대가를 지불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 다시 진왕에게 말하였다. “화씨벽은 매우 귀중한 보물입니다. 조왕께서는 진나라가 보복할까 두려워 부득이 바친것입니다. 조왕께서 이 화씨벽을 보낼 때 닷새간 재계를 하셨으니, 지금 대왕께서도 5일간 재계를 하시고 화씨벽을 받으십시오”하였다. 진나라왕은 명분없이 강탈할 수 없게 되었고 스스로 재계할 것을 약속하였다. 인상여는 이 틈을 타 휘하 수행원을 시켜 화씨벽을 품고 샛길로 도망쳐 조나라로 가져가게 하였다. 진왕이 재계한 후 인상여를 접견하여 화씨벽에 대해 물었다. 인상여가 아뢰기를 “진나라에는 목공 이래로 여태까지 약속을 지킨 임금은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신이 화씨벽을 조나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뢰옵건데 진나라는 강하고 조나라는 약합니다. 진나라가 때문에 화씨벽을 씨벽을 요청하자 조나라는 그것을 받쳤습니다. 만일 지금 왕께서 성을 주신다면 조나라가 화씨벽을 드리겠으며, 제가 대왕께 지은 죄는 제가 죽음으로 값겠습니다.”하였다. 진왕은 인상여의 지혜와 용맹함에 감탄하여 말하였다. “이자를 죽인다 해도 화씨벽은 절대 얻지 못할 것이며 진나라와 조나라 사이의 우호만 끊기게 되는 것이나 그를 살려보내는게 낫겠다.”하며 인상여를 예우하여 돌려보냈다. 인상여가 조나라로 돌아오자 조왕은 그가 현명한 대부이며 진에 사신으로 책임을 다하였다고 여겨 상대부(上大夫)에 임명하였다.[2]


민지에서의 회맹

기원전 279년 진나라는 조나라를 공격하였고 진왕이 사신을 보내 서하(西河) 바깥쪽의 민지(澠池)에서 평화적 회맹을 할 것을 제안했다. 조왕은 진나라를 두려워하여 가고싶어하지 않았으나, 당시 무관이었던 염파와 인상여가 조왕을 설득하여 결국 민지로 가게되었다. 이 때 인상여는 직접 왕을 수행하였고 염파는 조나라 국경에 주둔해 있었다.

연회가 무르익자 진왕이 조왕에게 거문고를 연주할 것을 청하였고 조왕이 거문고를 타자, 진나라의 신하가 나와 “모년 모월 모일에, 진나라 왕은 조나라 왕을 만나 술을 마시며 조나라 왕에게 거문고를 타게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러자 인상여가 나와 진왕에게 질장구를 쳐줄 것을 요청하였다. 진왕이 거절하였는데 인상여가 말하였다. “지금 대왕과 신의 거리는 다섯걸음밖에 되지 않습니다. 끝까지 거부하시면 제 목의 피로 대왕을 물들이겠습니다.”라고 협박하였고, 진왕을 마지못해 질장구를 두드렸다. 인상여는 조나라의 신하에게 “모년 모월 모일, 진왕이 조왕을 위해 질장구를 쳤다.”라고 기록하게 하였다. 진나라 대신들이 노하여 말하였다. “조나라는 열다섯 성을 진나라에 예물로 받치시오.” 인상여가 맞받아치며 말하였다. “진나라는 도읍인 함양을 바쳐 조왕에게 경의를 표하시오.” 이와 같은 양상으로 연회가 끝날 때 까지 진나라는 조금의 우위도 차지하지 못하였으며, 염파가 국경에서 주둔하여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공격할 수조차 없었다. 민지의 회맹이 끝나자 조왕은 인상여의 공이 매우 크다고 여겨 그를 상경(上卿)의 지위에 임명하였다.[3]

장군과 재상의 화해

민지에서의 회맹 이후 인상여가 상경의 지위에 올랐는데, 이는 염파보다 높은 지위였다. 염파가 이를 보고 노하였다. “나는 조나라의 대장군으로 적진을 치고 성을 함락시키는 큰 공을 여러번 세웠다. 그런데 인상여는 비천한 출신주제에 세치 혀를 놀려 작은 공을 세웠음에도 나보다 높은 자리에 올랐다. 나는 그것을 눈 뜨고 봐줄 수가 없다. 다음에 그자를 만나면 내 무서움을 보여줄 것이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인상여는 염파와 마주치지 않고자 노력했다. 매번 조정에 나갈때마다 병을 핑계삼아 나가지 염파와 마주치는 것을 피했다. 한번은 멀리서 염파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마차를 돌려 숨는 일이 있었다. 인상여의 문객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인상여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대인의 곁에 있는 까닭은 대인의 능력과 인품을 흠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대인께서는 염파장군을 두려워하여 도망하여 피해다니고 계십니다. 저이는 더 이상 그 수치를 참아낼 수 없으니 그만 보내주십시오.” 인상여가 이를 듣고 말하였다. “그대들은 염장군과 진나라 왕 중에 누가 더 무서운 것 같은가?” 문객들이 답하였다, “물론 진나라 왕입니다.” 인상여가 말하였다. “진나라 왕이 그렇게 무서운데도 나 인상여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의 신하들에게 치욕을 주었네. 헌데 내가 아무리 무능하다 한들 염장군 하나가 무서워 이리 피하겠나? 아닐세. 지금 진나라가 강대해졌음에도 감히 우리 조나라에 전쟁을 걸어오지 못하는 것은 염파장군과 내가 있기 때문이네. 그런 우리가 싸움을 한다면 결국 한사람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싸움이 끝나지 않을걸세. 그럼 이익으 보는 것은 누구이겠나? 바로 진나라일세. 내가 지금껏 염장군을 피해다닌것도 나라의 이익을 가장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네. 이 말을 전해들은 염파는 매우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에 상의를 벗고 싸리나무채를 등에 진 후 인상여의 집을 찾아와 사죄하였다. 이후 그들은 마침내 화해를 하고 문경지교(刎頸之交).[4]를 맺었다. [5]



평가

사마천은 『史記』에서 인상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6]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을 알면 반드시 용기가 솟아나게 된다. 이는 죽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처하는 것이 어려우 것이기 때문이다. 인상여가 화씨벽을 받쳐 들고 기둥을 노려보며 진나라 왕의 좌우를 꾸짖었을 때, 그는 자신이 죽으면 그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선비들중에는 두려워 감히 행동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인상여는 그 용기를 떨쳐 세워 적국에 그 위신을 떨치고, 물러나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염파에게 양보하니, 그의 이름은 태산처럼 무거웠다. 그는 지혜와 용기를 모두 갖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사마천,『사기 사마천의 인물열전』, 고산, 고명 편저, 김하나 옮김, 팩컴북스, 2010.

조장연,『사기열전』, 삼양미디어,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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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상여가 화씨벽을 온전히 보전하여 갖고오겠다고 한 말(完璧歸趙)에서 완벽(完璧)이라는 성어가 유래하였다. 완벽(完璧):흠이 없는 완전한 구슬[璧]이라는 뜻이며,일반적으로 완전무결(完全無缺)하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2. 『사기열전』, 조장연, 삼양미디어, 2016.
  3. 『사기열전』, 조장연, 삼양미디어, 2016.
  4. 문경지교(刎頸之交): 목을 베어 줄 수 있는 사귐이라는 뜻으로, 우정이 깊어 생사고락을 함께할 수 있는 친구를 말한다. 염파와 인상여가 화해한 후 목에 칼이 들어와도 서로를 배신하지 않기로 맹세하여 진정한 벗이 되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5. 『사기 사마천의 인물열전』, 사마천 지음, 고산, 고명 편저, 김하나 옮김, 팩컴북스, 2010.
  6. 『사기열전』, 조장연, 삼양미디어,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