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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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호 (토론 | 기여)님의 2017년 6월 26일 (월) 04:2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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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

장건은 자는 자문(子文)이며 지금의 산시성 성고현 사람으로 기원 전 2세기 중국 한나라 때 여행가이자, 외교관이었으며 탁월한 탐험으로 실크로드의 개척에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실크로드의 탄생

한의 무제는 북방에 3대 부족(동호족·흉노족·월지족) 중 흉노를 제압하기 위해 월지를 이용하려 하였다. 이때 월지족과 동맹을 맺기위해 사신으로 간 사람이 장건이다. 이에 장건은 무제의 명에 의해 B.C.139년에 장안을 출발하였다. 즉 장건이 서역으로 간 것은 실크로드 개척을 위한 것이 아니라 월지와의 동맹 때문이었다. 장건은 무리 100명을 이끌고 서역으로 출발했다. 장건은 흉노가 사는 지역을 지나다가 포로가 되어 10여 년 동안 억류되었으나 사신의 부절을 잃지 않았다. 흉노의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탈출한 장건은 무리를 이끌고 서쪽으로 향한 지 수십 일 만에 대원에 이르렀다. 당시 대월지는 이미 이리하 유역에서 중앙아시아 쪽으로 이주한 상태였기에 장건은 강거를 경유해 대월지에 이르렀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대월지는 중앙아시아에서 “땅이 비옥하고 침략자가 거의 없어 안락한 날을 보내고 있었으며, 한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굳이 흉노에게 복수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라고 전해진다. 결국 장건은 끝내 월지의 대답을 듣지 못하고 1년여를 보낸 후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귀국하는 길에 강족의 땅을 지나다가 또다시 흉노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어 1년 남짓 억류되었다. B.C 136년 장건이 마침내 장안으로 돌아왔으며 박망후에 봉해졌다. 고향을 떠난 지 13년만이었다. 장건은 비록 대월지와의 동맹은 실패하였지만, 많은 서역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와서 무제에게 여러 가지 건의하였다. 그 중 하나가 흉노를 거치지 않고 사천과 운남을 경유해서 인도로 가는 길을 개척하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열리게 된 교통로가 실크로드 즉 비단길이다. 비단길은 고대의 비단 무역을 계기로 중국과 서역 각국의 정치·경제·문화를 연계해주는 육해 교통로의 총칭이다. B.C. 119년에 장건은 재차 서역으로 출사했다. 목적은 오손을 하서 옛 땅으로 불러들이고 서역 여러 나라와 교류하기 위함이었다. 장건은 군사 300명을 거느리고 출발했는데, 군사마다 두 마리 말을 주고 소와 양 수만 마리와 수백 만 전의 값어치가 있는 금폐와 비단을 가져갈 수 있도록 했다. 장건은 오손에 도착했지만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원정 2년 (기원전 115년) 장건은 오손의 사신 수십 명과 함께 장안에 도착했다. 이후 장건 이 대원, 강거 ,대항 등에 파견한 지절부사들도 자신이 사신으로 갔던 나라 사람들과 함께 장안으로 속속 귀환했다. 이에 실크로드가 크게 열려 서역과 교역이 활발해졌다. 결국 그는 한나라 때 서역으로 가는 남북의 도로를 개척하였으며, 서역의 한혈마, 포도, 석류, 복숭아 등의 물품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의 활동으로 서역에 대한 지리·민족·풍물 등의 지식이 중국에 전달되었다. 이렇게 장건에 의해서 개통된 실크로드는 외교·군사적인 것뿐만 아니라 서역의 견문에 의하여 중국 서쪽에도 문명국이 있다는 것을 알게하여 중국의 세계관 정정에 큰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