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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동북삼성육군강무당을 졸업, 직계군의 요직을 맡았다. 황고둔사건(皇姑屯事件)이후, 동북 보안군 총사령을 맡았으며, 일본인의 꼬임을 거절하고, 동북을 변화시켜(東北易帜), 조국통일과 민족단결에 공헌했다. 후에 중화민국 육해군 부사령을 맡았으며, 육군1급상장에 올랐다. 서안사변 이후 장개석 부자에 의해 오랜기간 연금되었다. 1990년 장학량은 자유를 얻었으며, 1995년 대만을 떠나 하와이에서 거주했다. 2001년 10월, 향년 10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학량은 항일을 적극 주장하고 내전을 반대하며 일찍이 양호성(杨虎城)장군과 함께 서안사변(西安事變)을 일으켜, 국공2차합작을 이끌어내고,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였다. 그외 그는 풍류를 즐기고 호탕하며, 민국 4대 미남 중 한 명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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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동북삼성육군강무당을 졸업, 직계군의 요직을 맡았다. [[황고둔사건]](皇姑屯事件)이후, 동북 보안군 총사령을 맡았으며, 일본인의 꼬임을 거절하고, 동북을 변화시켜(東北易帜), 조국통일과 민족단결에 공헌했다. 후에 중화민국 육해군 부사령을 맡았으며, 육군1급상장에 올랐다. 서안사변 이후 [[장개석]] 부자에 의해 오랜기간 연금되었다. 1990년 장학량은 자유를 얻었으며, 1995년 대만을 떠나 하와이에서 거주했다. 2001년 10월, 향년 10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학량은 항일을 적극 주장하고 내전을 반대하며 일찍이 [[양호성]](杨虎城)장군과 함께 [[서안사변]](西安事變)을 일으켜, 국공2차합작을 이끌어내고,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였다. 그외 그는 풍류를 즐기고 호탕하며, 민국 4대 미남 중 한 명으로 불렸다.
  
 
==주요사건 《서안사변》==
 
==주요사건 《서안사변》==

2018년 12월 27일 (목) 15:40 판

장학량(장쉐량)

출생 18981년 6월 4일
요녕성(辽宁省) 해성현(海城縣)
사망 2001년 10월 14일, 미국 하와이

개요

자는 한경(汉卿),호는 의암(毅庵), 아명은 쌍희(双喜), 소육자(小六子)다. 국민혁명군 영수이며, 봉계군벌 수령인 장작림(张作霖)의 장자로 중국 근대사의 유명한 애국장군이다.

생애

1920년, 동북삼성육군강무당을 졸업, 직계군의 요직을 맡았다. 황고둔사건(皇姑屯事件)이후, 동북 보안군 총사령을 맡았으며, 일본인의 꼬임을 거절하고, 동북을 변화시켜(東北易帜), 조국통일과 민족단결에 공헌했다. 후에 중화민국 육해군 부사령을 맡았으며, 육군1급상장에 올랐다. 서안사변 이후 장개석 부자에 의해 오랜기간 연금되었다. 1990년 장학량은 자유를 얻었으며, 1995년 대만을 떠나 하와이에서 거주했다. 2001년 10월, 향년 10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장학량은 항일을 적극 주장하고 내전을 반대하며 일찍이 양호성(杨虎城)장군과 함께 서안사변(西安事變)을 일으켜, 국공2차합작을 이끌어내고,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였다. 그외 그는 풍류를 즐기고 호탕하며, 민국 4대 미남 중 한 명으로 불렸다.

주요사건 《서안사변》

발발배경

1931년 '9·18 사변'발발 이후 일본의 중국침략은 집요할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6년 10월 홍군이 장정을 끝내고 연안에 근거지를 마련하였지만, 홍군에 대한 국부군의 공격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장개석은 장학량의 동북군(東北軍)과 양호성의 서북군(西北軍)을 동원하여 홍군에 대한 공격을 강화함으로써 연안은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 시기에 중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이 더욱 확대됨으로써 중국인민의 항일의식이 극도에 이르게 되었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장학량의 대일 적대감은 분출된 반면, 동북군에 대한 국민정부의 재정지원 격감 등으로 인하여 장개석에 대한 장학량의 불만은 증대되기 시작하였다. 장학량이 양호성과 연대하여 서안사변을 일으킨 배경에는 중국공산당의 전략도 한 몫 하였다. 중국공산당은 항일 투쟁이라는 대의명분을 앞세워 장학량과의 연대를 꾸준히 모색하였고, 장학량 또한 중공당의 노력에 호응하며 상호교감이 진척되어 있었다.

전개

이처럼 일본의 침략 확대에 따른 민심의 변화, 그리고 공동항일을 위한 장학량과 중국공산당 간의 은밀한 접촉에도 불구하고, 장개석은 '먼저 국내를 안정시킨 뒤 외적을 물리친다'(先安內, 後攘外)는 방침을 고수함으로써 민심을 외면하였고, 1936년 10월과 12월에는 장학량과 양호성 군대의 홍군 섬멸작전을 독촉하기 위해 직접 서안으로 찾아갔다. 서안사변은 장개석이 전투를 독려하기 위해 두 번째 서안을 방문한 12월 12일에 발생하였다. 물론 장학량은 병력동원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기 전에 장개석을 설득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서안사변을 통하여 대륙의 정세는 급변하게 되었다. 연안이라는 막다른 골목에서 국부군의 총공세에 전전긍긍해야만 했던 중국공산당에게는 기사회생의 계기를 마련해준 반면, 중국공산당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해 국공내전을 승리로 장식하려고 했던 국민당 정부에게는 엄청난 타격을 안겨주었다.

관련자료

장학량을 주인공으로 한 2014년 중국 드라마 《청년원수》(少帅)

참고문헌

오수열, 「서안사변(西安事變)의 전개와 중국정치에 미친 영향」, 한국동북아논총 17권 3호, 2012, pp.193-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