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우언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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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주은래, 周恩來, Zhōu Ēnlái)

출생 1898년 3월 5일
중국 강소성 회안시
사망 1976년 1월 8일(77세)
중국 하북성 북경
학력 프랑스 파리 대학교 정치학과 중퇴
직업 정치가, 군인, 혁명가
배우자 덩잉차오(邓颖超)
자녀 양녀 쑨유스(孫維世)
부모 양부 저우이간(周貽淦)
생부 저우이넝(周貽能)
생모 완둥런(万冬人)

개요

저우언라이(중국어 간체: 周恩来, 정체: 周恩來, 병음: Zhōu Ēnlái, 한자음: 주은래, 1898년 3월 5일 ~ 1976년 1월 8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가, 혁명가이다. 중국공산당 강소성 회안시에 태어나 난카이(남개)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였으며, 이 시기에 5·4 운동에 적극 참여한다. 난카이 학교 졸업 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 공부하면서 중국공산당 프랑스 지부를 담당하게 되어 당원을 모집하는 등의 임무를 수행한다. 1924년 귀국하여 황포군관학교의 정치부 주임을 맡는다. 제1차 국공합작시기 장개석쪽에 적극 협력하던 도중 상해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데 성공하나 곧 장개석이 일으킨 4.12 정변으로 인해 큰 타격을 받고 도망자 신세가 된다. 이후 장개석에 대항하기 위해 남창봉기를 일으키나 실패로 돌아간다. 여전히 당의 주도권을 쥔 그를 포함한 엘리트파들은 홍군의 역량을 과신해 전면전으로 장개석의 군대와 싸우다가 실패하고 대장정을 시작하게 되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고 모택동의 참모를 자처하고 죽을 때까지 그를 충실히 보좌한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된 후 초대 총리와 외교부장을 겸하여 외교가로 활발히 활동하였는데 제네바 회담에서 활약하고 닉슨의 방중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이루어 내기도 한다. 모택동이 사망하기 8개월 전인 1976년 1월 8일 북경에서 사망한다.

생애

출생 및 성인 이전시기

1898년 3월 5일 중국 강소성 희안에서 태어났다. 주은래가 태어났던 해에 그의 아버지인 주이능이 과거에 합격했는데 이 때문에 황은(皇恩)이 찾아왔다는 뜻으로 은래(恩來)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친부모가 그를 돌볼 여력이 없던 탓에 백부인 주이갱의 집으로 양자로 보내졌다. 그를 입양한 양모 진씨는 그를 기독교 계통의 선교사를 집으로 데러와 저우언라이를 가르치게 하였고 이후에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심양의 ‘동관모범학단’에 입학했다. 이러한 점 덕분에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영어실력을 쌓아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뛰어난 영어실력에도 불구하고 대학 진학 시 ‘청화학교’에 지원했으나 지역별로 합격자 숫자를 할당하는 지역안배 제도 때문에 영어시험에서 떨어져 탈락하고 말았다. 그러자 차선책으로 난카이(남개)학교에 입학했다.

난카이 학교 시절과 유학

난카이 학교는 미국 계통의 학교였던 덕에 자유롭고 민주적인 분위기가 강했다고 한다. 이 시기부터 스스로 학비를 벌어가면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이례적으로 2학년 때부터 학비를 면제받기도 했고 졸업 당시 문학에서 수석을 차지하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또한 이 시기는 신해혁명부터 위안스카이의 황제취임 등 국가적으로 혼란한 사건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글을 작성해 자신이 조직한 서클에서 <경업보>라는 회보를 내기도 했고 각종 작문대회에 참가하거나 대중 앞에 나가 연설을 하면서 봉건주의적 전통과 위안스카이를 비판하곤 했다. 난카이학교 졸업 후 그는 신학문을 더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여기서 당시 일본 최고의 좌익 이론가였던 가와카미 하지메 박사의 글을 탐독하면서 마르크스 이론을 개괄적으로나마 접하게 된다. 그러나 1919년 5·4 운동이 일어나자 귀국하였다. 당시 난카이 학교는 난카이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저우언라이는 난카이 학교의 교장이었고 난카이 대학의 총장이던 장백령의 도움으로 학교 생활을 다시 시작한다. 이후 북경대의 이대교를 천진으로 초빙해 각오사 회원들에게 강연을 부탁했었는데, 이는 그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카우츠키의 『계급투쟁』, 『10월혁명』을 읽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던 중 당시 중국의 유망한 학생들을 유럽으로 유학 보내 노동하면서 학업을 병행하는 ‘근공검학’이라는 반향이 일고 있었다. 주은래 또한 이 계획에 따라 프랑스로 떠났다. 그러나 중국 유학생들을 위해 리옹에 설립된 대학에서 중산층의 유학생들만 받아들인다는 조건을 내걸자 항의시위를 조직했으나 발각되어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이때 마침 중국에서 공산당이 창설되었고 중국공산당 프랑스 지부의 우두머리가 된다. 또한 코민테른과도 접촉하게 되었는데, 코민테른의 자금지원을 받으며 공산당원을 모으는 임무를 맡게 되는데, 이 시기가 바로 주덕의 소개로 등소평을 만나게 된 때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당 중앙에서 그에게 귀국 명령을 내렸고 장신부의 추천으로 그는 황포군관학교 정치부 주임직을 맡게 된다.

등영초와의 인연

남개대학 시절 그는 친일파 산동군벌에 대항하기 위해 ‘각오사’라는 학생 조직을 만드는데 여기서 등영초라는 여학생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작문에 매우 뛰어났는데, 이때 저우언라이와 등영초는 곧 사랑에 빠지게 된다. 당시 천진의 경찰국장이 그가 이런 책들을 탐독하는 것을 방해했었는데 등용초가 이에 대한 항의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었던 일이 있었다. 또한 1920년 1월 20일 《각오》라는 잡지를 창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이 일본 상품을 판매하던 상인들에게 폭행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 항의시위를 벌이는 도중 경찰과 충돌이 빚어졌고 이 과정에서 주은래는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혐의는 기각되었고 곧바로 석방되었는데 이때 그를 도와준 변호사와 남개학교 창설자가 그에게 자신의 딸들과 결혼해줄 것을 제안했지만 이미 등영초에 대한 마음을 품고 있던 주은래는 이를 거절했던 일도 있었다. 파리 유학시절에도 그녀와 끊임없이 서신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나갔고 귀국 후 주은래는 27살, 등영초는 21살의 나이로 혁명동지들 앞에서 작은 결혼식을 올려 부부로 거듭난다.

젊은 시절의 주은래와 등영초 부부

제1차 국공합작4.12 정변

황포군관학교 정치부 주임직을 맡은 시기 국공합작이 성사되자 그는 황포군관학교 생도들과 함께 국민당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황포군관학교 생도들은 장개석이 동쪽 지역의 군소군벌을 토벌하자 이에 참여하였고, 주은래는 광동지역 농민들을 민병대로 조직화하여 유격전으로 가르쳤고 이들이 국민당 정부군을 물적으로 군사적으로 지원하도록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5년 손문이 타개하자 장개석은 공산당원들을 몰아낼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극우단체를 동원하여 공산당과 가깝게 지내던 요중개를 암살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이 반역행위를 꾸미고 있으며 황포군관학교를 개혁한다는 명목으로 공산당원들의 직위를 해제하고 주은래도 가택연금 시켜버린다. 그러나 여전히 국공합작이 지속되길 원하던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곧 석방된 주은래는 동남군벌이 장악하고 있던 상해로 가서 노동자들과 함께 봉기를 일으켜 상해를 접수하여 ‘시민정부’ 선포하며 ‘상해 코뮌’이 성립한다. 성공적으로 상해를 점령한 이들은 당연히 장개석이 이를 지원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오히려 이를 공산당을 축출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장개석]]군대가 상해를 점령하고 있던 홍군과 민병대들을 공격하는 4.12 정변이 발생한다. 수천명의 공산당원이 체포되어 처형당했고 주은래도 체포되었으나 운 좋게도 빠져나오게 되는데 이는 훗날 문화대혁명에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장개석은 그에게 8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고, 주은래는 무한 정부로 도주했다가 그해 7월말 남창으로 가서 무한정부 소속 국민당군 부사령관을 맡고 있던 주덕을 만난다. 여기서 주은래는 주덕과 함께 봉기를 계획한다. 당시 스탈린은 이를 반대했으나 이들은 이를 무시하고 봉기를 강행한다. 초기에는 봉기군에게 유리한 국면이 전개되는 듯 했으나 곧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 밀려 실패로 끝나고 만다.

공산당의 분열과 모택동과의 대립

1928년 5월 중국공산당 6전대회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다. 여기에는 주은래, 이립삼, 구추백 등을 중심으로 한 해외유학파와 모택동 등의 토착공산파를 포함해 수많은 파벌들이 참가했다. 이 당시 해외유학파들은 실권을 쥐면서 당의 주요업무를 담당했다. 그러나 곧 주은래는 이립삼과 군사전력과 토지몰수 문제를 두고 대립하기 시작했다. 장사의 사범학교에 다닐 때 모택동과 친구가 되었던 이립삼과 달리 이때까지만 주은래는 모택동으로 대표되는 ‘토착파’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모택동의 행보를 비판하면서 자신이 제시하는 방향에 따라 모택동의 제4군을 개혁하길 요구하기도 했다. 1930년 여름 주은래는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가 소련의 전폭적인 지지를 뒤에 업고 귀국했다. 이때 위기의식을 느낀 이립삼은 무리수를 두는데 모택동의 제4군이 장사를 점령하도록 지시한 것이었고, 이는 당연히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주은래도 귀국 후에 동일한 실수를 저질러버린다. 홍군의 역량을 과신하고 장사 공격을 다시 명령한 것이다. 두차례에 걸친 공격이 실패로 끝나자 모택동과의 대립이 가시화된다. 특히 모스크바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온 ‘28인의 볼셰비키’ 해외파는 모택동의 유격전을 비판하며 정통적인 군사작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토지개혁문제에서도 소련식 모델을 추구하였기에 그와 중국만의 개혁방식을 주장하던 모택동은 크게 대립했다. 그러나 장개석의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모택동의 유격전이 큰 효과를 발휘하였고, 결정적으로 국민당에 대한 전면공세에서 주은래가 이끄는 홍군이 패퇴하자 둘의 관계는 역전되어버린다. 그리고 이때의 패배는 이른바 ‘대장정’이 시작되는 계기가 된다.

대장정서안 사건

대장정이라고 불리는 기나긴 행군을 시작한 공산당군은 1935년 준의라는 지역에 도착한다. 여기서 공산당 지도부는 현 사태에 대한 책임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바로 이 자리에서 주은래는 “모택동은 항상 옳았고, 우리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라는 발언을 한다. 즉, 모택동보다 높은 지위에 있던 주은래가 지도부의 책임을 인정하면서 모택동을 사실상 향후 공산당을 주도할 지도자로 추대하려는 의지를 내비친 발언이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주은래는 모택동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뒤바뀐다. 한편 대장정 끝에 홍군은 연안에 도착한다. 여기서 주은래와 등영초는 양녀를 맞이한다. 그리고 외교활동을 벌이기 시작하는데 그의 외교적 수완이 처음 빛을 발한 사건이 바로 ‘서안 사건’이었다. 당시 장학량으로 하여금 공산당과 협력하자는 회담을 주도한 것도 주은래였고, 장개석이 감금되었을 때 직접 그를 찾아가 공산당을 공격하지 않고 함께 일본에 대항할 것을 약속받아 이후 국공합작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총리가 되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하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되면서 주은래는 정무원 총리 겸 외교부장에 임명된다. 건국 이전까지 지속되었던 혼란한 상황을 정리하고 국가 체제 및 대외적 외교관계 확립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세계 각국에서 오는 외교사절을 접대하는 한편 총리로서 국가행정의 밑바탕이 되는 행정제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이때부터 뛰어난 외교가로서의 진면목이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이를 드러내주는 한 가지 일화가 있다. 모택동이 스탈린으로부터 소련의 지원을 얻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확답을 주지 않고 모택동을 기다리게 했다. 이에 모택동은 화를 내며 당장 중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스탈린을 겁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주은래가 모스크바에 도착하면서 몇 주 지나지 않아 소련으로부터 3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받는 ‘중소 우호동맹 상호 원조조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한다.

한국전쟁과 제네바 회담

주은래는 한국전쟁과 연관성이 큰 인물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미국이 개입함과 동시에 대만을 보호하기 위해 제7함대를 대만해협 쪽으로 보내자 주은래는 이에 대하 반발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그는 미국 정부에 만약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해온다면 중국이 한반도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런 메시지를 무시한 미국은 38선을 넘어 북진을 계속했고 결국 한반도에 중국군을 진입시킨다. 이를 기점으로 미국과 중국은 대립 관계로 접어들었는데 이런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제3세계 외교’를 펼쳤다. 그의 노력은 제네바 회담에서 돋보였다. 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회담이 제네바에서 열렸다. 주은래는 이 당시 공산진영의 대표로 참석했다. 그는 그의 숙소에서 프랑스 측 대표단이 베트남측 정치가 팜 반동을 만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그해 6월 그는 영국의 이든 외상과 프랑스의 망데스 수상으로부터 라오스와 캄보디아 문제를 베트남 문제와 분리하여 처리한다는 동의를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뿐만 아니라 호치민을 달래어 그가 7월 제네바 협상에 좀 더 온건한 입장으로 돌아서게 만드는 데도 성공한다. 그리고 며칠 후 베트남은 군사분계선 문제에 대해 양보하는 입장으로 선회했고 회담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기에 이른다. 그는 협상 마지막 단계에서 미국으로부터 남베트남에 군사기지를 설치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려고 하였으나. 미국은 협정에 대한 서명을 거부함으로써 이를 거절했다. 한편 그해 6월 말 회담이 잠시 중지되자 그는 인도 총리 네루를 만나 티베트 무력점령으로 인해 중국에 대한 경계하던 인도 측을 안심시키고 ‘평화공존5원칙’을 이끌어낸다. 이 원칙은 1955년 반둥회의에서 채택되기까지 하는데 이때 그가 내세웠던 유명한 말이 “우리는 공통점을 추구하고 차이점을 존중해야 합니다.”였다. 이는 곧 구동존이(求同存異) 원칙으로 서로 의견이 다른 부분은 일단 뒤로 미루어 놓고 의견이 같은 부분에서 시작하여 우호적 관계를 구축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중국은 인도와 함께 제3세계의 대표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70년대 닉슨 독트린 이후 미국과 적극 협력할 수 있었던 것도 중국이 냉전체제의 대립에서 한 발짝 빗겨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받는다.

또 한 번의 갈등

이런 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였지만 다시 모택동과 갈등이 시작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공업화를 위한 방법론에 있어서 이견이 있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라면 바로 지식인에 대한 관점이 달랐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은래는 지식인들을 노동계급의 일부에 포함되어 있고 이들을 포용하여 공업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모택동은 지식인 주도하에 공업화가 진행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이들이 관료계급이라는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거듭나는 것처럼 보였다. 모택동은 이런 주은래와의 의견 차이를 좁혀가는 듯했다. 1957년 백화제방·백가쟁명 등의 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맥락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모택동은 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으로 돌아서고 주은래는 이로 인해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그리고 1958년 그는 외교부장 자리에서 잠시 물러난다. 퇴직 후에도 각종 외교 활동을 꾸준히 이어나갔다.

문화대혁명 시기의 주은래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 홍위병들이 전국적으로 일어나 활동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적 성향을 지녔다거나 부르주아 분자라고 생각되는 관료와 지식인들을 끌어내어 망신을 주거나 조리돌림 했다. 홍위병들의 활동이 점차 공격적으로 변하고 과격해지자 사태가 변질될 것을 우려한 주은래는 모택동에게 8월 8일 16개조 조항을 건의해 국가 행정조직이나 경제기구, 과학부문은 이러한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그리고 천안문에 나온 홍위병들을 향해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은 점차 홍위병들 간의 탈권 투쟁으로 흘러가는 등 혼란이 심화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주은래 또한 홍위병들 사이에서 지지와 비판을 동시에 받는 등 논란이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던 중 1967년 8월 그 또한 홍위병들에게 연금당하기에 이른다. 그는 흥분한 홍위병들을 겨우 설득하였지만 그 후 몇 시간 만에 심장발작으로 병원에 실려 갔다. 이때 그의 양녀였던 손유세도 홍위병들에게 고문 받아 사망하기에 이른다.

핑퐁외교의 1등 공신

이런 혼란 속에서 그가 집중했던 것은 그의 전문 분야인 외교에 힘쓰는 것이었다. 소련과 중국은 이미 1950년대 후반의 갑작스러운 지원 중단으로 인해 그 관계가 어긋나고 있던 상황이었다. 1968년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자 그는 이를 강력히 비판했다. 또한 중소간의 이념논쟁은 갈수록 격화되었고 1969년 중소국경분쟁이 터지자 두 국가의 관계는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주은래는 미국과 접촉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닉슨에게 비밀서한을 보내어 미국과의 협상의사를 내비쳤고 미국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국가안전보좌관인 키신저를 두 차례에 걸쳐 북경으로 파견한다. 이후 키신저가 미국에서 돌아올 때쯤 유엔총회에서 대만 대신 중화인민공화국의 가입을 승인했고 1972년 2월 17일 미중 정상회담이 북경에서 개최되기에 이른다. 아직 두 국가 간의 외교관계가 정상적으로 공식화되지 않았음에도 이러한 회담이 열릴 수 있던 것은 주은래의 역량과 노력 덕분이었다.

말년

이러한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루어냈지만 얼마못가 그는 암 진단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업무 수행을 해나갔다. 그는 모택동의 재가를 받아 농업, 공업, 국방, 과학 4개 부문의 현대화를 목표로 하는 ‘4대 현대화 계획’을 공표하는 한편 등소평을 인민해방군의 총참모장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1976년 1월 8일 그는 북경의 한 병원에서 사망한다. 그해 4월 청명절에는 많은 대중이 모여 그를 추모하기도 했는데 이때 4인방의 방해로 인해 유혈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1977년 사망 1주기 때도 대규모 인파가 모여 그를 애도하기도 했다.

평가

“협상에 임하는 저우의 태도는 침착하고 단호했다.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아마 자기 나라 기준으로 볼 때도 좋은 결과였을 것이다.” -앤소니 이든 경(제네바 회담 영국 대표)의 회고록[1]

"주석의 방대한 어젠더를 위한 자료를 만들었던 사람들과 마오쩌둥 사에에서 그는 빠질 수 없는 핵심 중재자가 되었으며, 마오쩌둥의 광대한 비전을 구체적인 프로그램으로 옮기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그런 마오쩌둥의 비전이 지난 극단성을 완화시켜 주었기 때문에 많은 중국인들이 그에게 감사를 표해 왔다." - 헨리 키신저[2]


보통 등소평 이전의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모택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모택동이 혁명가로서 중국이 나아갈 비전을 제시하고 이끌었다면 주은래는 유능한 실무자로서 이를 뒷받침하는 파트너로 활약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외교활동에 뛰어난 역량과 매너를 갖춘 덕분에 서방측 인사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2인자로서의 위치를 오래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업무에 열심이었고 검소하고 겸손했기에 중국인들에게도 크게 존경받는 인물이다. 1976년 천안문 광장에서 그를 추모하기 위해 수많은 군중이 모였던 것에서 알 수 있고 그 이후에도 추모 대회에서 중국의 주요 지도자들은 항상 그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는 편이다. 톈진대학에는 그와 그의 부인을 위한 기념관이 있는데 이 또한 그에 대한 중국인들의 평가를 잘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톈진대학의 주은래등영초 기념관
주은래등영초 석상

그러나 모택동 밑에서 실각하지 않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이끌었으므로 정치적인 생존을 위해 모택동의 눈치를 보며 그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다는 점 때문에, 모택동이 저지른 여러 실책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연표

연도 내용
1898년 3월 화이안에서 출생
1924년 3월 황포군관학교 정치부 주임에 임명
1925년 3월 소장 계급으로 북벌군의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
1925년 8월 덩잉차오(등영초)와 결혼
1927년 3월 상하이 노동자 봉기 조직
1927년 4~5월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및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
1927년 7월 공산당 새로운 임시중앙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선출
1927년 11월 공산당 임시중앙의 확대 정치국 회의에서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재선
1928년 1월 정치국에 의해 선전, 군사, 조사, 특무, 통신, 출판을 담당하는 주임으로 임명됨
1928년 6월 정치국과 상무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
1928년 7월 상무위원회의 비서장으로 임명
1928년 7~9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후보위원으로 선출
1929년 8월 중앙위원회 군사부 주임으로 임명
1931년 1월 코민테른으로부터 비판을 받았지만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위원 자리 유지
1931년 8월 상하이에서 장시성으로 이동 후 소비에트 지역의 중앙국 서기와 홍군 담당
1931년 12월 루이진에 도착해 중앙국 접수
1932년 10월 닝두 회의에서 마오가 홍군 내의 자신의 지위 빼앗기게 되자 홍1군의 정치위원 자리 접수
1932년 2~3월 임시중앙이 상하이에서 장시성으로 이동하면서 홍1군의 총정치위원에 임명됨
1933년 12월 새로 구성된 중앙혁명위원회의 부주석에 임명
1934년 1월 새로운 인사 변동 속에서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
1934년 7월 대장정 이끄는 3인 그룹의 한 명에 임명
1935년 1월 준이 회의에서 군사업무와 관련해 최종 결정을 내리는 책임을 부여 받음
1935년 11월 싼시성 북부에 정치국 중앙조직부를 건설
1936년 10월 3개 주력부대를 통합한 이후 확대 중앙군사위원회의 부주석에 임명
1937년 8월 정치국에 의해 신설 혁명군사위원회의 2명의 부서기 중 한 명에 임명됨
1937년 12월 정치국에 의해 남부지역 성들의 당무를 담당하는 중앙위원회 장강국 위원으로 지명됨
1938년 2월 (국공합작 이후) 국민당 정부에서 군사위원회 정치부 부주임에 임명
1938년 12월 국민당과의 협상을 위해 충칭에 도착
1939년 1월 중앙남방국의 서기에 임명
1943년 3월 충칭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정치국 위원 직책 유지
1945년 6월 13인의 정치국 위원 중 한 명과 5인의 서기 중 한 명으로 선출
1946년 11월 충칭에서 옌안으로 돌아온 뒤 군사위원회 부주석과 총참모장 대리로 임명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의 총리 겸 외교부장, 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임명
1954년 7월 제네바 회담의 중국 대표단 단장
1955년 4월 반둥회의에 참석
1976년 1월 베이징에서 사망

[3]

참고자료

바르바라 바르누앙, 《저우언라이 평전》, 유상철 역, 베리타스북스, 2005
신동준, 《인물로 읽는 중국 현대사》, 인간사랑, 2011
리핑, 《저우언라이》, 김세영 역, 천케이, 2008
헨리 키신저, 《중국 이야기》, 권기대 역, 민음사, 2012

각주

  1. 바르바라 바르누앙, 《저우언라이 평전》, 유상철 역, 베리타스북스, 2005, p.184.
  2. 헨리 키신저, 《중국 이야기》, 권기대 역, 민음사, 2012, p.298.
  3. 바르바라 바르누앙, 《저우언라이 평전》, 유상철 역, 베리타스북스, 2005, pp.370~3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