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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田)씨 종친들의 세력을 규합하여 정변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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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지]]는 [[전상]]을 경계하여 죽이고자 하였다. 전(田)씨의 먼 친척 [[전표]](田豹)는 [[감지]]를 섬겨 총애를 받던 충신이였다. [[감지]]가 “내가 전(田)씨 적손들을 모조리 없애고 너 [[전표]]를 전(田)씨 종가(宗家)로 만들려고 한다.”라고 했다. [[전표]]가 “저는 전(田)씨와는 거리가 먼 방계라 저를 종가로 하기에는 무리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전(田)씨 모두 없애겠습니까.”라고 하며 듣지 않았다.  그리고나서 [[전표]]는 [[전상]]에게 “[[감지]]가 당신을 죽이려 하니 선수치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이오.”라며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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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지]]는 [[전상]]을 경계하여 죽이고자 하였다. 전(田)씨의 먼 친척 [[전표]](田豹)는 [[감지]]를 섬겨 총애를 받던 충신이였다. [[감지]]가 “내가 전(田)씨 적손들을 모조리 없애고 너 [[전표]]를 전(田)씨 종가(宗家)로 만들려고 한다.”라고 했다. [[전표]]가 “저는 전(田)씨와는 거리가 먼 방계라 저를 종가로 하기에는 무리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전(田)씨 모두 없애겠습니까.”라고 하며 듣지 않았다.  그리고나서 [[전표]]는 [[전상]]에게 “[[감지]]가 당신을 죽이려 하니 선수치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이오.”라며 전했다.
::[[감지]]가 [[제간공]]의 궁중에 머무르고 있을 때 [[전상]]의 형제 넷이 궁중으로 마차를 몰아 [[감지]]를 죽이려 했다. [[감지]]가 궁실 문을 닫았다. [[제간공]]은 부인과 단대(檀臺)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갑자기 쳐들어온 [[전상]]을 공격하려 했다. 태사 자여(子餘)가 “[[전상]]은 감히 난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해를 제거하려는 것입니다.”라고 하자 [[제간공]]이 공격하려던 것을 그만 두었다. [[전상]]이 나와서는 [[제간공]]이 화가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죽을까 두려워 도망치려 했지만 [[전자행]](田子行)이 [[전상]]을 제지하며 “머뭇거림은 실행의 적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전상]]과 그 무리들은 [[제간공]]이 다시 즉위하여 자기들을 죽일까 겁이 나서 [[제간공]]까지 죽일 결심을 하게 되었다. [[감지]]도 그 무리를 이끌고 [[전상]]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도망쳤다. [[전상]]의 무리가 추격하여 결국 [[감지]]를 죽였다. [[제간공]]은 “진작에 어앙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런 재난은 만나지 않았을 것을!”라고 말하며 공실을 버리고 도망쳤다. 기원전 481년 [[전상]]의 군대들은 [[제간공]]을 뒤쫓아가 서주(徐州)에서 [[제간공]]을 잡아 시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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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지]]가 [[제간공]]의 궁중에 머무르고 있을 때 [[전상]]의 형제 넷이 궁중으로 마차를 몰아 [[감지]]를 죽이려 했다. [[감지]]가 궁실 문을 닫았다. [[제간공]]은 부인과 단대(檀臺)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갑자기 쳐들어온 [[전상]]을 공격하려 했다. 태사 자여(子餘)가 “[[전상]]은 감히 난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해를 제거하려는 것입니다.”라고 하자 [[제간공]]이 공격하려던 것을 그만 두었다. [[전상]]이 나와서는 [[제간공]]이 화가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죽을까 두려워 도망치려 했지만 [[전자행]](田子行)이 [[전상]]을 제지하며 “머뭇거림은 실행의 적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전상]]과 그 무리들은 [[제간공]]이 다시 즉위하여 자기들을 죽일까 겁이 나서 [[제간공]]까지 죽일 결심을 하게 되었다. [[감지]]도 그 무리를 이끌고 [[전상]]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도망쳤다. [[전상]]의 무리가 추격하여 결국 [[감지]]를 죽였다. [[제간공]]은 “진작에 어앙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런 재난은 만나지 않았을 것을!”라고 말하며 공실을 버리고 도망쳤다. 기원전 481년 [[전상]]의 군대들은 [[제간공]]을 뒤쫓아가 서주(徐州)에서 [[제간공]]을 잡아 시해하였다.
  
 
===[[제평공]]의 재상이 되어 제나라 국정을 주무르다===
 
===[[제평공]]의 재상이 되어 제나라 국정을 주무르다===

2017년 6월 25일 (일) 23:07 판

전상(田常)

본명 전항(田恆)
국적 (齊)나라
본관 (陳)나라
별칭 陳恒(진항)
田成子(전성자)
陳成子(진성자)
가족 할아버지 전환자(田僖子)
아버지 전걸(田乞)
자녀 전양자(田襄子) 전반(田盤)
시호 성(成)
생존 시대 춘추시대
신분 나라 대부

개요

  • 원래 이름은 전항(田恆)이라고 한다. 전상(田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한나라 시대에, 한문제의 이름 인 유항(刘恒)을 회피하기 위해서 였다.
  • 전(田)씨 일가는 진(陳)씨 성과 전(田)씨 성을 혼용하여 사용했다. 춘추 시대 초기에 (陳)나라에서 공실의 내분이 일어나 전항의 조상인 공자 완(完)이 제나라로 도망쳐왔다. 제나라 군주인 제환공은 그를 받아들여 조정의 낮은 벼슬 자리를 주었다. 그가 곧 나라에서 전(田)씨의 시초이다. 당시에는 전(田)과 진(陳)의 발음이 같았다고 한다.
  • 죽은 후에, 시호인 성(成)과 당시 경대부(卿大夫)를 존경의 의미로 불렀던 자(子)를 합쳐 진성자(陳成子) 혹은 전성자(田成子)라고 불렸다.

생애

나라의 재상이 된 전상

기원전 485년, 전상은 아버지 전걸의 지위인 대부를 계승 받았다, 그 후에 나라 대부 포식(鲍息)이 제도공(齐悼公)과 틈이 벌여져 제도공을 죽이게 되었다. 제도공의 처가인 나라가 과 연합하여 쳐들어온 후, 그의 아들 제간공(齐简公)을 왕으로 세웠다. 전상감지(阚止)는 나라의 좌우상을 담당하여 제간공을 도왔다. 전상제간공의 총애를 받는 감지를 경계하면서, 그의 조부 전환자와 같이 전상은 계속하여 큰 됫박(大斗)로 양식을 빌려 주고 작은 됫박(小斗)로 거둬 들이는 방법으로 민심을 더욱더 얻어나갔다. 나라 백성들은 "할머니가 뜯은 나물을 전성자에게 보내자!”라는 노래를 부르며 전상을 칭송했다. 어느 날 대부 어앙(御鞅)이 제간공에게“전상감지를 함께 재상으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한 사람을 선택하십시오”라고 간하였다. 그러나 간공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충고를 무시했다.


전(田)씨 종친들의 세력을 규합하여 정변을 하다

감지전상을 경계하여 죽이고자 하였다. 전(田)씨의 먼 친척 전표(田豹)는 감지를 섬겨 총애를 받던 충신이였다. 감지가 “내가 전(田)씨 적손들을 모조리 없애고 너 전표를 전(田)씨 종가(宗家)로 만들려고 한다.”라고 했다. 전표가 “저는 전(田)씨와는 거리가 먼 방계라 저를 종가로 하기에는 무리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전(田)씨 모두 없애겠습니까.”라고 하며 듣지 않았다. 그리고나서 전표전상에게 “감지가 당신을 죽이려 하니 선수치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이오.”라며 전했다.
감지제간공의 궁중에 머무르고 있을 때 전상의 형제 넷이 궁중으로 마차를 몰아 감지를 죽이려 했다. 감지가 궁실 문을 닫았다. 제간공은 부인과 단대(檀臺)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갑자기 쳐들어온 전상을 공격하려 했다. 태사 자여(子餘)가 “전상은 감히 난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해를 제거하려는 것입니다.”라고 하자 제간공이 공격하려던 것을 그만 두었다. 전상이 나와서는 제간공이 화가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죽을까 두려워 도망치려 했지만 전자행(田子行)이 전상을 제지하며 “머뭇거림은 실행의 적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전상과 그 무리들은 제간공이 다시 즉위하여 자기들을 죽일까 겁이 나서 제간공까지 죽일 결심을 하게 되었다. 감지도 그 무리를 이끌고 전상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도망쳤다. 전상의 무리가 추격하여 결국 감지를 죽였다. 제간공은 “진작에 어앙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런 재난은 만나지 않았을 것을!”라고 말하며 공실을 버리고 도망쳤다. 기원전 481년 전상의 군대들은 제간공을 뒤쫓아가 서주(徐州)에서 제간공을 잡아 시해하였다.

제평공의 재상이 되어 제나라 국정을 주무르다

전상제간공(齐简公)의 동생 오(鰲)를 왕으로 세웠으니, 이 사람이 제평공(齐平公)이다. 제평공이 임금 자리에 오르자 전상은 그의 재상이 되어 나라 국정을 주물렀다. 그리고 정치 개혁을 단행하고 형벌권을 장악하여 포(鮑), 안(晏), 공족(公族)들을 죽이는 등 반대 세력을 모조리 몰아냈다.

덕치는 백성이 좋아하는 것이니 군주께서 행하십시오. 형벌은 백성들이 싫어하는 것이니 이 신이 집행하겠습니다.

 
— 전상
이렇게 시행한 지 5년에 되어서 제나라의 정권은 모두 전상에게 귀속되었다. 이후 백성들은 제후인 평공을 두려워하지 않고 형벌을 주는 전상만을 오직 두려워하였다. 전상은 또한 자신의 사유 토지를 크게 늘려갔다. 나라 안평(安平)의 동쪽 땅을 떼어 내어 전씨의 봉읍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개인의 봉읍 면적이 공실 소유의 토지보다 많아졌다. 전상은 이제 제후가 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는 이미 삼가분진(三家分晉)으로 독립하여 신흥 세력이 된 한(韓), 조(趙), 위(魏)의 대부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제후들의 신망을 얻기 위해 일찍이 나라가 빼앗은 나라와 나라의 땅을 돌려주었다. 이렇게 해서 전상은 기원전 476년에 나라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주변 국가의 평론

논어 헌문(憲問)편

전상제간공(齊簡公)을 죽였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공자는 3일 동안 재계(齋戒)했고, 노애공(魯哀公)에게 나라를 토벌해야 한다고 간청했다. 노애공(魯哀公)은 맹손씨(孟孫氏), 숙손씨(叔孫氏), 계손씨(季孫氏)라는 3환(三桓)한테 가서 알려주라고 하였다. 공자가 3환에게 가서 알려주며 요청했으나 결국에는 거절당했다.


고서의 기록

장자(莊子),《남화경(南華經), 거협(胠篋)》

전성자(田成子)는 나라를 훔쳤다. 그는 대도(大盜) 제후이다.

 
장자(莊子), 《남화경(南華經), 거협(胠篋)》

한비자(韓非)

전성자나라를 뺏다(田成子取齊)

 
한비자(韓非)
이는 후세에 인용되는 성어인「竊鉤者誅,竊國者侯(절구자주 절국자후: 허리띠 고리를 훔친 자는 벌을 받지만,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의 유래이기도 하다.

사기(史記)

사기(史記)에 따르면 전상이 제나라 키가 7척 이상의 여자를 첩으로 골랐다고 한다. 후궁은 100명이였다. 후궁이 손님을 만나는 것은 금지하지 않았다. 전상이 죽었을 때에는 아들이 70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전상의 아들인 전반(田盘)이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 받았다.


참고 자료

Hao3aloha (토론) 2017년 6월 24일 (토) 19:07 (K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