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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전상(田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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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개요==
:*동주 [[춘추]]시대 [[제나라]]의 정치 인물이자 [[제나라]] 전씨 가족의 8번째 수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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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춘추]]시대 [[제나라]]의 정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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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라]] 전씨 가족의 8번째 수령이다. [[강제(姜齊)]]의 시대에서 [[전제(田齊)]]로 가는 데에 있어 많은 공헌을 했다 할 수 있다.
 
*원래 이름은 [[전상|전항]](田恆)이라고 한다. [[전상]](田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한나라]] 시대에, [[한문제]]의 이름 인 유항(刘恒)을 회피하기 위해서 였다.  
 
*원래 이름은 [[전상|전항]](田恆)이라고 한다. [[전상]](田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한나라]] 시대에, [[한문제]]의 이름 인 유항(刘恒)을 회피하기 위해서 였다.  
*전(田)씨 일가는 전(田)으로도, 진(陳)으로도 불리곤 한다. [[춘추]] 시대 초기에 [[진]](陳)나라에서 공실의 내분이 일어나 전항의 조상인 공자 완(完)이 [[제나라]]로 도망쳐왔다. [[제나라]] 군주인 [[제환공]]은 그를 받아들여 조정의 낮은 벼슬 자리를 주었다. 그가 곧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시초이다. 당시에는 전(田)과 진(陳)의 발음이 같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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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田)씨 일가는 진(陳)씨 성과 전(田)씨 성을 혼용하여 사용했다. [[춘추]] 시대 초기에 [[진]](陳)나라에서 공실의 내분이 일어나 전항의 조상인 공자 완(完)이 [[제나라]]로 도망쳐왔다. [[제나라]] 군주인 [[제환공]]은 그를 받아들여 조정의 낮은 벼슬 자리를 주었다. 그가 곧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시초이다. 당시에는 전(田)과 진(陳)의 발음이 같았다고 한다.  
 
*죽은 후에, [[시호]]인 성(成)과 당시 [[경대부]](卿大夫)를  존경의 의미로 불렀던 자(子)를 합쳐 [[전상|진성자]](陳成子) 혹은 [[전상|전성자]](田成子)라고 불렸다.
 
*죽은 후에, [[시호]]인 성(成)과 당시 [[경대부]](卿大夫)를  존경의 의미로 불렀던 자(子)를 합쳐 [[전상|진성자]](陳成子) 혹은 [[전상|전성자]](田成子)라고 불렸다.
  
 
==생애==
 
==생애==
:기원전 485년, [[전상]]은 아버지 [[전걸]]의 지위인 [[경대부|대부]]를 계승 받았다, 그 후에 [[제]]나라 [[경대부|대부]] 포식(鲍息)을 부추겨서 [[제도공]](齐悼公)죽이게 후 [[제간공]](齐简公)을 왕으로 세웠다. [[전상]]과 감지(阚止)는 [[제]]나라의 [[]]나라의 좌우상을 담당하였다. 기원전 481년, [[전상]]은 전씨 종친들의 세력을 규합하여 정변을 하였다. [[제간공]](齐简公)은 투쟁에서 패해 공실을 버리고 도망을 갔으나 [[전상]]이 군대를 보내 서주에서 감지(阚止)[[제간공]]을 죽였다. [[전상]]은 [[제간공]](齐简公)의 동생 오(鰲)를 왕으로 세웠으니, 이 사람이 [[제평공]](齐平公)이다. 평공이 임금 자리에 오르자 [[전상]]은 그의 재상이 되어 [[제]]나라 국정을 주물렀다. 포(), 안(晏) 등 여러 일가들을 모두 다 죽였다. 그리고 정치 개혁을 단행하고 형벌권을 장악하여 반대 세력을 모조리 몰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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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덕치는 백성이 좋아하는 것이니 군주께서 행하십시오. 형벌은 백성들이 싫어하는 것이니 이 신이 집행하겠습니다.|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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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백성들은 제후인 평공을 두려워하지 않고 형벌을 주는 [[전상]]만을 오직 두려워하였다. [[전상]]은 또한 자신의 사유 토지를 크게 늘려갔다. [[제]]나라 안평(安平)의 동쪽 땅을 떼어 내어 전씨의 [[봉읍]]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개인의 [[봉읍]] 면적이 공실 소유의 토지보다 많아졌다. [[전상]]은 계속하여 대두(大斗)로 양식을 빌려 주고 소두로 거둬 들이는 방법으로 민심을 더욱더 얻어나가기도 하였다. [[전상]]은 이제 제후가 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는 이미 [[삼가분진]](三家分晉)으로 독립하여 신흥 세력이 된 한(韓), 조(趙), 위(魏)의 [[경대부|대부]]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제후들의 신망을 얻기 위해 일찍이 [[제]]나라가 빼앗은 [[노]]나라와 [[위]]나라의 땅을 돌려주었다. 강제(姜齊)의 국조가 끝나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였다. 이렇게 해서 [[전상]]은 기원전 476년에 [[제]]나라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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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간공]](齐简公)의 재상이 된 [[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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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nbsp;기원전 485년, 아버지 [[전걸]]이 죽고 아들 [[전상]]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받았다, [[전상]][[]]나라에서 큰 세력을 구축한 전(田)씨들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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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nbsp;[[제]]나라 [[경대부|대부]] 포식(鲍息)[[제도공]](齐悼公)과 틈이 벌여져 제도공을 죽이게 되었다. 제도공의 처가인 [[노]]나라가 [[진]]과 연합하여 쳐들어온 , 그의 아들 [[제간공]](齐简公)을 왕으로 세웠다. [[전상]]과 [[감지]](阚止)는 [[제]]나라의 좌우상을 담당하여 제간공을 도왔다. [[전상]]은 제간공의 총애를 받는 감지를 경계하면서, 그의 조부 [[전환자]]와 같이 [[전상]]은 계속하여 큰 됫박(大斗)로 양식을 빌려 주고 작은 됫박(小斗)로 거둬 들이는 방법으로 민심을 더욱더 얻어나갔다. [[제]]나라 백성들은 "할머니가 뜯은 나물을 [[전상|전성자]]에게 보내자!”라는 노래를 부르며 전상을 칭송했다. 어느 날 [[경대부|대부]] 어앙(御鞅)이 제간공에게“전상과 감지를 함께 재상으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한 사람을 선택하십시오”라고 간하였다. 그러나 간공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충고를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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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田)씨 종친들의 세력을 규합하여 정변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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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지]]는 전상을 경계하여 죽이고자 하였다. 전(田)씨의 먼 친척 [[전표]](田豹)는 감지를 섬겨 총애를 받던 충신이였다. 감지가 “내가 전(田)씨 적손들을 모조리 없애고 너 전표를 전(田)씨 종가(宗家)로 만들려고 한다.”라고 했다. 전표가 “저는 전(田)씨와는 거리가 먼 방계라 저를 종가로 하기에는 무리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전(田)씨 모두 없애겠습니까.”라고 하며 듣지 않았다.  그리고나서 전표는 전상에게 “감지가 당신을 죽이려 하니 선수치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이오.”라며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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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지가 제간공의 궁중에 머무르고 있을 때 전상의 형제 넷이 궁중으로 마차를 몰아 감지를 죽이려 했다. 감지가 궁실 문을 닫았다. 제간공은 부인과 단대(檀臺)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갑자기 쳐들어온 전상을 공격하려 했다. 태사 자여(子餘)가 “전상은 감히 난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해를 제거하려는 것입니다.”라고 하자 제간공이 공격하려던 것을 그만 두었다. 전상이 나와서는 제간공이 화가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죽을까 두려워 도망치려 했지만 [[전자행]](田子行)전상을 제지하며 “머뭇거림은 실행의 적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전상과 그 무리들은 제간공이 다시 즉위하여 자기들을 죽일까 겁이 나서 제간공까지 죽일 결심을 하게 되었다. 감지도 그 무리를 이끌고 전상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도망쳤다. 전상의 무리가 추격하여 결국 감지를 죽였다. 제간공은 “진작에 어앙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런 재난은 만나지 않았을 것을!”라고 말하며 공실을 버리고 도망쳤다. 기원전 481년 전상의 군대들은 제간공을 뒤쫓아가 서주(徐州)에서 제간공을 잡아 시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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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평공]](齐平公)의 재상이 되어 제나라 국정을 주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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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nbsp;[[전상]]은 [[제간공]](齐简公)의 동생 오(鰲)를 왕으로 세웠으니, 이 사람이 [[제평공]](齐平公)이다. [[제평공]]이 임금 자리에 오르자 [[전상]]은 그의 재상이 되어 [[제]]나라 국정을 주물렀다. 그리고 정치 개혁을 단행하고 형벌권을 장악하여 포(), 안(晏), 공족(公族)들을 죽이는 등 반대 세력을 모조리 몰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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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덕치는 백성이 좋아하는 것이니 군주께서 행하십시오. <br>형벌은 백성들이 싫어하는 것이니 이 신이 집행하겠습니다.|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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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nbsp;이렇게 시행한 지 5년에 되어서 제나라의 정권은 모두 전상에게 귀속되었다. 이후 백성들은 제후인 평공을 두려워하지 않고 형벌을 주는 [[전상]]만을 오직 두려워하였다. [[전상]]은 또한 자신의 사유 토지를 크게 늘려갔다. [[제]]나라 안평(安平)의 동쪽 땅을 떼어 내어 전씨의 [[봉읍]]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개인의 [[봉읍]] 면적이 공실 소유의 토지보다 많아졌다. [[전상]]은 이제 제후가 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는 이미 [[삼가분진]](三家分晉)으로 독립하여 신흥 세력이 된 한(韓), 조(趙), 위(魏)의 [[경대부|대부]]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제후들의 신망을 얻기 위해 일찍이 [[제]]나라가 빼앗은 [[노]]나라와 [[위]]나라의 땅을 돌려주었다. 이렇게 해서 [[전상]]은 기원전 476년에 [[제]]나라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주변 국가의 평론==
 
==주변 국가의 평론==
 
===[[논어]] [[헌문]](憲問)편===
 
===[[논어]] [[헌문]](憲問)편===
:[[전상]]이 [[제간공]](齊簡公)을 죽였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공자]]는 3일 동안 재계(齋戒)했고, [[노애공]](魯哀公)에게 [[제]]나라를 토벌하라고 요청했다. [[노애공]](魯哀公)은 [[계손비]](季孫肥)한테 가서 알려주라고 하였다. 공자가 [[계손비]]에게 가서 알려주며 요청했으나 결국에는 거절당했다. 후세에 [[계손비]]의 행동 때문에, [[계손비]]는 역신(逆臣)이라고 지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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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이 [[제간공]](齊簡公)을 죽였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공자]]는 3일 동안 재계(齋戒)했고, [[노애공]](魯哀公)에게 [[제]]나라를 토벌해야 한다고 간청했다. 노애공(魯哀公)은 맹손씨(孟孫氏), 숙손씨(叔孫氏), 계손씨(季孫氏)라는 3환(三桓)한테 가서 알려주라고 하였다. 공자가 3환에게 가서 알려주며 요청했으나 결국에는 거절당했다.
  
 
==고서의 기록==
 
==고서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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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韓非)===
 
===[[한비자]](韓非)===
 
{{인용문| [[전상|전성자]]가 [[제]]나라를 뺏다(田成子取齊)|[[한비자]](韓非)|}}
 
{{인용문| [[전상|전성자]]가 [[제]]나라를 뺏다(田成子取齊)|[[한비자]](韓非)|}}
:이는 후세에 인용되는 성어인「[[竊鉤者誅,竊國者侯]](절구자주 절국자후: 허리띠 고리를 훔친 자는 벌을 받지만,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의 유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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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nbsp;이는 후세에 인용되는 성어인「[[竊鉤者誅,竊國者侯]](절구자주 절국자후: 허리띠 고리를 훔친 자는 벌을 받지만,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의 유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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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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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nbsp;[[사기]](史記)에 따르면 [[전상]]이 제나라 키가 7척 이상의 여자를 첩으로 골랐다고 한다. 후궁은 100명이였다. 후궁이 손님을 만나는 것은 금지하지 않았다. [[전상]]이 죽었을 때에는 아들이 70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전상]]의 아들인 [[전반]](田盘)이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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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역사에 따르면 [[전상]]이 제나라 키가 7척 이상의 여자를 첩으로 골랐다고 한다. 후궁은 100명이였다. 후궁이 손님을 만나는 것은 금지하지 않았다. [[전상]]이 죽었을 때, 70명의 아들이 옆에 있었다고 한다. [[전상]]의 아들인 [[전반]](田盘)이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 받았다.
 
  
==기타==
 
:[[강제(姜齊)]]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전제(田齊)]]의 시대로 제후의 성씨가 바뀌게 된다.
 
===[[강제(姜齊)]]의 시대에서 [[전제(田齊)]]의 시대로===
 
:기원전 5세기 무렵 [[전걸]](田乞), [[전상]](田常) 부자가 [[제]](齊)나라의 실권을 잡고 B.C 391년 [[전화]](田和)가 정권을 찬탈하여 제후로 인정을 받게되었다. 이후 전제(田齊)라 칭하였다.
 
====내용====
 
:*[[춘추]] 시대 초기에 [[진]](陳)나라에서 공실의 내분이 일어나 공자 [[전경중|완]](完)이 제나라로 도망쳐왔다. [[제환공]]은 그를 받아들여 조정의 낮은 벼슬 자리를 주었다. 그가 곧 [[제]]나라에서 전(田)씨의 시초이다. 전씨와 [[제]]나라 공실의 유대는 점차 돈독해졌고 [[제환공]]의 총애를 얻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춘추]] 시대 말기에 이르자 전씨 가문은 점차 [[제]]나라의 신흥 세력으로 떠올랐다. 반면 [[제]]나라 공실은 귀족들간의 알력으로 쇠퇴하여 갔다.
 
:*[[제경공]](齊景公: 재위 기원전 547년~490년) 때 전(田)씨는 대부로 이미 상당한 역량을 갖춘 터였다. 신흥 세력의 대표인 [[전환자]](田桓子)는 공실에 맞설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제나라 공실은 많은 세금을 거두어 들여 점차 민심을 잃었다. [[전환자]]는 공실에서 떠난 민심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하여 머리를 썼다. 그 방법은 백성들에게 춘궁기에 대두(大斗)로 양식을 빌려주고 추수 후 소두(小斗)로 거두어 들인 것이다. 같은 한 말(斗)이지만 대두와 소두는 양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전환자]]의 민심 회유 방법은 실효를 거두었다. 많은 백성들이 공실의 착취를 기피하여 점차 전씨 가문에서 양곡을 빌렸다. 백성들의 [[전환자]]에 대한 신망은 점차 높아갔다. 상대적으로 공실의 신망은 허물어져 갔으며, 많은 백성이 공실을 버리고 전씨 가문에 귀의하였다. [[제]]나라 공실의 백성들은 전씨의 은민(隱民)으로 변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공실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제]]나라 공실의 구귀족들과 전씨 사이에 세 차례에 걸쳐 쟁투가 발생하였다.
 
:#첫번째 쟁투(기원전 532년 발생): [[전환자]]는 도음 주위에 사는 백성인 국인(國人)들을 동원하여 집정 귀족의 우두머리인 란(欒)씨와 고(高)씨를 압도하였고 이들을 국외로 추방하였다.
 
:#두번째 쟁투(기원전 489년 발생): [[전환자]]의 아들 [[전걸]](田乞)이 주축이 되어 대부들을 규합하여 공실을 압박하였다. 공실의 잔류 귀족들은 또다시 패배하여 쫓겨나게 되었고 [[전걸]]는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정치, 군사 대권을 장악하였다.
 
:#세번째 쟁투(기원전 481년 발생):[[전걸]](田乞)의 아들인 [[전상]](田常)이 중심이 되어 [[제간공]](齊簡公)과 그를 따르는 대신들과 벌인 싸움이었다. 결국 [[제간공]]은 [[전상]]이 보낸 군대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전상]]은 [[제간공]]의 동생을 군주에 앉혔는데 그가 [[제평공]](齊平公)이었다. [[전상]]은 재상을 맡아 국정을 주물렀다. 그리고 정치 개혁을 단행하고 형벌권을 장악하여 반대 세력을 모조리 몰아냈다. [[전상]]은 기원전 476년에 제나라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전상]]이 죽고 그의 아들 [[전반]](田盤)이 대를 이으니 그가 바로 [[전반|전양자]](田襄子)이다.
 
:*전양자가 죽고 그의 손자 [[전화]](田和)가 대를 이어 명목상의 군주에 불구하던 [[제강공]](齊康公)을 바닷가로 유폐시키고 [[제]]나라 군주에 올랐다. 기원전 392년의 일이었다. [[전화]]는 [[위문후]](魏文候)에게 청탁하여 삼진(三晉)의 선례에 따라 [[주]]나라 천자가 자기를 제후로 봉해주도록 부탁하였다. [[주안왕]](周安王)이 [[위문후]]의 요청을 받아 기원전 386년에 [[전화]]를 정식으로 [[제]]나라 제후에 봉하였다. 그가 [[전태공]](田太公)이다. [[제]]나라의 첫 군주인 [[강태공]]의 이름에 성만 바꾼 것이다. 이때부터 [[강제(姜齊)]] 시대는 막을 내리고 [[전제(田齊)]]시대가 열렸다.
 
  
 
==참고 자료==
 
==참고 자료==
*박인수,『춘추 전국의 패자와 책사들』,  지음, 석필(2001), pp.195~pp.197
+
*박인수,『춘추 전국의 패자와 책사들』,  석필(2001), pp.195~pp.197
*[[사마천]],『[[사기]] 세가』, 김원중 옮김, 민음사(2010), p.110  
+
*[[사마천]], 김원중 옮김,『사기세가』,  민음사(2010), p.110  
*중국 위키피디아, "田成子", 2017-01-06, <https://zh.wikipedia.org/wiki/%E7%94%B0%E6%88%90%E5%AD%90>, 2017-06-24<br>
+
*[https://zh.wikipedia.org/wiki/%E7%94%B0%E6%88%90%E5%AD%90 위키피디아 중국어판 "田成子" 바로보기]
  
[[분류:인물]][[분류:제나라사람]][[분류:제나라정치인물]][[분류:춘추전국시대인물]]<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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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인물]][[분류:제나라사람]][[분류:제나라정치인물]][[분류:춘추전국시대인물]]<br>
[[사용자:Hao3aloha|Hao3aloha]] ([[사용자토론:Hao3aloha|토론]]) 2017년 6월 24일 (토) 19:07 (KST)
 

2017년 6월 28일 (수) 10:13 기준 최신판

전상(田常)

본명 전항(田恆)
국적 (齊)나라
본관 (陳)나라
별칭 陳恒(진항)
田成子(전성자)
陳成子(진성자)
가족 할아버지 전환자(田桓子)
아버지 전걸(田乞)
자녀 전양자(田襄子) 전반(田盤)
시호 성(成)
생존 시대 춘추시대
신분 나라 대부

개요

  • 제나라 전씨 가족의 8번째 수령이다. 강제(姜齊)의 시대에서 전제(田齊)로 가는 데에 있어 많은 공헌을 했다 할 수 있다.
  • 원래 이름은 전항(田恆)이라고 한다. 전상(田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한나라 시대에, 한문제의 이름 인 유항(刘恒)을 회피하기 위해서 였다.
  • 전(田)씨 일가는 진(陳)씨 성과 전(田)씨 성을 혼용하여 사용했다. 춘추 시대 초기에 (陳)나라에서 공실의 내분이 일어나 전항의 조상인 공자 완(完)이 제나라로 도망쳐왔다. 제나라 군주인 제환공은 그를 받아들여 조정의 낮은 벼슬 자리를 주었다. 그가 곧 나라에서 전(田)씨의 시초이다. 당시에는 전(田)과 진(陳)의 발음이 같았다고 한다.
  • 죽은 후에, 시호인 성(成)과 당시 경대부(卿大夫)를 존경의 의미로 불렀던 자(子)를 합쳐 진성자(陳成子) 혹은 전성자(田成子)라고 불렸다.

생애

제간공(齐简公)의 재상이 된 전상

  기원전 485년, 아버지 전걸이 죽고 아들 전상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받았다, 전상나라에서 큰 세력을 구축한 전(田)씨들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나라 대부 포식(鲍息)이 제도공(齐悼公)과 틈이 벌여져 제도공을 죽이게 되었다. 제도공의 처가인 나라가 과 연합하여 쳐들어온 후, 그의 아들 제간공(齐简公)을 왕으로 세웠다. 전상감지(阚止)는 나라의 좌우상을 담당하여 제간공을 도왔다. 전상은 제간공의 총애를 받는 감지를 경계하면서, 그의 조부 전환자와 같이 전상은 계속하여 큰 됫박(大斗)로 양식을 빌려 주고 작은 됫박(小斗)로 거둬 들이는 방법으로 민심을 더욱더 얻어나갔다. 나라 백성들은 "할머니가 뜯은 나물을 전성자에게 보내자!”라는 노래를 부르며 전상을 칭송했다. 어느 날 대부 어앙(御鞅)이 제간공에게“전상과 감지를 함께 재상으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한 사람을 선택하십시오”라고 간하였다. 그러나 간공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충고를 무시했다.

전(田)씨 종친들의 세력을 규합하여 정변을 하다

감지는 전상을 경계하여 죽이고자 하였다. 전(田)씨의 먼 친척 전표(田豹)는 감지를 섬겨 총애를 받던 충신이였다. 감지가 “내가 전(田)씨 적손들을 모조리 없애고 너 전표를 전(田)씨 종가(宗家)로 만들려고 한다.”라고 했다. 전표가 “저는 전(田)씨와는 거리가 먼 방계라 저를 종가로 하기에는 무리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전(田)씨 모두 없애겠습니까.”라고 하며 듣지 않았다. 그리고나서 전표는 전상에게 “감지가 당신을 죽이려 하니 선수치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이오.”라며 전했다. 감지가 제간공의 궁중에 머무르고 있을 때 전상의 형제 넷이 궁중으로 마차를 몰아 감지를 죽이려 했다. 감지가 궁실 문을 닫았다. 제간공은 부인과 단대(檀臺)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갑자기 쳐들어온 전상을 공격하려 했다. 태사 자여(子餘)가 “전상은 감히 난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해를 제거하려는 것입니다.”라고 하자 제간공이 공격하려던 것을 그만 두었다. 전상이 나와서는 제간공이 화가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죽을까 두려워 도망치려 했지만 전자행(田子行)이 전상을 제지하며 “머뭇거림은 실행의 적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전상과 그 무리들은 제간공이 다시 즉위하여 자기들을 죽일까 겁이 나서 제간공까지 죽일 결심을 하게 되었다. 감지도 그 무리를 이끌고 전상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도망쳤다. 전상의 무리가 추격하여 결국 감지를 죽였다. 제간공은 “진작에 어앙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런 재난은 만나지 않았을 것을!”라고 말하며 공실을 버리고 도망쳤다. 기원전 481년 전상의 군대들은 제간공을 뒤쫓아가 서주(徐州)에서 제간공을 잡아 시해하였다.

제평공(齐平公)의 재상이 되어 제나라 국정을 주무르다

  전상제간공(齐简公)의 동생 오(鰲)를 왕으로 세웠으니, 이 사람이 제평공(齐平公)이다. 제평공이 임금 자리에 오르자 전상은 그의 재상이 되어 나라 국정을 주물렀다. 그리고 정치 개혁을 단행하고 형벌권을 장악하여 포(鮑), 안(晏), 공족(公族)들을 죽이는 등 반대 세력을 모조리 몰아냈다.

덕치는 백성이 좋아하는 것이니 군주께서 행하십시오.
형벌은 백성들이 싫어하는 것이니 이 신이 집행하겠습니다.

 
— 전상
  이렇게 시행한 지 5년에 되어서 제나라의 정권은 모두 전상에게 귀속되었다. 이후 백성들은 제후인 평공을 두려워하지 않고 형벌을 주는 전상만을 오직 두려워하였다. 전상은 또한 자신의 사유 토지를 크게 늘려갔다. 나라 안평(安平)의 동쪽 땅을 떼어 내어 전씨의 봉읍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개인의 봉읍 면적이 공실 소유의 토지보다 많아졌다. 전상은 이제 제후가 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는 이미 삼가분진(三家分晉)으로 독립하여 신흥 세력이 된 한(韓), 조(趙), 위(魏)의 대부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제후들의 신망을 얻기 위해 일찍이 나라가 빼앗은 나라와 나라의 땅을 돌려주었다. 이렇게 해서 전상은 기원전 476년에 나라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주변 국가의 평론

논어 헌문(憲問)편

전상제간공(齊簡公)을 죽였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공자는 3일 동안 재계(齋戒)했고, 노애공(魯哀公)에게 나라를 토벌해야 한다고 간청했다. 노애공(魯哀公)은 맹손씨(孟孫氏), 숙손씨(叔孫氏), 계손씨(季孫氏)라는 3환(三桓)한테 가서 알려주라고 하였다. 공자가 3환에게 가서 알려주며 요청했으나 결국에는 거절당했다.

고서의 기록

장자(莊子),《남화경(南華經), 거협(胠篋)》

전성자(田成子)는 나라를 훔쳤다. 그는 대도(大盜) 제후이다.

 
장자(莊子), 《남화경(南華經), 거협(胠篋)》

한비자(韓非)

전성자나라를 뺏다(田成子取齊)

 
한비자(韓非)
  이는 후세에 인용되는 성어인「竊鉤者誅,竊國者侯(절구자주 절국자후: 허리띠 고리를 훔친 자는 벌을 받지만,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의 유래이기도 하다.

사기(史記)

  사기(史記)에 따르면 전상이 제나라 키가 7척 이상의 여자를 첩으로 골랐다고 한다. 후궁은 100명이였다. 후궁이 손님을 만나는 것은 금지하지 않았다. 전상이 죽었을 때에는 아들이 70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전상의 아들인 전반(田盘)이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 받았다.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