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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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enji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6월 23일 (일) 19:0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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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공이론의 사상적 근거

조공이론의 사상적 근거는 『맹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나라 선왕이 물었다. "이웃나라와 사귀는 데에 방법이 있습니까?" 
맹자께서 대답하셨다. "있습니다. 오직 인자(仁者)만이 대국으로서 소국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以大事小]. 그러므로 탕왕(湯王)께서 갈(葛)나라를 사랑하시고, 문왕(文王)께서 곤이(昆夷)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오직 지자(智者)만이 소국으로서 대국을 섬길 수 있습니다[以小事大]. 그러므로 문왕의 조부(祖父)인 태왕(太王)께서 훈육(獯鬻)을 섬기시고, 구천(句踐)이 오(吳)나라를 섬긴 것입니다. 큰 나라이면서 작은 나라를 사랑하는 자는 하늘의 이치를 즐거워하는 자이고, 작은 나라이면서 큰 나라를 섬기는 자는 하늘의 이치를 두려워하는 자이니, 하늘의 이치를 즐거워하는 자는 천하를 보전하고, 하늘의 이치를 두려워하는 자는 자기 나라를 보전합니다. ..."[1]

'큰 나라를 섬기고 작은 나라를 보살핀다'는 뜻의 '사대자소(事大字小)'는 이 구절에서 유래햐였다.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김으로써 자신의 나라를 보전하고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사랑함으로써, 즉 보살펴줌으로써 천하를 보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춘추좌씨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예(禮)는 소국(小國)이 대국(大國)을 섬기고 대국(大國)이 소국(小國)을 겸애(慈愛[字])하는 것을 이릅니다. [2] 

이렇듯 유교전통에서의 대국과 소국의 관계설정은 호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적 근거를 바탕으로 조공체제가 특히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유지해 왔던 것이다.

조공이론의 제기

페어뱅크(J.Fairbank)의 조공체제론

1941년 미국의 역사학자 페어뱅크(J.Fairbank)에 의해 '조공체제'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그는 조공을 동아시아의 '질서'라는 측면에서 체계적으로 해석하면서 이를 통해 중국을 중시으로 한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3] 그에 따르면 조공은 제국이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위한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주변 국가들을 활용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또한 주변 국가들은 제국(중국)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중국의 정치적 우위를 인정하도록 요구되었다. [4] 페어뱅크는 이러한 구조를 '중국적 세계질서'라고 불렀다. 즉 중국은 주변국이 중국을 중심으로 인정하는 도덕적 가치 혹은 통치 이데올로기를 수용할 것을 기대하고, 주변 국은 중국으로부터 자신들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책봉 등을 통해 정권의 정당성 확보와 무역 이익을 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주변국은 조공이라는 체제에 동의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는 동아시아의 국제질서 차원에서의 조공-책봉 관계가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적 세계질서'를 설명하기 위해 페어뱅크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공간적 관념을 도입한다. 즉 중국중심의 세계를 1. 중국지대, 2. 내륙 아시아 지대, 3. 외곽지대 등의 세 공간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다.[5] 동심원적 구조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이러한 중국 중심의 세계는 결국 거리에 따라 '화'와 '이'를 구별하는 근거가 된다. 또한 자연스럽게 불평등한 서열을 가진 구조가 됨을 알 수 있다.

조공체제의 양상

조공체제의 성립과 서주시기

조공제도의 성립은 봉건제로부터 시작한다.[6] 서주의 건국 후에 주공은 봉건제를 실시한다. 이는 주 왕실의 혈족을 제후로 책봉하여 왕실의 권력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도록 한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봉건제 하에서의 제후와 대부 등의 혈족은 예에 의해서 구속되는데, 제후의 조공은 그러한 예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주나라 천자는 책봉의 주체가 되고 제후는 조공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책봉과 조공의 예는 오직 주 천자와 천자에게 책봉을 받은 제후 간에 이루어졌던 행위로, 서주 내에서의 권력관계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조공체제

춘추전국시대에는 혼란한 사회가 되며 더이상 서주시기와 같은 권력관계가 유지되지 못하였다. 제후국들은 여러 이유를 대며 주 왕실에 대한 조공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고, 공납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 왕실에게 돌아가지 않고 패자에게 상납되기도 하였다. [7] 따라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조공'이 이루어지던 시기는 아니었으며, 이 시기의 '조공'이라고 함은 일국의 군주가 다른 나라의 군주를 직접 방문하여 양국의 친선과 결속을 강화하는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춘추전국시대의 제후국들은 '회맹'이라는 국제회의를 통해 상호 조양을 맺었는데, 여기에서 '조빙[8]의 예'를 상호 교환하였다. 즉 서주시기와 같이 혈연적 관계에서 조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변적으로 행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춘추전국시대의 조공은 외면적으로 상호 친선의 외교적 행사였으나, 내면적으로는 소국이 대국에 대한 복속의 표시였다. 이후 선진(先秦)시기에는 조공제도가 다시금 서주시기처럼 혈연집단 간의 정치적 위계를 표현하는 의례의 형태로 행해지기도 하였다.

진(秦)의 조공체제

진(秦)의 통일 이후에는 조공체제 자체가 불필요해졌다. 왜냐하면 진의 통일로 인해 여러 권력이 병존하는 상황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의 권력만이 존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은 중국 전체에 대한 직접적 지배를 위해 군현제를 실시하였다. 이는 중국 내의 황제 이외의 다른 권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므로 진나라에서는 책봉과 조공이라는 행위 자체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한(漢)의 조공체제

진나라와 다르게 한(漢)나라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황권을 가지지 못한채 건국되었다. 그래서 전국에 대한 일원적 지배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군국제 형식의 통치방식을 취하였다. 한나라의 중앙정부는 제후왕국을 통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조공제도를 이용하였다. 이는 근본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제후들이 서주 천자에 대해 취했던 조공의 예와 다를 바가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치이념면에서는 큰 차이를 보인다. 즉 진나라의 강력한 통일적인 권력을 열망했던 한나라는 제후국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하여 '중건제후정책(重建諸侯政策)', '삭지정책(削地政策)'등을 시행하여 마침내 전국적으로 군현제도를 확대, 실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진나라와 같은 통일제국을 수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시기에는 진 시기와는 다른 대외관계적 특징이 있었으니, 바로 북방 흉노의 등장이다. 북방에 새로 형성된 흉노 유목제국은 정치적, 군사적으로 한나라를 압박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나라는 흉노 세력을 인정하고, 그들에 의한 무력침입과 약탈을 모면하기 위해 흉노에게 조공을 바쳤다. 하지만 이러한 세력관계는 역전되기도 하여 흉노가 한에게 조공을 바치는 시기도 있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무력의 강약에 따라 조공을 통해 국제 질서가 유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흉노 이외의 주변 이민족 군장들과는 원칙적으로 외신(外臣)으로서의 조공관계가 성립되었다.조선, 남조, 흉노, 선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한 황제로부터 각기 다른 등급의 책봉을 받았으며, 책봉을 받은 외신들은 조공 등의 예를 이행해야 했다. 하지만 이들은 내신(內臣)과는 달리 한의 법령 적용을 받지 않고 자주권을 행사했으며, 한과 조선간의 관계에서 나타나듯 조공의 특징적 양상들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또한 후한대에 이르러 내조(來朝)의 본래 의미가 사라지고 입공(入貢)의 의미가 강조됨에 따라 조공이라는 용어가 보다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한나라 이후의 조공체제

한나라 이후의 조공체제는 위진 남북조시대에 이르러 특징적 양상들이 점차 제도화되었고, 수당시대를 통해 발전하였다. 하지만 남송(南宋)시기에 이르러 대외관에 변화가 일어난다. 국력이 크게 약화되고 북방 이민족들의 침입이 잦았던 동시에 주자학이 대두하면서 폐쇄적이고 독단적인 방향으로 선회한 것이다. 그리하여 대등한 국제 관계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주변 민족과의 상하차등의 조공관계만 고집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폐쇄적 태도는 이후 명, 청대를 거치며 훨씬 강화되었다. 특히 명(明) 시기에는 원대의 이민족통치의 잔재를 청산하고 중화질서의 회복을 적극 추진하였다. 이는 엄격한 해금정책(海禁政策)의 시행과 더불어 대외관계를 조공제도로 일원화시킨 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동안 중국과 주변국과의 비조공관계는 없어지고 조공관계만이 유일한 것이 되었다. 동시에 조공관계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규정을 만들어 이행하도록 요구함으로써 명, 청대에 이르러 조공제도는 제도적으로 완비되었다.

조공체제의 기능

평화유지

조공체제를 유지함으로써 얻는 긍정적인 면은 먼저 중국과 주변국가 사이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조공체제 하에서 중심국과 주변국가들은 위계적 질서를 통해 자리매김 되었고, 이에 제국은 정치적 우위는 물론 대외적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주변국은 경제교역 이외에도 조공체제를 통해 타협적 전략을 유도할 수 있었고, 이는 특히 명청시기 조공관계에 있지 않았던 유목민들과 지속적 전쟁을 벌였다는 점으로 확인할 수 있다. 즉 조공관계는 주변국가들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 중국의 정치적 권위를 자발적으로 인정하고, 동시에 중국은 주변국들의 자율성과 주권을 인정하는 상호인정의 형태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평화가 유지될 수 있었던 토대에는 앞서 언급한 조공체제의 사상적 기원이기도 한 '사대자소(事大字小)'의 원칙이 있기도 하다. 즉 약자의 복종과 더불어 강자의 배려가 함께 존재함으로써 양자간의 평화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이는 유교적 규범이 물리적 강제가 아닌 도덕적이고 이념적인 차원에서의 설득을 통해 권위를 얻는다는 특징을 보여주기도 한다.[9]

경제적 기능

조공체제 아래에서 주변국이 중국과 교류하고자 할 때 먼저 조공의 예를 취하고, 중국은 이에 상응하는 비단, 차 등으로 보답하는데 이를 회사(回賜)라고 한다. 이러한 조공과 회사는 사대자소의 경제적 표현으로서, 각각 복종과 사례 혹은 포상을 의미한다. 특히 중심국은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줌으로써[후왕박래(厚往薄來)] 시혜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조공은 '조공무역'으로서 기능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이는 실제 역사서들에 조공국들이 빈번한 대규모 사절단의 파견을 요청한 반면, 중국은 사절의 빈도나 수행인원의 수를 제한하는 사례들이 있다는 것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 즉 조공국들은 정치적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경제적 혜택을 위해서도 조공관계에 매우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절단에는 조공과 관계없이 물건을 매매하여 경제적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제국은 조공제도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국경지역에서의 민간교역을 금지하거나 제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변국가들은 조공무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0]

참고문헌

『맹자』
『춘추좌씨전』
김영진, 「전통 동아시아 국제질서 개념으로서 조공체제에 대한 비판적 고찰」, 한국정치외교사논총 Vol.38 No.1, 한국정치외교사학회, 2016.
유제령,「조공책봉관계의 시대적 변천을 통해서 본 한중관계사의 이해」, 동국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6.
홍면기, 「페어뱅크 조공체제론의 비판적 검토: 중국중심주의라는 엇나간 시선의 문제」,동북아연구 Vol.33 No.2, 조선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부설 동북아연구소, 2008.

각주

  1. 『맹자』, 양혜왕 하, 전통문화연구회 동양고전DB 참고.
  2. 『춘추좌씨전』, 전통문화연구회 동양고전DB 참고.
  3. 홍면기, 「페어뱅크 조공체제론의 비판적 검토: 중국중심주의라는 엇나간 시선의 문제」,동북아연구 Vol.33 No.2, 조선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부설 동북아연구소, 2008, p.14.
  4. 김영진, 「전통 동아시아 국제질서 개념으로서 조공체제에 대한 비판적 고찰」, 한국정치외교사논총 Vol.38 No.1, 한국정치외교사학회, 2016, p.254.
  5. 홍면기, 「페어뱅크 조공체제론의 비판적 검토: 중국중심주의라는 엇나간 시선의 문제」,동북아연구 Vol.33 No.2, 조선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부설 동북아연구소, 2008, p.15.
  6. '조공체제의 양상'부분의 내용은 '유제령,「조공책봉관계의 시대적 변천을 통해서 본 한중관계사의 이해」, 동국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6, p.20-26.'을 참고, 요약, 정리 한 것임을 밝힌다.
  7. 이 지점에서 "김한규는 공납이 주 천자에게만 행해졌던 것이 아니라 보다 약소한 제후국이 주변의 강한 제후국에게 행하였던 것을 확인하였다.", 같은논문, p.21.
  8. 조빙은 오례(五禮)중의 하나로, 제후가 직접 행하는 것이 '조(朝)'이고 경대부로 하여금 행하게 하는 것이 '빙(聘)'이다, 같은 논문, p.21,각주 43 참고.
  9. 김영진, 「전통 동아시아 국제질서 개념으로서 조공체제에 대한 비판적 고찰」, 한국정치외교사논총 Vol.38 No.1, 한국정치외교사학회, 2016, p.263-266, 재인용 포함.
  10. 김영진, 「전통 동아시아 국제질서 개념으로서 조공체제에 대한 비판적 고찰」, 한국정치외교사논총 Vol.38 No.1, 한국정치외교사학회, 2016, p.266-268, 재인용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