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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鳥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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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或獻書一賦,或鳥篆盈簡,而位升郎中,形圖丹青.”-《後漢書․陽球傳》
 
:“或獻書一賦,或鳥篆盈簡,而位升郎中,形圖丹青.”-《後漢書․陽球傳》
  
:光和[[元]]年(公元一七八年)二月,始置鴻都門學生。李賢注:鴻都,門名也. 於內置學,其中諸生皆敕州郡三公舉召能為尺牘、辭賦及工書鳥篆者相課試. 至千人焉.” - 《後漢書․靈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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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和[[元]]年(公元一七八年)二月,始置鴻都門學生。李賢注:鴻都,門名也. 於內置學,其中諸生皆敕州郡三公舉召能為尺牘、辭賦及工書鳥篆者相課試. 至千人焉.” - 《後漢書․靈帝紀》
  
 
:“受詔典著作,又為 《魏官儀》,凡所撰述數十篇. 好古文․鳥篆․隸草,無所不善.”- 《三國志․魏志․衡覬傳》
 
:“受詔典著作,又為 《魏官儀》,凡所撰述數十篇. 好古文․鳥篆․隸草,無所不善.”- 《三國志․魏志․衡覬傳》

2021년 1월 12일 (화) 14:17 판

춘추 시대 월(越)왕 구천(勾踐)의 劍.“越王勾踐 自作用劍”이 검신에 새겨져있다.

개요

전국 시대 남방을 중심으로 성행했던 자체(字體)로 주로 오월(吳越)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했다. 조충서(鳥蟲書)라고도 한다. 굴곡과 완곡을 강조하며 새나 곤충 모양의 장식으로 필획을 변형시키거나 도안의 형태로 응용하여 풍부한 장식의 효과를 가진 것이 특징이다.

조충문의 등장

鳥蟲書와 유사한 형태는 3,500년 전 상(商)대 갑골문의 ‘玄鳥婦’에서 유물로 확인할 수 있다.[1] 비록 이 글자의 형태를 조충문으로 볼 수 있는지 논란이 존재한다. 하지만 자체를 중심으로 예술적인 필획을 가미했다는 점은 자형 구조에 있어서 조충문으로 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명칭의 유래

蟲書, 鳥蟲書

조충서에 관한 명칭을 아래 표와 같이 시기 순으로 찾아볼 수 있다.

문헌 내용 원문
『說文解字․敘』 시기 8개의 자체가 있다: 첫번째는 대전, 두번째는 소전, 세번째는 각부, 네번째는 충서...다.' 위 문장에서 이르는 충서는 바로 조충서로 새나 벌레를 형상화한 것인데 여기에는 날개 달린 곤충도 포함된다. ‘自爾秦書有八體:一曰大篆,二曰小篆,三曰刻符,四曰蟲書,....’上文曰蟲書,此曰鳥蟲書,謂其或像鳥或像蟲,亦稱羽蟲也.
『漢書․藝文志』 …또한 육체를 익힐 따름이다.… 자체로는 고문, 기자, 전서, 예서, 무전,충서가 있는데, 모두 고금의 문자를 알 수 있고 인장을 새기거나 신호기를 작성하는데 사용되었다. 「 …又以六體試之,…」, 體著,古文,奇字,篆書,隸書,繆篆,蟲書,皆所以通知古今文字, 摹印章,書幡信也.

한나라 시기 허신(許慎)의 《설문해자》의 구절을 통해 이미 진()나라 때부터 충서(蟲書)가 있었으며, 진 시기부터 이어진 충서가 한()대에 들어와 秦書八體 중 하나로 불리며 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허선영(2015)는 조충서가 지역적, 자연적 환경에서 서로 다르게 사용된 字體이며, 단순히 일정한 시기에 유행된 자법이 아닌 특정한 자체로 인식되었을 것이라고 했다.[2]

『漢書․藝文志』에서 조충서는 여섯가지 자체의 하나로, 고금문자 중 하나며 인장이나 표지(標識)가 있는 기(旗)를 사용하여 명령을 전달하는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또한 위의 《설문해자》에서 말하는 秦書八體와 六體의 구성 자체가 전반적으로 유사한데, 이를 통해 鳥蟲書는 곧 蟲書이며, 시대 별로 제시된 용어와 용도 때문에 명칭이 다르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鳥書

한편 鳥書라는 명칭도 등장한다. 秦書八體 중의 하나인 ‘蟲書’는 衛恆의《四體書勢》에서는 ‘蟲’을 제외한 ‘鳥書’라고만 기록하였다.

‘王莽時,使司空甄豐校文字部,改定古文,復有六書:一曰古文,孔氏壁中書也;二曰奇字,即古文而異者;三曰篆書,秦篆書也;四曰佐書,即秦隸也;五曰繆篆,所以摹印也;六曰鳥書,所以書幡信也.’

鳥篆

東漢時期에 이르러 鳥蟲書의 여러 가지 명칭 가운데 ‘鳥篆’이 등장한다.

"初,帝好學,自造皇羲篇五十章,因引諸生能為文賦者.本頗以經學相招,後諸為尺牘及工書鳥篆者,皆加引召,遂至數十人." - 《後漢書․蔡邕傳》
“或獻書一賦,或鳥篆盈簡,而位升郎中,形圖丹青.”-《後漢書․陽球傳》
“光和年(公元一七八年)二月,始置鴻都門學生。李賢注:鴻都,門名也. 於內置學,其中諸生皆敕州郡三公舉召能為尺牘、辭賦及工書鳥篆者相課試. 至千人焉.” - 《後漢書․靈帝紀》
“受詔典著作,又為 《魏官儀》,凡所撰述數十篇. 好古文․鳥篆․隸草,無所不善.”- 《三國志․魏志․衡覬傳》

명칭에 대한 이견

조충서나 충서 또는 기타의 다른 명칭들도 그 자체의 기본적인 특징은 조류나 벌레의 형상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蟲’은 모든 동물을 포함하고 있어‘鳥類’도 이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鳥蟲書는 蟲書, 鳥書, 鳥篆, 鳥飾文字, 鳥篆文字, 鳥蟲篆, 鳳飾篆字 등 다양한 명칭이 있지만 이러한 명칭을 두고 학계에서는 다소 이견이 있다. 조충서의 기본은 전서를 기초로 새나 벌레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이러한 예술적 필획의 자체를 藝術體 혹은 美術體라고도 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조충서의 발전

조충서는 전서(篆書)를 기본으로 하는 필법에 굴곡과 완곡을 더해 전서와는 다른 글자 형태였다. 춘추전국시기 남방을 중심으로 유행된 자체로 주로 오월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을 했다. 청동 병기에 착금의 형식으로 주조되었으며, 酒器와 樂器에서도 조충서의 사용이 확인된다.이는 한나라 시기까지 지속적으로 유행했다. 漢대에 이르러서는 옥새를 비롯하여 와당문자(瓦當文字)나 동경문자(銅鏡文字) 등에 주로 사용되었다. 어느 시대이건 모두 장식의 효과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춘추전국시기 조충서

조충서는 춘추전국시대 남방 지역을 중심으로 유행했다. 청동기는 2500년 전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춘추전국시기에 이르러서는 조충서로 청동기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현재 출토된 청동기 중 청동 병기의 비율이 가장 높으며 허선영(1999)의 통계에 따르면, 나라 별로는 越國 86개, 吳國 22개, 蔡國 21개, 楚國 18개, 曾國 3개, 宋國2개, 徐國 1개, 국가 불명 14개를 포함하여 모두 167개의 鳥蟲書 청동기가 확인되고 있다. 춘추전국시대 주조된 청동기 가운데 기원전 500년 경에 제작된 ‘吳王子戈', '楚王孫漁戈', ‘王子午鼎' 등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료다.

한나라 시기 조충서

한대 문자와당(文字瓦當)에 등장하는 조충서는 장식성을 높여 예술적 미를 더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사용되었다. 한대 문자와당에는 소전에 조류나 벌레 등의 굴곡과 식필(飾筆)[3]을 강조하였다. 한대 명문와당에 등장하는 조충서는 대부분 길상어로 등장하는데, 천추만세(千秋萬歲) 명문와당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다.

‘千秋萬歲’와당은 대부분 한대중기 왕릉에서 출토가 되었고, 후기 王陵유적지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천추만세는 세월이 오랫동안 지속됨을 형용하는 문구로 사람들의 장수를 염원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1. 허선영 (2015) 戰國時期 金文과 漢代 文字瓦當의 鳥蟲書 章法 - 千秋萬歲 銘文瓦當을 中心으로 -, 동아시아고대학, 37, pp.201-226.
  2. 허선영, 「先秦鳥蟲書研究」, 臺灣國立師範大學 國文硏究所 碩士學位論文, 1999,
  3. 鸟虫书,百度百科,2020.
  4. 宰予,「鸟虫书-金文中的花体字」,『博物』 2015年第05期, 2015.
  5. 董作賓, 「殷代的鳥書」, 『大陸雜誌』 第6卷 11期, 1953.

각주

  1. 董作賓, 「殷代的鳥書」, 『大陸雜誌』 第6卷 11期, 1953, 9-11쪽.
  2. 허선영 (2015), 상기동일, p.204.
  3. 필획을 장식하여 꾸미는 것을 의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