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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3일 (금) 21:28 판


인물개요

주나라를 건국한 개국 군주. 성은 희(姬)이고 이름은 발(發)이다. 주 문왕 희창(姬昌)과 정비 태사(太姒)의 차남이다. 형인 백읍고(伯邑考)가 상나라 주왕에게 참살당한 것으로 인해 주 무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도읍을 풍(豊)에서 호(鎬)로 옮겼다. 그곳이 지금의 산시성 시안이다. 주 왕조를 세운 뒤 재위한 기간은 4년이며, 죽어서 필원에 묻혔다.

주무왕 (周武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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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기원전 1087년
사망 기원전 1043년
관련 활동 문학

업적

상의 멸망

즉위 2년째에 그는 맹진(盟津)에서 군대를 사열했는데, 800명의 제후가 미리 약속한 것처럼 동시에 모여 상왕 주를 토벌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시기가 아직 무르익지 않다고 판단하여 군사를 돌려 돌아갔다. 이런 상황에서도 상나라 주왕은 계속 음란에만 빠져 있었고, 대신이었던 미자가 충고했으나 소용이 없자 하는 수 없이 상나라 주왕을 떠났고, 비간은 강력하게 충고하다가 비참하게 살해되었으며, 기자도 감옥에 갇혔다가 노비가 되었다. 이렇게 상 왕조 통치계급은 점점 와해되기 시작했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무왕은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상을 멸망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일으켜 용(庸) · 촉(蜀) · 강(羌) · 모(髳) · 미(微) · 노(盧) · 팽(彭) · 복(濮) 등 서방 및 서남의 방국 부락들과 연합하여 맹진을 건너 제후들과 회동했다. 이 자리에서 무왕은 <태서(泰誓)>라는 선전포고문을 지어 상나라 주왕의 죄악을 나무랐다. 기원전 1046년 주의 군대와 제후의 연합군은 상나라 교외에 위치한 목야에 결집했다. 무왕은 여기서 <목서(牧誓)>를 지어 결전을 호소했다. 이 때 상나라 주왕도 군대를 이끌고 저항했다. 그러나 상나라의 군대는 일격을 견디지 못했고, 결국 패한 상나라 주왕은 녹대로 도망쳐서 분신자살했다. 무왕은 상나라의 도읍으로 입성했고, 상 왕조는 멸망했다. 당시 전쟁터였던 ‘목야’를 따 이 전쟁을 목야지전(牧野之戰)이라 칭한다.

정책

봉건제 시행

무왕은 공신의 업적에 따라 봉토를 하사했는데 이를 봉건제라고 한다. 태공은 제, 주공은 노, 소공은 연에 봉했으며, 죽은 상나라 주왕의 자식들을 초, 축, 계, 진, 기 등에 봉했다. 유럽에서는 중세에 시작한 봉건제가 아시아에서는 기원전 10세기 이전에 등장한 것이다.

정전제 시행

봉건제를 효율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정전제라는 토지 제도도 등장했다 이 제도는 모든 토지를 주 황실에 소유 하에 둔 다음 황제가 토지를 우물 정 자 모양으로 아홉 등분한다. 아홉 등분의 토지 중 중앙에 있는 땅은 황실이 다스리고 나머지의 땅은 제후들에게 하사했다. 제후는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신하들에게 토지를 하사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너무 이상적이어서 현실에서는 적용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다.

신분 질서 확립

무왕은 신분 질서를 확립했다. 신분 질서의 맨 위에는 황제, 즉 천자가 있고, 그 아래에는 제나라 태공과 같은 제후가 있고, 제후 밑에는 황제의 신하 또는 제후의 신하를 뜻하는 가신들이 있다. 그 아래에는 피지배층이 존재했는데, 피지배층도 직업에 따라 서열이 나뉘었다. 이러한 신분구조가 바로 사농공상이다.

천명 사상

무왕의 혁명은 제후국이 황실을 무너뜨린 하극상이기 때문에 백이와 숙제같은 청렴한 학자들은 굶어죽으면서까지 주 왕실을 거부했다. 그래서 백성들의 반발을 막기 위한 대책이 필요했고, 천명사상을 수용하게 되었다. 황제가 되고 싶어서 벌인 하극상이 아니라 하늘의 명을 따라 백성을 구했다는 것이다.

민간전설

샤오즈멘(臊子面) 고사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하러 나섰다가 치산에서 용처럼 생긴 괴수를 만나 그를 죽였는데, 무왕이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이 괴수의 고기를 나누어 먹기로 했다. 그런데 군사들 수에 비해 고기가 부족하여 가마솥에 넣고 끓여 그 탕을 한 그르씩 나누어 주었는데 맛이 아주 좋았다고 한다. 이후 이 지역 사람들은 육수에 면과 야채 등을 곁들여 먹기 시작했는데, 이 때부터 유래한 국수가 샤오즈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