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베트남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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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베트남 통일과 난민 발생

1973년 1월 26일 체결된 파리협정으로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이후 짧은 기간 동안 남북 베트남 분단 상태가 유지되었으나 곧 바로 전쟁이 시작되어 1975년 4월 30일에 북베트남이 사이공을 점령하면서 남북베트남 통일전쟁은 빠르게 끝났다. 이후 전국적인 총선을 통해 1976년 6월 24일~ 7월 3일까지 통일 베트남의 국회가 개원했다. 통일 베트남의 최우선 과제는 정치적 안정과 통합이었다. 통일 베트남은 정치적 통합을 위해 남베트남을 상대로 급격한 사회주의 개조 정책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이미 자본주의를 경험했고 북베트남 보다 부유했던 남베트남 주민들의 동요를 본격화시킬 뿐이었다. 가장 부작용이 큰 정책은 1978년 3월 자본주의적 상업 활동을 금지한 정책이다. 상업 활동 금지를 통해 남부 베트남의 인력과 자본을 공업부문으로 순환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호치민시 등 대도시에서 상업에 종사하고 있던 인구를 신경제구로 이주시키는 정책은 남베트남 주민들로 하여금 반발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남베트남에 대한 사회주의적 개조는 경제 위기를 초래했다. 1978-1980년 사이 식량 증산은 고사하고 생산량이 하락하였다. 집단 농장의 잉여 생산품은 국가에 귀속되었기 때문이다. 1979년 베트남의 경제성장률은 –0.2%, 1980년에는 –1.4% 성장률을 기록했다. 베트남 사회는 극심한 식량난과 물가 상승에 직면하게 되었다. 당시 베트남에서 유행하는 것은 “길 어귀에서 타이어 바람 넣는 대령, 길 끝에서 음료수 파는 중령”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식량 부족과 물가상승, 생필품 부족 등의 문제로 인해 남베트남 각지에서는 밀무역이 확산되었다. 결국 신경제구 및 집단농장으로 이주한 이들은 생계를 해결하기 힘들어 도주하는 이들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은 경제 침체의 원인이 밀무역과 시장의 존재 때문이라고 보았다. 1978년 정치국원 도 무어이(Do Muoi)는 남부 상공업개조위원회 위원장으로 부임해 사회주의 개조 정책을 가속화했다. 대표적인 정책이 통화정책이다. 사회주의적 개조를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착취제도, 투기 등 비합법적으로 축척된 자본을 회수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금융업, 사채업에 종사하던 자본가는 체포되었고, 두 차례의 화폐교환으로 남부 베트남의 자산을 사실상 동결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계층은 상업과 금융업에 종사하고 있던 화인(華人), 화교(華僑)들이었다. 화인은 중국 혈통을 가진 베트남인을 의미하고, 화교는 중국 국적을 가지고 베트남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칭한다. 중국 정부는 191년 1월 1일 화교권익 보호법을 제정했는데, 이 법률에 의하면 화교(華僑)는 중국 국적을 가지고 베트남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인(华侨是指定居在国外的中国公民)을 의미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화인(華人)은 외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화인 혈통(中华民族的人的泛称)을 의미한다.

베트남 통일 이전 화인, 화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북베트남은 중국 국적의 화교들을 ‘화 끼에우(Hoa Kieu)’라고 부르며 이들의 권익을 보호해주었다. 베트남 공민에게 부과되는 병역 의무를 면제해주는 우대 정책도 실시했다. 그러나 197년 ‘화 끼에우’라는 용어 사용을 중지하고,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중국인을 뜻하는 ‘응어이 화(Nguoi Hoa)’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978년-1979년 양국 관계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던 당시 베트남 정부는 ‘응어이 비엣 곡 화(Nguoi Niet Goc Hua)’ 즉 ‘중국계 베트남인’이라고 부르면서 이들로 하여금 중국 국적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양국 관계가 전쟁을 하는 상황으로 악화되자, 화교는 물론 중국 혈통을 가지고 있지만 대대로 베트남에 정착해서 살던 화인들도 중국인으로 의심을 받게 되어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증가하게 되었다. 베트남은 도이머이 정책 실시 이후 자국 거주 중국인을 ‘응어이 화’ 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제 베트남에서도 ‘응어이 화’와 ‘화 끼에우’는 명확히 구분되는 개념이다.

남베트남에 거주하고 있던 화인들이 많은 피해를 입은 이유는 그들의 경제력 때문이다. 1975년 4월 북베트남이 사이공을 함락할 당시 남베트남에 거주하고 있던 화인들은 베트남 전쟁 특수를 이용해 많은 부를 창출할 수 있었다. 1975년 기준으로 화인들은 방직물 생산의 80%, 제련소 5곳 중 4곳, 커피 농장 278개, 차 농장 14개 등을 보유했다. 특히 1,80개의 도매 업소는 모두 화인이 장악하고 있었고, 소매 업소의 50%가 화인이 소유하고 있었다. 전체 무역회사의 90%에 해당하는 80여개 업체는 물론, 전체 운송수단의 12%에 해당하는 차량 및 선박 4천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현대식 생산설비를 갖춘 대규모 공장 32개, 중소 제조업체 8,00 여개 등 남베트남 제조업의 약 80%”를 장악하고 있었다. 1976년 1월 통일 베트남 정부는 화교들에 대해 베트남 국적으로의 전환을 요청했다. 그러나 남베트남에 거주 화교들은 베트남 국적을 부정하고 중국 국적으로 등록하는 경우가 많았다. 베트남 정부는 “중국 국적의 화교이길 원하는 사람에게는 베트남 공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특권’을 폐지하며, 취업의 제한을 두는 ‘외국인’으로 취급하는”는 정책을 실시했다.

화교들이 베트남 국적 취득을 거부한 이유는 중국 정부가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권을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교들의 이러한 선택은 베트남 정부로 하여금 안보에 위협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모든중국어 신문, 화교 학교는 폐쇄되었고, 징벌적 증세 및 재산 압류 등의 조치가 뒤따랐다. 1978년 3월에는 화인, 화교 소유 기업 약 3만 개를 국유화하였고, 5월에는 화폐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자산을 몰수했다.

베트남 정부는 197년 이후 북베트남 지역의 화인들에게도 국적 선택을 요구했다. 베트남 국적 취득을 거부한 화인들의 경우 외국인으로 취급되고 퇴거를 요구하기도 했다. 북베트남 거주 화인들의 경우 농업, 어업 등에 종사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중국인으로 의심받는 화인들은 중국으로 퇴거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이제 화교는 물론 중국계 화인들도 동요하게 되었다. 1978년 4월부터 6월 사이에 약 16만 명 이상이 중국으로 국경을 넘었다. 1978년 8월 25일에는 베트남군이 2,00명의 화인을 추방하였고, 이 과정에서 중국 군대와 총격전이 발생하기도 했다. 북부의 화인, 화교들은 중국으로, 남베트남의 화교들은 ‘보트 피플’이 되어 동남아, 서방 국가로 유랑하는 난민이 되었다. 중국은 이에 대한 불만으로 1978년 7월 3일 베트남에 대한 원조를 전면 중단하고, 고문단을 소환한다고 선언했다. 1978년 6월 29일 베트남이 소련 중심의 코메콘(COMECON) 가입을 선언한 것도 중국의 원조 중단에 영향을 주었다. 중국은 베트남의 화인, 화교 정책을 반중 정책의 일환으로 인식했다.

국경 분쟁의 심화

중국-베트남 국경지역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산악 지형을 경계로 국경이 구분되어 있고, 국적은 다르지만 혈통이 같은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중국-베트남은 국경을 엄격하게 관리하지 않았다. 또한 이들 소수 민족은 국경과 상관없이 상호 왕래하며 거주하고 있었다. 1979년 2월 전쟁 발발 이전 중국 윈난, 광시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소수 민족이 베트남에 거주하고 있는 일가친척에게 전쟁에 대비하라고 미리 알려준 경우도 많았다. 광시좡족자치구의 좡족(壯族) 인구는 2012년기준 1,548만 명에 달하는데, 베트남에도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 대족이 약 19만, 농족이 약 7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특히 1978년 이후 베트남이 중국과의 국경 지역 단속을 강화하면서 베트남 북부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소수민족, 화인, 화교들도 동요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대로 베트남에 거주하며 베트남에 거주하고 있던 화인들의 경우 농민이 다수였음에도 중국으로 망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둘째, 베트남 통일 후 중국-베트남 국경의 긴장은 양국 관계 악화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중국-베트남 육지 국경은 187년 청과 프랑스가 체결한 톈진조약에 의해 약 30여 개의 표지석을 설치하면서 구분되었다. 그러나 1979년 당시에는 표지석이 유실되거나 경계가 모호한 지역이 증가했다. 더구나 1950년대 프랑스와의 전쟁, 1960년대 미국과의 전쟁 기간 동안 양국은 국경을 자유롭게 왕래했던바, 국경의 획정은 양국 간 큰 문제로 부각되지 않았다. 베트남은 1970년대 초 미중 관계 개선으로 중국이 베트남 통일을 반대한다고 인식하게 되면서 중국을 경계하게 되었다. 결국 1975년 베트남 통일 후 중국과의 국경 획정을 앞두고 긴장이 증가하게 되었다.

중국-베트남 국경은 185년부터 187년 사이에 약 30 여개의 비석을 설치함으로써 획정될 수 있었다. 물론 현 시점에서 중국의 연구자들은 당시 국경 협상은 프랑스의 주장이 일방적으로 반영되었고, 그 원인으로 청의 분열과 무능을 비판하고 있다. 중국-베트남 국경은 1975년 통일 베트남 정부가 육지 국경을 재협상 하자고 문제제기 하면서 다시 불거졌다. 베트남 지도자들은 베트남이 톈진조약 체결의 당사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중국의 입장이 많이 반영되었다고 인식했다. 중국 정부로서는 1958년 북 베트남 정부와 영토 협상을 마무리했다고 인식했기 때문에, 통일 베트남 정부의 국경 재획정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1975년 이후 국경 획정을 위한 회담이 개최되었으나, 해양 국경을 포함한 기존 국경 인정 여부를 두고 입장의 차이가 컸기 때문에 별 소득 없이 끝났다. 1975년 이후 중국-베트남 국경 지역의 주둔군이 증가했고, 국경 지역의 소규모 무장 충돌이 발발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는 1978년부터 1979년까지 베트남이 50여 차례 중국측 영토를 침범해 공격했다고 비판했다.

중국-베트남의 해상 영유권 분쟁 역시 1979년 중국-베트남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중국 최남단 하이난(海南島)과 베트남의 동해는 중첩되는 수역이 많다. 중국-베트남의 해상 영유권은 결국 남중국해 분쟁으로 귀결된다. 남중국해(South China Sea)는 파라타스(Pratas, 東沙, TungSha), 매클레스 필드(Maclesfield, 中沙, Chungsha), 파라셀(Paracel, 西沙, HoangSa), 스프래틀리(Sprately, 南沙, TruongSa) 총 4개의 군도로 이루어져 있다. 수십 개의 도서와 암초가 존재하고 있는 난사군도의 경우 중국, 베트남 외 타이완,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브루나이가 군도의 일부 도서를 점유하고 있으면서 주변 해역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남중국해를 둘러싼 해양 영유권 분쟁이 심화되고 있는 이유는 남중국해의 지정학적 가치 때문이다. 특히, 남중국해는 다량의 지하자원이 매장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68년 ‘UN 아시아 극동경제위원회(ECAFE, 현 ESCAP)’는 2년간의 탐사 작업을 통해 남중국해에 풍부한 석유 및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한 바 있다.

군사적으로도 남중국해의 중요성은 크다. 남중국해는 태평양과 인도양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서, 동아시아 국가의 해상 무역은 남중국해를 지나지 않고서 통행할 수 없다. 만약 남중국해 해상을 봉쇄하면 원유 수입의 90% 이상을 수입하고 있는 한국, 중국, 일본의 경우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베트남 통일 후 소련의 극동함대가 베트남에 주둔하게 되자, 미국, 일본은 물론 중국의 위협 인식이 고조되었음은 물론이다. 이 밖에도 남중국해의 중요성과 그와 관련된 분쟁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남중국해 분쟁문제로 따로 분류하여 이야기하겠다.

중국 소련 관계 악화와 소련 베트남 관계 발전

중국과 소련의 관계 악화에 관해 해야 할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이 부분은 중국 소련 분쟁으로 따로 분류하여 이야기하겠다.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중국과 소련은 각국의 이익문제, 국제 공산당 내의 위치와 노선문제로 갈등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관계가 악화되었다.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던 둘의 관계는 1969년 전바오다오(珍寶島)에서의 충돌을 계기로 완전히 적대관계로 돌아서게 되었다. 1969년 중․소 국경 분쟁 이후 양국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었던 것에 비해, 베트남-소련 관계는 군사동맹 관계로 발전했다. 베트남의 입장에서 소련과의 관계 강화는 레 주언을 중심으로 한 친소 정치지도자의 권력 강화, 국내정치적 노선, 국제정치적 환경 요인이 작용한 결과이다. 첫째, 베트남 국내정치에서 레 주언을 중심으로 한 친소련 인맥이 권력을 장악했다.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북베트남은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전쟁을 치르면서 중국과 소련 양국 모두의 지원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1969년 사망 시까지 북베트남의 최고 지도자는 호치민이었다. 호치민은 중소 관계가 악화된 1960년대 이후에도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지 않는 등거리 외교를 해야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고 보았다. 특히 호치민은 중국에 많은 인맥을 가지고 있었고, 중국 정치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호치민은 1910년대부터 중국 남부 지역에서 혁명 활동을 하였고, 북경어는 물론 광둥어에도 능통하였으며,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등과 오랜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베트남 공산당 내부에서는 호치민의 노선에 반대하는 세력도 존재했다. 일반적으로 베트남은 지도부의 단합으로 미국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베트남 국내에서 친소파, 친중파의 노선 투쟁은 196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다. 1959년 이후 중․소 관계 악화는 베트남 내 친중파, 친소파 간 노선 투쟁으로 이어졌다. 1960년 3차 당대회에서 레 주언이 제1서기로 등극함에 따라 베트남 국내정치는 소련을 중시하는 정책이 강조되었다. 레 주언은 196년 모스크바 방문시 소련을 ‘제2의 조국’이라고 언급할 만큼 친소적인 인물이었고, 1971년 이후 중국은 베트남의 통일과 세력 확장에 방해가 될 것으로 인식했다.

1975년 베트남 통일 후 국내정치는 레 주언을 중심으로 한 친소련 인맥이 정국을 주도했다. 특히 1976년 12월 베트남 4차 당대회를 통해 친중파 정치국위원이 실각하였고, 그 자리를 친소련 인맥이 차지했다. 베트남 4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17명의 정치국위원 중 친중파 1명을 제외하고 실각하였고, 레 주언 중심의 친소파 인맥 10명, 중도파 6명이 선출됨에 따라 친소 노선을 표방하는 정치국이 구성되었다. 베트남 국내 정치에서 친소 인맥이 중용된 이유는 레 주언 개인의 특성도 있지만, 베트남 전쟁 기간 중 소련이 36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했고, 이는 베트남이 받은 해외 원조의 65%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도 베트남에 대한 많은 원조를 제공했지만, 미국과 관계 개선을 시도했기 때문에 베트남으로서는 배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베트남-소련 관계는 1978년 1월 3일 ‘베트남-소련 우호협력 협정’ 체결로 군사동맹 관계로 발전했다. 조약 체결 후 소련 극동함대의 캄란(Cam Lan)만 기지 사용이 증가하였고, 베트남에 대한 군사원조도 증가했다.

둘째, 통일 베트남은 미국과 맞설 수 있는 국방력, 경제력, 국제적 영향력을 가진 소련의 노선을 발전 모델로 인식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 시기 베트남을 수정주의 국가로 비판하였으며, 정부의 기능이 마비될 정도로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경제를 다시 재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반해, 소련의 베트남 경제 원조는 베트남 전쟁이 발발한 1965년부터 1968년까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소련은 1965년 2월 코시킨 총리의 하노이 방문 시 호치민과 정상회담을 갖고 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동남아에서 소련의 역할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1967년에는 소련 전체 원조의 50%가 베트남에 집중되었고, 1968년 이후부터 소련의 원조가 중국을 능가하게 되었다. 또한 1965년 9월부터 약 1,50명-2,50명의 군사 고문단, 기술자가 베트남에 방문해 베트남의 전쟁수행 및 경제 재건을 돕게 되었다. 베트남은 전쟁을 수행하는 중에도 매년 약 30여명의 유학생을 소련에 파견할 만큼 소련이 곧 통일 베트남이 지향해야 할 모델로 인식했다.

셋째, 1969년 중․소 분쟁, 1972년 중․미 화해로 인해 베트남-소련 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1969년 이후 소련은 중국과의 국경 지역에 약 10만 명의 군대를 배치하였다. 위협을 느낀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소련을 견제하고자했다. 그 결과는 키신저의 비밀 방중 및 1972년 미국 닉슨 대통령의 공식 방중으로 나타났다. 베트남은 전쟁이 한창인 상황에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는 중국에 대한 불신이 더욱 커졌다. 특히, 중국이 베트남의 승리를 원하지 않는 것으로 의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은 1974년 남베트남이 점유하고 있던 시사군도를 점령하기도 했다. 베트남은 중국이 베트남 통일을 원하지 않고 있으며,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중국보다는 소련과의 관계 강화가 더 중요하다는 전략적 선택을 했다. 베트남 하노이대 국제학부 팜쾅민(Pham Quang Minh) 교수는 2013년 8월 14일 인터뷰에서 베트남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1971년 중미 관계 개선은 베트남의 중국 인식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팜 교수는 중국이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했기 때문에, 베트남으로서는 친소정책 이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베트남은 소련과의 관계 강화를 통해 중미 양국의 포위를 견제할 수 있다고 인식했다. 특히 중국과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소련과의 협력을 통한 중국 압박이 필요했다. 그 결과는 1978년 1월 2일 모스크바에서 체결된 ‘소련-베트남 우호동맹조약’이다. 동 조약은 정치, 경제, 문화 등 방면의 협력을 강조하고 있는데, 핵심은 ‘공수동맹(攻守同盟)’을 의미하는 6조이다. 1978년 1월 2일 베트남 레 주언과 팜 반동은 소련을 방문해 동맹조약 및 향후 10년간의 경제원조 조약, 국방원조 조약, 과학, 기술, 문화 협력 의정서를 체결할 수 있었다. 베트남은 유사시 소련의 자동 개입을 담보할 수 있었고, 소련은 베트남의 군사 시설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

첫째, 베트남 지도자들은 캄보디아에 대한 종주권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베트남은 15세기 중남부의 참파 왕조를 멸망시키고 베트남의 영토로 병합한 바 있다. 이후 베트남은 캄보디아 영토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베트남은 17세기 이래 남부 지역으로 영토를 확정하는 정책을 취하였고, 자연스럽게 캄보디아 내정에 대해 깊은 이해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 식민지 시기 베트남 관료들에 의한 캄보디아 통치는 베트남인으로 하여금 캄보디아에 대한 우월 의식을, 캄보디아 인으로 하여금 베트남에 대한 원한을 조성하는 배경이 되었다.

둘째, 1975년 사이공 점령 후 베트남은 캄보디아에 대한 특수한 이해관계와 전방위 협력을 강조하였다. 베트남 전쟁기간 북 베트남은 캄보디아 영토를 경유하는 ‘사이공 루트’를 통해 미군을 공격한 바 있다. 1969년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은 약 50,00-60,00명에 달하였다. 북 베트남은 캄보디아 주둔군을 통해 캄보디아에 대한 실질적인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캄보디아를 둘러싼 베트남과 중국의 경쟁 구도가 형성되었다. 1975년 5월 폴 포트(Pol Pot)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Khmer Rouge, 캄보디아 공산당) 세력이 집권하게 되었다. 크메르 루주 정권은 중국의 지원을 통해 캄보디아에 대한 베트남의 영향력을 제어하고자 했다. 크메르 루주의 폴 포트는 집권 후 완전한 공산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급진적인 정책을 실시했다. 우선 공산주의 사회 건설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자본가, 지식인 계급에 대한 대대적인 처형을 전개했다. 크메르 루즈 지도부는 중국의 문화대혁명 등 극좌파 노선을 신봉했다. 따라서 1976년 4인방(장칭, 장춘차오, 야오위안, 왕홍원)의 체포 소식은 큰 충격이었다. 마오쩌둥 사후 크메르 루즈 지도부는 중국의 지원을 얻기 위해 화궈펑에게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1997년에는 베트남에서 훈련을 받은 공산당원들에 대한 숙청을 통해 친 베트남 세력은 숙청 되었다. 외교정책 역시 중국, 북한, 라오스 대사관을 제외한 모든 대사관을 폐쇄했다.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는 베트남인 기술자, 전문가, 상인 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는데, 도시 전체 인구를 이동시킴으로써 베트남인들은 추방당하거나 살해당했다. 폴 포트는 전 국민을 이주시켜 새로운 인간을 만든다는 가혹한 정책을 실시했다. 결국 수도 프놈펜이 텅 비기도 했으며, 전체 인구 70만 명 중에 약 150만 명이 살해되었다. 1977년 이후부터 캄보디아에 대한 베트남과 중국의 영향력 경쟁이 본격화되었다. 크메르 루주 정권은 마오쩌둥 사후 화궈펑, 덩샤오핑이 권력을 장악했음에도 캄보디아에 대한 무기, 경제 원조가 지속됨에 따라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크메르 루주 정권은 197년 이래 베트남에 대한 국지적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국경 분쟁이 증가했다. 캄보디아는 자국민 10만 명이 베트남 메콩 델타 유역에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베트남 남부 지역에 대한 소규모 공격을 개시했다. 베트남은 국경지역의 캄보디아의 공격에 대응하면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단기간에 정권을 교체하고자 했다. 1977년 베트남 지도부들이 소련을 방문해 군사협력을 강화하고, 1977년 10월부터 소련 군사고문단이 대거 베트남에 파견되었다. 그 이후부터 베트남은 중국과 캄보디아를 동시에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소련이 베트남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본격화한 197년은 중국-베트남 관계 악화의 전환점이 되었다. 베트남과 라오스는 197년 7월 양국 간 특수 관계를 형성하는 조약을 체결하였다. 1978년 이래 베트남-캄보디아, 베트남-중국 국경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1978년 7월부터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양국이 본격적인 전쟁을 경고하는 수순에 이르렀다. 또한 캄보디아를 지원하는 중국과의 언론전도 가열되기 시작했고, 1978년 7월 이후 베트남 군대가 캄보디아의 국경 지역으로 이동했다.

셋째, 베트남은 1978년 12월 25일 캄보디아를 침공한 후 친베트남 정권 수립에 주력했다. 베트남군 최정예 12개 사단 10만 명이 동원되었고, 2주 만인 1979년 1월 7일 수도 프놈펜이 함락되었다. 이에 캄보디아의 키우삼판 국가원수, 폴 포트 수상, 이앵 사리 부수상 등이 특별기편으로 베이징으로 탈출했다. 베트남은 헹 삼린(Heng Sam Rin)을 의장으로 하는 ‘캄보디아 8인 혁명위원회’를 구성해 비동맹 노선 추구, 폴 포트 정권 해체, 사회주의 경제정책 실시, 협상을 통한 분쟁의 평화적 해결 추구, 군사 동맹 불가입, 외군군사기지 설치 불용 등 1개 항의 정치 강령을 발표하였다. 1979년 1월 1일에는 ‘캄보디아인민공화국’수립을 선포하고, 행 삼린을 의장으로 하는 14인의 공산당 중앙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후 베트남, 라오스, 아프가니스탄, 소련, 헝가리, 동독, 불가리아, 폴란드, 체코, 이디오피아, 콩고 등 1개국이 캄보디아의 신정권을 승인하였다. 베트남은 서방측 기자들을 초청해 폴 포트 정권의 잔인함을 선전하였고, 폴 포트의 학살로 인해 반란군이 생겨나 베트남 군대는 이들 반란군을 돕는 역할에 불과하다고 선전하였다. 그러나 베트남의 노력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캄보디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태국을 중심으로 ASEAN 국가들이 연합해 UN을 통해 베트남군 철수를 주장하였고, 중국이 캄보디아 폴 포트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원을 천명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캄보디아의 친 베트남 정부를 수립해 국제적 승인을 받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군대를 동원해 게릴라 전쟁을 선택한 폴 포트 정권의 군대를 추적해 소멸하는 전략을 취했다. 1979년 10월 캄보디아 내 베트남 병력은 20만 명으로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의 전략은 실패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캄보디아의 중앙은 평야 지대라서 군사 작전이 용이하지만, 태국과의 국경 지역인 북서쪽은 산악과 밀림으로 우거져 있어서 게릴라전에 유리한 지형이었기 때문이다. 1979년 1월 태국과의 국경지역에 약 4만 명의 병력이 추가 배치되었다. 이에 중국은 태국과 캄보디아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원 약속은 물론, 베트남에 대한 제2의 교훈전쟁을 위협하였다. 베트남은 병력 및 군사장비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폴 포트를 중심으로 한 게릴라 부대를 단시일 내에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베트남 군대의 공격으로 약 2만 명의 난민이 태국과의 국경 지역으로 이동함에 따라 베트남군에 대항하는 게릴라군은 폴 포트 계열, 보수 계열, 시아누크 전 국왕이 이끄는 3개의 독자적인 단체가 구성되었다. 베트남이 캄보디아의 늪에 빠질 무렵 중국이 대응을 시작했다. 중국과 ASEAN, 국제사회의 요구로 1982년 6월 2일 시아누크를 대통령으로 하는‘민주 캄보디아 연합정부(Coalition Government of Democratic Kamouchea: CGDK)’가 구성되었고, 이 정부는 1983년 10월 20일 UN 총회에서 대표권을 인정받았다.

결과적으로 1978년 12월 25일 베트남의 ‘캄보디아 공격’은 중국이 ‘베트남 공격’을 결정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978년 12월 25일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 프놈펜 함락은 중국이 베트남 공격을 확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얀 찬다는 1979년 1월 중국 지도부가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공격한 규모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기로 결정했다고 주장한다. 1978년 12월 25일 중국 인민일보의 “우리의 인내심에는 한계가 있다(我们的忍耐是有限度的)”는 사설은 중국이 베트남을 징벌(懲罰)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 사설은 “최근 베트남의 중국에 대한 도발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베트남 무장 역량이 중국 영토를 침범하고, 변경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과 어민들을 살상하거나 살해하고 있다. 이와 같이 베트남 당국이 중국을 기만하는 행위는 이미 용인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금년 8월 25일부터 12월 15일까지, 광시 지역의 10여개 지점에서 중국의 영토를 침범하였고, 무장인원 약 2,00여명 이상이 20여 차례 도발하였으며, 변경 지역에서 수십인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비판했다.

이와 동시에 “베트남 당국은 전쟁 준비를 위해 전국적으로 군인을 모으고, 군대를 확충하고 있으며, 중국을 목표로 상정한 군사연습을 실시하고 있다. 국경 지역에서는‘정화’활동을 강화하면서 군대를 증파하고 있다. 베트남 당국은 스스로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민족 파시스트주의와 지역패권주의를 행하고 있다. 베트남의 야망은 대국, 소국을 막론하고 기만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오늘날 베트남은 북쪽의 중국을 기만하고, 서쪽의 캄보디아를 침범하는 것은, 그들이 얘기하는 중국의 잘못된 이론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고 비판했다.

마지막으로 베트남에 대한 징벌을 암시하면서 “중국 인민의 인내와 자제는 한계가 있고, 중국은 어느 누구도 기만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우리를 기만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나를 침범하지 않으면, 나도 다른 사람을 침범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나를 침범하면, 나도 다른 사람을 침범할 것이다. 이 말은 지금까지 유효하다. 우리는 베트남 당국에 엄중히 경고한다. 만약 베트남이 소련의 지지에 기대어 한도 끝도 없는 욕심을 부리며, 망동을 계속하게 되면 반드시 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의 할 말은 이제 다 했으니, 나중에 미리 말하지 않았다고 하지 말기를 바란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덩샤오핑은 1979년 1월 7일 프놈펜 함락 직전 베이징으로 피신한 캄보디아의 시아누크(Norodom Sihanuk: 192-2012) 와의 회담에서 베트남 군대가 캄보디아를 침공한 것은 국제연합(UN)의 반대성명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중국이 베트남을 공격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지지 속에서 캄보디아 인민의 투쟁과 구국운동을 돕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관련 국가들의 이해관계

중국

중국은 공식적으로는 베트남 통일을 지원했지만,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남북 베트남의 분단을 더 선호하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 원인은 중국과 소련의 경쟁에 있었다. 중국은 소련의 영향력을 통한 베트남의 통일 보다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의 공존이 전략적으로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은 북 베트남 지도자들이 통일전쟁을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하였다. 동시에 중국에 대한 베트남의 불신과 반감을 키웠다.

분쟁지역의 중요성

남중국해는 전략적으로도 지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점은 남중국해 영토분쟁이 아닌 중국 베트남의 육지 전쟁이며, 남중국해와 관련된 이야기는 남중국해 분쟁 부분에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전개과정

1979년 중-베트남 전쟁은 28일 만에 종결되었다. 1979년 중-베트남 전쟁은 2월 17일-26일까지의 전투를 제 1단계, 2월 27일- 3월 5일까지의 전투를 제2 단계, 3월 6일-16일까지를 제 3단계로 구분해서 살펴볼 수 있다. 한 달 남짓한 전투였지만 각 단계마다 전쟁의 양상과 특징이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 1단계는 중국이 대규모 화력을 통해 베트남 진지를 파괴하고 점령함으로써 진격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공격이 전개되었다. 전술적 목표는 베트남 국경을 통과해 5-10km 지점에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2단계는 베트남 국경 약 20-30km에 위치하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 라오까이(Lao Cai), 랑선(Lang Son)을 점령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특히 랑선은 수도 하노이를 최단거리로 공격할 수 있는 지정학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랑선을 점령하는 것은 수도 하노이로 진격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베트남 역시 랑 선을 사수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고, 양측 모두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랑 선을 점령한 후 중국은 퇴각을 선언하였다. 3단계는 인민해방군이 철수하는 시기이며, 점령한 국경 도시의 군사 시설, 경제적 기반 시설을 파괴하는데 주력했다.

1단계: 1979년 2월 17일 – 2월 26일

1979년 2월 17일 토요일 새벽 5시(베트남 시간 4시), 중국 인민해방군 약 17만 병력이 광시와 윈난 두 축을 중심으로 베트남을 침공했다. 대규모 포 사격으로 전쟁이 시작되었고, 17개 사단 약 225,00명이 투입되었다. 1979년 2월 17일 개전 당일에는 약 75,000명에서 85,000명의 병력이 베트남을 공격했다. 약 70대의 전투기가 중국측 영공에서 호위하였는데 실제 공중 포격은 없었다. 인민해방군은 베트남 몽까이(Mong Cai), 라이차우(Lai Chau), 하지앙(Ha Giang), 까오방(Cao Bang), 랑선(Lang SOn) 등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5개 성 13개 지점을 공격했다. 인민해방군이 국경을 돌파하기 위한 전투는 2월 17일-18일 간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인민해방군은 대규모 포 공격을 바탕으로 13곳 지점에서 강을 건너 베트남측 방어선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인민해방군 공병 부대는 개전 이전부터 충분히 도강(渡江) 준비를 해 둔 상태였다. 또한 베트남군 진지를 포로 공격하기 위한 좌표 계산을 이미 끝낸 상황이었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 북부 지역에서 중국으로 온 화인, 화교들의 정보가 큰 도움이 되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베트남 인민군 규모와, 진지 위치, 지형을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월 17일 해가 뜨기 직전 베트남 진지에 대한 대규모 화력이 집중되었고, 인민해방군은 베트남 인민군의 큰 저항 없이 국경을 건너는데 성공하였다. 베트남 인민군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기습 공격을 예측하지 못했고, 베트남 인민군이 구축했던 진지와 포대들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베트남 인민군은 후방 10km 지점으로 후퇴해 진지를 재구축 하였다. 베트남은 게릴라식 전술로 반격을 시도했고, 인민해방군의 진격 속도는 느려졌다. 베트남 영토로 진격할수록 중국의 사상자는 더욱 증가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대다수 전선에서 대략 2-5배되는 병력의 우위와 화력을 바탕으로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지정학적 요충지 랑선 방면으로 진격하는 것은 베트남 인민군 정규 사단의 강한 저항에 직면했다. 랑선 공격을 위해서는 양국 국경의 상징 우의관(友誼關)을 거쳐 4km 남쪽에 위치한 동당(Dong Dang)시를 점령해야만 했다. 냉전시기 중국-베트남 우의를 상징하던 우의관(友誼關)의 옛 명칭은, 역설적으로 남쪽을 진압한다는 의미의 ‘진남관(鎭南關)’이었다. 명 홍무 원년(1368)에 진남관이라고 칭한 이래, 1953년 남쪽과 화목함을 뜻하는 ‘목남관(睦南關)’으로 바뀌었고, 베트남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65년 우의관으로 개명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동당은 해발 50m 높이의 산이 둘러싸고 있는데, 베트남 인민군 3사단이 3개의 봉우리에서 포대 진지를 구축하고 삼각형 모양으로 방어를 하고 있었다. 인민해방군은 동당 공격에서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상대적으로 방어가 약한 하나의 포대를 집중 공격해 점령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어서 나머지 두 포대를 성공적으로 점령하고 동당을 거점으로 삼을 수 있었다. 중국의 서쪽, 윈난-라오까이 전투는 랑선 보다 더 수월하게 진격을 할 수 있었다. 라오까이는 베트남 인민군의 방어 태세가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이다. 인민해방군의 공격으로 베트남 인민군 246 사단장이 전사했고, 참모장이 생포되기도 했다. 인민해방군은 2월 18일 국경도시 간탕을 점령해 라오까이 공격의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다. 개전 후 3일간 격렬한 공방전이 전개된 후 전세(戰勢)는 다소 소강상태가 되었다. 2월 17일부터 2월 19일까지 3일 간 베트남군 약 10,00명 이상이 사망하였고, 7개 미사일 기지 및 다수의 포병 진지가 파괴되었다. 인민해방군은 순조롭게 국경을 돌파하고 진격의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중국 인민해방군은 베트남 내륙으로 남하하면서 고전하기 시작했다. 베트남 국경 지역은 험준한 산악 지형이 이어지기 때문에 병력의 우위를 살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형에서는 포병의 지원을 받기 어려웠다. 또한, 베트남 인민군의 장기인 게릴라 전투에 직면했기 때문에, 인민해방군의 진격 일정은 지연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는 2월 18일 베트남 정부에 국경 협상을 공식 제안했다. 베트남 정부는 중국의 협상 제안을 거절했다. 베트남 정부는 중국 군대가 베트남 영토에 있는 한 협상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2월 19일 베트남 정부는 성명을 통해 중국 인민해방군 4,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10대의 전차를 파괴하는 등 중국의 공격이 효과적으로 제지되고 있다고 발표했다. 구체적으로 랑선에서 1,00명 사살 및 전차 10대 파손, 까오방에서 1,60명 사살 및 전차 50대 파손, 라이차우에서 70명 사살 및 1개 연대 타격, 쾅닌에서 150명을 사살했다고 발표했다. 2월 19일 캄보디아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팜 반동 총리도“베트남은 장기간 투쟁할 각오가 되어 있으며 북방으로부터의 침입자들은 항상 패배당하여 왔다”고 언급하고,“과거의 베트남은 단독으로 이에 항거하여 왔으나 현재 베트남은 소련 및 사회주의국가들과 우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승리는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하다”고 강조했다.

베트남 인민군은 국경 및 국경 인근 1차 방어선 수성에 실패하자, 약 10km까지 지점까지 후퇴해서 저항선을 재구축했다. 베트남 인민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예군이 캄보디아 공격에 동원되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하노이 및 남부 지역에 위치한 일부 병력을 북부 지역으로 이동하는 명령을 내렸다. 베트남 정부는 외교적 노력도 병행했다. 국제사회에 중국의 무력 사용을 규탄하며 UN의 개입을 요청하였고, 소련과 협조해 중국의 침략을 방어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베트남은 2월 2일 랑선에 제345 예비사단을 파견하였다. 베트남 인민군 지도부는 소련이 군수 물자만 충분히 지원해주면 중국 인민해방군의 공격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고 인식했다. 특히 베트남 정규군이 수비하고 있는 국경 도시 동당과 몽까이, 랑선 에서는 인민해방군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큰 타격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2월 23일부터 25일까지 랑선시 외곽에서 양군 주력부대간의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는데, 베트남 정부는 2,00명의 인민해방군 사상자와 인민해방군 전차 20여대를 파괴했다고 발표했다.

중국은 베트남 인민군의 본격적인 저항에 직면하게 되자 대규모 추가 병력을 투입하였다. 인민해방군은 우세한 화력을 바탕으로, 베트남군의 한 진지를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하는 전술을 세우고 있었다. 이에 대해 베트남 인민군은 지형을 이용한 산악 전투를 중심으로 인민해방군의 공격을 막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3배에서 5배가 넘는 병력의 열세를 장기간 방어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결국 베트남 인민군은 10km, 20km, 30km 계속 후퇴하며 진지를 구축하고 전열을 재정비했다. 물론 베트남 인민군의 후퇴가 회복 불가능한 손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전쟁의 초기 단계에서 외교적 대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월 17일 20시 베트남 외교부 응우옌 꼬탁 차관은 하노이 주재 외교단을 초치했다. 응우옌 차관은 중국의 공격에 대한 UN의 즉각적인 개입 및 각국이 중국의 침략중지 및 철군을 요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중국은 2월 17일 천차오 주 UN대사가 중국 정부의 입장을 설명하는 성명서를 제출하였다. 관영 신화통신은 2월 18일“전쟁의 목적이 베트남 영토점령에 있지 않다”고 강조하면서, 베트남 당국의 중국에 대한 무력침략과 모든 도발해위를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베트남 공격이 제한적인 조치임을 강조하면서 서로가 합의하는 장소와 수준에서 국경분쟁 해결을 위한 협상을 제안했다. 덩샤오핑은 2월 19일 미주기구(OAS) 사무총장과의 면담에서“이번 중공의 침공은 특수 상황에 대처키 위한 것이며 어떤 식으로든 더 이상 확대되지 않을 것(It wil not be extended or expanded in any other way)”이라고 밝히고,“무력조치를 취하기 전에 소련의 반응 가능성을 검토하였으며 소련의 직접적인 군사행동 위험성은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다”고 언급하였다.

소련 정부는 중국과 미국을 동시에 비난하면서 베트남에 대한 동맹 조약이행을 천명하였다.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Pravda)는 2월 20일 중국의 베트남 공격은 인도차이나에서의 패배를 복수하려는 일부 미국 친구들에 의해 고무된 결과라고 비난했다. 미국은 2월 17일 국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6개 원칙을 발표하였다. 미국은 “중-베트남 전쟁에 직접적인 관여 회피, 소련이 개입되는 것을 방지하며 중-베트남 중재 노력, 캄보디아 내 베트남군 철수 및 베트남의 중공군 철수를 위해 노력, 미-중간 관계 정상화는 중-베트남 전쟁과는 별개의 문제, 중-베트남간의 이번 분쟁은 미국이나 기타 동남아세아 연방에 대한 안보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며, 중-베트남 분쟁에 대한 제3국의 무력개입은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아세안 국가들도 미국의 성명과 비슷하게 중국의 베트남 철수와 베트남 군대의 캄보디아 철수를 동시에 요구하였다. 일본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베트남 철군과, 베트남의 캄보디아 철군을 동시에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2월 19일 오히라 수상과 소노다 외상이 드리트리 폴리안스키 주일 소련대사를 면담하고 소련의 신중한 태도를 촉구했고, 폴리안스키대사는 “일본정부가 인도차이나 전면전을 회피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요청했다.

2단계: 1979년 2월 27일 – 3월 5일

1단계 전쟁은 중국 인민해방군이 국경 도시로 진격하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2월 27일부터 3월 5일까지 전개된 2단계 전투는 20-30km 후방에 위치한 국경도시를 점령하는 것이다. 2단계 전투는 1단계보다 더 격렬했고, 인민해방군은 광시 및 윈난 거주 18-35세 남성을 대상으로 민병대를 조직해 부상자 및 사상자를 후송했다. 또한 국경도시 공격을 위해서는 산악전 및 시가전(市街戰)이 필요했기 때문에 후방의 예비 병력을 더 많이 투입했다. 2단계 전투의 핵심은 국경도시 ‘랑선(Lang Son)’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하노이를 가장 빨리 진격할 수 있는 지정학적 요충지 랑선을 두고 가장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랑선 전투에서 쌍방 모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1단계 전투에서 중국 인민해방군은 우의관을 지나 4km에 위치한 동당(Dong Dang)을 점령한 것은 언급한 바 있다. 인민해방군 제54군단, 제5군단이 동당을 지나 15km 정도 진격했다. 제43군단은 록빈(Loc Binh)에서 랑선을 우회 공격했다. 인민해방군은 랑선을 점령하기 위해 2개 사단의 신규 병력을 추가로 투입했다. 인민해방군의 전술은 병력의 우위를 활용해 양면에서 포위 점령하는 것이었다.

해방군의 전술은 병력의 우위를 활용해 양면에서 포위 점령하는 것이었다.434) 베트남 인민군은 본격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베트남 인민군은 랑선 방어를 담당하던 제3사단 외에도, 최정예 3개 사단을 추가 투입했다. 그 결과 제5군단의 경우 일주일간 3km도 진격하지 못했다. 베트남은 라오스 주둔 연대, 캄보디아에 파견된 일부 병력, 베트남 남부 지역의 일부 병력을 북베트남 전선으로 이동하는 동원령도 내렸다. 1단계 전투에서 중국은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기습 공격을 했고, 대규모 화력의 지원으로 성공적으로 국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의 본격적인 저항에 직면하게 되자 많은 피해를 입었다.

베트남 인민군은 정규군, 지방군, 민병대가 각각 익숙한 산악지형을 이용해서 십여 명의 소대 규모로 매복해서 공격하고 퇴각하는 작전을 구사하였다. 인민해방군 역시 산악지형을 통과하기 위해 소규모 보병 부대를 중심으로 돌파 작전을 전개했다. 2월 28일 인민해방군 병력이 랑선으로 이동하고 있는 와중에 베트남 인민군이 후방에 위치한 동당을 공격해 점령하자 중국 지도부는 크게 당황했다. 자칫하면 인민해방군이 남북으로 포위당하는 상황이 발생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베트남 인민군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후방을 공격하기도 했다. 킹 천은 베트남의 반격이 의미 있는 타격을 주지는 못했지만, 중국의 후방이 취약하다는 것은 증명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인민해방군 지도부는 중국내 예비 부대를 투입해 3월 1일 동당 고지 재탈환에 성공했다. 또한 신규 증원된 사단이 랑선시 포위 작전에 투입되 었다. 인민해방군은 랑선 점령을 위해 가용 자원을 모두 동원했다.

2월 27일-28일 양일간 인민해방군 5군단이 랑선시로 진격했고, 약 306대의 자주포가 동원되어 후방에서 지원 사격을 했다. 중국은 3월 2일과 3일 격렬한 전투를 통해 랑선을 에워싸고 있는 콰마선 (Khua Ma Son)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인민해방군은 동당 외에 록빈(Loc Binh) 방향에서도 랑선을 포위했다. 동당에서 랑선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고지 점령을 위해 대규모 포 공격을 통해 보병의 진격을 지원했다. 중국은 3월 4일 성정부, 기차역, 공안부 등 주요 정부 건물을 장악할 수 있었지만, 3월 4일 하루 동안 약 2,470명의 사망자가 발생할 정도로 피해가 컸다. 이 기간 동안 56037 대대 등 일부 부대는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며 전투를 수행했고, 일부 부대는 병력의 1/3 이상의 손실을 보기도 했다.

랑선시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베트남 인민군은 성정부 등 주요 정부기관이 위치한 랑선지 북쪽 방어를 포기하고 랑선시 남쪽의 산악지역으로 후퇴해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베트남 인민군 역시 3월 1일 하노이 외곽에 주둔하고 있던 최정예 308사단을 랑선시 남쪽에 추가로 투입했다. 보 응우옌잡 장군도 랑선 지역을 시찰했다. 베트남 인민군은 월등한 전투력으로 중국에 큰 피해를 줄 수 있었지만, 중국 인민해방군 3개 군단의 9개 사단이 동원된 대규모 병력을 방어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랑선전투에서 베트남 정부는 중국군 42,00명의 사상자와 381대의 전차를 파괴했다고 발표했다. 중국 정부는 베트남군 3개 사단을 괴멸시키고 미사일 기지를 다수 파괴했다고 발표했다. 인민해방군의 랑선시 점령은 하노이로 진격하는 길이 열린 것을 의미했다. 3월 5일 베트남 정부는 18-45세 남성을 대상으로 징병령을 발표하고, 하노이를 방어하기 위한 민병대를 조직했다. 국제사회는 전쟁이 하노이로 확전될 것인지, 베트남이 강력한 반격을 할 것인지 예의주시하는상황이 전개되었다.

랑선을 둘러싼 공방이 한창 진행될 무렵 외교적 대응은 보다 긴박해졌다. 소련은 2월 28일 개최된 UN 안보리에서 중국의 야만적 침략행위를 규탄했다. 코시킨과 브레즈네프는 소련-베트남 조약을 이행할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그러나 남중국해 함대의 해상 시위를 제외하고는 눈에 띄는 군대의 이동은 관찰되지 않았다. 미국과 중국은 중국의 베트남 철군과 베트남의 캄보디아 철군을 동시에 주장했기 때문에 안보리 이사회는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소련은 중국의 야만적 침략이 지속될 경우 베트남에 지원군을 파견하겠다고 경고했다. 2단계 전투가 진행되는 기간 중 남중국해에는 소련 함대가 출몰하고, 하이퐁(Hai pong) 항구에는 많은 군수물자들이 도착하고 있다는 소식이 외신에 보도되기도 했다.

본래 중국 정부는 신속하게 베트남의 30-50km를 점령하고 철군하려고 계획하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중국 인민해방군이 베트남 인민군과의 전투를 유리하게 전개해 베트남의 패권주의를 교훈을 주었다는 체면과 위신을 달성하고자 했다. 또한 이러한 목적이 달성될 경우 베트남의 캄보디아 철군 및 국경 협상도 유리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중국 인민해방군은 전투에서 인상적인 승리를 하지는 못했다. 중국은 지정학적 요충지 랑선 점령을 통해 베트남 철군 명분을 찾는 데 만족했다. 중국의 경제력이 전쟁이 수개월 간 확전되는 것을 감당하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3월 5일 철군을 선언 하고 영토분쟁 해결을 위한 협상 개최를 요구하였다. 랑선 점령으로 당황한 것은 베트남도 마찬가지였다. 베트남은 3월 5일 징병령을 발표하고 전시 체제에 돌입하였다. 수도 하노이의 경우 민병, 공병, 학생이 모두 군사조직화 되었다. 그리고 모든 단위에서 8시간 일(학업), 8시간 군사 훈련, 8시간 휴식을 취하며 대기하는 전시 체제에 돌입하였다. 베트남 외교부는 하노이 주재 외교단을 소집해 공습 등 긴급사태에 대응하라는 지시를 전달하였고, 협상은 중국군이 완전히 철수한 이후 가능하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3단계: 1979년 3월 6일 – 3월 16일

중국은 베트남 주요 도시는 물로 하노이도 점령할 수 있다는 위신과 정치적 목적을 중시했다. 즉,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했더라도 전쟁에서 승리하는 전략을 추구했다. 황병무가 “중국은 점령한 영토를 상대방에게 정전협정의 체결을 강요하는 레버리지로 사용하지 않았다. 중인, 중월전쟁의 경우 일방적으로 철군을 결정하고 군사적 적대행위를 종결했다”는 주장은 타당하다. 1979년 베트남과의 전쟁에서 중국군의 문제점이 노출되자 중국은 “전 국토의 전면전 보다는 발생 가능한 국지 전쟁과 군사충돌에 대비할 수 있는 전략과 능력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교리가 변화되었다.

실제 3월 5일 관영 인민일보는 정부 성명을 발표하고 전 인민해방군이 중국 영토로 철수할 것을 선언하였다. 중국은 베트남 영토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베트남의 중국 영토 침범 역시 묵과하지 않을 것임을 경고하였다. 만약 베트남이 다시 침범할 경우 다시 자위반격전을 전개할 수 있다고 경고하였으며, 철군 완료 후 국경 협상을 위한 담판을 실시할 것을 제의하였다. 1979년 3월 5일 인민해방군이 철군을 선언한 것은 처음부터 계산된 것이었다. 첫째, 베트남 북부 지역은 3월부터 기온이 급격하게 상승하고 수풀이 우거져 뱀과 모기가 증가한다. 4월 우기가 시작되면 습한 날씨와 비가 자주 내리는 환경에서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부담감이 있었다. 실제 전쟁에 투입된 인민해방군 병사들은 베트남 북부 지역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어려움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중국 영토에서부터 베트남 랑선 까지 보급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둘째,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증가하는 국방비를 중국 경제가 감당할 수 없었다. 이시이 아키라(石井明)에 의하면 1978년 중국의 재정 수입은 1,132억 위안이었고 그 중 국방예산은 167.8억 위안으로 국가 예산의 15.1%를 차지했다. 그러나 1979년의 국방예산은 22.7억 위안으로 17.5% 까지 증가했다. 개혁개방 정책을 막 시작한 중국이 재정의 15% 이상을 국방비로 지출하는 것은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1979년 이후 중국의 국방예산은 198년까지 국방예산이 20억 위안이 넘었던 적이 없었을 정도로 긴축 재정에 돌입하였다. 1979년 중국 경제는 170억 위안의 적자를 기록했는데, 이는 1949년 건국 이후 최대 규모였다. 재정 적자가 증가한 이유는 베트남과의 전쟁에 막대한 국방 예산이 투입되었고, 시설 투자, 농민을 위한 농산품 가격의 인상, 임금 인상 등으로 인해 재정 지출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결국 1979년 중국 정부의 재정 상황에서 전쟁의 장기화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인민해방군의 공격으로 가장 피해를 본 것은 베트남 인민들이었다. 물론 일부 베트남 소수민족 거주 지역에서는 인민해방군이 식량을 나눠주기도 하고 선전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경 도시에 대다수 베트남 인민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철수 과정에서 추가적인 인명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베트남 민병대원 중에는 군복을 입지 않고 매복하고 있다가 철수하는 인민해방군을 공격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고한 베트남 인민들이 군인으로 오해 받아 목숨을 잃기도 했다. 3단계 전투에서는 전쟁이 가지고 있는 잔인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킹 천의 언급처럼 “의심할 여지없이 베트남 인민이 중국인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정전협상의 개최와 결렬

1979년 3월 6일 베트남 외교부 대변인은 중국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하고, 양국이 영토 분계선을 존중한 이후에 차관급 회담을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1979년 3월 16일 중국 정부는 철군 완료 후 양국 차관급 회담의 조기 개최를 제안했으나, 베트남은 철군이 완료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회담 개최를 거부했다. 결국 철군 후 한 달이 지난 1979년 4월 18일부터 5월 18일까지 베트남 하노이에서 1차 회담이 한 달간 개최되었다. 2차 회담은 1979년 6월 28일부터 1980년 3월 6일까지 베이징에서 약 8개월간 개최되었다.

정전 협상에서 베트남 대표단은 중국 군대가 베트남 공격은 자위반격이 아닌 ‘침략전쟁’이라고 비판했다. 베트남 대표단은 3가지 해결방안을 제시하였다. 첫째, 1979년 2월 17일 이전 상황으로 양국 군대가 3-5km 후퇴해 비무장지대를 조성한다. 둘째, 양국간 정상 관계를 회복한다. 셋째, 프랑스와 청이 체결한 187년, 1895년 조약에 근거해 영토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이 경우 시사, 난사 군도의 영유권은 베트남이 보유하게 된다.

중국은 8가지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첫째, 평화공존 5원칙에 근거해 양국간 우호관계를 회복한다. 둘째, 어느 일방도 인도차이나 및 동남아 지역에서 패권을 추구하지 않고, 해외 주둔군을 두지 않는다. 셋째, 중-프랑스 국경 협상에 의거해 영토 문제를 해결한다. 넷째, 국제해양법 원칙에 근거해, 북부만 및 기타해역의 경제수역 및 대륙붕 문제를 해결한다. 다섯째, 난사, 시사 군도는 중국 영토의 일부분이며, 베트남은 중국의 주권을 존중해야 한다. 여섯째, 변경 지역 주민들에 대한 우호적인 정책을 실시한다. 일곱째, 베트남은 중국 영내의 베트남 국민들을 받아들인다. 여덟째, 양국간 철도, 항공, 우편을 재개한다.

정전 협상에서 가장 큰 논란이 된 것은 캄보디아 문제였다. 중국은 캄보디아의 베트남 군대 철군이라는 전제 조건의 양보 없이 양국간 관계 개선은 어렵다고 보았다. 또한 베트남의 3원칙은 패권주의라는 문제의 본질을 회피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베트남은 중국이 캄보디아 문제에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중국의 8개항 원칙은 근거도 부족할 뿐더러 베트남에 대한 패권주의 정책의 일환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두 차례에 걸친 장기간의 정전 협상은 어떤 합의 사항도 도출하지 못했다. 1980년 3월 6일 중국은 베트남이 아무런 성의 없이 회담에 임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일방적으로 협상의 종결을 선언했다. 베트남은 1980년부터 1987년까지 17차례 3차 협상의 재개를 요청하였고, 중국은 이를 거부했다. 정전 협상이 상관없이 종결됨에 따라 중국-베트남 국경의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베트남은 1979년 3월 5일 베트남 전역에 징병령을 선포했다. 이에 따라 18-45세의 남성, 18-35세의 여성중에 자격에 부합한 사람들은 민병 유격대 및 자위대에 참가해야 했다. 동시에 북부 국경 지역에 베트남 주둔군과 무기가 대폭 보강되었다. 중국은 베트남과의 국경 지역에 15개 사단이 주둔하였다. 중국은 베트남이 도발을 중지하지 않을 경우 제2의 교훈 전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압박을 가했다. 결국 1979년 이래 중국-베트남 국경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교전이 지속되었다. 1981년, 1983년, 1984년의 경우 수십 명에서 수 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베트남 자료에 의하면 1979년부터 1984년까지 7,50차례의 무력 충돌이 있었다. 남중국해에서도 긴장은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