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소련 영토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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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근대의 네르친스크 조약, 아이군 조약 그리고 베이징 조약]]]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서 영토갈등이 발생한 시초는 17세기 중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는 1582년 이반 4세 때 우랄산맥 동쪽지대인 시베리아 정벌에 성공한 이후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미 동부 시베리아와 프리아무르 지역(Амур, 중국어로는 黑龍江, 헤이룽 강) 방면까지 진출하였다. 네르친스크와 알바진 등지에 러시아 군대의 성과 요새가 구축된 것이다. 이에 청나라는 러시아의 영토확장을 견제하면서 러시아가 요구하는 통상을 원활하게 하고자 1689년 양국 간 간 최초의 국경협정인 네르친스크(Nerchinsk) 조약을 체결하였다.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청나라는 변방 부족들의 할거지(割據地)를 자국 영토로 복속시키는 성과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네르친스크 조약은 이후 170년 동안 자바이칼 지역과 프리아무르 지역에 대한 러시아와 중국 관계를 규정하는 중요한 문서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엽 청나라가 쇠퇴하게 되자 러시아는 네르친스크 조약을 대체할 아이훈 조약(1858년)과 베이징 조약(1860년) 등을 연달아 체결하면서 프리아무르 지역과 우수리강 동안(東岸)연해주 일대를 러시아 영토로 복속시켰다. 이로써 오늘날 러시아와 중국 간의 근대적 영토 경계, 즉 국경획정의 밑그림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베이징 조약이 체결된 지 100년이 지난 1960년대 들어서 중국은 러시아(당시에는 소련) 측에 베이징 조약에 따른 국경획정과 그 설정 과정 국경을 확정하는 절차는 국경획정(delimitation)과 국경설정(demarcation) 두 단계로 나뉜다. 국제법상 국경획정이란 인접국 간 합의에 따라 국경선의 위치와 방향을 정하는 것이며 이러한 과정은 지도상에 국경선통과 지점 및 위치를 지리적으로 상세히 묘사함으로써 관련국 간 조약에 구체화된다. 이와 관련, 지도는 조약의 주요 일부로 조약문에 첨부되며 국경선의 위치에 관한 확실한 입증자료 역할을 하게 된다. 국경획정 후 국경표지작업이 이루어진다. 국제법상 국경표지작업은 국경획정 조약에 따라 공동위원회가 시행하며 이 공동위원회는 국경표지(표주, 철조망 등)를 설치함으로써 현장에 국경선 통과 지점을 확정, 표시한다. 이 과정을 국경설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국경설정은 대체로 일정 기간 발생한 지면의 변화 및 하천의 하상변화 등과 관련하여 이미 설정된 지역의 국경을 더욱 확실히 하는 작업도 포함된다.

[[[카라한 선언]]] 1919년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외교관 레프 카라한은 러시아 황제에 의한 중국 내 모든 영토 점령을 일방적 및 무조건적으로 포기한다는 소련 정부의 입장을 발표했다. 그러나 카라한 선언 당시 러시아가 포기한 영토의 상당 부분은 새로 수립된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USSR)의 통제를 벗어난 반혁명 세력의 지배 하에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라한 선언은 철회되었고 때이른 축배를 들었던 중국의 분노를 샀다.

[[[한국전쟁]]] 중국과 소련의 관계에서 균열을 보이게 된 사건 중 하나는 한국전의 경험이었다. 한국전은 북-중-소 3국의 군사적인 협력 속에 전개되어 실제 이들 국가의 동맹관계를 공고화시킴과 동시에 전쟁이 소모적으로 장기화되면서 이들 국가의 관계에 점차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한국전 발발 초기 6개월의 기간은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대결이라는 냉전을 형성, 극대화 시켰으나 나머지 2년 6개월간의 전쟁은 교전과 정전협성(1951.7-1953.7)으로 특징지어진다. 당초 예상과 달리 미국의 신속한 개입으로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이들 북-중-소 3국은 각기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대응하며 불협화음을 내기 시작하였다. 공산진영의 협력관계가 점차 균열을 보이게 된 데는 무엇보다 이 전쟁의 총지휘권을 행사한 소련의 이기적이고 극단적인 실용주의적인 정책노선이 그 중심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당초 소련은 한국전 개시이전부터 줄곧 미국과 군사대결을 피하여 이 전쟁에 개입되지 않았음을 알리는데 주력하였다. 즉 소련은 배후에서 전쟁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총 지휘하면서도 군대파견과 같은 군수지원에서는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소련의 이기적인 태도는 전세가 공산 측에 불리하거나 반대로 유리하게 진행됨에 따라 약간의 변화를 보였다. 물론 이런 식의 변화도 소련이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는 전제아래에서였다. 소련은 전황이 공산 측에 불리해지면서 더욱 이기적인 방식으로 대응하여 붕괴직전의 북한을 직접 개입이 아닌 중국에 군대파견의 권유로 대신하였고 이것이 여의치 않자 북한정권 자체를 포기하는 망명정부 수립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중화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소련은 한반도에 우호정권의 손실을 감수하고자 하는 소극적인 태도를 버리고 속전을 독려하는 등 이전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후 정전협상이 계속해서 이루어졌으나 당시 공산 측의 정전협상 시도는 다분히 미국의 진격을 막고 중국과 북한군의 전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져들면서 직접 전투에 참여하고 있던 중국은 소련과 달리 정전협상에 열의를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련의 스탈린은 속전을 주장하여 양국은 이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소련 측 자료에 의하면 북한과 중국은 1952년까지 정전협상을 하길 원했으나 소련은 속전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소련의 이런 태도는 전쟁이 교착상태에서 장기화되는 상황이 자국에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직접개입이 없는 상태에서 전쟁의 장기화는 희생 없이 부수적인 이득을 소련에게 가져다주었다. 우선 미국을 한국전에 묶어두어 유럽의 문제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경제적인 자원을 고갈시켰고, 동시에 중국과 미국 간의 적대감을 상승시켜 중국을 확실히 소련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결국 스탈린의 전쟁 연장은 직접 개입과 대결을 피하는 범위에서 이익을 증진시키려는 이기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중국과 북한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소련의 극단적인 실용주의 노선은 이들 삼국간의 마찰과 불협화음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스탈린 사후 소련의 변화]]]

요시프 스탈린의 뒤를 이어 소련의 최고 지도자가 된 니키타 후루쇼프가 1956년 스탈린에 대한 격하(格下)를 본격화하고, 미국 등 자유 진영과의 평화적인 공존 가능성을 선언하자, 중국은 이를 ‘수정주의’(修正主義)로 규정하며 반발했다. 1950년대 이래 6.25 전쟁, 대만해협 분쟁 등으로 미국과 직접적인 군사 대립을 겪었던 중국에게, 소련의 대미(對美) 정책 전환은 자신들에 대한 전략적인 배신, 혹은 포위로 비춰졌던 것이다. 이러한 수정주의 논쟁을 계기로, 중소 양국의 갈등은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소련은 1958년 대만과의 진먼다오 포격전을 비롯하여 중국이 개입한 주요 군사 분쟁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1960년에 이르러서는 중국에 파견했던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귀국시키고, 중국과 체결했던 부문별 협력 사업들까지 일방적으로 중단했다. 이처럼 같은 공산 진영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소련은 1960년대 이래 사실상의 적대 관계로 돌아서게 되었다.

[[[분쟁 배경 종합]]]

이와 같은 배경을 바탕으로 역사적 진화와 불평등 조약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중러 영토분쟁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양국의 국경은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명확하게 확정된 바가 없었고 영토분쟁은 주로 19세기에 양국이 체결한 일련의 ‘불평등 조약’에 기인한 것이었다. 중국은 이러한 조약이 불평등하며 그에 따른 러시아의 중국 영토 병합이 불법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분쟁이 심화된 가장 큰 원인은 1960년대의 양국관계 악화였다. 1960년대의 첫 번째 국경 분쟁 이후 국경분쟁이 점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양국 갈등의 주요 원인으로 자리 잡았다.

관련 국가들의 이해관계

[[[중국]]] 중국의 관점에서 중국과 소련의 대립은 소련이 1956년 소련공산당 제 20차 대회에서 스탈린 격하와 평화공존론을 채택하여 사회주의권의 결속을 와해시키고 제국주의진영과의 투쟁을 포기한데서 비롯되었다. 또한 1960년대 중소대립은 중국이 더 이상 소련의 종속적인 관계에 머무르지 않겠다는 의도 속에서 자주적인 입장을 견지하려는 시도가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이것은 중소관계가 급격히 악화된 1958-59년의 회담에서 마오쩌둥이 취한 태도에서 엿볼 수 있다. 예컨대 후르시초프는 중국의 영역에 기지국 설치를 요청했을 때 중국이 협력할 것이라고 회고했으나 마오쩌둥은 돌연 소련대사 유딘과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을 거절하고 후르시초프를 중국에 오게 했다. 회담에서 후르시초프는 기지국과 다른 군사적인 문제를 정중하게 설명했으나 마오쩌둥은 담배를 싫어하는 후르시초프에게 담배를 피우며 “당신은 오래 얘기했지만 핵심을 찌르지 못했다”는 식으로 말하며 조롱하기도 하였다. 또한 후르시초프가 미국의 7함대와 경쟁하기위해 공통함대를 건설할 희망을 설명했을 때 마오쩌둥은 그의 큰 팔로 소파를 세게 치고 “내가 당신에게 공통함대가 무엇인지 물었는데 당신은 아직도 나에게 대답을 하지 않았다”며 회담 내내 무례한 태도를 취했다. 이러한 마오쩌둥의 태도가 중소대립의 원인이었다기보다는 이전의 소련과 종속적인 관계를 탈피하고자 하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중국은 스탈린의 죽음과 이후 소련의 변화를 소련과의 비대칭적인 권력관계를 수정할 기회로 삼았다. 특히 중국의 마오쩌둥에게 스탈린의 죽음은 후원자의 상실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스탈린을 대신할 세계공산주의 진영의 최고지도자로서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 사후 소련의 새 지도부에 비해 자신이 공산주의 지도자로서 이론적으로나 투쟁의 경험에서나 앞서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후 소련의 탈스탈린화의 움직임도 이런 마오쩌둥의 인식에서 받아들여졌다.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 20차 대회에서 행한 탈스탈린화가 마오쩌둥에게는 과거 스탈린에 대한 마오쩌둥의 불만과 비판을 소련지도부도 인정한 것으로 간주했을 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마오쩌둥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1958년 7-8월의 정상회담에서 마오쩌둥은 중국의 위상을 고양시키려는 입장에서 소련의 제의가 중국의 종속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우려 속에 후르시초프의 제안에 대해 끊임없이 도발적인 언사로 대응했다.

[[[소련]]] 소련의 관점에서는 1958년 중국이 소련의 대외정책을 비합리적으로 비판하고 원자탄개발 지원 등 지나친 요구를 하여 중국과 소련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고 본다. 소련의 후르시초프는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 20차 대회를 통해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진영과의 평화공존을 제창하고, 사회주의국가 건설의 다양성 문제를 제기하였으며, 스탈린 개인숭배를 비판하였다. 당시 소련공산당은 ‘평화공존론’, ‘전쟁가피론’, ‘사회주의 이행의 다원론’등을 주장하였다. 중국은 이 중에서 스탈린 비판문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는데 중국과 소련간의 스탈린 평가에 대한 차이는 국제공산주의 운동 과정에서 자본주의 진영과의 일대 대결이 불가피한가, 아니면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것이 가능한가를 둘러싼 판단문제로 발전하였다. 당시 중국은 신생 중국과 미국과의 충돌 가능성의 우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권 국가들을 확실하게 자국의 우군으로 묶어둘 필요가 있어, ‘제국주의와의 일대 결전’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강력하게 견지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1959년 제 21차 당대회 결의문에서도 “세계에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 이전, 세계의 일부에서 자본주의가 계속 존재하고 있는 동안에도 인료사회에서 세계전쟁을 없앨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하면서 자본주의 진영과의 평화공존론, 전쟁가피론을 거듭 확인하였다.

분쟁지역의 중요성

헤이샤쯔 섬(볼쇼이 우수리스키섬)에서 시작되는 푸위안 삼각주는 러시아 극동지구와 일본과 직선 거리로 가장 가깝고 북미대륙과도 최단 거리에 있어 대외무역의 교두보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인근 헤이룽강의 강심이 깊어 5000∼1만t급 선박의 접안이 가능할 정도로 항구로서의 입지 조건도 훌륭할 뿐 아니라 러시아의 극동고속도로와 동시베리아철도가 근접해 있어 유럽∼아시아∼미 대륙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글의 내용과 아래의 그림의 출처.

전개과정

[[[중국공산당과 소련(공산당 창당~1950년)]]] 중국과 소련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관련되어 있어 사회주의 종주국으로서 소련과 이들의 후원 속에서 체제를 유지하는 신생공산중국의 관계는 전형적으로 강대국과 약소국 간의 관계로 출발했다. 중소의 협력관계는 중국 공산당이 창설된 시기부터 거슬러 올라가나 1950년 2월 14일 중소우호협력조약이 체결되기 이전가지 공산중국과 소련과의 관계는 소원했다. 당시 소련은 미국과 협력 속에 국익을 도모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에 제한적인 지지뿐 아니라 때로는 그들에 치명적인 지시조차 서슴치 않았다. 이는 미국과 제 2차 세계대전의 수행에 이어 전후 질서재편 과정에서도 계속 공조체제를 구축하고 있던 소련이 공산당과 국민당으로부터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하려는 노력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소련이 중국공산당에 대해 소극적인 지지를 보낸 것은 국공내전시기 중국공산당의 군사적 시도가 미국을 개입시켜 미소갈등이 야기되는 것을 우려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능력을 과소 평가한데서도 연유된다. 즉 스탈린은 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승리할 것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계속 관계유지를 통해 중국에서의 목적을 달성하려했다. 당시 소련의 목적은 만주, 신장, 몽고 등을 통제하거나 서구의 영향력이 소련의 국경지대까지 확대되는 것을 막는 데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1949년 중국공산당의 승리가 확실시 되면서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스탈린은 공산당에 대한 소극적인 전의 정책을 포기하고 있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미국과 중국에 대한 신뢰 문제로 여전히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당시 소련의 동아시아정책의 주요 목적은 중국내전에 미국의 개입을 막는 것으로 소련과 중국공산당의 관계가 개선되어도 변하지 않는 근본적인 것이었다. 이와 함께 소련은 독립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중국공산당이 소련에 대해 반기를 들고 독자노선을 걷고 있던 유고와 유사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신생중국에 대한 신뢰가 높지 않았다.

[[[사회주의 종주국과 신생공산중국의 우호관계(1949년~1956년)]]] 모택동은 국공내전시기 소련이 미진한 지지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전후 소련과 관계 개선을 시도하였다. 모택동은 1949년 1월 동북지역 점령 후 모스크바 방문을 제안하였고 이에 스탈린은 소련의 정치국원 미꼬안(A. Mikoyan)을 중국에 파견하였다. 1949년 3월 제 7차 중국공산당 회의에서 모택동은 신 중국의 외교관계에서 소련에 대해 일방에 기댐(lean to one side)을 결정하고 중국 공산당 대표를 소련에 파견, 전황의 보고와 사회주의 건설에 조언과 원조를 구하였다. 이에 소련의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의 능력을 과소 평가했던 전의 정책을 포기하는 한편 류소기와의 면담에서 이제까지 소련의 과오를 인정, 사과함과 동시에 향후 모든 관계에서 원조를 보장하였다. 이 같은 양국의 움직임은 1950년 2월 14일 중소우호동맹 및 상호원조조약의 체결로 귀결되었다.

중소양국은 1950년 2월 14일 30년간의 우호동맹 및 상호원조 조약, 중국에 공여 될 장기 차관 및 여타 협정들의 조인과 함께 수개월이 지난 6월 한국전의 발발로 양국의 우호관계가 강화되었다. 이 시기 중소의 협력관계는 냉전의 상황에서 서로의 원조와 지지를 필요로 유지됐으며 특히 신생중국은 소련의 원조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었다. 1954-57년 시기까지 소련의 새로운 지도자들은 권력 장악을 위해 소련 국내 뿐 아니라 사회주의진영 내에서도 그들의 지위구축을 위해 중국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필요성이 있어 이들과 관계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중국도 소련의 모델을 표방 1차 5개년 계획을 수행하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소련의 자원뿐만 아니라 원조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어서 양국의 관계는 긴밀해졌다.

따라서 당시 양국의 관계는 소련에 대한 중국의 의존을 의미하는 불균등한 세력 간의 동맹관계로 전체적으로 보아 1949년에서 1956년 사이 양국의 관계는 우호와 협력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일방적인 의존관계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부당한 대우와 내정간섭을 야기하고 이것은 이후 양국 관계변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행사하게 한다.

[[[ 중국-소련 분쟁의 시작(1956년~1968년)]]] 중국과 소련의 분쟁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 20차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소련공산당 서기장 후르시초프는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진영과의 평화공존을 제창하고, 사회주의 국가 건설의 다양성 문제를 제기하였으며, 스탈린 개인숭배를 비판하였다. 당시 소련공산당은 ‘평화공존론’, ‘전쟁가피론’, ‘사회주의 이행의 다원론’ 등을 주장하였다. 중국과 소련 간의 이론논쟁은 스탈린 비판문제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마오쩌둥은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개인숭배 비판이 중국공산당 내에서 권력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후 중국은 흐루시초프가 제창한 스탈린에 대한 격하나 자유 진영과의 평화적인 공존가능성을 ‘수정주의’라 규정하며 반발했다.

중국과 소련 간 전쟁가피론과 평화공존론에 대한 시각 차이는 구체적인 이슈에 대한 대처에 있어서도 상호 충돌하는 것을 불가피하게 했다. 1958년 8월 흐루시초프와 마리노코프스키 국방상이 중국을 함께 방문하여 중국과 소련 간 태평양 상의 ‘공동방위체제’를 제안하고, 중국이 동중국해의 해상 군사능력의 증대를 위해 연합 함대를 만들면 소련이 도와주는 것으로 하는 협정에 양국이 공동으로 서명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타이완해협에서 위기가 발생하자 중국은 소련과의 사전 협의도 없이 먼저 타이완의 진먼타오(金門島)에 대한 포격을 감행했고, 미국은 제 7함대를 출동시켜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에 당시 미국과 평화공존을 추진하고 있던 소련은 중국을 지원하여 미국과 군사적으로 대치한다는 것은 자국의 이익에 배치도니다고 판단하고, 미국과의 정면충돌을 피하기 위해 오히려 중국을 비난했고, 중국은 이에 크게 반발하였다. 결국 1959년 6월 소련은 국방 신기술에 대한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중국에 원자폭탄의 모형과 기술을 제공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1959년 11월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련공산당 제 21차 대회에 중국 대표로 파견된 덩샤오핑은 소련의 평화공존론을 다시 한 번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이에 1960년 7월 소련은 중국의 국방현대화를 위해 지원하고 있던 기술고문단을 철수할 것을 통보하였다. 이어 1961년 10월 소련공산당 제 22차 대회에서는 중국과 소련의 갈등이 한층 확대되었는데, 당시 중국 대표로 참석했던 저우언라이는 좃련과 보조를 맞추던 유고슬라비아를 맹비난했고, 소련은 중국의 입장에 동조·합류한 알바니아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후 1963년 8월에는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영·소 3국이 부분적 핵실험 금지조약을 체결하여 중국의 핵개발의지를 제한하자, 중국은 1963년 9월 우루무치와 쿨자에 설치된 소련 영사관을 폐쇄시키기까지 하였다.

이후 중국과 소련은 베트남 전쟁의 지원과 관련해서도 한차례 논쟁이 있었다. 북베트남은 중국의 파병과는 별개로 소련에게 전투기를 비롯한 안보물자의 지원과 소련군의 파병을 요청했는데, 소련은 이를 수락하고 중국에게 소련군 4천여 명이 중국을 통과하는 것과 소련 공군기의 중국 남서부 비행장 사용 및 중국영공 통항권을 중국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중·소 분쟁에서 소련과 이념상으로는 물론이고 안보상으로도 대립하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자국의 영토를 가로질러 소련군이 통과하고, 소련의 군용 항공기가 중국의 군사시설인 비행장을 이용하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시 중국은 이것을 중국에 대한 소련의 술수라고 비판하며 외면했다.

1964년 중국과 소련이 영토협상을 시작하기도 했다. 소련은 일정부분 영토 할양을 감수하더라도 국경설정을 명확하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중국은 하바롭스크 인근 아무르 강과 우수리 강이 만나는 지점에 놓인 두 개의 큰 섬(볼쇼이우스리스크 섬과 타라바로프 섬)과 작은 도서들에 대한 과도한 영유권을 주장했다. 볼쇼이우스리스크 섬(о́стров Большо́й Уссури́йский)은 중국에서 헤이샤쯔 섬(黑瞎子島)이라고 하며 아무르강과 우수리 강의 합류지점에 위치하는 면적 327 km²의 섬이다. 주변에 타라바로프 섬(о́стровТараба́ров)을 비롯한 90여 개의 작은 섬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러시아의 동부 하바롭스크에 인접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원래 중국 령에 속하던 섬을 1929년 소련군이 점령한 이후 줄곧 양국 간 영토분쟁의 원인으로 작용해왔다.

중·소분쟁은 1964년 10월, 분쟁의 시발점이었던 후르시초프가 실각하고, 브레즈네프가 정권을 잡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특히 1968년 8월 체코의 자유화운동을 진압하고 소련은 사회주의를 보위하기 위해 공산주의는 국제주의적 책무를 지녀야한다는 주장과 함께, 제5차 폴란드 공산당 대회에 소위 ‘제한주권론’을 제출하였는데, 이것은 소련이 다른 공산주의 국가에 대하여 무력간섭을 할 권리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브레즈네프가 집권하면서 중국은 양국 관계가 개선되길 기대했지만 소련의 체코 침공 사건이후 곧바돌 대립국면으로 되돌아가면서 이러한 기대는 수포로 돌아갔다. 중국공산당은 이를 “후르시초프 없는 후르시초프주의”라고 비난하였다.

[[[전바오다오 사건과 분쟁(1969년)]]] 소련은 1965년부터 4년 동안, 중국과의 국경 지대에 사단급 부대의 수를 13개에서 21개로 대폭 확충했고, 이에 맞서 중국도 국경수비대 소속의 병력을 빈번히 분쟁 대상 지역들로 투입해 소련군과 크고 작은 충돌을 일으켰다. 1968년 8월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적 자유화, 즉 ‘프라하의 봄’을 무력 침공으로 진압했다. 이 사건은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 공산정권의 지도부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소련의 선제공격에 의한 전쟁 가능성이 실재할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높아졌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에 중국은 소련과의 국경 분쟁이 전면 전쟁으로 확대, 악화될 가능성에 더욱 주목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중국은 불가피할 것으로 여겨지는 소련과의 무력 대결에서 스스로의 정치적 의지를 과시하고, 군사적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방안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중국은 소련에 대한 제한적․ 기습적인 국경 전투를 감행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1969년 1∼2월 사이에 이에 필요한 준비를 본격화했다. 대상은 우수리 강 유역의 전바오다오(珍寶島. 소련명 ‘다만스키 섬’)였다. 마침내 3월 2일 중국군은 전바오다오에서 국경을 순찰하던 소련군에 습격을 가하였다. 당시 중국은 전바오다오에 대대급 병력을 투입했는데, 이는 소대 규모에 불과했던 소련의 국경수비대보다 수적으로 우세했다. 그 결과 중국군은 소련군에 전사 31명, 부상 14명 등의 피해를 입혔다. 중국은 전바오다오에서 소련군에 가한 습격을 ‘소련 병사들이 국경에서 중국 병사들을 상대로 벌였던 다수의 유혈사건에 대한 반격, 응징’이라고 주장, 선전했다. 이 전투는 중국 공산정권이 수립된 1949년 이후, 중소 양국 사이에서 처음 발생한 정규전이었다는 점에서 큰 충격을 주었다. 뒤이어 중국군은 3월 15일에 연대급 규모의 보병과 이들을 지원할 포병, 박격포 부대를 추가 투입했다. 그러나 탱크, 장갑차, 다연장 로켓포, 항공기 등의 우월한 화력을 앞세운 소련군의 공격으로 중국군은 1,000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낸 채 전바오다오에서 패퇴했다. 이후에도 국은 수개월 동안 군사적 대치 상태를 지속하며 충돌했는데, 특히 8월 13일에는 중국 서부 신장 자치구의 한 접경지대에서 중소 양국의 병력이 다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도 소련군은 수십대의 탱크와 장갑차, 헬기 등이 제공하는 화력 우위를 바탕으로 보병들의 소총과 기관총이 고작이었던 중국의 국경수비 부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 결국 중국과 소련은 1969년 9월을 기점으로 국경문제의 해결을 위한 외교적인 논의에 착수했으며, 국경의 현상유지 및 무력충돌 방지 등의 필요성에 동의하였다. 이후 중국은 냉전이 종식된 2004년에야 아무르 강, 우수리 강 유역을 비롯한 러시아와의 국경 지대에서의 경계를 확정짓는 협정을 체결하여 그동안의 국경 분쟁을 종결했다. 이로써 양국은 국경 분쟁으로 인한 군사적 충돌이 대규모의 전쟁으로 확대, 악화될 위험성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중국은 과거 한반도, 인도에서의 전쟁처럼 영토 주변에서 제한적인 수준의 군사 대결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과시하고, 이를 토대로 소련과의 정치 ․ 이념적 대립에서도 자국의 입장을 관철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러한 중국의 의도는 화력, 기동력 등에서 보다 우세한 군사력을 동원한 소련에 의해 분쇄되고 말았다. 요컨대 국경분쟁에서 비롯된 1969년 소련과의 무력 대결은 명백히 중국의 군사적 실패였던 것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중소 국경합의]]] 양국의 협의는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지 못 한 채 1979년 까지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며 이어지다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중단되었다. 이후에 중국은 관계 정상화에 따른 세 가지 문제점을 강조하는 것 말고는 국경지역의 상태 변화에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중국이 제기한 세 가지 문제는 중국 국경과 몽골에 배치된 소련의 대규모 병력,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에 대한 소련의 지지였다. 국경 문제에 대한 협의의 성공은 전반적인 중소 관계 개선에 달려있었던 것이다. 베어섬에 대한 소련의 출입봉쇄가 1976에 철회되면서 양국관계 정상화를 위한 전환점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양자 논의는 1979년에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이후 중단된 상태였고 중국은 계속해서 앞서 언급한 세 가지 문제 의 해결을 양국 관계 정상화의 조건으로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돌파구가 될 만한 해결책을 제시한 이는 고르바초프였다. 그는 일종의 해결사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전략은 세계무대에서 소련이 지닌 입지의 약화와 국익의 침해에 대한 우려에 기인한 것이었다. 1980년대 초반 미국과의 경쟁 심화로 인해 소련은 국가 유지비용을 상승시킨 경제 위기에 당면하게 되었다. 소련은 미국과의 군비경쟁과 중국과의 국경에 배치한 60만 병사의 유지비용을 부담할 여력이 없었다. 고르바초프는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통해 소련이 지닌 입지가 더 이상 추락하지 않도록 하고자 했던 것이다. 러시아는 교착상태에 빠진 중국과의 국경분쟁에 협력적인 접근법을 적용했고 이 분쟁에 대한 합의는 탈베그 원칙 국제법 규칙의 하나인 "양국(兩國) 사이에 하천(河川)이 흐르고 그 위의 국경선 획정(劃定)을 위한 양국 간의 특별 합의나 관습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 이 하천에 항행이 가능하면 가항로(可航路)의 중앙선을, 항행이 불가능하면 하천의 양쪽 기슭으로부터의 중앙선에 국경을 획정한다."는 규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1986년 블라디보스토크 연설에서 고르바초프는 분쟁 중인 영토의 상당 부분을 중국에 양보하겠다는 의미를 담은 “공식적 국경은 간천을 따라 규정될 수 있다”라는 발언을 통해 러시아의 방향전환을 선언했다. 이에 대해 중국이 발 빠르게 대응하면서 국경에 관한 논의가 수 개월 내에 재개되었다. 양측 모두 탈베그 원칙과 과거 조약의 공통 분모로부터의 합의를 모색하였고 상당한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 이 영토분쟁의 해결은 곧 러시아가 중국측 간천의 수 백 개에 이르는 하천섬에 대한 권리 (베어섬을 제외하고)를 포기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그 후에 이어진 중러관계의 ‘긍정적 호혜주의’의 시발점이 되었다. 과거에 카라한 (그리고 레닌)은 러시아가 침탈한 영토를 중국에 반환하겠다는 약속을 번복함으로써 중국으로부터 빈축을 샀지만 고르바초프가 택한 행보는 이와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양국관계의 진전은 1988년 10월의 회담에서도 이어졌다. 하천이 양국국경 동부의 대부분을 구성하기 때문에 탈베그 원칙을 수용함으로써 국경선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아무르와 우수리 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헤이샤쯔섬 (볼쇼이 우수리스키섬)이 난제로 떠올랐다. 양측은 파미르 산을 포함한 서쪽 국경에 대한 논의에 합의하고 이 지역에 대한 공동 연구에 착수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중국과 러시아가 1964년에 도달했던 합의를 다시 불러냈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은 국경 확정에 대한 기본적인 방침을 대대적으로 수정했는데 그 내용은 특정 지역과 관련하여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모든 시도가 실패했을 때에는 그 문제는 보류해 둠으로써 다른 지역에 대한 협의를 방해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보다 현명한 후세대’가 현재에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고안해낼 수도 있다는 가정에 기반한 방침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해결이 어려운 문제가 베어섬에 대한 영유권에서 발생했다. 소련은 이 문제가 협상 가능하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고 중국은 소련이 ‘원칙적으로는’ 베어섬을 중국에 반환해야 한다며 유연한 반응을 보였다.

중국과 러시아는 ‘불일치에 대한 합의.’ ‘비협력에 대한 공조’의 방법을 체득하는 과정에서 가끔은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를 한 켠에 미루어 둘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1987년 2월 양국은 일단 국경의 동부에 집중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양측의 협의가 1964년의 합의에 기초하여 재개될 것임을 암시했다. 1987년 8월, 중국과 러시아는 ‘기존의 관련 조약’에 의거하여 동부의 국경에 대한 분쟁을 마무리하기로 합의한다. 그러나 중국이 모든 분쟁 지역에 대한 총체적인 합의를 선호하여 국경 서부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높아졌던 반면, 소련은 각 지역별로 접근하는 방식을 원했다. 1989년 5월, 중국과 소련은 고르바초프의 베이징 방문 기간 동안 양국관계를 정상화하였다. 정상회담이 개최되기 전에 주요 영토분쟁의 해결을 향한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졌다. 양국은 국경 동부의 대부분에 대한 합의에 도달하였고 중앙 아시아 지역에 대한 협의를 시작했다. 4 번째 협의가 이루어졌던 1989년 10월에 중국은 모든 영토분쟁의 해결이라는 이전에 요구를 철회했는데 이는 첸치천 부총리의 1987년 발언과는 정 반대되는 것이었다.

대신 중국은 지역에 특정되는 조약을 체결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중국은 분쟁 대상이 되었던 두 개의 섬(타라바로프 섬과 볼쇼이우수리스크 섬)을 제외시키기 위한 합의에 서명하기로 합의했다. 중소 관계의 개선을 가져올 국경 동부의 대부분에 대한 양측의 합의는 매우 의미 깊은 것이었다. 이와 같은 중국측의 타협으로 합의가 도출되는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될 수 있었다. 1991년 5월 16일 첸치천 중국 부총리와 알렉산더 베스메르트니히 소련 외무 장관은 동부 국경에 대한 국경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 규정된 동부 국경의 대부분은 아무르강, 우수리강, 아르군강의 본류 또는 중간선을 가로지른다. 1991년 12월 26일 소련 최고 소비에트의 142-H선언 이후 소련의 붕괴가 시작되었지만 이는 앞서 언급한 협정의 발효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동부 국경에 대한 실질적인 경계확정은 1993년에 시작되었다. 분쟁 중인 섬의 할당 등 세부적인 경계 확정은 1997년 11월에 마무리 되었다. 분쟁 대상이었던 영토에 대한 권리는 양국에 거의 동등하게 배분되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중국과 러시아는 분쟁 영토의 1,000 평방 킬로미터 가량을 분할하였고 최종적인 경계 확정에는 중국과 그 이웃국가 간에 체결된 국경 관련 협정 중 가장 상세한 협정을 적용하기로 하였다. 소련의 붕괴 이후 중앙 아시아 국가들이 중-소 국경의 서부에 대한 분쟁의 대부분을 이어 받았다. 이 지역에 대한 합의는 1994년 전반기에 있었던 실무진 회담을 통해 도출되었다. 9월에 첸치천과 안드레이 코지레프는 서부 국경협정에 서명했다. 이 지역에 대한 경계확정은 두 개의 경계표지 설치와 함께 1997년에 마무리 되었다.

[[[2005년 중·러조약]]] 1997년 11월 국경 협정 (1991년 5월에 체결된 협정)의 시행이 발표되면서 중국과 러시아의 동부국경 문제의 98퍼센트가 해결되었다. 이 협정에서 제외된 두 지역에 위치한 세 개 섬 (볼쇼이 우수리스키섬 (헤이샤쯔섬), 타라바로프섬 (인롱섬), 아르군강의 볼쇼이 섬)의 반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었으나 이 또한2003년 10월 14일에 개최된 중-러 정상회담을 통해 해결되었다. 양국의 영토 문제가 드디어 해결되었음을 전세계에 알릴 수 있게 된 중국과 러시아는 매우 기뻐했다. 1991년 동부국경 협정에서 제외된 두 지역에 대한 분쟁은 199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푸틴 대통령의 방중기간 동안 푸틴과 장쩌민은 중국과 러시아가 ‘(해당 지역을) 동등하게 나누기로’ 합의했음을 명시한 동부 국경에 대한 추가적 국경협정에 서명했다. 2005년 41년을 끌어 온 중국과 러시아의 영토분쟁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결된 새로운 조약을 통해 일단락 됐다. 중국과 러시아는 6월 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외무장관 회담에서 경계확정과 함께 전체 중소국경이 합의, 규정, 및 합법화함으로써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의 우호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2008년 7월 21일 베이징에서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 양제츠(楊潔篪) 중국 외교부장이 아무르 강 국경설정에 관한 ‘러·중 동부국경 추가 서술-협의서’에 서명했다. 양국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볼쇼이우스리스크 섬을 절반씩 나누기로 합의함으로써 4,300km에 이르는 양국 간 동부국경 전체에 대한 분쟁을 마무리한 것이다. 이로써 2004년 10월 14일의 러시아연방과 중화인민공화국 간 동부국경 추가협정에 따라 재설정된 국경 추가 서술-협의서는 2008년 8월 초 베이징에서 교환될 수 있었다. 그리고 2008년 10월 14일 양국 공식 대표단이 참가한 가운데 하바롭스크 인근에 국경표주를 설치함으로써 양국 간 국경설정이 완료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