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독수

ChineseWiki
권혁재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12월 27일 (목) 10:43 판 (새 문서: 400픽셀|섬네일|오른쪽| =='''요약'''== 중국공산당 초대 중앙위원회 의장. 유교 도덕을 비판하며 문학혁명론을 주장했고,...)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진독수.jpg

요약

중국공산당 초대 중앙위원회 의장. 유교 도덕을 비판하며 문학혁명론을 주장했고, 이는 이후 5·4 운동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중국공산당을 창당해 초대 중앙위원회 의장에 취임했고, 제1차 국공합작을 제안했다.

생애

1879년 안후이성에서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일본, 프랑스로 유학을 다녀왔다. 이후 1916년 베이징에서 '신청년'을 발간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자, 마르크스주의에 크게 경도되었다. 이후 리다쟈오와 의논하여 중국에서 공산주의 정당의 창당을 논의해 소련의 지원으로 1921년 7월 중국 공산당을 창당하고 총서기로 취임하였다.

1920~1922년에는 천중밍과 협력하여 광동의 교육개혁 운동을 지도했으며, 광동에서 임조함, 담평산, 천궁보와 함께 공산주의 소조를 결성했다. 쑨원의 2차 호법운동에 대해서는 이를 시기상조라 여겨 반대했다. 1921년 쑨원과 코민테른 대표 마링의 만남을 주선했고, 천중밍이 1922년 영풍함 사건을 일으키자, 천중밍과 단절하고 쑨원 지지 선언을 발표했다. 1923년 3차 광동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선전주임을 맡아 쑨원을 원조했다.

1922년 홍콩 선원 파업을 지원했으며, 1922년 코민테른이 국민당과의 당내 합작을 지시하자 반대를 표명했다. 그러나 결국 국민당의 개조, 쑨원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폐하는 조건으로 합작에 동의하여 중국 국민당 당적을 획득하였다. 1924년 1차 국공합작이 일어난 이후 국민혁명에 종사했다. 이후 1927년 장제스의 4.12 상하이 쿠데타로 1차 국공합작이 사실상 붕괴되고 마일사변 등 반공폭동이 계속 일어나는 와중에도 국민당에 대한 양보 정책을 취하며 국공합작을 지속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27년 7월 우한 정부마저 분공을 결정, 국공결렬이 확정되자, 결국 코민테른으로부터 "혁명에 기회주의적인 노선으로 일관했다"는 이유로 비판당했다. 이후 7월 12일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지시에 따라 공산당 지도부가 개조되자, 7월 14일 잠적하였고 7월 15일 총서기 사퇴 의사를 밝혔다. 난창 폭동 직후에 일어난 8.7 긴급회의에서는 기존 노선의 오류에 대한 책임을 추궁 당했고, 취임한지 6년만에 총서기직을 박탈 당했다. 이후 1929년 11월 중국 공산당의 세력이 심각하게 약화된 책임을 지고 당적까지 제명 당했다.

이후에는 트로츠키주의에 관심을 가져 중국좌익반대파의 총서기로 취임했으나, 1932년 국민당에게 체포됨으로써 조직이 붕괴되었다. 1937년 출옥한 이후에는 무산계급 혁명에 회의를 느끼고 민주주의자로 다시 전향하였다. 만년에는 충칭 인근에서 저술에 힘쓰다가 1942년 병사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충칭에 공산당 대표로 머무르던 저우언라이가 중병에 걸린 입원한 천두슈를 문병오기도 했다.

가족관계

본처와는 4남1녀의 자녀를 두었다. 맞아들 천옌녠(1898-1927)과 둘째 아들 첸자오녠(1902-1928)은 공산당원으로서 4.12 상하이 쿠데타이후 국민당에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현재 공산당에서는 열사로 기념하고 있다. [1] 세째아들 천광메이(1907-1999)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일반인으로 살아갔으며, 네째아들 첸쑹녠 (1910-1990) 은 안후이성의 관리를 지냈다. 애인이 낳은 자식은 둘이 있는데 모두 중국을 떠나 망명, 미국 홍콩에 살았다. 이렇게 자녀 둘이 공산당을 위해 활동하다 처형되었기 때문에, 중공정권에서 본인의 평가가 그다지 박하지 않은 측면도 있다.

평가

전향자이지만, 현재 중국에서는 그래도 당 시조로서 어느 정도는 평가받고 있다. 고향에 동상과 기념관까지 세워졌다. 다만 그와 별개로 중공 공식 역사상에서는 여전히 제명된 당적도 회복되지 않고 있다. 2001년 편찬된 역사서에 '우경기회주의자가 아니었으며 다만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고 짤막하게 서술된 것이 현재까지 중국 공산당의 유일한 재평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