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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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문공(晉文公)

본명 중이(重耳)
출생 기원전 697년
사망 기원전 628년

개요

진 문공(晉文公)은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22대 군주로 제 위왕 이후 두번째로 패업을 달성하게 된다. 성은 희(), 휘는 중이(重耳)이며 진헌공의 아들이다. 긴 망명생활동안 익힌 처세술과 뛰어난 리더쉽으로 진나라를 부강하고 안정적인 나라로 만들어냈다.

생애

여희의 난과 망명의 시작

그는 아버지인 진헌공과 대융 출신인 호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태자는 제강의 아들 신생이었는데, 진헌공의 첩인 여희가 자신의 아들 해제를 태자로 삼기 위해 모략을 세운다. 여희는 신생이 제헌공을 독살하려 한 것처럼 위장하였고, 신생은 어쩔 수 없이 자살하게 된다. 이 사건 이후 중이와 동생 이오는 자신들도 위험에 처할 거라 생각해 근거지로 도주한다. 진헌공은 그 사실을 알고 두 아들에게 모반 의사가 있는 것으로 생각해 발제에게 중이를 공격하라 명령하였다. 중이는 호언의 조언에 따라 척나라로 도주하였고 이때 조최, 위주, 전힐, 개자추 등 충신들의 호위를 받으며 19년에 걸친 긴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망명 이후 진(晋)나라의 상황

진헌공의 죽음 이후 해제와 탁자가 왕위에 오르지만, 장자인 중이를 왕위에 올리려 했던 이극이 여희의 무리를 몰살시켰다. 이극은 중이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제안하지만 혼란스러운 시기에 왕위에 오르는 것을 거절하였고, 이에 기원전 651년 가을 이오가 제후국들의 인정 하에 왕으로 즉위해 진혜공이 되었다.
진목공이 이오를 왕으로 인정한 이유는 이오가 땅을 떼어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약속한 땅을 주지 않았고 진목공은 분노했지만 진(晋)나라를 공격하진 않았다. 이후 진(晋)나라가 흉년이 들자 진(秦)나라에 곡식을 베풀어 줄 것을 요구했다. 주변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진목공은 “군주는 악하지만 백성들이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곡식을 베풀어 주었다. 그러자 다음해에는 진(秦)나라에 흉년이 들어 진목공은 진혜공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하지만 혜공은 배은망덕하게도 이 틈을 타 군사를 모아 공격을 시도했다. 이 전투에서 결국 진(秦)나라가 승리를 거두고 진혜공은 포로로 잡히지만 이후 석방되었다.
진혜공이 사망한 이듬해 진혜공의 아들 어가 진회공으로 즉위했다. 그는 백부인 중이가 두려웠다. 이에 진나라 신하로서 중이를 따라 국외로 망명한 자들의 부모와 친척들 중 석 달 이내에 망명한 자들을 모두 소환해 기한 내에 돌아오지 많으면 일가족 전부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 하명했다. 호모 형제의 아버지인 호돌은 아들을 부르지 않았고, 진회공은 호돌을 목을 내리쳤다. 이 사건으로 진회공은 중이와 호모 형제의 복수의 대상이 된다.

기나긴 망명생활

제나라

기원전 644년 진혜공은 발제를 보내 또 한번 중이를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중이는 이내 척나라에는 더 이상 머물 수 없음을 알았고 때마침 제환공의 재상 관중이 별세한 소식을 전해들었다. 중이는 제나라로 가 제환공의 힘이 되어주고자 했으며 동시에 그의 보호와 도움을 얻고자했다. 그렇게 제나라에 있는 동안 중이는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으며 동시에 군주의 자리를 회복하고자 했던 옛 소망도 옅어져 갔다. 제환공은 중이를 많이 아끼어 여러 선물을 주곤 했다. 예로, 그에게 20척의 마차를 선물하기도 했으며, 황실의 여인 치강을 중이에게 시집보내기도 하였다.

기원전 639년 제환공이 죽자 제나라는 내란이 발생했다. 하루는, 조최 등 중이의 일행들이 뽕나무 아래에서 어떻게 제나라를 떠날 것인지 회의를 했는데 한 궁녀가 이를 듣고 몰래 돌아가 중이의 부인인 제강에게 일렀다. 제강은 궁녀가 이 기밀을 누설할까봐 겉으로는 크게 상을 주어 치하해주었지만 이내 그 궁녀를 죽이었다. 제강은 중이에게 떠날 것을 권했지만 중이는 듣지 않았고 결국 조최 등 중이의 일행들이 중이를 취하게 만든 다음에 중이를 수레에 태운 후 제나라를 떠났다. 중이가 깨어났을 때 이미 많이 늦었음을 안 중이는 대노하여 중이의 외삼촌 호언(狐偃)을 죽이려 했지만 다행이 실패하였다.

조나라

중이는 그의 충신들과과 조나라에 도착했다. 조공공은 중이의 갈비뼈가 통짜라는 소문을 듣고 호기심에 중이가 목욕을 하고 있을 때 몰래 그의 나체를 훔쳐보았다. 조공공이 이리 무례하니 중이는 몹시 원망하고 미워하였다.

송나라

기원전638년, 초나라가 송양공의 군대를 물리친지 얼마 지나지 않은 후 중이는 송나라에 도착했다. 송나라는 전투에서 크게 패해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중이를 열정적으로 환대하였고, 그에게 20필의 마차를 선물했다.

초나라

기원전 637년, 중이는 정나라를 지나고 초나라에 도착했다. 초성왕은 연회를 열어 중이를 극진해 대해주었는데, 한편으로 후에 어떻게 초나라에 보답을 할 것인지 물었다. 중이는 대답하기를"만일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전쟁이 난다면 기꺼이 군대들을 3사()를 후퇴해서 배치시키겠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초나라의 대부 성득신초성왕에게 당장 중이를 죽여 후한을 남기지 말 것을 권했지만, 초성왕은 중이를 뛰어난 인재로 여겨 이를 거절했다.

진나라

중이 일행이 초나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진목공이 신하를 보내 그를 진나라로 데려왔다. 목공은 중이에게 회영을 부인으로 맞을 것을 권유했고, 그 둘은 혼인을 하게 되어 ‘진진지의(秦晉之誼)’를 맺게 되었다. 이해 9월, 호돌이 참형에 처해진 사실을 들은 호모 형제가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이를 들은 중이는 진목공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 때가 왔다고 느낀 진목공은 흔쾌히 병사를 내어주었다. 그는 오랜 망명생활 끝에 고향을 향해 전진하였다.

진문공 시대의 시작

목공이 중이를 환대하다

중이가 초나라에 머물고 있을 때 진나라에 억류되어 있던 진의 태자 어는 이미 본국으로 달아나 있었다. 어가 본국으로 도망친 것은 춘추시대의 관례의 맞지 않는 일이었다. 인질 교환은 엄연한 국가 간의 약속이었다. 진목공은 어의 행동에 분노했고, 마침 중이가 초나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사자를 보냈다. 초성왕은 목공이 중이를 초청하자 많은 예물을 주어 호송했다. 드디어 중이의 망명생활이 막바지에 달한 것이다. 목공과 중이는 의기투합하기 시작하는데, 목공은 공실 여인 중 다섯 명을 골라 중이에게 시집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목공은 중이를 위해 연회를 여는데 이때 중이를 군주의 예우로 대접했다. 목공은 "시경" '소아'의 채숙편을 노래 불렀다. 이 노래는 목공 자신은 먼 여정 끝에 진나라까지 온 군자를 잘 보살펴줄 것이며, 장차 중이의 앞날이 창창하리라는 것을 축복하는 멋진 시였다. 조최는 중이에게 언질을 주어 당 아래로 내려가 절을하게 했다, 이어서 조최는 목공을 극히 정중히 대하면서도 천자가 부르는 노래는 감히 함부로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보이며 예의 면에서 목공보다 더 밝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목공은 같이 당 아래로 내려감으로 제후는 천자의 자격으로 다른 제후를 대할 수 없다는 것을 본인 또한 알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화기애애하면서도 서로 빈틈을 보이지 않은 행동들이었다. 조최는 중이에게 언질을 주어 답가를 하게 했고, 이를 통해 중이가 은혜를 입어 귀국하여 진의 임금이 된다면 주나라 왕실을 다시 강하게 만드는 것에 이바지 할 것이고, 그것이 중이가 바라는 것이라는 달콤한 말을 통해 목공은 크게 기뻐하며 감탄하였다.

목공의 도움으로 중이가 환국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혜공은 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어린 어가 그 뒤에 권력을 잡기는 역부족이었다. 진라나 내부는 당장 동요하였다. 그러자 그해 겨울 목공은 지체 없이 행동에 들어갔다. 중이에게 정예병을 딸려 보내서 황하를 건너게 했고, 이는 무려 19년 만의 귀국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나라의 남은 세력들은 모두 항복했고, 호언은 진나라 대부들을 모두 모아 중이를 군주로 세우기로 약속받았다. 중이는 동시 사람을 보내서 희공을 살해했다. 마침내 중이가 등극하니 그가 바로 춘추 두 번째 패자가 되는 문공이다.

춘추전국의 제2의 패자에 등극하다

진문공이 패업을 달성하는 데 마지막까지 걸림돌이 된 것은 남방의 강국 초나라였다. 초나라는 계속해서 중원의 정치판도에 간섭하고자 하였다. 이리하여 기원전 632년, 진과 초 사이에 '성복 전투'가 일어났다. 이때 일찍이 초나라 성왕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문공은 진나라 군대를 전장에서 3사 퇴보시켜 진을 치고 있다가 대결하여 개전한지 6일만에 초군을 격퇴시켰다. 이 약속을 지킴으로서 패할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무력이 아닌 인의(仁義)를 실천해 사람들의 마음을 얻게 된다. 주양왕은 진나라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친히 정나라의 형웅까지 순시를 나왔고, 그를 맞기 위해 진문공은 천토에 행궁을 짓고 회맹을 소집하니 이것이 유명한 '천토회맹'이다. 제나라 환공의 규구회맹 이래 가장 성대한 것이었으며, 이때 주왕은 진문공에게 후백의 칭호를 내렸다. 후백이란 제후들 중의 영수를 가리키는데 이는 진문공이 명실공히 중원의 패자가 되었음을 뜻한다. 9년 동안의 짧은 재위기간에도 불구하고 천하를 호령한 진문공은 기원전 628년 겨울, 6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문공의 정치

문공의 논공행상

군주의 첫 번째 자질은 바로 인재등용과 신상필벌이다. 상과 벌을 정확히 내리면 당연히 지지자들이 몰려든다. 그의 논공행상은 향후 중국사의 각 고비마다 모양을 달리해서 등장한다. 그는 나름대로 뚜렷한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문공이 즉위하자 내시 발제가 급히 알현하고자 했다. 문공은 발제에게 두 번이나 죽을 뻔했기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힐책했다. 그러자 발제도 사람을 통해 회신했는데, 신하는 당시 자신이 섬기고 있는 군주에 대해 충실해야하기에, 군주에게 충성을 한 것이지 사람에게 충성한 것이 아니다. 군주가 싫어하는 자를 제거함에는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맞다는 것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 말을 듣고 문공은 느끼는 것이 있어 발제를 불렀다. 그러자 발젠느 여생과 극예가 야밤에 공궁을 습격하려 한다는 사실을 밀고하였고, 문공은 발제에게 사과를 하며 그 공을 치하하였다.

또한 문공은 자신을 지지한 모든 사람에게 포상을 했다. 그러나 문공의 포상 기준은 엄격했다. 논공행상이 끝나자 하급 신하인 도숙호가 불만을 품고 호언에게 고했다. "제가 군주를 따라 망명한 지 어언 13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3차에 걸쳐 상을 내리면서 어찌 군주께서 저를 잊으신 것입니까?" 호언이 말을 전하자 문공은 대답을 하였는데 " 내가 어찌 그를 잊을 수 있겠소? 대저 나를 깨우치고 인으로 나의 그릇된 점을 고쳐주며 훌륭한 인간이 되게 하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는 최고의 상을, 정당한 말로 나에게 간하고, 울타리가 되어 나를 보호하여 나로 하여금 현자의 문으로 이끌어준 사람, 그에게 나는 차등의 상을 주었소. 몸을 바쳐 나를 환난에서 구해준 용사, 그에게 그 다음의 상을 주었소이다. 3등까지 상을 준 후에야 몸으로 고생한 사람들에게 상을 줄 수 있소. 대저 고생한 사람들 중에는 도숙호 그 사람이 제일 아니오. 내가 어찌 그를 잊을 수 있겠소?" 이 말을 들은 주나라 내사 흥은 문공의 안목에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문공이 어떻게 패자가 되지 않겠는가? 옛날의 성왕들은 덕을 먼저 하고 힘을 뒤로 했다고 한다. 문공이 거기에 합당한 인물이 아닌가?

 
— <공원국,춘추전국이야기2>

문공의 논공행상은 앞으로도 이어지지만 그 원칙은 깨어지지 않았다. 인의를 발깋ㄴ 사람과 나라를 지킨 사람을 앞에 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이란 자신을 위해 고생한 사람을 먼저 챙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문공은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일정한 공을 돌리고, 패자의 기본 자질을 세워준 사람들을 우대했다.

=

평가

진문공은 대기만성형의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진문공을 좋아하는 이유는 인내하며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군자였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물러남'으로 '나아감'을 대신하는 처세 방식을 대단히 중시한다. 조건이 갖춰지지 않았을 때 무리하게 일을 추진하면 고생만 자처하게 된다. 만일 사실을 받아들이고 전략적으로 양보하고 휴식을 취하며 다시 힘을 축적하면 더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다. 진문공은 망명 생활 동안 시기를 엿보며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이극의 왕위에 올라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를 거절했고, 성복의 전투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약속을 지키며 후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모든 건 '극복'과 '나아감'을 위한 것으로 승리를 이끈 현명한 방법이었다. 그는 '부드러움'과 '물러남'을 통해 춘추오패의 자리에 등극할 수 있었으며, 그가 이룬 위업 때문에 진나라의 판도는 전국 시대 말 진시황에 의해 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진문공의 패업은 당연했다. 임기응변의 권모술수도 알고, 만대에 이득이 되는 방략까지 알았기 때문이다

 
— 『한비자』,공자

관련 설화

* 한식의 기원

진문공은 왕위에 오르자 오랫동안 자신을 따르며 고생한 신복들에게 포상을 했다. 특히 개자추는 중이가 굶주리고 있을 때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국을 끓여 중이에게 바친 충신이었다. 진문공은 개자추에게 포상하려 했지만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개자추는 주문공을 보좌한 것은 그것이 도리이기 때문이지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함이 아니었다 여겨 진문공이 즉위한 후 바로 산속으로 들어가 어머니와 은거하였기 때문이다. 진문공은 개자추가 산에서 은거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찾을 수 있는 묘책을 생각해냈다. 면산에 불을 지르면 효심이 지극한 개자추가 어머니를 업고 내려올 것이라 여겨 군사들에게 불을 지르게 한 것이다. 엄청난 불길이 면산을 휘덮었지만 끝내 개자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몇일 후 버드나무 아래에서 어머니와 까맣게 탄 그의 시신을 발견한다. 개자추의 시신을 본 진문공은 통곡을 하며 울었다. 그는 개자추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면산을 개산이라 칭하고, 그가 죽은 3월 초닷새에 불에 타죽은 개자추를 추모하는 뜻에서 불을 피우지 않고 찬 음식을 먹었다. 이러한 이유로 한식이 생겨나게 됐다.

참고문헌

신동준 《춘추전국의 영웅들 1. 패도로 난세를 평정하다》, 한길사, 2011
이수광 《중국을 뒤흔든 27인의 지략가》, 미루북스, 2011
박인수 《춘추전국의 패자와 책사들》, 석필, 2001
박인수 《제왕과 책사 : 천하를 얻는 용인과 지략의 인간학》, 렁청진,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