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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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의 역사 개요

기원전 210년의 秦

진나라는 기원전 4세기 쯤 전국 시대 때 상앙이 행한 법가에 따른 개혁에 의해 급속도로 강성해져 기원전 3세기 중후반에 국력이 약했던 주나라를 시작으로 전국칠웅을 모두 멸망시키고 통일을 이룩했다. 시황제는 도량형과 문자의 통일, 군현제의 실시 등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했고 흉노 등의 북방 기마민족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서 각각의 나라가 독자적으로 만들고 있던 장성을 정비해 만리장성을 건설했다. 하지만 시황제의 사망 이후 벼슬아치들이 암살을 일삼고 2세 황제를 앞세워 폭정을 하는 등 반란과 혼란의 시기가 도래했고 끝내 관중關中에 들어온 유방劉邦에게 항복하면서 통일 16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전국시대의 진(秦)

외교전의 전개와 진秦, 조趙의 대결

기원전 330년 무렵부터 서방(섬서성)의 진이 점차 중원으로 진출해 들어왔다. 진 효공孝公은 기원전 340년 소국인 위衛의 왕족 출신인 상앙을 신임하였고, 상앙은 변법으로 군사력 증강과 새로운 경제성장정책을 실시한 결과 국력은 더욱 충실해졌으며 진은 이를 배경으로 동진하기 시작했다. 진의 세력이 동진을 시작하자 위魏 이하 6국은 모두 중대한 위협을 느꼈다. 연합해서 진에 대항할 것인가, 혹은 진과 협조할 것인가 등 여러 가지 외교정책이 논의되었다. 진은 가장 가까운 위를 침공하고, 직접 국경을 접하지 않은 제齊 등에는 평화정책을 취했다. 즉 원교근공遠交近攻 정책으로서 이는 범수가 입안하였다. 이리하여 기원전 330년 이후에는 외교적으로 대단히 혼란한 시대가 되었다. 제와 진이 동서로 대립하여 그 사이에 있는 나라들, 특히 남방의 강대국 초도 이 대립에 말려들어, 진, 제, 위 등으로부터 끊임없이 외교관이 파견되는 등 외교정책상 항상 미묘한 입장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소진蘇秦은 6국이 연합하여 진에 대항하자는 합종책合從策을 취했다. 이에 반해 장의張儀는 6국의 연맹을 끊어 진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연횡책連衡策을 취했다. 소진이 여러 나라를 유세하며 연맹을 실현하여 한때 6국의 재상을 겸임했다는 화려한 사적과 변론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상당히 현실성이 부족하여 소진이 완전히 가공의 인물이라는 말도 있지만, 당시의 일반 상황으로 보건대 약간 과장되어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듯 합종, 연횡이라는 두 축을 둘러싸고 많은 변론가가 나타났으며, 대단히 복잡한 외교관계를 드러냈다.

그러한 가운데 점차 진의 세력이 우세해지면서 동방의 제와 남방의 초를 압도해 나갔다. 그런데 그 시기는 가장 북쪽에 있던 조나라가 기원전 285년 무렵 북방 유목민을 정복하여 영역을 넓혀가고 있던 때였다. 그리하여 조와 진은 남쪽으로부터 위를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북방에서는 직접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기원전 285년 전후부터 진과 조가 패권을 다투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원교근공의 승리와 진의 중국통일

무력으로 진에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남방의 초나라뿐이었지만 초와 진이 국경을 접한 곳은 험한 산지가 가로놓여 있어서 직접 충돌은 일어나기 어려웠기 때문에 진은 먼저 조와 결전을 벌였다. 즉 기원전 261년 무렵부터 조와 진나라의 최후 격전이 전개되어 장기전 끝에 진이 결정적 승리를 거두고 패권을 확보했다. 기원전 260년의 일, 바로 장평전투(長平戰鬪)이다. 이 결전 뒤에도 진의 동진은 그치지 않았고 기원전 221년에 이르러 마침내 진은 6국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