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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에서의 창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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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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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리카이위엔, 진시황의 비밀, 시공사, 2010, ISBN 9788952760050
 
-출처 : 리카이위엔, 진시황의 비밀, 시공사, 2010, ISBN 978895276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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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인물]]

2017년 7월 3일 (월) 14:04 기준 최신판

진(秦)나라에서 상국(相國)을 지냈다. 성씨는 미(羋), 본관은 웅(熊)이다. 본래는 초나라의 공자이자 초나라의 마지막 왕인 부추의 이복동생으로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나 중국의 역사학자 리카이위옌은 《진시황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진의 상국에 대한 기록과 진시대의 동과 유물에 적힌 명문에 따르면 이름이 웅계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창평군(昌平君)

본명 웅계
출생 기원전 272년
사망 기원전 223년
생존시기 전국시대
관련 활동 정치

창평군의 출생

웅원이 진나라에서 볼모로 있을 때 진나라 정권의 실세는 선태후를 중심으로 한 초나라계 외척세력이었다. 당시 약 54세이던 진소왕에게 자녀가 많았던 만큼 웅원이 맞아들인 부인은 진소왕의 공주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창평군이다. 창평군은 빠르면 진소왕 35년, 초경양왕 27년(기원전 272년), 늦어도 다음 해인 기원전 271년에 출생했다. 진소왕 44년이자 초경양왕 36년이던 기원전 263년 , 웅원의 부친인 초나라 40대 왕인 초경양왕 웅횡은 병이 깊어져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따라서 함양에서 10년간 볼모로 있었던 태자 웅원은 이 소식을 듣고 초나라로 돌아간다. 웅원이 초나라 왕이 된 후 창평군이나 부인을 불러들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진시황과 창평군의 관계도.JPG

진시황과 창평군의 관계도.jpg


진나라에서의 창평군

진장양왕 원년, 초고열왕 14년(기원전 249년)에 23살의 창평군은 화양부인의 조카이자 장양왕 자이의 사촌동생이라는 간판을 걸고 정계 전면에 등장했다. 26세에 영정이 즉위하자 보정대신이 됐으며, 34세에는 어사대부로서 노애의 난을 진압하고 영정이 안정적으로 친정체제를 갖출 수 있도록 했다. 진왕정 10년 여불위 파면 후 승상으로 임명됐다.

진왕정 9년 (기원전 238년)
장신후 노애가 반란을 일으키려다 들통이 나자 왕의 옥새와 태후의 인장을 도용하여 옹현의 군사, 진왕의 호위군사, 관의 기병, 융적(戎翟)의 우두머리 및 가신들을 동원해 기년궁(蘄年宮)을 공격하는 난을 일으켰다. 
왕이 이를 알고 상국 창평군(昌平君)과 창문군(昌文君)에게 군대를 내어 노애를 공격하도록 명령하니 함양(咸陽)에서 싸워 수백 명의 머리를 베었다. 
공을 세운 모두에게 작위를 주고, 싸움에 가담한 환관들에게도 작위를 한 등급씩 올려 주었다._<<사기>><진시황본기>

창평군은 진나라 승상 시절 전국시대 종결(초나라 공략)에 있어서 영정과 상반된 입장을 띄었다. 왜냐하면 초나라 정벌은 자신의 조국을 멸망시키는 일이자 친가 일족이 멸문지화를 입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왕정 21년, 파면 후 영진으로 좌천됐다.

진왕정 21년 (기원전 226년)
창평군이 한왕 안이 죽은곳으로 좌천되어 왔는데 용사들이 따랐다._진간<<편년기>>
창년군이 영진으로 좌천되었다._<<사기>><진시황본기>

초나라에서의 창평군

진왕정 22년 이신과 몽무가 이끄는 진나라 군대는 영진의 남부와 동남부 지역에서 초나라 군대를 쳐부순 승세를 타고, 초나라 도읍인 수춘으로 공격해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초나라 함락을 눈앞에 둔 그시점에 영진에 있던 창평군이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진군의 후방을 끊어버린다. 그 때문에 초나라를 공격하던 이신의 부대는 초나라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영진을 공격했다. 결국 앞뒤로 협공을 받은 이신의 진나라 부대는 대패했다. 창평군은 영진에서 철수한 이후 회하지역으로 후퇴했다. 초나라는 이미 초왕 부추가 생포되어 구심점이 사라진 상태였다. 나라에 군주가 하루라도 없으면 안 되기에 항연은 재빠르게 창평군을 왕으로 옹립했다. 이후 창평군은 항연의 보좌 하에 초나라 군민을 이끌고 진나라에 대한 항쟁을 계속했다.

진왕정 23년 (기원전 224년)
형의 장수 항연이 창평군을 형왕으로 옹립하고 회남에서 진나라에 저항했다._진간<<편년기>>

항연이 자살한 회북의 계현은 훗날 진승, 오광의 대택향 봉기가 일어난 장소다. 왕저은 초나라 도성 수춘을 함락한 이후 북상했다. 초나라 웅계(창평군)와 항연은 회북으로 방어선을 물린 후 계현에서 결전을 벌인다. 하지만 초나라 군대는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대패하게된다. 그 결과 초왕 웅계는 전사하고 대장군 항연은 자결한다. 이 전쟁의 결과 춘추전국의 남방 강국 초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춘추전국시대가 종결됐다.

진왕정 24년 (기원전 223년)
왕전, 몽무가 초나라를 공격해 적을 대파하니 창평군은 전사하고 항연이 그 뒤를 이어 자살했다._<<사기>><진시황본기>

참고 자료

-출처 : 리카이위엔, 진시황의 비밀, 시공사, 2010, ISBN 978895276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