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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개요==
춘추오패 중 한 사람으로 제환공, 진문공에 이은 3번째 패자이다. 초나라의 22대 군주로 성은 미(羋)이고, 씨는 웅(熊), 이름은 여(旅 또는 侶, 呂)이다. BC.614년에 즉위하여 BC.591년에 사망하였다. 진나라와 대적하면서 진의 패권에 위협을 가하다 필지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춘추시대의 패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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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오패]] 중 한 사람으로 [[제환공]], [[진문공]]에 이은 3번째 패자이다. 초나라의 22대 군주로 성은 미(羋)이고, 씨는 웅(熊), 이름은 여(旅 또는 侶, 呂)이다. BC.614년에 즉위하여 BC.591년에 사망하였다. 진(晉)나라와 대적하면서 진의 패권에 위협을 가하다 필지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춘추시대의 패자가 된다.
  
 
==생애==
 
==생애==
 
===즉위 직후===
 
===즉위 직후===
초장왕은 즉위 후 3년간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왕에게 간언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엄벌을 내렸다. 하루는 왕이 정희와 월녀를 껴안고 악대에 취해있었는데 중신 오거가 찾아와 물었다. “산봉우리 위에 새 한 마리가 앉았는데 3년을 울지도 않고 날지도 않으니 이 새는 무슨 새입니까?” 장왕은 오거의 뜻을 알아듣고 물러가라고 하였지만 변함이 없었다. 이후 중신 소종이 찾아와 말하였다. “대왕께서 놀이의 미혹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장왕은 소종의 간언을 듣고 주색놀음을 그만두고 국정에 전념하였다. 무능력하거나 위법한 조정 대신들 수백명을 갈아치우고 초야의 인재를 대거 등용하였다. 간언을 한 오거와 소정에게 국정을 위임하였고 영윤의 권한을 분산시켰다. 불비불명이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서 비롯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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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장왕은 즉위 후 3년간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왕에게 간언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엄벌을 내렸다. 하루는 왕이 정희와 월녀를 껴안고 악대에 취해있었는데 중신 오거가 찾아와 물었다. “산봉우리 위에 새 한 마리가 앉았는데 3년을 울지도 않고 날지도 않으니 이 새는 무슨 새입니까?” 장왕은 오거의 뜻을 알아듣고 물러가라고 하였지만 변함이 없었다. 이후 중신 소종이 찾아와 말하였다. “대왕께서 놀이의 미혹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장왕은 소종의 간언을 듣고 주색놀음을 그만두고 국정에 전념하였다. 무능력하거나 위법한 조정 대신들 수백명을 갈아치우고 초야의 인재를 대거 등용하였다. 간언을 한 오거와 소정에게 국정을 위임하였고 영윤의 권한을 분산시켰다. [[불비불명]]이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서 비롯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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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우외환===
 
===내우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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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으로의 진출 시도===
 
===중원으로의 진출 시도===
BC.608년 초나라는 정나라를 이끌고 진(陳)나라와 송나라를 공격하였다. 진(陳)과 송이 초를 배신하고 진(晉)나라와 결맹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진(晉)의 조돈은 제후들과 함께 정을 공격하였다. 초는 위가를 보내 진(晉)을 물리치고 정을 이용하여 송을 공격하였다. 이에 진(晉)이 송을 도우려 했으나 당시 진(秦)이 진(晉)을 공격하였고 진(晉) 내부의 상황도 진양공과 조돈의 관계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여서 초의 개입을 보고 물러났다. 이로서 중원의 제후국들은 치기 시작한 초장왕은 BC.606년 육혼융을 공격한 후 그 길로 낙수를 건너 주나라 경내에서 열병식을 거행하였다. 주나라는 융을 정벌한 초를 위로하기 위해 왕손만을 보내었다. 장왕은 왕손만에게 구정의 크기와 무게를 물었다. 구정이란 하나라, 상나라, 은나라를 거쳐 주나라로 내려온 아홉 개의 거대한 구리 솥으로 왕실의 권위가 천하의 중심에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왕손만은 주나라의 덕은 쇠퇴하였으나 천명을 바뀌지 않았으므로 구정의 무게를 물을 수는 없다고 하였다. 장왕은 이 말을 듣고 군대를 돌려 돌아갔다. 장왕이 구정을 언급한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주로 장왕이 천하를 얻겠다는 뜻에서 말한 것이라고 하나 진(晉)을 위협하기 위함이라거나 주 왕실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함이라는 해석도 있다. 장왕이 왕손만의 말을 듣고 퇴군한 것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지만, 초나라가 중원의 패권을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천자를 차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강하다. 이후 문정이란 천하를 넘본다는 말로 쓰이게 되었고 문정중원이라는 고사가 여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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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608년 초나라는 정나라를 이끌고 진(陳)나라와 송나라를 공격하였다. 진(陳)과 송이 초를 배신하고 진(晉)나라와 결맹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진(晉)의 조돈은 제후들과 함께 정을 공격하였다. 초는 위가를 보내 진(晉)을 물리치고 정을 이용하여 송을 공격하였다. 이에 진(晉)이 송을 도우려 했으나 당시 진(秦)이 진(晉)을 공격하였고 진(晉) 내부의 상황도 [[진양공]]과 [[조돈]]의 관계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여서 초의 개입을 보고 물러났다. 이로서 중원의 제후국들은 치기 시작한 초장왕은 BC.606년 육혼융을 공격한 후 그 길로 낙수를 건너 주나라 경내에서 열병식을 거행하였다. 주나라는 융을 정벌한 초를 위로하기 위해 왕손만을 보내었다. 장왕은 왕손만에게 [[구정]]의 크기와 무게를 물었다. 구정이란 하나라, 상나라, 은나라를 거쳐 주나라로 내려온 아홉 개의 거대한 구리 솥으로 왕실의 권위가 천하의 중심에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왕손만은 주나라의 덕은 쇠퇴하였으나 천명을 바뀌지 않았으므로 구정의 무게를 물을 수는 없다고 하였다. 장왕은 이 말을 듣고 군대를 돌려 돌아갔다. 장왕이 구정을 언급한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주로 장왕이 천하를 얻겠다는 뜻에서 말한 것이라고 하나 진(晉)을 위협하기 위함이라거나 주 왕실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함이라는 해석도 있다. 장왕이 왕손만의 말을 듣고 퇴군한 것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지만, 초나라가 중원의 패권을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천자를 차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강하다. 이후 문정이란 천하를 넘본다는 말로 쓰이게 되었고 [[문정중원]]이라는 고사가 여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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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지전===
 
===필지전===
BC.597년 진(晉)과 초 사이에 끼인 정나라가 계속 편을 바꾸자 초장왕이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장왕이 정나라의 도성을 포위한 지 17일이 지나고 정나라는 버티지 못하고 점을 쳐보고 백성들이 울기 시작했다. 성벽을 지키던 병사들도 따라 우니 초장왕은 정나라가 곧 항복할 것이라 생각하고 도성에서 30리 밖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정나라는 진(晉)에서 원군이 올 것을 믿고 재정비하여 3개월을 더 버티었다. 결국 정양공이 웃옷을 벗고 양을 끌고 나와 항복을 선언하였다. 웃옷을 벗은 것은 죄인에게 채찍질을 해달라는 의미이고 양을 끌고 온 것은 멀리 온 군사들에게 대접하겠다는 뜻으로 육단견양이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장왕은 정나라를 취하지 않고 복권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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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597년 진(晉)과 초 사이에 끼인 정나라가 계속 편을 바꾸자 초장왕이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장왕이 정나라의 도성을 포위한 지 17일이 지나고 정나라는 버티지 못하고 점을 쳐보고 백성들이 울기 시작했다. 성벽을 지키던 병사들도 따라 우니 초장왕은 정나라가 곧 항복할 것이라 생각하고 도성에서 30리 밖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정나라는 진(晉)에서 원군이 올 것을 믿고 재정비하여 3개월을 더 버티었다. 결국 [[정양공]]이 웃옷을 벗고 양을 끌고 나와 항복을 선언하였다. 웃옷을 벗은 것은 죄인에게 채찍질을 해달라는 의미이고 양을 끌고 온 것은 멀리 온 군사들에게 대접하겠다는 뜻으로 [[육단견양]]이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장왕은 정나라를 취하지 않고 복권시켰다.<br>진나라는 뒤늦게 정나라에 원군을 보내었는데 진의 군대가 황하강 이남에 도착하였을 때 정은 이미 항복한 뒤였다. 진의 군대는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와 되돌아가야 한다는 피전파로 나뉘었다. 총사령관 [[순임보]]는 피전파였으나 당시 진의 군대는 통합이 안 되어 주전파인 선각이 총사령관의 동의 없이 초나라를 공격하러 떠났다. 이후 한궐의 설득으로 순임보도 초나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한편 초나라도 진나라의 하방 소식을 듣고 [[오삼]]과 같은 주전파와 [[손숙오]]와 같은 피전파로 의견이 나뉘었다. 초장왕은 선곡이 황하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오삼의 의견을 수용하여 북진하여 진과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이 필이라는 곳에서 일어나서 필지전이라 한다. 장왕은 필지전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이 전투를 계기로 춘추시대 3번째 패자로 등극하였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장왕은 [[성복]]의 싸움과는 달리 경관을 만들지 않고 시체를 모두 땅에 묻었다. 경관은 적의 시체를 산처럼 모아놓은 전승기념물을 말하는데 장왕은 자신에게는 무덕이 없음과 진나라의 백성들은 단지 군명을 받든 것이라는 이유를 들면서 경관을 짓지 않았다. 황하에 제사를 지내고 선군들의 사당을 만들고 승전을 고하고 물러갔다.
진나라는 뒤늦게 정나라에 원군을 보내었는데 진의 군대가 황하강 이남에 도착하였을 때 정은 이미 항복한 뒤였다. 진의 군대는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와 되돌아가야 한다는 피전파로 나뉘었다. 총사령관 순임보는 피전파였으나 당시 진의 군대는 통합이 안 되어 주전파인 선각이 총사령관의 동의 없이 초나라를 공격하러 떠났다. 이후 한궐의 설득으로 순임보도 초나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한편 초나라도 진나라의 하방 소식을 듣고 오삼과 같은 주전파와 손숙오와 같은 피전파로 의견이 나뉘었다. 초장왕은 선곡이 황하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오삼의 의견을 수용하여 북진하여 진과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이 필이라는 곳에서 일어나서 필지전이라 한다. 장왕은 필지전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이 전투를 계기로 춘추시대 3번째 패자로 등극하였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장왕은 성복의 싸움과는 달리 경관을 만들지 않고 시체를 모두 땅에 묻었다. 경관은 적의 시체를 산처럼 모아놓은 전승기념물을 말하는데 장왕은 자신에게는 무덕이 없음과 진나라의 백성들은 단지 군명을 받든 것이라는 이유를 들면서 경관을 짓지 않았다. 황하에 제사를 지내고 선군들의 사당을 만들고 승전을 고하고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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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토벌===
 
===송나라 토벌===
BC. 595년 초나라 영윤 손숙오가 사망하였다. 진(晉)나라의 총사령관이었던 순림보는 필지전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초나라가 상을 당한 기회를 틈타 정나라를 공격하자고 진경공에게 건의하였고 진경공은 이를 받아들여 순림보가 정나라를 침공하였다. 진의 군대가 물러간 후 정양공은 초나라에게 인질을 보내어 충성심을 보였다. 초장왕은 정나라의 충성심을 믿으면서 인질들을 모두 돌려보냈고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진나라에 힘을 과시하기 위해 송나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송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초장왕은 제나라로 사신을 보내기로 하였다. 제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송나라를 반드시 지나야하는데 이 때 송나라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기로 하였다. 그러면 반드시 송이 초나라 사자에게 위해를 가할 것이고 이것을 이용하여 송나라를 치려고 함이었다. 길을 지나갈 사자로는 신무외를 지목하였는데 그 이유는 일전에 신무외가 송소공의 어자를 채찍으로 때린 적이 있기 때문에 송나라가 반드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송나라는 신무외를 죽였고 초장왕은 즉시 출병하여 송나라의 도성을 포위하였다. 초와 송의 공성전이 계속되자 송나라의 사자가 진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러 갔다. 그러나 진나라의 대부 백종이 진경공의 송나라 구원을 만류하였고 송나라에는 해양이라는 사자를 보내어 거짓으로 응답하게 하였다. 그러나 가는 와중 해양은 초장왕에게 잡히었고 장왕은 해양에게 뇌물을 주면서 송나라에게 진나라의 군대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라고 하였다. 해양은 포로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장왕의 요구를 일단 승낙하고 풀려났으나 해양이 송나라에 도착해서는 백종의 말대로 진의 원군이 있을 것이라고 거짓 응답하였다. 송나라는 이 말을 듣고 전투를 계속하였고 싸움은 장기전이 되었다. 성과를 보이지 못한 장왕은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신무외의 아들 서가 아버지를 언급하며 송나라를 함락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장왕은 이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고 송나라로 돌아가서 근처에 집을 짓고 땅을 갈면서 송나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송나라는 결국 항복하였고 초장왕은 송나라와 강화를 맺었다. 초의 국력은 진과 비등해졌으며 다시 한 번 초장왕의 패자로서의 모습을 확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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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595년 초나라 영윤 손숙오가 사망하였다. 진(晉)나라의 총사령관이었던 순림보는 필지전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초나라가 상을 당한 기회를 틈타 정나라를 공격하자고 [[진경공]]에게 건의하였고 진경공은 이를 받아들여 순림보가 정나라를 침공하였다. 진의 군대가 물러간 후 정양공은 초나라에게 인질을 보내어 충성심을 보였다. 초장왕은 정나라의 충성심을 믿으면서 인질들을 모두 돌려보냈고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진나라에 힘을 과시하기 위해 송나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송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초장왕은 제나라로 사신을 보내기로 하였다. 제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송나라를 반드시 지나야하는데 이 때 송나라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기로 하였다. 그러면 반드시 송이 초나라 사자에게 위해를 가할 것이고 이것을 이용하여 송나라를 치려고 함이었다. 길을 지나갈 사자로는 [[신무외]]를 지목하였는데 그 이유는 일전에 신무외가 송소공의 어자를 채찍으로 때린 적이 있기 때문에 송나라가 반드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송나라는 신무외를 죽였고 초장왕은 즉시 출병하여 송나라의 도성을 포위하였다. 초와 송의 공성전이 계속되자 송나라의 사자가 진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러 갔다. 그러나 진나라의 대부 백종이 진경공의 송나라 구원을 만류하였고 송나라에는 해양이라는 사자를 보내어 거짓으로 응답하게 하였다. 그러나 가는 와중 해양은 초장왕에게 잡히었고 장왕은 해양에게 뇌물을 주면서 송나라에게 진나라의 군대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라고 하였다. 해양은 포로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장왕의 요구를 일단 승낙하고 풀려났으나 해양이 송나라에 도착해서는 백종의 말대로 진의 원군이 있을 것이라고 거짓 응답하였다. 송나라는 이 말을 듣고 전투를 계속하였고 싸움은 장기전이 되었다. 성과를 보이지 못한 장왕은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신무외의 아들 서가 아버지를 언급하며 송나라를 함락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장왕은 이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고 송나라로 돌아가서 근처에 집을 짓고 땅을 갈면서 송나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송나라는 결국 항복하였고 초장왕은 송나라와 강화를 맺었다. 초의 국력은 진과 비등해졌으며 다시 한 번 초장왕의 패자로서의 모습을 확인하게 되었다.
  
 
==기타==
 
==기타==

2018년 6월 26일 (화) 01:19 판

개요

춘추오패 중 한 사람으로 제환공, 진문공에 이은 3번째 패자이다. 초나라의 22대 군주로 성은 미(羋)이고, 씨는 웅(熊), 이름은 여(旅 또는 侶, 呂)이다. BC.614년에 즉위하여 BC.591년에 사망하였다. 진(晉)나라와 대적하면서 진의 패권에 위협을 가하다 필지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춘추시대의 패자가 된다.

생애

즉위 직후

초장왕은 즉위 후 3년간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왕에게 간언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엄벌을 내렸다. 하루는 왕이 정희와 월녀를 껴안고 악대에 취해있었는데 중신 오거가 찾아와 물었다. “산봉우리 위에 새 한 마리가 앉았는데 3년을 울지도 않고 날지도 않으니 이 새는 무슨 새입니까?” 장왕은 오거의 뜻을 알아듣고 물러가라고 하였지만 변함이 없었다. 이후 중신 소종이 찾아와 말하였다. “대왕께서 놀이의 미혹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장왕은 소종의 간언을 듣고 주색놀음을 그만두고 국정에 전념하였다. 무능력하거나 위법한 조정 대신들 수백명을 갈아치우고 초야의 인재를 대거 등용하였다. 간언을 한 오거와 소정에게 국정을 위임하였고 영윤의 권한을 분산시켰다. 불비불명이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서 비롯한 말이다.

내우외환

초장왕이 국정에 전념하기 시작하던 해 초나라는 내우외환을 겪었다. 안으로는 대기근이 닥쳤고 밖으로는 이 기회를 통해 소국들이 반란을 꾀하였다. 서남방에서는 융족들이, 서북방에서는 균나라가 백복민족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그 중 가장 세력이 큰 나라는 용(庸)나라였다. 용나라의 반란에 초나라는 잠시 후퇴하고 다시 공격하자는 의견과 지금 바로 진격하자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초장왕은 위가의 의견을 따라 용나라에 바로 반격을 가하였다. 초나라 군대는 가는 길에 백복을 퇴각시켰고 용나라에 도착해서 일부러 싸우고 달아나기를 7번 반복하여 용나라를 오만하게 만들었다. 이후 초장왕이 이끄는 군대가 도착하여 동쪽에서 공격하고 초와 연합한 진(秦)나라와 파나라가 각각 서북과 남쪽에서 공격하여 용나라를 멸망시켰다.

중원으로의 진출 시도

BC.608년 초나라는 정나라를 이끌고 진(陳)나라와 송나라를 공격하였다. 진(陳)과 송이 초를 배신하고 진(晉)나라와 결맹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진(晉)의 조돈은 제후들과 함께 정을 공격하였다. 초는 위가를 보내 진(晉)을 물리치고 정을 이용하여 송을 공격하였다. 이에 진(晉)이 송을 도우려 했으나 당시 진(秦)이 진(晉)을 공격하였고 진(晉) 내부의 상황도 진양공조돈의 관계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여서 초의 개입을 보고 물러났다. 이로서 중원의 제후국들은 치기 시작한 초장왕은 BC.606년 육혼융을 공격한 후 그 길로 낙수를 건너 주나라 경내에서 열병식을 거행하였다. 주나라는 융을 정벌한 초를 위로하기 위해 왕손만을 보내었다. 장왕은 왕손만에게 구정의 크기와 무게를 물었다. 구정이란 하나라, 상나라, 은나라를 거쳐 주나라로 내려온 아홉 개의 거대한 구리 솥으로 왕실의 권위가 천하의 중심에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왕손만은 주나라의 덕은 쇠퇴하였으나 천명을 바뀌지 않았으므로 구정의 무게를 물을 수는 없다고 하였다. 장왕은 이 말을 듣고 군대를 돌려 돌아갔다. 장왕이 구정을 언급한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주로 장왕이 천하를 얻겠다는 뜻에서 말한 것이라고 하나 진(晉)을 위협하기 위함이라거나 주 왕실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함이라는 해석도 있다. 장왕이 왕손만의 말을 듣고 퇴군한 것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지만, 초나라가 중원의 패권을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천자를 차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강하다. 이후 문정이란 천하를 넘본다는 말로 쓰이게 되었고 문정중원이라는 고사가 여기서 유래하였다.

필지전

BC.597년 진(晉)과 초 사이에 끼인 정나라가 계속 편을 바꾸자 초장왕이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장왕이 정나라의 도성을 포위한 지 17일이 지나고 정나라는 버티지 못하고 점을 쳐보고 백성들이 울기 시작했다. 성벽을 지키던 병사들도 따라 우니 초장왕은 정나라가 곧 항복할 것이라 생각하고 도성에서 30리 밖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정나라는 진(晉)에서 원군이 올 것을 믿고 재정비하여 3개월을 더 버티었다. 결국 정양공이 웃옷을 벗고 양을 끌고 나와 항복을 선언하였다. 웃옷을 벗은 것은 죄인에게 채찍질을 해달라는 의미이고 양을 끌고 온 것은 멀리 온 군사들에게 대접하겠다는 뜻으로 육단견양이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장왕은 정나라를 취하지 않고 복권시켰다.
진나라는 뒤늦게 정나라에 원군을 보내었는데 진의 군대가 황하강 이남에 도착하였을 때 정은 이미 항복한 뒤였다. 진의 군대는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와 되돌아가야 한다는 피전파로 나뉘었다. 총사령관 순임보는 피전파였으나 당시 진의 군대는 통합이 안 되어 주전파인 선각이 총사령관의 동의 없이 초나라를 공격하러 떠났다. 이후 한궐의 설득으로 순임보도 초나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한편 초나라도 진나라의 하방 소식을 듣고 오삼과 같은 주전파와 손숙오와 같은 피전파로 의견이 나뉘었다. 초장왕은 선곡이 황하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오삼의 의견을 수용하여 북진하여 진과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이 필이라는 곳에서 일어나서 필지전이라 한다. 장왕은 필지전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이 전투를 계기로 춘추시대 3번째 패자로 등극하였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장왕은 성복의 싸움과는 달리 경관을 만들지 않고 시체를 모두 땅에 묻었다. 경관은 적의 시체를 산처럼 모아놓은 전승기념물을 말하는데 장왕은 자신에게는 무덕이 없음과 진나라의 백성들은 단지 군명을 받든 것이라는 이유를 들면서 경관을 짓지 않았다. 황하에 제사를 지내고 선군들의 사당을 만들고 승전을 고하고 물러갔다.

송나라 토벌

BC. 595년 초나라 영윤 손숙오가 사망하였다. 진(晉)나라의 총사령관이었던 순림보는 필지전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초나라가 상을 당한 기회를 틈타 정나라를 공격하자고 진경공에게 건의하였고 진경공은 이를 받아들여 순림보가 정나라를 침공하였다. 진의 군대가 물러간 후 정양공은 초나라에게 인질을 보내어 충성심을 보였다. 초장왕은 정나라의 충성심을 믿으면서 인질들을 모두 돌려보냈고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진나라에 힘을 과시하기 위해 송나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송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초장왕은 제나라로 사신을 보내기로 하였다. 제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송나라를 반드시 지나야하는데 이 때 송나라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기로 하였다. 그러면 반드시 송이 초나라 사자에게 위해를 가할 것이고 이것을 이용하여 송나라를 치려고 함이었다. 길을 지나갈 사자로는 신무외를 지목하였는데 그 이유는 일전에 신무외가 송소공의 어자를 채찍으로 때린 적이 있기 때문에 송나라가 반드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송나라는 신무외를 죽였고 초장왕은 즉시 출병하여 송나라의 도성을 포위하였다. 초와 송의 공성전이 계속되자 송나라의 사자가 진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러 갔다. 그러나 진나라의 대부 백종이 진경공의 송나라 구원을 만류하였고 송나라에는 해양이라는 사자를 보내어 거짓으로 응답하게 하였다. 그러나 가는 와중 해양은 초장왕에게 잡히었고 장왕은 해양에게 뇌물을 주면서 송나라에게 진나라의 군대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라고 하였다. 해양은 포로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장왕의 요구를 일단 승낙하고 풀려났으나 해양이 송나라에 도착해서는 백종의 말대로 진의 원군이 있을 것이라고 거짓 응답하였다. 송나라는 이 말을 듣고 전투를 계속하였고 싸움은 장기전이 되었다. 성과를 보이지 못한 장왕은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신무외의 아들 서가 아버지를 언급하며 송나라를 함락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장왕은 이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고 송나라로 돌아가서 근처에 집을 짓고 땅을 갈면서 송나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송나라는 결국 항복하였고 초장왕은 송나라와 강화를 맺었다. 초의 국력은 진과 비등해졌으며 다시 한 번 초장왕의 패자로서의 모습을 확인하게 되었다.

기타

참고문헌

공원국, 『춘추전국이야기3』, 위즈덤하우스, 2017
신동준, 『춘추전국의 영웅들1』, 한길사, 2011
이중톈, 『이중톈 중국사 춘추에서 전국까지』, 김택규 역, 글항아리, 2014
박인수, 『춘추 전국의 패자와 책사들』, 석필,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