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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의 서방사(西方寺)에 위치한 양주팔괴기념관은 양주팔괴(楊洲八怪)의 그림을 전시해놓은 기념관이다. 그러면 이 양주팔괴란 무엇인가?
 
 
 
=양주팔괴=
 
 
 
==양주팔괴란?==
 
<ref>[네이버 지식백과] 양주팔괴 [揚州八怪, Yangzhou Baguai] (미술대사전(용어편), 1998., 한국사전연구사).</ref>
 
 
 
:양주팔괴란 중국, 청 ∙ 건륭년간(1736~95), 장쑤성 양주에 모인 8인의 개성파 화가들을 말한다. 금농(金農), 황신(黃愼), 이선, 왕사신(汪士愼), 고상(高翔), 정섭(鄭燮), 이방응(李方膺), 나빙(羅聘) 등을 가리키나, 그 외에도 고봉한(高鳳翰), 민정(閔貞)을 더하기도 한다. 화암(華嵒)을 추가하여 양주화파라고도 부른다. 대운하와 소금 거래로 경제적 번영을 이룬 상업 도시 양주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마왈관(馬曰琯) ∙ 마왈로 등 대부호들과 교우(僑寓)하여 지원을 받기도 했다. 그들은 사왕오운(四王吳惲) 오파(吳派)<ref>화단에 큰 영향을 미친 청나라 초기의 6거장(巨匠)에 대한 약칭(네이버 두산백과)</ref>의 정통적 남종화(南宗畵)를 이어받아 청조(淸朝) 이래 이미 정형화되어 있던 문인화의 전통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분방하고 개성적인 제작태도를 보였다.
 
 
 
==양주팔괴의 등장배경==
 
 
 
<ref>양주팔괴, 바이두 지식백과, http://baike.baidu.com/subview/2326/4987555.htm, 2015.11.6)</ref>
 
 
 
양주는 수나라, 당나라 이래 경제 발전의 중심지였다. 비록 전쟁 시기에 황폐해지긴 했으나 지리적으로 교통의 요충지이고 토지가 비옥하며 물자가 풍부하다보니 전쟁 이후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청대에 들어와서는 양주십일(扬洲十日)<ref> 청나라 군대가 양주를 점령하려했을 때 양주가 저항하자 청의 군대가 양주 백성을 학살한 사건, http://baike.baidu.com/link?url=us23yH2XtpJ9O-d8-P3DV8Mo6gpgti8JMaT59DJ5Md6PYC8RnNiTImlEgkkKfysAXzXlNQ4NzYh4d7SQiJkFGq, 바이두백과 扬州十日, 2015.11.6</ref>때 파괴된 이후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시기에 다시 발전하여 번영하게 되었고 중국 동남부의 최고 무역 중심지가 되었다. 이에 따라 부유한 상인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고 특히 제염업이 성행하여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경제의 발전으로 문화와 예술 역시 발전하게 되었고 각지의 문인들이 양주로 모여들게 되었다. 현지 관원의 관리 하에 시를 짓는 대회가 개최되기도 했고, 특히 몇몇의 제염업자들은 엄청난 부호로서 전국의 유명한 작가들을 초청하여 접대하기도 했다. 이렇게 양주가 전국 각지의 유명한 작가와 시인, 예술가를 불러보았기 때문에 당시의 양주는 경제의 중심지일뿐 아니라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호들은 자신의 사치스러운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아름다운 공예품이나 진귀한 보석, 각종의 맛있는 음식과 서화 역시 찾곤 했는데, 이러한 유행에 영향을 받아 조금 돈이 있는 중산층은 서화를 집에 걸어두어 자신의 감각을 뽐내기도 했다. 이러한 서예와 회화에 대한 대량 수요로 인해 양주에 많은 화가가 몰려들게 되었고, “양주팔괴” 역시 당시에 명성을 날리던 화가였다. “양주팔괴”는 양주화파의 작품을 대표하는데, 그들은 모두 강한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예술가의 화풍은 당시 화단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흐름과 대중들의 심미관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사실 중국 회화는 명말 청초까지만 하더라도 보수파의 틀 안에 갇혀있어 대상을 모사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어 화단에는 활기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에 재능이 뛰어난 화가들이 불만을 품었는데, 이 시기에 양주에 진보적인 화가인 석도(石涛)가 출현하게 된다. 그의 자유로운 화풍은 ‘양주일파’를 이루게 되었고 결국 ‘양주팔괴’등의 창의적인 정신을 가진 화가 집단을 낳게 되었다.
 
 
 
==양주팔괴의 화풍==
 
<ref>김백균. (2004). 明末淸初, '畵'에 대한 새로운 인식  :  석도와 양주팔괴의 회화사상을 중심으로 = The New Perception of the ‘Hua(畵)’ during in the Transitional Period from the Ming to the Qing era. 美術史學報, 23호, 287-309(23쪽).</ref>
 
 
 
양주팔괴는 자유로운 화풍을 그 특징으로 한다. 이들은 화조와 인물화를 주로 그렸는데, 그들의 창작활동은 자아에 대한 자각과 독창적인 세계관을 그 바탕으로 한다. ‘양주팔괴’의 괴(怪)라는 글자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은 전통에서 벗어난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화풍을 일구어내었다. 이러한 면에서, 그들이 비록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직업적인 문인화가였다 할지라도 그들의 창작물 자체는 대중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전통적 문인화가의 범주에 넣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들의 그림은 민간성, 현실성, 일상성의 요소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양주팔괴의 일원인 금농은 ‘절대적 객관’이나 ‘절대적 주관’이 아닌 ‘나의 감각을 통해 체험된 것’을 표현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러한 인식은 송대의, ‘보편성’을 표현하려던 정신과는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양주팔괴인 정판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역시 주관적 예술형상을 강조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대상의 본질 자체나 자신의 순수한 내면만이 아닌,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주관적인 정서를 반영해 그림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2015년 11월 26일 (목) 14:45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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