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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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기간 BC157-BC141

통치

문제사후 아들 계(啓)가 즉위하니 그가 곧 경제이다. 경제 역시 문제의 통치 방식을 이어받아 선정을 펼쳤다. 문제와 경제 시대에는 전쟁이 그치고 사회가 안정되었다. 농업과 상공업이 발전하여 국가에 많은 부가 쌓였다. 소위 문경지치로 불리는 태평성대가 온 듯하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황노사상에 입각한 청정무위의 정치로 인해 흉노 문제, 호족의 대두와 동성제후국들의 권력이 비대화되는 등의 문제가 나타났다.

흉노 문제

한 고조가 평성에서 패배한 이래 맺은 화친조약에 따라 매년 많은 양의 쌀과 비단, 그리고 종실의 여자를 흉노에게 보내어야 했다. 화친조약에도 불구하고 흉노는 계속해서 한의 북방을 침략해왔고 문제와 경제는 특별한 대책 없이 화친조약에 호소할 뿐이었다.

오초칠국의 난

경제는 태자 시절 오나라의 태자를 살해하였는데, 이 사건 이후로 오나라의 왕이 입조하지 않는 등 황실과 오나라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졌다. 오나라는 바닷물로부터 소금을 만들어 전국에 팔았는데 이로 막대한 부를 쌓았고, 이를 토대로 점차 강성해져갔다.
한편 조조는 세력이 점점 커지는 제후국의 위협을 알아차리고 경제에게 제후국의 봉지를 삭감하는 삭번책을 상주하였다. 경제는 이를 받아들이고 오의 3군 가운데 2군을 삭감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B.C.154년 오왕이 초왕, 조왕, 교서왕, 제남왕, 치천왕, 교동왕 등 6명의 제후와 함께 군을 일으켰다. 오왕의 목적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나 명분은 간신 조조를 없애는 것이었다. 따라서 경제는 조조를 사형시키고 반란을 멈추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군사를 돌리지 않았고, 황제는 다른 제후국의 도움을 받아 7국을 완전히 멸하였다.
난이 평정된 후 군국제의 모습은 크게 달라졌다. 제후왕을 왕국의 저이에서 분리시키고 왕국 내의 관리는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가 장악했고, 조세의 징수도 그들의 권한이 되었다. 몇 개 군에 걸칠 정도로 광대했던 영지가 삭감되고 세분화되었다. [1]

호족의 대두

문제와 경제시절의 농업 생산 회복과 경제의 발전은 상인과 공인들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농민들의 토지를 겸병했고, 농민들은 그들의 소작인이나 노예가 되는 경향이 증가했다. 이로써 대토지를 소유한 자는 호족으로 행세하였다. 낮은 토지세는 그들의 부를 더욱 축적하도록 도왔고 농민은 몰락해갔다. [2]

  1. 신성곤,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 2005, p83-84
  2. 중국사연구실, <중국역사. 상>, 신서원, 1993, p20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