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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2012년 『중국문명의 기원과 발전』 수강생, <고사성어로 읽는 중국문화사>
 
2011, 2012년 『중국문명의 기원과 발전』 수강생, <고사성어로 읽는 중국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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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저, 김병총 역, <사기 2>, 짐문당, 1994
 
사마천 저, 김병총 역, <사기 2>, 짐문당, 1994
  
 
[[분류: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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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5일 (일) 13:18 판

형가[荊軻]

출생 미상
사망 BC.227년
국적 위나라
생존시기 전국시대
관련 활동 진시황 암살 시도


출생과 생애

형가는 전국시대 위(衛)나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제(齊)나라 사람이었는데, 형가 때 위나라로 이주해왔다. 그래서 그를 제나라의 경(慶)씨를 써서 경경(慶卿)이라 부르기도 하고, 후에 연에서는 형경(荊卿)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는 학문이 깊고 무예도 출중하여 문무를 겸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을 가지고 위나라 원군(元君: B.C. 251-230 재위)에게 유세하기도 했지만 등용되지는 못했다. 그 뒤에 진나라가 위(魏)를 쳐서 야왕(野王) 땅으로 옮겨 살게 하고 있을 때, 그는 떠돌이 생활을 하며 지냈다.

그는 성격이 침착하여, 검객과 검술에 대한 논쟁이 붙어 갑섭(蓋聶)이라는 자가 화를 내도 맞상대하기는커녕 조용히 그 자리를 비켜버렸다. 그리고 한단에서도 검객 노구천(魯句踐)과 장기를 두며 놀다가 그가 화를 내며 장기판을 뒤엎었을 때도 그는 맞대응하기보다 조용히 일어나 도망쳐버렸다. 이러한 그는 사람들에게 지혜로우며 검술을 좋아한 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 후 형가는 연나라로 가서 축(築: 비파 비슷한 죽제악기)을 기막히게 잘타는 개백정 고점리(高漸離)와 어울렸다. 둘은 술에 취하면 고점리가 타는 축의 장단에 맞추어 시장 복판에서 즐기며 떠들었다. 고점리는 그의 침착한 성품과 학문의 깊이를 이해했던 친구였고, 연나라의 처사(處士: 재야인사) 전광(田光)도 형가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유달리 우대하였다.

자객으로서 진시황 암살 시도

당시 진나라는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까지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지리적인 이점도 갖고 있어 험한 요새를 끼고 비옥한 땅을 차지했었다. 백성은 많고 용사는 사나우며 무기와 장비도 역시 넉넉하여 진나라가 쳐들어올 생각만 있다면 연나라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상황이었다. 이에 태자 단은 진나라의 인질로 잡혀 있던 원한까지 더하여,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간구했었다. 이에 현명하다고 소문난 전광 선생에게 청하여 시국을 논했고, 전광은 형가를 태자에게 추천했다.

형가는 자객으로서 진시황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연나라 충신, 번오기(樊於期)의 목과 연나라 옥토 독항의 지도를 준비하고자 했다. 번오기는 이제 드디어 진시황을 복수할 방법을 찾았다며 기쁘게 자신의 목을 베어 형가에게 주었고, 태자는 천하에서 가장 날카롭다는 서부인의 비수도 함께 형가에게 주었다. 출발하고 난 후에 역수 가에 이르러서는 다시 돌아올 수 없음을 알며 고점리의 축과 형가의 화답한 노래가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風蕭蕭兮易水寒(바람 쓸쓸하고 역수 강물은 차구나!)
壯士一去兮不復還(장사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리)

형가는 번오기의 목이 든 함을 받들고, 동행한 진무양(秦舞陽)은 지도가 든 갑을 받들어 진시황의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진왕이 지도를 천천히 펼치며 연나라의 옥토 독항을 볼 때 비수가 떨어졌다. 이 때 형가는 전광석화처럼 비수를 집어 진왕의 옷소매를 왼손으로 잡아 쥐며 진시황을 죽이고자 했다. 하지만 끝내 진시황의 몸에 비수가 닿지 못했고, 진시황이 휘두르는 칼날에 난도질 당하고 말았다. 그는 기둥을 등지고 털썩 주저앉으며 실패를 직감했다

" 아, 이는 하늘의 뜻이다! 나의 운명이며 연나라의 운명이다! " 

형가는 즉석에서 맞아 죽었으며, 연나라의 수도인 계성은 10개월 후에 함락 되었다.

관련 사자성어

방약무인(傍若無人) : 곁에 아무도 없는 듯, 제 멋대로 행동한다는 뜻으로 고점리가 축을 치면 형가는 주변에 사람이 있든 없든 크게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도궁비현(圖窮匕見) : 지도를 펼치자 비수가 나온다는 뜻으로 일이 탄로 나는 것을 뜻하는 사자성어. 형가가 바친 지도에서 나온 칼에서 비롯되었다.

절치부심(切齒腐心): 원수를 갚으려 이를 갈고 심장이 새까맣게 타들어갈 정도로 다짐한다는 의미이다. 형가가 번오기에게 진시황의 암살 계획을 이야기하고 목숨을 걸 수 있겠는지 묻자, 이에 번오기가 답하면서 한 말이다.

평가

형가와 장기를 두며 다툼이 있었던 노구천은, 진왕을 척살하려한 훌륭한 인사를 알아보지 못하고 꾸짖었던 것을 한탄하고, 검법을 알려주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사마천은 그의 의협심을 높게 사며 의도가 명백하고 끝까지 의지를 바꾸지 않았음을 칭찬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형가의 암살 시도가 나라를 지키기 위한 의로운 행위였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진시황의 통일 사업을 방해한 것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로 나뉜다. 그리고 두 가지를 다 절충하여 형가의 용기와 의협심, 진시황의 통일 업적을 모두 높이 사 양쪽을 둘 다 인정하는 평가도 있다.

형가를 모티브로 한 작품들

중국에서는 의협심이 넘쳤던 형가를 모티브로한 작품들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장예모가 감독을 맡은 '영웅(2002)'이라는 영화와, 천카이거가 감독을 맡은 '시황제 암살(1998)'이라는 영화가 있다. 그리고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형가전기(2004)' 라는 무협 드라마도 중국에서 방영되었다.

국내에서도 '대자객 형가'라는 무협 작품이 나오며, 형가 이야기는 현대에 와서도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참고자료

2011, 2012년 『중국문명의 기원과 발전』 수강생, <고사성어로 읽는 중국문화사>

사마천 저, 김병총 역, <사기 2>, 짐문당,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