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Chines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19번째 줄: 19번째 줄:
 
  [[시황제]] 37년 10월, 황제는 다섯 번째 지방 시찰 길에는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 그리고 시황제가 친히 아끼는 막내아들 [[호해]]가 동행했다. 순행 중 사구에 이르렀을 때, 시황제의 병이 더욱 깊어졌고 황제는 장남 [[부소]]에게 왕위를 넘기고자 유서를 남긴다. <br>
 
  [[시황제]] 37년 10월, 황제는 다섯 번째 지방 시찰 길에는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 그리고 시황제가 친히 아끼는 막내아들 [[호해]]가 동행했다. 순행 중 사구에 이르렀을 때, 시황제의 병이 더욱 깊어졌고 황제는 장남 [[부소]]에게 왕위를 넘기고자 유서를 남긴다. <br>
 
  '''해당 유언은 다음과 같다<br>“군대는 [[몽염]]에게 맡기고 함양으로 돌아와 짐의 유해를 맞이하고 장례를 거행하라”'''  <br>
 
  '''해당 유언은 다음과 같다<br>“군대는 [[몽염]]에게 맡기고 함양으로 돌아와 짐의 유해를 맞이하고 장례를 거행하라”'''  <br>
  부소에게 자신의 장례를 치르고 뒤를 이어 황제가 되라는 뜻을 전했지만 이들 일행은 시황제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호해를 황제로 만들 음모를 꾸몄다.  
+
  시황제는 장남 부소에게 자신의 장례를 치르고 뒤를 이어 황제가 되라는 뜻을 전했지만 이들 일행은 시황제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호해를 황제로 만들 음모를 꾸몄다.  
 
  [[조고]]는“아직 천자의 승하도 공표되지 않았고 장례도 하지 않았는데 어찌 이런 일을 승상에게 의논 하겠소? 그렇기 때문에 일각을 다투는 일입니다. 빨리 처리해야합니다.”라며 호해를 설득했고, 이후 승상 [[이사]]를 만나 [[부소]]가 왕위에 오른다면 승상으로 [[몽염]]이 기용될 것이고,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 할 것이라며 위협했다.  
 
  [[조고]]는“아직 천자의 승하도 공표되지 않았고 장례도 하지 않았는데 어찌 이런 일을 승상에게 의논 하겠소? 그렇기 때문에 일각을 다투는 일입니다. 빨리 처리해야합니다.”라며 호해를 설득했고, 이후 승상 [[이사]]를 만나 [[부소]]가 왕위에 오른다면 승상으로 [[몽염]]이 기용될 것이고,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 할 것이라며 위협했다.  
 
  그리하여 시황제의 유언을 꾸며 [[호해]]를 태자로 세운 후, [[부소]]에게 내리는 조서를 작성했는데, 서한을 받은 부소는 눈물을 흘리며 자결했다. 이를 [[사구정변]]이라 한다.
 
  그리하여 시황제의 유언을 꾸며 [[호해]]를 태자로 세운 후, [[부소]]에게 내리는 조서를 작성했는데, 서한을 받은 부소는 눈물을 흘리며 자결했다. 이를 [[사구정변]]이라 한다.

2019년 6월 25일 (화) 16:39 판

호해(胡亥)

출생 B.C 230?
진(秦)나라 함양
사망 B.C 207
생존시기 진(秦)나라 (재위 : B.C 210 ~ B.C 207)
별칭 이세황제(二世皇帝)


개요

진나라의 2대황제로서 성은 영(嬴), 이름은 호해(胡亥)이다. 진시황의 18번째 아들로,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에 의해 이세황제(二世皇帝)의 자리에 올랐으나, 정치에 관심이 없고 대규모 토목 사업을 강행했으며 민심을 살피지 못했다. 결국 재위 3년만에 자결하고, 진(秦)은 멸망한다.
(재위기간 : B.C 210 ~ B.C 207)

생애

진시황의 죽음, 간신들의 역할로 왕위에 오르다

시황제 37년 10월, 황제는 다섯 번째 지방 시찰 길에는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 그리고 시황제가 친히 아끼는 막내아들 호해가 동행했다. 순행 중 사구에 이르렀을 때, 시황제의 병이 더욱 깊어졌고 황제는 장남 부소에게 왕위를 넘기고자 유서를 남긴다. 
해당 유언은 다음과 같다
“군대는 몽염에게 맡기고 함양으로 돌아와 짐의 유해를 맞이하고 장례를 거행하라”

시황제는 장남 부소에게 자신의 장례를 치르고 뒤를 이어 황제가 되라는 뜻을 전했지만 이들 일행은 시황제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호해를 황제로 만들 음모를 꾸몄다. 조고는“아직 천자의 승하도 공표되지 않았고 장례도 하지 않았는데 어찌 이런 일을 승상에게 의논 하겠소? 그렇기 때문에 일각을 다투는 일입니다. 빨리 처리해야합니다.”라며 호해를 설득했고, 이후 승상 이사를 만나 부소가 왕위에 오른다면 승상으로 몽염이 기용될 것이고,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 할 것이라며 위협했다. 그리하여 시황제의 유언을 꾸며 호해를 태자로 세운 후, 부소에게 내리는 조서를 작성했는데, 서한을 받은 부소는 눈물을 흘리며 자결했다. 이를 사구정변이라 한다.


허수아비 군주의 삶, 신하들의 세력다툼으로 조정이 엉망이 되다

책 제목도, 작가도 모르는 독초를 구해 읽었으나 상태가 온전치 않아 소설의 앞과 뒤가 없었다. 덕분에 결말이 없는 책을 읽고 스스로 이야기의 결말을 상상함으로써 창작 열정이 시작이 되었다. 
문화대혁명이 끝날 무렵인 고등학교 2학년, 독초 소설 가운데 유일하게 뜯겨나가지 않았던 책,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의 ‘춘희’를 필사본 형태로 구했으나, 하루밖에 빌려 읽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위화는 친구와 함께 3분의 1가량 읽고 훌륭한 소설이라 생각하여 책을 베끼기 시작한다. 부모님이 퇴근하여 집에 오실 시간 되자 학교로 향했고, 창문을 통해 교실로 들어가 전등 전선 끌어다가 백열등 켜놓은 채, 한 사람이 베끼는 동안 다른 한 사람은 책상을 이어 만든 침대 위에 누워 휴식, 이를 번갈아가며 아침까지 책을 필사했다. 

비극적인 죽음과 진나라의 멸망

당시 중국에서는 개인에게 자신의 직업을 선택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직업은 전부 국가가 분배해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위화에게 치과의사라는 직업을 분배되었지만, 오후 휴식시간이 되면 항상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병원 창가에 서서 눈 아래 펼쳐지는 소란스러운 거리의 풍경을 부러워했다. 창가에 서면 항상 현 문화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할 일 없이 한가하게 거리를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내가 이 자리에 평생 서 있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든 순간 위화는 바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문화관에서 일하기로 결심한 위화가 치과의사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문화관에서 일을 하려면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자신이 문화관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했는데 문화관에 갈 수 있는 방법에는 ‘작곡’, ‘회화’, ‘글쓰기’ 뿐이었다.
위화는 스무살 때 이를 뽑는 동시에 글쓰기를 시작했다. 이를 뽑는 것은 생계를 위해, 글쓰기는 더 이상 이를 뽑지 않기 위해서였다. 한편 1980년대 단편 소설을 문학잡지에 보내기 시작한 위화는  1983년 11월 <베이징문학>에 단편소설을 기재하며 문화관에 출근하게 되었다.

관련인물 및 일화

진승•오광의 난

  • 첫 번째 기숙사
  • 18세에 집을 나가 먼길을 가다
  • 내게는 이름이 없다
  •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
  • 4월 3일 사건
  • 무더운 여름

지록위마(指鹿爲馬)

  • 가랑비 속의 외침
  • 인생
  • 허삼관 매혈기
  • 형제
  • 제 7일


평가

천록비결

「인생」, 1994














참고문헌

1. 사마천, 김원중 역 「사기본기」, 민음사, 2015, 250-274쪽
2. 사마천, 김진연 역 「사기 (1) 토끼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 먹는다」, 서해문집, 2002, 290-302쪽
3. 사마천, 김진연 역 「사기 (3) 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 보이는 법이다」, 서해문집, 2002, 96-105쪽
4. 두산백과
5. 중국위키피디아